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소련의 전후 구상과 한반도 정책

미국은 1942년경부터 전후에 대비하여 동아시아와 한반도에서의 정책을 구상, 기획, 준비하고 있었고, 그 기본적인 방향이 연합국 공동의 신탁통치 방안으로 정리되었다. 이에 반해 소련은 종전 때까지 동아시아와 한반도에 대한 정책을 구상, 준비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한반도에 대한 오랜 이해관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소련이 한반도에 대해서 아무런 입장이 없을 수는 없었다. 근대 이후 만주와 한반도를 두고 러시아는 일본과 각축을 벌였으나 1904〜1905년의 러일 전쟁의 패배로 조선에서 영향력을 상실했다. 하지만 1917년 러시아 혁명 후 소비에트정권(소련)이 세워지면서 조선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주요한 지지 세력이 되었다. 특히 소련은 일본제국주의와 싸우는 한국의 공산주의 운동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주요한 지원세력이었다. 1937년 스탈린의 극동 조선인의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와 간첩 혐의 등을 이유로 조선인 혁명가들과 지도적 인물들에 대한 박해·처형으로 조선민족해방운동에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지만 해방 때까지 항일투쟁 세력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1940년 이후 만주에서 싸우던 동북항일연군이 국경을 넘어 소련에 자리를 잡아 88독립보병여단(‘동북항일연군 교도려’)을 결성하였고, 이곳에서 조선인 대원들이 포함된 소련군의 대일전에 공동으로 참전할 준비를 하는 등 소련의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확보의 중요한 통로가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대일전 참전이 결정된 얄타회담(1945.2.4.〜2.11) 이전까지는 소련의 대한반도 정책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1)

제2차 세계대전 중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적·물적 피해를 본 것은 소련이었는데 유럽전선에서 독일과의 전쟁에 총력을 쏟아야 했던 소련으로서는 동아시아에 대해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1945년 2월 8일 얄타에서 개최된 소련 수상 스탈린과의 회담에서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는 전후 조선에 대한 미·중·소에 의한 20〜30년간의 신탁통치를 제의했다. 이에 대해 스탈린은 “신탁통치(후견제)의 기간은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고 응답했다. 미국의 신탁통치에 반대하지 않고 암묵적인 동의를 한 셈이었는데, 이는 결국 소련이 전후 한반도 문제 해결에 적극 참여하겠다는 의사표시이기도 했다.

얄타회담에서는 논의된 주된 문제 중 하나는 소련의 대일전 참전 조건과 관련된 것이었다. 소련은 1944년 10월 모스크바 회담 때 유럽에서 전쟁이 끝난 뒤 3개월 후에 일정한 조건 하에서 대일전에 참여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다. 1944년 12월 14일 스탈린은 주 소련 미국대사 해리먼과의 대담에서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지위가 1905년 러일전쟁 직전 상태로 완전히 회복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소련의 요구 조건은 얄타회담에서 연합국에 의해 받아들여졌다.(2)

▲ 독일의 소련 침공작전인 ‘바르바로사 진격 작전’(1941.6.22.-12.5) 지도. 제2차 대전 때 유럽 동부전선에서 독일과 혈전을 벌여야 했던 소련은 독일이 패전할 때까지 동아시아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얄타회담에서 소련의 참전 조건으로 합의된 내용은 외몽고(지금의 몽골공화국)의 현상 유지, 사할린 남부 및 그 부속도서의 소련으로의 반환, 소련의 우선권을 보장하는 바탕에서 다롄(대련)항의 국제화, 소련의 해군기지로서 뤼순(여순)항 조차(租借) 부활, 중국과 공동으로 중동·남만 철도 이용 재개, 쿠릴열도의 소련 할양 등이었다. 다만, 외몽고와 다롄·뤼순항 및 철도 문제는 중국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전제가 제시되었다. 얄타 회담에서는 공식적으로 한반도 문제는 제외되었다.(3)

그런데 1945년 6월 29일자 중국 주재 소련대사관 문서에는 얄타회담에서 루즈벨트와 스탈린 사이에 “미군과 소련군이 한국으로 진공한다. 한국에서 일본을 축출한 후 미·중·소 3국에 의한 신탁통치를 실시한다. 소련군은 일본 북부지역을, 미군은 남부지역을 점령한다”는 내용의 합의가 있었다고 되어 있다. 이승만과 일부 연구자들이 제기한 이른바 ‘얄타 밀약설’의 근거가 될 수도 있겠으나 이 자료의 신빙성은 의문의 여지가 많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생각이다.(4)

