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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째 이야기,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1)

기사승인 2020.09.12  00:5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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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해랑 연재소설> 노동자 신돌석씨의 하루 (43)

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연재를 다시 시작하며

58년 개띠 노동자 이야기를 다시 하려고 합니다. 잠시 쉰다는 것이 1년을 넘겨 버렸습니다. 그 동안 우리의 주인공 신돌석씨도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세상은 많이 변한 것 같은데 어찌 보면 완강하게 버티며 변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변한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그보다도 변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소소한 일상을 통해 그려 보고자 합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응원과 질책을 부탁드립니다. / 필자

 

   
▲ [삽화-백소(白笑)]

오랜만에 보는 긴 장마다. 신돌석씨가 어린 시절에는 거의 항상 장마가 한 달 가까이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언제부턴가 장마가 흐지부지하다가 사라지는 해도 있었다. 그런데 올해는 장마가 꽤 길게 계속되고 있다. 기상 이변이 나타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코로나19 때문에 비행기가 다니는 게 줄어들면서 하늘이 청정해지니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것이든 장마 때 비가 오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그 정도가 너무 심한 것도 괴로운 일이다.

긴 장마 끝인지 아니면 아직 계속되어야 하는데 소강상태인지 아무튼 오늘은 중부지방이 근래에 보기 드물게 맑게 갰다. 하지만 아직도 남부지방에는 비가 계속 내린다고 한다. 저녁에는 그 비구름이 중부지방으로 올라온단다. 요즘은 이런 예보가 거의 들어맞는데 예보에 따르면 신돌석씨는 비 오는 곳을 찾아 내려갔다가 장마전선 따라 올라오는 셈이다. 오늘 남부지방으로 갈 일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 가기로 한 곳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소가 있는 봉하마을이다. 언제부턴가 형이 봉하마을에 가야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였다. 벌써 몇 년 된 이야기다. 형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인데도 신돌석씨가 알기에 선거에서 그를 찍었다. 그리고는 그의 재임 후반기부터 그를 안 좋게 이야기하더니 퇴임 후 검찰 조사를 받을 때는 신랄하게 비난을 했다. 그리고는 그가 세상을 뜬 뒤 한동안 말이 없다가 다시 얼마 전부터는 그에게 정말 미안하다는 말을 종종 하곤 하였다.

형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대신 가장 노릇을 했던 사람이다. 특별히 뛰어난 능력을 가졌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어도, 가족을 위해 젊은 날에는 두 동생을 위해, 30대 이후에는 자식들을 위해 헌신한다는 인생관이 확고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인생관으로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살아왔다. 형을 생각하면 항상 존경심과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이 신돌석씨의 진심 어린 마음이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형이 오락가락하는 것을 많이 봤다. 특히 정치적인 문제에서 그랬다. 어찌 보면 우리 사회에서 5-60년대 태어난 사람들의 숙명인지도 몰랐다.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까지 군사독재의 주입식 교육을 받고, 그것이 진실인 줄 알고 살았는데, 청장년 시절에 거대한 사회 변화의 풍랑 속에 내맡겨져 살아가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모순된 언행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형이 봉하마을에 가서 노대통령 묘소 앞에서 사죄의 말이라도 해야겠다는 말을 술만 마시면 입버릇처럼 하기에 신돌석씨가 함께 가자고 이야기해서 오늘로 날을 잡은 것이었다. 신돌석씨 생각으로는 형이 진심으로 가고 싶지만 선뜻 나설 엄두가 안 나서 망설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자신이 동행하여 가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야 형도 자신도 마음의 짐을 덜 것만 같았다.

형도 형이지만 신돌석씨도 역시 봉하마을에 한번 가보고 싶었다. 신돌석씨는 오히려 형과 달리 한 번도 노무현을 찍어본 적이 없었다. 그가 국회의원이나 시장에 나올 때는 지역구가 아니었고, 대통령에 나왔을 때는 권영길을 찍었다. 신돌석씨가 그 당시 생각한 바로는 그는 어쨌든 보수야당을 대표해서 출마한 사람이었고, 노동자계급은 진보정당 후보를 찍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신돌석씨는 노무현을 남달리 생각하는 점이 많았다. 그를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억들이 많이 떠올랐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신돌석씨를 많이 헷갈리게 만들었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그가 시대의 변화에 온몸을 던진 사람임에 틀림없다는 것이고, 우리가 존경을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훌륭한 사람으로 인정해야 하는 것은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신돌석씨도 형 핑계로 봉하마을에 가서 그런 점들을 한번 정리해 보고 싶었다.

