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청나라를 통해 새로운 문물이 물밀 듯이 수입되었다.
철학이나 학문, 정치제도의 경우는 조선이 세계적 수준이었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수용할 것이 없었다.
대부분은 향락적이고 소비적인 대중문화였다.
[고금소총]과 같은 음담과 해학, 풍자가 담긴 서적이 출간되고, 남녀상열지사를 노래한 사설 시조, 춘향가, 심청가, 변강쇠가와 같은 판소리가 유행했다.

특히 패관잡기(稗官雜記), 패관소설의 유행은 사회적 문제가 될 정도였다.
정조는 패관소설이라 하여 ‘삼국지’도 읽지 않았다고 하며 수입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채제공은 이런 기록을 남겼다.

“요즘 사대부 집 부인들이 패관소설을 읽는다고 밤새고, 아침밥을 하는 것도 잃어버릴 정도이니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 집 부인은 그런 소설을 안 읽지롱~”

이러한 퇴폐문화는 한양과 같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유행했다.
퇴폐문화를 근절하라는 상소가 빗발쳤고, 조정에서도 관료들을 감찰하고 기강을 잡기 위해 노력한다.
숙종 때, 영유 현령 김세진이 기생에게 빠져 놀다가 마누라에게 얻어맞아 팔이 부러지고 파직당했다.
음탕한 시를 썼다는 죄명으로 출셋길을 막고 기생들과 놀아나거나 성추행, 강간 따위에는 엄정하게 법을 집행했다.
하지만 퇴폐문화를 퍼트리고 소비하는 중심세력은 관료나 사대부가 아니라 돈 많은 상인이나 중인, 한량들이었다.
관직이 없는 이들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일본의 춘화이다. 일본 춘화는 과장, 왜곡, 괴기스럽다. [사진 제공 - 심규섭]
일본의 춘화이다. 일본 춘화는 과장, 왜곡, 괴기스럽다. [사진 제공 - 심규섭]

춘화(春畵)는 남녀의 성행위를 담은 그림이다.
조선 후기 청나라와 일본에서는 춘화가 유행하고 있었다.
1791년 조선 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온 신유한은 일본의 성 풍속과 춘화에 대해 기록했는데, 그 정도가 짐승 수준이라며 경악했다.

‘대도시에는 인구가 많고 남자 대비 여자가 많다. 동성동본을 피하지 않고 사촌 남매끼리 서로 결혼한다. 형수와 아우의 아내가 과부가 되면 남은 형제가 데리고 살아서 음탕하고 더러운 행실이 마치 짐승과 같다. 집마다 목욕탕이 있는데 남녀가 함께 목욕한다.
대낮에 서로 성교를 하고, 밤에도 반드시 불을 켜고 한다. 각기 색정을 도발하는 자료를 가지고 즐거움을 극도로 한다.
사람마다 춘화를 품속에 지녔는데, 화려한 종이 여러 폭에 각기 남녀가 교접하는 자세를 백 가지 천 가지로 묘사하였다.’

우리나라에도 춘화가 전해진다.
단원 김홍도나 신윤복의 낙관이 찍힌 춘화가 있지만, 후대에 찍은 것이라 진위가 불분명하다.
하지만 인물 묘사나 선묘, 배경 표현의 수준이 김홍도나 신윤복의 작품과 비슷한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보게, 혜원. 춘화를 그려보면 어떻겠는가? 자네 실력이라면 대박이 날 걸세.”

“싫습니다. 시대의 분위기도 수상하고, 집안에 누가 될까 두려운데 어찌 춘화를 그리라 합니까? 나는 싫소!”

“하~ 난감하구먼. 자네의 고집이야 누가 꺾겠는가? 앞 뒷말 모두 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300냥을 주겠네. 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우리 화상들이 큰돈을 추렴했네.”

“3...300냥을 준다고요?”

300냥을 요즘 환율로 계산하면 대략 3억 원이다.

“여기에 조수 역할을 할 화공 2명과 광통교 쪽에 화실을 내어주겠네. 어떤가?”

신윤복의 마음이 흔들렸다.
요즘 그림도 팔리지 않고, 도화라는 기생을 만나면서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신윤복은 춘화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고, 춘화를 그리고 유통하는 일이 범죄라고 여기지 않았다. 이는 사대부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춘화, 운우도, 춘정화, 춘의화’를 검색하면 단 한 건도 나오지 않는다. 춘화가 사회적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었다는 의미이다.
춘화는 성적 호기심을 채워주고, 성적 욕망을 일으키는 역할을 한다. 동시에 성교육을 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조선에서 만들어진 춘화는 아주 귀했다.
신윤복은 단원 김홍도가 그렸다는 춘화를 본 적이 있었다. 대부분 조잡하고 모사한 흔적이 역력했다.
하지만 화면의 구성이나 표현은 중국이나 일본의 춘화와 달리 조선의 정서가 담겨있어 상당히 흥미로웠다.