우리가 잘 알다시피 38선 획정은 여러 자료들을 통해서 밝혀지듯이 미국이 일방적으로 그어 제안한 것을 소련이 받아들임으로써 이뤄진 것이었다. 신탁통치안 또한 이미 이전부터 미국이 준비한 것으로써 소련의 정책과는 오히려 거리가 먼 내용이었다. 얄타회담에서는 루즈벨트의 한반도 신탁통치 제안에 대해 스탈린이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은 맞지만 한반도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 1941년 4월 일소 중립조약 체결 문서에 서명하고 있는 일본 외상 마쓰오카 요스케. 그 뒤에 소련 수상 스탈린이 서 있다. 이 조약은 1939년 독소 불가침조약만큼이나 놀라운 사건이었지만 이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에서는 조약을 파기하였다.

‘우호적인 정부 수립’이라는 소련의 원론적 원칙

얄타회담에서 한반도 문제가 논의되지 않았던 것은 소련의 전후 동북아 전략 구상에서 한반도는 만주와 일본에 비해서 일차적인 관심대상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련이 한반도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근대 이후 일본과 계속해서 각축전을 벌여왔던 한반도에서 일본을 완전히 축출하는 것이 필요했으며, 중국과의 협정에 따라 뤼순항을 해군기지로 확보할 경우 대한해협의 의미가 커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소련이 한반도에 대한 구체적인 정책 방침을 확정한 것은 아니었고 실무적 차원에서 요구 사항을 제기하고 있었던 수준에 머물렀던 것이다.

소련 내부에서 한반도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주장이 처음 제기된 것은 1945년 6월 29일자 외무성 제2극동부장 D. A. 쥬코프와 부부장 E. G. 쟈브로진이 작성한 「조선」이란 정보문건 말미의 내용이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소련의 이해관계를 담은 주장에 개진되었다.

“3) 조선의 독립은 일본뿐만 아니라 동방에서 소련에 압력을 가하려는 다른 열강쪽에서 조선을 소련에 반대한 미래의 침략기지로 삼으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서 그만큼 효과적이 되어야 한다. 조선의 독립과 소련의 동방 안보에 가장 현실적이고도 믿을만한 보장은 소련과 조선간의 우호적이고도 긴밀한 관계 형성일 것이다. 이는 미래 조선정부의 구성에서도 반영되어야 한다. 4) 의심할 바 없이 조선문제의 해결은 과거 조선에서의 미국과 중국의 이해관계를 고려하면 일련의 난관에 부딪칠 수 있다. … 5) 조선에 대해 완전한 독립이 허용되기 이전 어떠한 형태의 후견이 이루어질 경우 소련은 여기에 당당히 참여해야 한다.”(5)

이 문건은 정책 제안서에 불과하지만 조선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외무성의 조선담당 관리가 작성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들은 소련 내 대한반도 관련 최고의 외교전문가들이고 따라서 당시 소련 지도부의 시각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이 문건에서 알 수 있는 것은 1945년 6월의 시점에서도 소련 지도부는 신탁통치를 비롯한 한반도 정책 구상과 입장이 분명하게 서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문서에서 소련은 전체적으로 ‘한반도에서 소련에 우호적인 정치권력을 세워야 한다’는 원론적 입장을 강조하였지만, 한반도의 소비에트화나 부르주아민주주의 등의 권력 수립문제는 제기하지 않고 있다.(6)

▲ 1939년 소련과 일본의 국경 충돌. 근대 이후 러시아와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두고 숙명의 대결을 펼쳤고, 1941년 상호 중립조약을 맺었으나 1945년 종전을 앞두고 소련이 재차 대일전에 참전했다.

