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에 일장기를 들고 나온 극우집단이 개천절까지 망쳐 놓으려하고 있다. 태극기를 망쳐 놓고 차례로 순수하고 고귀한 민족의 자산들을 하나하나 먹칠을 하고 있다. 언감생심 금년 광복절 땐 일장기까지 들고 나왔다. 일본 왜구들의 사주를 받지 않는다면 제 정신 가지고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짓들을 이 자들은 지금 서슴없이 자행하고 있다. 어느 나라든 ‘보수극우’의 특징은 민족 우선주의와 국가 우월주의에 있다. 일본의 극우, 미국의 극우, 독일의 극우들을 보라. 그들에게는 한 가지 이와 같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희한한 나라 한국에서는 이런 극우의 본질적 성격을 모두 진보 좌파들이 가지고 있다. 글 쓰는 사람들도 이러한 보편적 정의에 따르면 극우 보수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소위 한국의 보수집단이란 기형적인 존재들은 어떤 사상과 이념으로도 정의될 수 없는 것이다. 이들은 돈 줄 대로 따라 다니는 맘몬주의자들이라고 하면 된다. 최근 이들 극우들이 일본자금 지원을 노골적으로 받고 있는 것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이미 이런 토착왜구들을 통해 일본의 재침략은 시작된 것이다.

제대로 되었다면 해방 후 보수 우익은 만주에서 활동하던 대종교의 대를 잇는 계열이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해방 후 가짜 우익 보수는 김좌진 장군을 공산당이 살해했다는 등 보수 세력들을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반공으로 덧칠을 하였고, 대종교뿐만 아니라 천도교들, 민족 종교 계열들이 이들 사이비 극우보수 세력에 속에 한 편이 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필자는 2004년도 화룡에 가 나철, 김교헌, 서일 선생들의 무덤을 참배한 적이 있으며 그 동네에 가서야 김좌진 장군의 사인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 김좌진 장군은 김일성 부대원이 아닌 차라리 김일성과 대척점에 있었던 화요파 인물에 의하여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국 사이비 극우들은 반공을 부채질하기 위해 마치 김일성 부대가 김좌진 장군을 죽인 것처럼 가짜 악선전하고 있다.

김일성 주석이 이끌던 항일연군이 민족주의 계열과 서로 불편한 관계였던 것도 사실이다. 왕청현에서 민족계열 현묵관이 반일 공동 투쟁을 위해 좌우 합작회의를 소집해 놓고는 집회에 참가한 최봉 등 청년 5명을 산골짜기에 끌고 가 돌로 쳐 죽인 사건은 신간회 이후 좌우 합작을 끝내 무산시키고 말았다. 당시 민족주의 계열은 공산-사회주의 계열을 일본보다 더 적대시하였다. 그러나 사회주의 계열은 그 반대 생각, 즉 동상이몽 속에 왕청회의는 소집되었지만 결국 해방될 때까지 좌우 합작은 어렵게 되고 말았다. 그 원인제공은 현묵관이 한 것을 역사는 잊지 않을 것이다. 그 이후 상해임시정부 민족주의 계열과 공산-사회주의 계열 간의 오해와 불신의 골은 지금까지 깊어만 가고 있다. 그러나 아래 일단의 한 장면은 서로 대화할 수 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김소래의 농기와 노동당의 당기 간의 비교를 통해.

김일성 항일유격대가 민족종교 인사들과 조우하는 장면은 회고록 여러 곳에서 나온다. 그 가운데 동학교도 박달의 경우는 혁명열사릉에 안장될 정도이다. 그가 국내 진공에 큰 공을 세운 것과 끝내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한 것은 역사의 한 장이 되었다. 고난의 행군의 끝자락 백두산 산골 동내에서 만난 민족종교 계열 ‘덩덕궁교’와의 조우도 김일성 사령은 아름다운 추억의 한 장으로 회고록에 기록하고 있다. 우리 순수한 민족 종교의 소중함을 소상히 회고록에 남기고 있다. 민족진영이 공산주의를 배타 내지 배격했지 그 반대는 아니었다.

