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지난 연재에서는 독립투사 문학가 일부를 돌이켜 보았다. 독립투사로서의 문학가보다는 친일문학가가 몇 배는 더 많다. 이번에는 해방 전의 친일문학가가 해방 후 과거의 친일 행위에 대한 참회 없이 해방공간에서 새로운 기회를 잡으려 독립운동가에게 접근하거나 독립운동사를 저술한 대표적인 친일문학가 다섯 명을 소개하고자 한다.

1. 육당 최남선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은 민족주의 성향의 기독교인이자 문학인이었으나, 진정한 민족주의적 측면에서 볼 때 그는 기독교인인 것이 그의 한계였다. 육당의 동천사관(東遷史觀)은 구약 창세기의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육당은 역사학자이기는 하였지만, 일찍이 신체시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월간 『소년』 창간호에 발표하고, 시조 시화집 『백팔번뇌』, 『심춘순례』와 『백두산 근참기』 『금강예찬』을 발표한다.

그러나 기미 독립선언서의 초안을 잡았던 육당도 후일 친일로 변절한다. 이후 1938년 ‘만몽일보사(滿蒙日報社)’ 고문과 일본 관동군이 만주에 세운 ‘건국대학(建國大學)’의 조선사, 조선학 교수직에 임명되어 교수로 부임해 1943년 2월까지 역임한다. 1940년에는 만주에서 활동하던 항일 무장 세력을 상대로 귀순 및 투항공작을 전개한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東南地區特別工作後援會)’ 고문으로 활동하는데, 공작후원회의 귀순 및 투항 공작의 대상자는 김일성 등등이었다.

『조선독립운동사』, 최남선 저, 4×6판, 1946년 2월 20일 초판본, 동명사 발행. 동명사는 육당 최남선이 만든 출판사이다. 이 책은 해방후에 처음 나온 종합적인 독립운동사이다. 의미가 깊은 것은 이 책은 간략하지만 좌우를 모두 다루고 있다. 필자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조선독립운동사』, 최남선 저, 4×6판, 1946년 2월 20일 초판본, 동명사 발행. 동명사는 육당 최남선이 만든 출판사이다. 이 책은 해방후에 처음 나온 종합적인 독립운동사이다. 의미가 깊은 것은 이 책은 간략하지만 좌우를 모두 다루고 있다. 필자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그러므로 일제하의 육당 최남선은 괴뢰 만주국의 관리를 하면서 만주에서의 독립운동가들의 동향에 관한 많은 견문(見聞)을 하고 있었다. 육당의 그러한 견문은 해방 후에 『조선독립운동사』(본문 102면)라는 소책자를 편저하여 1946년 2월 15일 인쇄하여 같은 달 20일 자로 동명사에서 발행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육당의 『조선독립운동사』는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6개월 만에 나온 책이다.

그런데 육당 최남선은 이 책 PP.59~60과 95에서 북의 김일성(金日成, 1912~1994)과 보천보 전투(1937년)에 대하여 주목하여 다루고 있기까지 하다. 육당의 『조선독립운동사』는 해방 후에 저술하고 출판한 좌우를 모두 다루고 있는 종합적인 첫 번쩨 독립운동사라는데 깊은 의미가 있다.

2. 춘원 이광수

위인전 『도선안창호』는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 1892~1950)를 저자로 하여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에서 1947년 5월 31일에 초판본을 발행하였고, 김구(金九) 자서전 『백범일지(白凡逸志)』는 춘원 이광수가 윤색(潤色)하여 1947년 12월 15일 자에 국시원에서 초판본을 발행하였다.

사실 춘원 이광수는 일제 식민시기와 해방공간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많은 수의 소설을 창작한 조선 최고의 문학가였다. 또한 이광수는 도산 안창호(安昌浩, 1878~1938)가 주도하여 결성한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의 구성원이었으니, 그는 도산 안창호를 가장 잘 아는 당대의 문학인이었다.

『도산안창호』, 이광수 저, 4×6판, 초판 19947년 5월 31일,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 발행. 이광수는 안창호의 수양동우회 출신이다. 사진의 책은 1959년 6월 20일 5판본. 필자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도산안창호』, 이광수 저, 4×6판, 초판 19947년 5월 31일,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 발행. 이광수는 안창호의 수양동우회 출신이다. 사진의 책은 1959년 6월 20일 5판본. 필자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 김구 원저, 이광수 윤색, 4×6판, 초판 1947년 12월 15일 발행, 4×6판, 국사원 발행. 사진의 책은 1948년 3월 1일 재판본. 필자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 김구 원저, 이광수 윤색, 4×6판, 초판 1947년 12월 15일 발행, 4×6판, 국사원 발행. 사진의 책은 1948년 3월 1일 재판본. 필자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춘원 이광수는 해방된 후 1947년 3월 10일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가 조직되자, 재빨리 『도선안창호』를 도산의 전기(傳記)로 저술하여 내놓은 것이다. 이후 춘원 이광수는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의 자서전 『백범일지』의 원고를 가다듬어 출판하는 윤색을 담당한다. 춘원은 도산의 제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해방공간에서 확고히 하려 한 것이다.