소련으로서는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인 지위를 확보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겠지만 현실적인 국력이나 역사성, 미국 등 연합국과의 이해관계를 배제할 수 없는 상황 등이 작용하고 있었다. 소련의 기본 원칙은 한반도에서 어느 열강이든 독점적인 지위를 가져서는 안 되며, 소련의 안보를 위해서라도 조선은 소련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반도에서 친미 또는 친중 일변도의 정부 수립을 반대한 것이다. 소련에 ’우호적인 관계’는 이념적으로 일치하는 정부 수립이 아니라 소련의 국익에 합치하는 정치체제를 의미했다. 이때까지 소련은 한반도 문제 대한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는 원칙론에 머물러 있었다. 소련은 한반도 문제에 적극 참여한다는 의지를 보이기는 했지만, 정책적 입장을 구체화하지는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그 때문에 소련은 미국의 신탁통치 구상 등에 대해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대응하고 있었다.(7)

소련의 한반도 정책의 가이드라인이 제시된 것은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한 뒤인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의 「훈령」을 통해서였다. 북한 주둔 제25군 사령부에 내려진 이 문건에서 스탈린은 “모든 반일민주정당·사회단체들의 광범위한 연합을 기반으로 북조선에 부르주아민주주의정권을 수립하라”고 지시했다.(8) 이를 두고 일부 보수학자들은 소련의 분단 음모설을 제기하는데 이는 터무니없는 주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종전 직전 일본의 연합국 이간 공작 시도와 실패

1945년 4월 5일 소련 외상 몰로토프는 주소련 일본대사 사또(佐藤)를 불러 소련은 1941년 4월 13일 소련과 일본의 중립조약을 연장하지 않겠다고 통고했다. 몰로토프는 “조약이 조인된 이후, 사태가 근본적으로 변화하여 일본은 그 동맹국인 독일을 대소전쟁 수행에 원조하고 또한 소련의 동맹국인 미·영과 교전중이어서 중립조약은 그 의의를 상실하였고, 그 존속은 불가능하므로 내년 기간 만료 후 연장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때 사또 대사는 향후 1년간 효력이 더 존속하느냐고 문의하였고, 몰로토프 외상은 이를 인정했으나 소련군은 그 1년이 지나기 전인 8월 9일 선전포고와 함께 대일전을 시작하였다.(9)

이미 살펴본 것처럼, 이때까지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기본방침은 신탁통치 실시를 위해 공동점령·공동관리였고, 군부에서는 이를 위한 현실적인 방안으로 분할점령 방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1945년 1월 하순경 미국 전쟁성 작전국 전략정책단은 일본 패망 후 일본에서의 미국의 군사목표를 위한 정책참모 연구서 「일본 패전 후의 점령과 관리」를 작성했다. 이 문서에서 한반도와 관련하여 경성(서울)과 인천을 최우선 점령지로 하여 국제관리하에 두며, 소련의 단독지배와 중공군의 선착을 견제하면서 조선 13개도를, 1) 소련에게는 동북방의 2〜3개 도, 2) 영국에게는 서북방의 3개도(중공군 선착을 우려하여), 3) 중국에게는 제주도 포함하여 서남방의 3개도(영국과 대체 가능), 4) 미국에게는 나머지 5개도를 각기 점령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4개국에 의한 분할안은 결국 후에 미국과 소련에 의하여 2등분하는 38선 분할안의 원형이 되었다.(10)

▲ 한반도 분할 점령의 기초가 된 일본과 한반도, 타이완에 대한 연합국(미국)의 분할 점령 방안. 대만과 만주는 중국에, 한반도와 일본은 분할 점령함으로써 일본제국을 해체한다는 방안은 한반도의 미소 분할점령과 일본의 미국 단독점령으로 바뀌었다.
▲ 미국 육군성이 작성한 한반도 4대국 분할안(1945년 1월 10일-20일 작성)

한편, 일본군은 소련군의 대일 작전이 점차 농후해짐에 따라 대소 외교교섭과 함께 군사적 대응을 준비했다. 일본 대본영은 1945년 4월 중순 중국 중서부에서 4개 사단을 감축, 북부로 이동시키는 재조정을 시행하였고, 5월 3일에는 작전부서와 우메즈(梅津) 참모총장 간에 조선의 17방면군을 관동군 예하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5월 7일 우메즈 총장은 히로히또(裕仁) 천왕에게 이를 건의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자 이에 대한 대안으로 작전참모 다네무라(種村佐孝)는 “관동군과 조선군이 북·남으로 작전방향을 양분하여 관동군은 북쪽만, 조선군은 대미시책에 철저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건의하였다. 5월 30일 이 방안이 받아들여져 북조선(평안남북도와 함경남북도)만 관동군에게 넘겨주고 제17방면군이 남조선을 계속 방어하는 방안이 대소작전 요령으로 발령되었다. 2차 세계대전 중 한반도를 군사작전상 분할한 최초의 선례였다.(11)