해방 후 동학 청우당을 유일 종교 단체로 인정을 하고, 1994년 대박산 기슭에 단군릉을 건립한 것은 그 곳을 한 번 방문하게 되면 그 규모에 놀랄 것이다. 단군릉 건립을 두고 김일성 우상화 내지 역사적 허위 운운하고 있지만, 고난의 행군 이후 1939년부터 항일유격대는 국내 진입을 위해 오직 흰 눈 덮인 백두산을 이정표 삼아 진격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백두산이 민족의 영산이었기 때문이다. 항일유격대들이 추석보다 주요시한 명절이 단오절이다. 이 하나를 보더라도 단군릉 건립은 결코 주체사상 확립을 위한 김일성 우상화가 아닌 것이 증명이 되고도 남는다. 여기 회고록 3권에 상당한 양에 걸쳐 대종교 지도자 김소래를 소개한 글과 김소래가 그린 농기와 노동당 당기의 비슷함을 보여줌으로 조금이나마 양 진영 간의 해묵은 오해를 거둘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소래 김중건 笑來 金中建(1889.12.6.생)은 당시 대종교 지도자였다. 김소래는 함남 영흥군 고령리 출신이다. 11세에 항일시를 지어 벽에 붙여 놓을 정도였다고 한다. 1910년 서울로 와 천도교에 입교한다. 그는 그의 독창적인 철학을 발표하는 데 이를 ‘극원철학 極元哲學’이라고 한다. 그는 국가를 소공화국(A), 대공화국(B), 무국(C)으로 분류하여 ‘소공화국’을 조선의 최초 건국, ‘대공화국’을 세계혁명과 세계정부, ‘무국’을 인도주의 실현으로 보았다. 이를 일명 김소래의 ‘ABC 운동’이라 한다. 칸트의 세계공화국을 한 발 더 나간 운동 같다. 그리고 이러한 이념을 두고 ‘원종元宗’이라고 했다(김소래 철학과 사상, 1권 49-50쪽). 원종을 창시한 이유는 천도교가 극심하게 부패하고 무식자들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1914년 만주로 갔으나 일경의 체포와 구금이 반복되고 홍공포증이란 병에까지 걸려 심신이 한없이 나약해졌던 차, 1928년 봄 북만으로 이주를 한다.

1929년 봄 김소래는 녕안현 팔도하자촌(일명 어복촌)에 정착, 그의 ABC 이상향을 실현할 땅을 일구면서 3대 정책을 발표한다. ‘1. 농우동맹의 백만 결속운동, 2. 만주 대십자 정책, 3. 동방약소민족 해방운동 대연맹 결성’이 그것이다. 2번째 만주 대십자 운동이란 만주 일대의 철로망을 十 자로 그어 거점마다 항일 비밀조직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 십자의 중심이 녕안현 팔도하자촌이란 것이다.

팔도하자는 동으로 용산, 서로 달호산, 북으로 덕성산, 남으로 망미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 가운데 요새였다. 그는 팔도하자에 원종 총본부를 세우고 이상촌의 꿈을 펴려 한다. 중앙부 총무처 건물에는 ‘농기儂旗’라는 깃발이 펄럭였으니 그 기세가 장엄했다고 한다.

농기는 원종의 상징으로서 적색 바탕에 청색 무늬로 되었다. 중앙에 만자가 새겨져 있고 만자 위에 ‘칼’과 ‘호미’를 그렸다, 만자는 ‘로’로 읽었다. 칼은 ‘인도주의,’ 호미는 ‘농촌제일주의’를 상징한다. 그리고 김소래는 자기 사상을 ‘쪼각사상’이라고 했다.

▲ 김소래의 ‘농기’
▲ 노동당 ‘당마크’

 

 

 

 

 

김소래 원종의 농기는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북한 노동당 당마크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다른 점도 있다. 농기는 칼과 호미와 만자(로)이지만, 당마크는 마치, 낫, 붓이다.

1946년 7월 당마크가 제작될 당시 김일성 주석은 직접 제작에 지시, "다른 나라의 것처럼 노동자, 농민만을 형상하고 근로인테리(사무직 근로자)를 제쳐놓은 당마크 도안들의 부족점도 깨우쳐줬다"면서 지식인이 포함된 의미를 짚었다고 한다. 공산당 마크가 마치와 낫뿐인데 그 가운데 붓을 그려 넣었다.