독립운동가에서 적극적인 친일파로, 해방 후에는 다시 기회를 엿보아 자신의 입지를 다진 것이 아니겠는가? 참으로 육당 최남선보다도 더 큰 순발력(瞬發力)이 있는 춘원 이광수이다.

3. 홍효민

홍효민(洪曉民, 1904~1976)은 1936년에 그의 대표작 역사 장편소설 「인조반정(仁祖反正)」을 발표함으로써 소설가로 활약하였고, 1927년에는 『개척(開拓)』 7월호에 평론 「문예시평(文藝時評)」을 발표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조선문학(朝鮮文學)』에 「문학의 사회적 성격」(1936.8.), 「노문학(露文學)과 콜옹(翁)의 지위」(1936.9.) 등을 발표하여 문학의 사회적 문화적 기능과 가치를 피력하는 등 문학평론가로도 활동하였다.

그는 일제강점기 말기에 「미영사상의 본질」(1943년) 등 총 5편의 친일 논설과 수필을 발표하고 친일 문인단체인 조선문인보국회 평론수필분회 간사를 맡았다. 홍효민은 광복 후에는 좌익 계열의 조선프로레타리아문학동맹에 참가했다가 이 단체가 조선문학건설본부와 통합하는 과정에서 의견 차이를 드러내며 탈퇴한 뒤로는 좌우익 문학 운동에 참여하지 않고 중간자적 입장을 내세웠다.

『영생의 밀사』, 홍효민 저, 4×6판, 1949년 7월 25일, 치형협회 발행. 1907년 헤이그에서 순국한 이준 열사를 소재로 한 장편소설이다. 필사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영생의 밀사』, 홍효민 저, 4×6판, 1949년 7월 25일, 치형협회 발행. 1907년 헤이그에서 순국한 이준 열사를 소재로 한 장편소설이다. 필사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그러한 그가 해방 후에 1907년 헤이그에서 순국한 이준(李儁) 열사를 소재로 한 위인전 『영생의 밀사』(1949년 초판)를 저술하여 치형협회에서 발행한다. 홍효민은 한국 전쟁 후로는 『애국사상과 애국문학』(1956) 등을 통하여 애국주의문학론을 주창하였다.

4. 금남 이석훈

금남(琴南) 이석훈(李石薰, 1908년~?)은 극작가 겸 소설가이다. 일제 강점 말기에는 친일 작품을 창작하고 「성지참배통신」(1942)과 같은 친일 기행문 등을 남겼다. 소설 3편, 소설집 1권을 포함하여 총 친일 작품 수는 19편으로 적지 않다. 또한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지원을 받은 문학 단체인 ‘조선문인협회’에서 간사, 상무간사, 상무로 활동했고,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후원을 통해 결성된 시국강연부대에서 활동했다.

그 외에 부여신궁 어조영지 근로봉사대, 용산호국신사어조영지 근로봉사, 일본 현지에 있는 신사·신궁 참배를 위한 성지순배사 활동에 참여했다. 1943년에는 애국백인일수전(愛國百人一首展)을 주최하고 매출금을 조선군과 일본 제국 해군에 헌금했고, 1943년부터 1944년까지 ‘조선문인보국회’에서 소설희곡부회 간사장을 역임했다.