▲ 조선주둔 일본군 배치 상황-미태평양지역 육군사령부 정보처(1945.7.20.경 작성). 지도에 나타난 평원선에 그어진 선은 관동군과 조선군 사이의 관할 분계선이다. 일본군의 이러한 한반도에 대한 관할 분할 또한 미소의 한반도 분할 점령에 일정하게 영향을 미쳤다.

독일 패전 후인 5월 11〜14일 사이에 개최된 일본의 최고전쟁지도회의에서는 소련의 대일참전을 막기 위해 소련을 통해 전쟁 종결을 시도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일본 지도부는 남만주를 중립지대로 하고 조선을 일본이 보유하는 안을 복안으로 결정했다. 이러한 안을 가지고 히로다(廣田) 전 수상이 말리크 소련대사를 만났으나 기대했던 반응을 얻지 못했다. 7월 11일 주 소련대사 사또는 몰로토프와의 면담에서 ‘국체(國體)의 호지(護持: 보호하여 지킴)’, 즉 ‘천왕제 유지’를 조건으로 이번 전쟁에서 획득한 모든 영토를 포기하겠다는 입장을 제기했다. 그렇지만 이때까지도 일본은 조선과 대만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으나 소련과 미국 등 연합국의 입장은 확고했다. 7월 20일 사또 대사는 극비전보에서 “국체호지만 된다면, 다른 것(조선 등 영토조항)들을 버리고 무조건항복을 감수하는 길 이외에는 없다”고 호소했다. 이러한 일본측의 외교전문은 미국 정보부서에 의해 모두 포착되어 포츠담회담에 참석하고 있던 마샬 육군참모총장에게 7월 25일분까지 전해졌다. 미국은 일본의 대소 화평 교섭의 전 과정을 상세히 탐지하고 있었다.(12)

1945년 4월 12일 루즈벨트의 사망으로 부통령에 있던 트루먼이 대통령직을 이어받으면서 미국의 대소 견제는 전에 비해 훨씬 심해졌다. 트루먼 대통령은 6월 18일 아침 백악관 전략회의에 앞서 그류(J. C. Grew) 국무차관(국무장관 서리)와 만나 그류가 생각하고 있던 종전을 끝낼 수 있는 외교적 방안에 대해 자문을 구했다. 그류는 ‘무조건 항복’이라는 정의를 다듬어서 일본의 천왕체제의 존속을 보장함으로써 일본 내의 화평파를 자극하여 대일본 본토 침공 작전을 펴지 않고 대일전을 종식시키자는 방안을 제안하였다.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뒤 직업외교관의 길로 들어서 1922년 로잔 강화회담(투르크제국의 후신인 터키공화국과 연합국이 1차 대전 후 맺은 영토 조약) 미국 대표, 터키대사, 주일대사 등을 거친 일본을 잘 아는 그는 “천왕제를 존속하지 않는 한 일본은 절대 항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전후 미·소간의 대결 구도로 발전할 것이 필연적이므로, 그러한 대결에서 일본은 미국에 중요한 자산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이러한 방안은 천왕의 권위를 이용함으로써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하기 전에 미군의 희생도 줄이고 일본의 점령도 단독으로 가능하게 되는 장점이 있다고 강조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그 제안에 대해 관계 장관 및 각군 총장들과 협의해 보라고 지시했다. 다음날 그류는 스팀슨 전쟁장관, 포레스탈 해군장관 및 마샬 육군참모총장을 만나 논의한 결과 기본 개념에서는 동조를 받았으나 시기 포착과 관련한 문제 제기를 받았다. 다른 경로에서도 반대가 있어서 그류는 6월 30일 트루먼 대통령에게 의견 수렴에 실패했다고 보고했다.(13)