김소래와 김일성 항일유격대가 직접 조우한 기록이 회고록 3권 9장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 “팔도하자를 일명 소래지팡이라고도 하였는데, 바로 여기에 녕안현당도 있었고 구당도 있었다. 팔도하자를 소래지팡이로 한 것은 화룡현 일대에서 대종교의 교주로 있던 김소래란 사람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었다.(3권 391쪽)

김일성 주석은 이미 길림 육문중학교 시절부터 김소래를 들어 알고 있었다고 하면서 우호적으로 “반일 감정이 강한 그는 건원중학교 졸업생들을 홍범도, 김좌진과 같은 독립군 맹장들의 수하에 보내는 것으로 구국운동을 후원하였다”(392), “김소래는 독립군이 북간도에서 철수한 후 팔도하자골 안에 와서 토지를 사고 거기서 김좌진독립군에 군자금을 대주었다”고 하면서 김일성 유격대 대원인 “리광도 유격대 초창기에 이 사람한테 와서 여러 자루의 무기를 구해가지고 갔었다”(392)고 회고하고 있다.

그러나 1930년 대 중반 김일성 유격대가 팔도하자골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고려홍군’이 왔다 하면서 아이들을 집안으로 불러들이면서 문을 잠갔다고 한다. 김일성 부대는 지금까지 가는 곳마다 대환영을 받았는데 항일유격 활동하던 가운데 가장 참혹한 경험이었다고 한다. 김소래 때문이라고 보고 있지는 않지만 민족주의 계열과 공산-사회주의 계열 간에 서로 적대감은 농후했던 것 같다. 그런데 녕안땅이 어떤 땅인가? 발해의 8개 성 가운데 가장 큰 성이 있던 곳이 아니던가?

김일성 사령은 처음부터 이 지역에 사람들을 불러 모아 놓고 대중 강연부터 하려던 접근법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하모니카 잘 부는 사람들을 다 모으고 연길 지방의 아동 유희반을 데리고 와 노래와 춤 공연을 하는 것으로 강연을 대신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녕안땅이 유격대의 활동 거점이 되었다고 한다.

“인민이 자기의 이익을 옹호하고 대변하는 혁명가들을 외면한다면 그 인민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난생 처음으로 이런 고고한 절벽에 부딪혀 보는 나로서는 생각이 깊었다. 푸르허와 오가자를 혁명화 하는 과정이 단순치 않았다고 하지만 그 지방 사람들도 녕안 인민들처럼 그렇게까지는 냉정하지는 않았었다.”(393)

‘푸르허’란 백두산 가는 길목에 있는 작은 동네이다. 김 주석은 이 동네에 들어가 머슴살이를 한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푸르허보다 녕안땅 팔도하자골이 더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을 훈령하는 대중 강연부터 시작이 잘못되었다고 스스로 반성하고 있다.

김소래 선생은 ‘김소래의 철학과 사상’을 남겼고, 김일성 주석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남겼다. 두 문헌을 통해 양자를 비교해 보는 마당에 착잡한 마음 금할 수 없다. 김소래 연구자들은 그가 “1933년 3월 24일 45세에 재만 공산주의자들에게 참해 당했다”(김소래철학사상 연구 2권, 493)고 기록하고 있다.

김소래를 참해한 공산주의자들은 바로 김일성도 참해하려던 자들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회고록 거의 대부분이 일제와 싸운 얘기보다는 같은 공산주의자들 안의 갈등이 더 많은 분량으로 기록돼 있다. 남한의 기록들이 이를 분리할 줄 모르기 때문에 대종교 건전 보수주의자들이 사이비 보수에 지금 한 배를 타고 있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끝으로, 농기와 당기로 돌아가 생각해 보기로 한다. 약간의 작도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공통된 점은 관념론과 유물론의 조화라고 할 수 있다. 농기의 칼(인도주의)과 호미(농민)는 유물론과 관념론을 상징하고 가운데 만자

 

는 불교적 상징으로 융합과 조화의 상징이다. 물질과 정신을 조화시킨다는 말이다. 같은 공산국가인 소련과 중국이 마치와 낫만을 공산당기로 사용하는 반면에 당기는 그 가운데 관념론의 상징인 붓이 들어가 있다. 김정일 위원장의 ‘주체사상에 대하여’란 글을 보면 관념론을 ‘세계관1’, 그리고 유물론을 ‘세계관2’라 하면서 이를 조화시킨 주체사상은 ‘세계관3’이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농기와 당기는 모두 코리아 민족 고유사상의 본질을 그대로 상징화한 것이라고 본다. 이런 정신과 물질을 두 세계로 나누어 보지 않고 이를 조화시켜 보려 한 것은 원효, 율곡, 그리고 수운에 이르기까지 민족의 원형ARCHETYPE 그 자체라고 본다.

그리고 우리의 통일은 이러한 원형을 재발견하는 데서 올 것이다. 농기와 당기를 바라보면서 결국 같은 점이 더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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