1944년 만주국으로 건너가 《만선일보》에 합류했다. 당시 만선일보에는 염상섭, 안수길, 박팔양 등 유명 작가들이 근무하면서 일명 '만주 문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석훈은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전하면서 귀국하여 러시아 문학 작품 번역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순국혁명가열전』, 이석훈 저, 4×6판, 1947년 9월 7일 초판본, 조선출판사 발행, 이석훈은 자신의 친일 행위를 참회하며 사과하고 이 책을 저술하였다. 필자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순국혁명가열전』, 이석훈 저, 4×6판, 1947년 9월 7일 초판본, 조선출판사 발행, 이석훈은 자신의 친일 행위를 참회하며 사과하고 이 책을 저술하였다. 필자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그런데 친일문학인 가운데 오직 이석훈만은 해방 후인 1947년에 〈고백〉이라는 글에서 친일을 참회하는 글을 남기는 한편, 그가 저술한 『순국혁명가열전(殉國革命家列傳)』은 1947년 9월 1일 자로 조선출판사에서 초판본을 발행하였다. 이 책의 서문(1947년5월하순) 저자는 “나는 일개 범속한 문인으로서 선열들이 생명을 걸고 일제와 싸운 반면에, 내 자신 안이한 생애에 집착한 것을 반성하니, 참으로 한안(汗顔)을 이기지 못가겠으며, 애오라지 미미한 문장봉사의 길로나마, 선열의 영령 앞에 사과하는 것밖에 도리(道理)가 없는 것이다”라고 참회하고 있다.

5. 미당 서정주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 1915~2000)는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친일문학을 발표했는데, 주로 시 소설 잡문 평론 등을 통해 일제에 협력했다. 『매일신보』(1942)에 다츠시로 시즈오(達城靜雄)라는 창씨개명한 이름으로 「시의 시야기 - 주로 국민시가에 대하여」를 발표, 친일문학지 『국민문학』, 『국민시가』의 편집에 참여하면서 수필 「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1943), 「인보(隣保)의 정신」(1943), 「스무 살 된 벗에게」(1943), 일본어 시 「항공일에」(1943), 단편소설 『최제부의 군속 지망』(1943), 시 「헌시(獻詩)」(1943), 「오장 마쓰이 송가」(1944) 등 11편을 발표했다.

대부분의 내용은 태평양전쟁을 성전(聖戰)으로 미화하면서 학병지원 권유, 징병의 필요성과 의미를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일제의 식민정책에 동조해야 한다는 글을 썼다. 서정주는 특히 1943년에 친일작품을 많이 발표하는데, 그 배경에는 같은 해에 최재서와 함께 일본군 종군기자로 사병의 군복을 입고 취재를 다닌 데 있다.

『김좌진장군전』, 서정주 저, 4×6판, 1948년 12월 10일 초판본, 을유문화사 발행, 최초의 김좌진 장군의 전기이다. 필자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김좌진장군전』, 서정주 저, 4×6판, 1948년 12월 10일 초판본, 을유문화사 발행, 최초의 김좌진 장군의 전기이다. 필자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미당 서정주의 『김좌진장군전(金佐鎭將軍傳))』은 1948년 12월 10일자로 을유문화사에서 초판본을 발행하며, 1949년 여름부터 경무대에 정기적으로 출입하며 구술로 이승만의 자서전인 『우남 이승만전』의 초판본을 출간하였으나, 압권인 것은 이승만의 선친 이름에 경칭을 붙이지 않았다고 하여 이승만은 이를 모두 파쇄하도록 지시한다. 이 책은 후에 프란체스카 여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내용을 보강하여 1990년대에 재출간 된다.

미당 서정주는 이승만을 기리는 전기를 썼고,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베트남 파병을 촉구하는 시를 발표하기도 했으며, 1981년 대선 당시 전두환 대통령 후보를 위해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그를 지지하는 지원연설을 하기도 했고, 1987년에는 전두환의 만 56세 생일을 기념하여 찬양시를 지어 바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는 친일 부역 행위를 사과할 기회가 몇 차례 있었으나 이를 박차 버린다.

6. 맺음말

위에서 언급한 최남선, 이광수, 홍효민, 이석훈, 서정주 등의 저서를 출간순으로 정리하면 아래의 표와 같이 정리된다.

성 명

서 명

발행 일자

판 형

비 고

최 남 선

조선독립운동사

1946.02.20.

4×6

 

이 광 수

도산안창호

1947.05,31.

4×6

 

백범일지

1947,12.15.

4×6

 

이 석 훈

순국혁명가열전

1947.09.01.

4×6

 

서 정 주

김좌진장군전

1948.12.10.

4×6

 

우남이승만전

1949.

?

파쇄

홍 효 민

영생의 밀사

1949.07.25.

4×6

 

 

이러한 다섯 문학인 가운데 친일을 참회하고 사과한 문학인은 이석훈이 유일하다. 최남선과 이광수는 변명하였고, 홍효민은 사과 없이 슬쩍 지나쳐 갔으며, 서정주는 참회 자체를 모르는 인간성이 떨어지는 인물, 모든 권력자에게 아부하는 간사한 인물, 민족 앞에 몰염치한 후안무치(厚顔無恥)의 인물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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