7월 2일 스팀슨 장관은 대통령에게 보내는 각서를 썼다. 그것은 일본에게 최종적으로 무조건 항복을 권유하고, 원폭 사용의 최종 결단의 근거가 된 경고를 포함한 3거두 선언문을 공표하자고 건의한 초안이었다. 여기서는 일본의 주권을 그 본토 도서로 국한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7월 17일 스탈린은 포츠담에서 트루먼에게 일본이 화평 공작을 통해 연합국을 이간질시키려 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일본의 도고 외상은 수차에 걸쳐 사또 주 소련대사를 통해 교섭했으나 대일 참전 계획을 마련한 소련을 설득하는 것이 불가능했다.(14)

포츠담 회담 전후 미·소의 한반도 군사작전계획 구상

1945년 6월 18일 트루먼 대통령은 대일전에 관한 전반적 전략을 점검하고 포츠담 회담 준비를 위해 육군·해군 장관, 각 군 참모총장을 소집해 중대 전략회의를 개최했다. 여기서 마련된 대일 승전전략은 큐슈침공 작전과 칸도(關東)평야 상륙작전 계획 등 일본 본토 점령을 목표로 한 대일전략으로 한반도는 우선 작전순위에서 밀렸다. 일본 본토 공략 작전으로 인한 만주와 조선에서 생기는 전력을 공백은 앞으로 참전하게 될 소련군에게 맡기자는 것이 맥아더 장군의 기본 전략 구상이었다. 미군은 한반도 작전에서 평양 서남방 90마일 지점에 있는 ‘장산 곶’을 유일한 상륙거점으로 보았으나, 이곳은 여러 면에서 일본 큐슈보다도 훨씬 불리하다고 지적했다. 이같은 이유로 미군의 침공 작전 지역에서 한반도는 제외되었다.

7월 10일 합동전쟁기획위원회(JWPC)가 작성한 미군에 의한 전략지점 점령계획에서 “미국은 우선 일본의 본토를 점령하여야 하고, 그 후 남부 한반도와 중부 태평양의 적 점유 도서들을 점령하여야 한다”고 결론짓고 이를 건의하였다. 이는 일본의 본토 침공작전 이전에 일본이 붕괴하거나 항복하고 소련군이 참전해올 경우에 대비한 것으로, 이 경우 일본과 주변 영토 점령 문제는 미·영·중·소 4강국의 합의가 필요하지만 일본과 싸우는 주요 강대국 간에 그러한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는 이 같은 방침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는 미군이 한반도의 남부만 점령하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써 지금까지 확인된 것으로는 최초의 문헌으로 알려지는데, 첨부된 지도에서는 미군이 점령해야 할 지역이 북위 40도선에 근접해 있다.(15)

▲ <지도> 미 합동전쟁기획위원회의 한반도 남부 점령안(1945년 7월 10일). “Map: Proposed Occupational Areas,” in JWPC 264/6, 10 July 1945, P. 165, ABC 014 Japan(13 Apr 44), US National Archives.(한국전쟁학회편, 『한국 현대사의 재조명』, 명인문화사, 2007, 99쪽)

한편, 독일 패배 후 유럽과 세계 질서 재편을 논의한 포츠담 회담(1945.7.17.〜8.2)에서는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공식적으로 카이로 선언을 재확인한다는 구절만 발표되었을 뿐이었다. 다만, 조선인들의 자치능력이 없다는 전제하에 종전 후 신탁통치가 필요하다는 데는 3거두(트루먼, 처칠, 스탈린)가 의견을 같이했다. 그런데 포츠담 회담이 진행 중이던 7월 24일과 26일 이틀간 미국과 소련의 참모총장 회의에서 중요한 군사적 결정이 내려졌다. 이 회의에서 소련의 대일전 참전에 따른 만주와 북조선에서의 해·공군 작전 구역이 획정되었는데 이는 한반도 분할의 중요한 실제적 연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미국 육군참모총장 마샬 장군은 7월 24일 회의에서 소련군의 대일전 참전과 관련해 5개항의 질의서 형식을 통해 미·소간 작전구역안을 소련측에 건넸는데 이때 38선이 처음으로 나왔던 것이다. 이에 대해 소련 육군참모총장 안토노프는 수정제안을 했다. 이 수정안 중에 만주와 한반도의 분할제안이 등장했다. 여기서는 북한의 무수단에서 장춘(창춘), 요원(랴오옌), 개로(카이루), 적봉(치펑), 북경(베이징), 대동(타퉁)과 내몽고 남부국경을 연한선으로 하는데, 북한지역은 함경북도 일부만 해당되고 있다. 이 제안은 미국측에 의해 그대로 수락되었다. 이 작전구역의 적용 시기는 소련군이 참전하는 날에 발효하도록 되어 있었다. 소련은 포츠담 회담이 끝나고(8월 2일) 일주일만인 8월 9일 대일 군사작전에 돌입했다.(16)