“알겠소.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림은 그리겠지만 낙관은 찍지 않겠소. 대신 화공들을 훈련 시켜 대량으로 모사할 수 있도록 하겠소.”

화상들은 신윤복이 허락을 한다고 해도 낙관을 거부할 줄 알았다. 이는 단원 김홍도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알만한 사람들은 혜원의 그림인 줄 알 것이고, 모르는 사람에게는 낙관을 위조해 찍고 비싸게 팔면 그뿐이라고 여겼다.

이렇게 하여 원본 제작 6개월, 모사본 제작 6개월을 합쳐 근 1년에 가까운 ‘혜원 춘화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신윤복은 선금으로 받은 100냥을 아낌없이 자료수집과 초벌 사생 그림에 쏟아부었다.
단원 김홍도의 춘화부터 중국, 일본에서 수입된 춘화를 검토하고 장단점을 파악했다.

중국의 춘화는 쓸데없이 화려하고, 일본은 괴기하다.
배경이 너무 복잡거나 화려하면 산만해진다. 그렇다고 특정 부위를 확대, 왜곡하면 거부감이 들 수도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조선의 정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조선사람의 정서에 맞아야 현실감이 생긴다.

혜원의 낙관은 후대에 찍은 것으로 판단한다. 진품인지 아닌지는 판단 불가이다. 조선의 춘화는 이야기가 있고 화면구성이 탁월하다. [사진 제공 - 심규섭]
혜원의 낙관은 후대에 찍은 것으로 판단한다. 진품인지 아닌지는 판단 불가이다. 조선의 춘화는 이야기가 있고 화면구성이 탁월하다. [사진 제공 - 심규섭]

춘화의 주인공은 사대부와 기생으로 잡았다.
사대부를 주인공으로 삼은 것은 춘화의 품격을 높이기 위함이 아니다. 일종의 고급화 전략이다.
머슴들의 성행위를 보고 사대부들이 따라 하는 데는 정서적 불편함이 있지만, 반대로 사대부들의 성행위를 따라 하는 머슴은 정서적 충만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여념 집 여인이나 사대부 집 부인을 소재로 삼았다가는 의금부로 끌려가 문초를 당할 수도 있다.
춘화에 이야기를 넣되 너무 많은 설명은 안 된다. 설명은 성적 상상력을 저해하고 금방 싫증을 느낀다. 훔쳐보기와 같은 시선의 외부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도와주는 화공에게 성행위 상황이나 이야기, 체위 따위를 수집하도록 했다.

가장 어려운 부분은 실제 성행위를 보고 사생하는 일이었다. 보고 그리는 것과 상
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나이 든 퇴기(退妓)와 뒷골목 바람둥이를 찾아 섭외했다.
실제 성행위를 할 필요는 없었다. 다양한 체위와 그에 맞는 자세가 필요할 뿐이다.

신윤복은 빠른 눈썰미와 손재주로 수백 장이 넘는 사생을 했다.
이 사생을 모아 형태를 만들고 살을 붙이고 채색을 할 것이다.

그렇게 40여 점이 넘는 춘화 원본이 만들었다.
원본의 크기는 대략 가로세로 50cm 정도였다.
이 원작으로 가지고 다니거나 숨길 수 있는 화첩 크기로 축소해야 한다.
일단 축소한 또 다른 원본이 만들어지면 대형 원본은 폐기할 것이다.

혜원은 춘화 작업을 하면서 한 번도 기방(妓房)을 찾지 않았다.
도화의 모습을 떠올리지도 않았다.
행여 도화의 모습이나 정서가 춘화에 스며드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계약금을 주면서 나이 지긋한 화상은 몇 번이나 신신당부했다.

“혜원, 기생을 만나고 있다고 들었네. 하지만 이번 작업을 하는 동안은 만나지 말게.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자네는 충분히 알 것이라 믿네.”

혜원은 알고 있었다.
화가의 개인적인 경험이 끼어드는 순간, 춘화는 실패한다는 것을.

이제 6개월에 걸친 춘화 원본 작업이 끝났다.
화공을 훈련 시켜 모사본을 만드는 일만 남았다.

갑자기 허탈감이 몰려왔다.
수많은 사람의 사랑하는 모습을 그림에 담았지만 정작 혜원의 가슴은 메말라 갔다.

‘아, 도화. 네가 보고 싶구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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