한편, 소련측은 7월 26일 회의에서 미군과 소련군이 남북에서 조선반도를 각기 공략하자고 제안하였으며, 회의 종료 직전 북조선 전체를 포괄하는 지상군 침공 작전계획이 들어 있는 한 장의 지도를 미국측에 건넸다. 이 지도에는 소련의 지상군이 서울을 향하여 진격하는 화살표가 박혀 있었다. 이 지도는 6월 27일 스탈린 최고총사령관이 승인한 극동작전계획 제2호(말리노프스키의 작전계획 2단계와 합치)에 있던 지도와 일치했다.

미국측은 소련의 이 같은 작전지도를 보고 크게 놀랐다. 마샬 총장은 헐 작전국장과 린컨 전략단장과 회동, 조선에 미군을 진군시키는 작전안을 숙의하였고, 그때 북방 한계선을 서울에서 상당히 떨어진 북쪽에(아마도 평원선) 설정하자는 복안을 냈다. 이 복안이 한반도를 양분하는 분할선을 그어보려는 구체적인 첫 구상이었지만 당시에 38선을 분명하게 획정하지는 않았다.(17)

소련의 작전계획에 자극을 받은 미국은 이후 기존의 대일 전략을 대폭 수정하여 조선(부산), 중국의 동북방 연안(진황도와 체후[芝罘] 등 전략거점의 점거작전계획, 즉 암호명 ‘VICTORY 357’)을 7월 26일자로 급히 현지 사령관들에게 타전했다. 그러나 미국의 원폭 성공 사실을 모르고 있던 맥아더 사령관은 이에 대해 크게 반발했다. 그는 일본 본토에 대한 직접 침공 작전계획을 언급하면서 해·공군의 봉쇄전략을 통박했다. 그의 강경한 주장으로 미군의 한반도를 포함한 대륙진출은 좌절되었다. 이는 어찌 보면 한반도 분할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18)

▲ <지도> 소련군의 대일작전 지도. 북조선 작전에서 화살 끝이 서울을 향하고 있다.

중국 대륙에 대한 미군의 대일 전략이 어려워지자 미국의 합동전쟁기획위원회(JWPC)는 7월 30일 다시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할하는 군사작전의 7월 10일자 복안을 재차 건의했다. 이는 한반도에서 미군이 남부조선을 점령하고, 소련군이 참전시 북부조선을 점령할 것이라고 남북한 분할점령안을 다시 명시한 것이다. 합동전쟁기획위원회(JWPC)는 한반도 지역에 소련군이 진입해 올 것은 거의 확실하며 한반도의 점령은 궁극적으로 4개국에 의해 이뤄질 것으로 예상했다. 소련군이 전 조선을 석권하지 않을 경우, 미군에 의한 조기 진입을 계획하여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소련과 중국, 미국도 특별한 이해관계가 있는 조선에 진군할 우선순위로 1)부산-진해지구, 2)서울-인천지구, 3)청진-나진지구 순으로 되어 있었다. 작전국은 이 보고서를 일본의 항복이 절박한 시기에 때맞추어 작성한 훌륭한 연구라고 높이 평가했다.(19)

일제의 조기 항복과 미·소의 분할 점령

일제의 패망이 임박해지면서 미·소의 한반도 주변에 대한 정책도 점차 구체화되어 갔다. 미국의 경우 한반도에 대한 4개국 공동신탁통치와 공동점령·공동관리가 기본방향이었으나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 때문에 한반도에 대한 분할 점령 쪽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애초의 계획대로 일본이 본토 사수작전을 펴고 이에 대응하여 미국이 일본 본토 점령작전에 돌입했다면 미국은 분명 한반도에 대한 군사적 여력이 없었던 터여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었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일본이 조기에 항복을 선언하고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일본의 천황제 존속을 사실상 인정받음으로써 한반도 상황이 최악의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소련과 구체적인 협약을 맺지 못한 미국은 한반도의 분할 점령을 소련에 제안하였고, 일본(사할린 등)과 만주(만주철도, 뤼순항과 다롄항)에 대한 이권에 더 큰 관심을 가졌던 소련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음으로써 38선을 경계로 한 한반도 분할 점령이 시행되었다.

일본의 조기 항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1945년 8월 초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와 소련의 대일전 참전이었다.

미국은 1939년 8월부터 비밀리에 ‘맨해튼 계획’으로 불린 핵무기(원자폭탄) 개발 계획을 시작했다. 미국이 뉴멕시코 북쪽 사막에서 원자폭탄 폭발 시험에 성공한 것은 포츠담 회담 시작 바로 전날인 1945년 7월 16일이었다.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영국 수상 처칠과 함께 일본을 상대로 이 무기를 사용할 방침을 세운 다음, 7월 25일 스탈린에게 핵무기 개발을 스탈린에게 알렸다. 스탈린은 그 소식을 듣고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하지만 소련 해체 후 KGB 비밀문서를 통해 이미 스탈린이 미국의 핵무기 성공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게 밝혀졌다. 스탈린이 쇼를 한 셈이었던 것이다. 이후 소련은 스파이 활동을 통해 미국 핵기술의 핵심을 빼내서 4년 뒤인 1949년 8월 29일 원폭실험에 성공했다. 이후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초강대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적인 냉전 체제가 ‘공포의 균형’ 속에서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20)

1945년 8월 6일과 9일 두 차례에 걸쳐 미국의 일본에 대한 원자탄 공격이 있었는데 그 충격은 실로 엄청났다. 일찍이 그 어떤 무기도 보여주지 못한 파괴력과 살상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도저히 인간을 상대로 쓸 수 없는, 결코 사용해서는 안 되는 무기의 위력이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이 떨어지자 도시 전체가 파괴되었고 수십 만 명이 한꺼번에 사망했다. 미국 원자탄의 위력은 어마어마했으나 이것만으로 일본이 항복한 것은 아니었다. 소련군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미국은 더 오랫동안 피를 흘려야 했을 것이다.(21)

1945년 8월 8일 소련은 포츠담 회담에서 약속한대로 대일 선전포고를 했다. 1941년 4월 13일 일본과 소련은 중립 조약을 체결했다. 두 나라는 제3국과 적대관계에 들어설 때 중립을 지키며, 상대국의 영토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소련은 독일의 침공을 눈앞에 두고 있었고, 일본은 미국과 태평양 전쟁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독일이 항복한 마당에 이 조약이 유지될 이유가 없었다. 8월 9일부터 소련군은 전장 4천㎞가 넘는 전선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한 전면공격을 개시했다. 대일공격에 참여한 소련군은 자바이칼 전선군, 제1·2 극동전선군, 태평양 함대, 아무르강 적기 소함대로 이뤄졌다. 이들 군대는 A. N. 바실리옙스키가 이끄는 소련 극동군 총사령부의 지휘를 받았다. 소련군 총사령부는 극동에서 대일전에 대비해 본격적인 전력 증강을 시작한 1945년 5월 극동군 총사령부를 설치했다.(22)

▲ 2차 대전 종전 직전 미국은 일본에 대한 연합국의 분할 점령안을 마련했으나 전쟁이 끝난 뒤 이 계획안을 폐기했다.

소련군이 내몽골과 만주, 한반도로 진격을 개시하자 최정예라고 자랑했던 70만의 일본 관동군은 추풍낙엽처럼 무너졌다. 태평양 전쟁과 함께 1943년 가을 이후 주력부대들이 남방 전선으로 이동하면서 만주의 관동군 전력은 매우 약화되었다. 소련군의 참전은 일본에게는 결정타가 되었다. 미국에 저항하며 본토 결전을 치르는 것도 엄청난 손실이 예상되었으나 소련까지 가세한 공격에는 견딜 재간이 없었다. 전쟁이 길어지면 일본 본토가 소련군과 미군에 의해 분할 점령될 가능성이 높았다.

미 국무부 기밀문서에 따르면, 미 국무부는 주요 연합국들이 일본을 분할 점령하는 방안을 1945년 8월 13일자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비망록을 통해 제시했다. ‘종전 이후 일본 점령을 위한 국가별 무력구성’이란 제목의 이 문서는 2차 대전이 끝나고 민주세계와 공산세력이 대립하는 새로운 시대에 들어갈 것이란 예측 아래 기획되었다. 막대한 전비 부담에 고심하던 미국은 비용을 분담하고 연합국들에게 보은한다는 차원에서 일본 분할 방안을 추진했으나 종전 이후 이 방안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시행되지 않고 폐기되었다.

▲ 극동 소련군의 만주, 조선, 사할린, 쿠릴 열도 작전계획도

전문가들은 당초 일본 분할 점령안이 미 국무부 일각과 맥아더가 이끄는 연합군 최고사령부(GHQ: General Headquarters)에 의해 기획 입안되었으나 미국이 일본에 원폭을 투하해 승기를 잡은 이후 없었던 일로 폐기된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은 남태평양의 여러 섬과 필리핀 대만을 차례로 탈환하면서 막대한 병력과 전비를 쏟아 부었고 이에 부담을 느낀 나머지 일본 본토는 연합국들이 각각 점령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던 것이다. 분할 점령안은 미국이 간토지역과 오사카 간사이 지역을 점령하고, 소련은 홋카이도와 도쿄 북쪽 도호쿠 지방을, 영국은 규슈와 긴끼 지방을, 중국은 시코쿠를 각각 점령해 통치하도록 기획되었다.(23) 그러나 외상 요시다 시게루를 비롯한 일본정부의 주요 인사들이 맥아더 사령관에 적극적인 반대와 로비를 폈고, 영국도 소련과의 냉전을 염두에 두고 반대로 돌아서면서 폐기되었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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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기광서, 소련군의 북한 진주와 ‘부르주아민주주의’ 노선, 『통일문제연구』 20-1(조선대 통일문제연구소), 2005, 68쪽

2) 이재훈, 해방전후 소련 극동정책을 통해 본 소련의 한국인식과 대한정책, 사림 제20호(수선사학회, 2003), 46쪽

3) 기광서, 위의 글, 69쪽

4) 이재훈, 위의 글, 47쪽

5) 기광서, 위의 글, 70쪽 재인용

6) 김선호, 1945~1946년 북한의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과 혁명동력의 설정·배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92, 2017.9., 216〜217쪽

7) 기광서, 위의 글, 70〜71쪽

8) 김선호, 위의 글, 217쪽

9) 김기조, 「38선 획정의 국제적 요인: 한반도 분할 과정의 재조명(1941〜1945)」, 한국전쟁학회편, 『한국 현대사의 재조명』, 명인문화사, 2007, 84쪽

10) 김기조, 위의 글, 85〜86쪽

11) 김기조, 위의 글, 87〜89쪽

12) 김기조, 위의 글, 90〜91쪽

13) 김기조, 위의 글, 93〜94쪽

14) 김기조, 위의 글, 94쪽

15) 김기조, 위의 글, 98〜99쪽

16) 김기조, 위의 글, 100〜101쪽

17) 김기조, 위의 글, 103쪽

18) 김기조, 위의 글, 103〜104쪽

19) 김기조, 위의 글, 104〜105쪽

20) 김기협, 해방일기 [Re.2]1945. 8. 2./포츠담회담의 진짜 주인, 2017. 8. 1 페리스코프

(https://orunkim.tistory.com/1721?category=295693) 참조

21) 이완범, 『한국 해방 3년사 1945-1948』, 태학사, 2007, 38쪽

22) 기광서, “1940년대 전반 소련군 88독립보병여단 내 김일성 그룹의 동향”, 역사와현실 28, 1998년 6월, 275쪽

23) “Truman's Approval of ‘National Composition of Forces to Occupy Japan’(prepared by SWNCC), August 18, 1945”. 《Birth of the Constitution of Japan》. National Diet Library.

24) 정승욱, “‘일본 분할 점령방안’ 미 기밀문서 공개돼”, 세계일보, 201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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