   
▲ [삽화-백소(白笑)]

서울역에서 형을 만나 ktx를 타고 진영으로 향했다. 서울역 발 창원행 열차를 타고, 도중에 진영에서 내리는 것이었다. 신돌석씨는 창원은 가본 적 있어도 진영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다만 소설 ‘어둠의 혼’에서 진영 장터가 나왔다는 기억이 났다. 신돌석씨는 노동운동 하기 전까지는 시나 소설 근처에도 안 갔던 사람인데, 그 뒤 이것저것 추천을 받을 때마다 읽었는데 김원일의 ‘어둠의 혼’도 그 중 하나로 기억에 남는 작품이었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열차 안은 자리가 거의 다 찼다. 코로나19의 대유행 이후로 몇 번 ktx 타고 지방에 가본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열차 안은 많이 비었었다. 그런데 평일이 아닌 토요일이라서 그런지 사람이 제법 많았다. 9시 5분에 서울을 출발하여 진영을 향하는 열차를 탔다. 이 열차 노선은 진주까지 가는데 이 열차는 창원이 종착역이었다. 진영보다 하나 전인 밀양에서 부산 가는 열차와 갈라지게 되어 있었다.

서울역에서 형을 만나 함께 열차에 올랐다. 열차 타러 들어가는 2층보다 한층 더 올라간 멤버십라운지 앞에 형이 있다고 해서 그리로 올라갔다. 형은 철도를 많이 이용해서 멤버십이 있는데 신돌석씨가 어떤지 몰라서 앞에서 기다린다고 했다. 신돌석씨는 그런 곳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내려와서 커피를 사고 화장실을 다녀오니 열차 시간에 얼추 가깝게 되었다. 정말 오랜만에 둘이 여행을 떠나는 셈이었다. 언제 갔는지도 잘 생각이 안 났다.

열차가 출발하자마자 차내 방송이 나왔다. 마스크를 꼭 착용해 달라면서 턱에 걸치거나 하지 말고 코와 입을 꼭 가려 달라고 하였다. 대화나 통화도 자제해 주고 꼭 해야 하면 밖에 나가서 해 달라고 하였다. 형은 마스크를 잘 쓰려고 하지 않았다. 써도 턱에 걸치다가 마지못해 쓰곤 하였다. 신돌석씨는 처음에 나이가 들어서 부리는 객기 정도로 생각했다. 몇 번 이야기해도 잘 고치지 않더니 어느 날은 왜 그런지를 이야기했다.

금형 기술자인 형은 금형 제작 과정에서 용접을 해야 했다. 그때마다 마스크를 쓰고 하는데 정말 답답하다고 하였다. 쇳물은 펄펄 끓지 불꽃은 튀지, 그런 가운데 숨이 막히는 마스크를 쓰고 있으면 벗어 버리고 튀어 나가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래서 조금만 숨이 막혀도 가슴이 답답해 오는 버릇이 생겼는데 병이라면 병이었다. 그래서 미세먼지가 한창일 때도 마스크를 안 썼는데 요즘은 나라에서 강제하니 할 수 없이 쓴다는 것이었다.

방송이 나오자 형이 마스크를 썼다. 조금 있다가 역무원이 지나갔다. 그러자 다시 턱 밑으로 내렸다. 형은 ktx를 자주 타서 언제쯤 역무원이 지나가는지를 잘 알았다. 다니던 회사를 퇴직한 뒤 형은 지방 여기저기에 금형이나 용접 등을 하는 곳을 찾아가서 일을 하였다. 공고를 나온 형은 평생 쇠를 다루는 일을 했다. 그 중 최고 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금형 기술을 익힌 뒤 평생을 그 직업으로 먹고 살았다.

형이 쇠를 다루는 일에서 손을 뗀 몇 년이 있었다. 30대 초반쯤에 중동에 몇 년 다녀왔을 때였다. 그때 형은 금형 기술로 최고는 아니었어도 꽤 실력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았었다. 그런데도 그 일과는 관련이 없는 비계 등을 익혀서 중동으로 갔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 수입이 금형 기술로 받는 수입의 배가 넘었기 때문이었다. 신돌석씨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프레스 공장에 오래 다녀서 신돌석씨는 안다. 금형 기술자들이 얼마나 각고의 노력 끝에 어려운 기술을 익힌 사람인지 아는 것이다.

가방공장에 다녀 봐서 미싱사도 얼마나 뛰어난 기술자인지 안다. 지금 봉제공장에는 5-60대 여자들만 있다고 한다. 그만큼 대접을 못 받으니까 이제는 봉제 기술을 배우려고 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자기 몸을 갈아 넣듯이 고생을 해도 그만큼 돌아오는 것이 없는데 누가 배우겠는가? 물론 기계가 발달하면서 사양산업으로 들어간 점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있을 때까지는 그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그러므로 노동력 시장은 수요 공급으로만 가격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노동과 자본의 교섭력에 의해 좌우된다고 할까?

형이 마스크를 답답해하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가 된 뒤 강요하지는 않았다. 마스크를 생각하자 또 한 사람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신돌석씨보다 열 살 가까이 많은 분인데 사람들 모이는 곳에 마스크를 안 쓰고 나타나곤 하였다. 언제 한 번은 뒤풀이 자리에서 30대 친구가 왜 마스크를 쓰지 않으시냐고 따지듯이 말했다. 그러다가 누구 한 사람이라도 확진자가 되면 책임지실 거냐고 하였다. 젊은 사람다운 당돌한 제기였다. 그러자 그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슬며시 자리를 떴다.

그분이 자리를 뜨고 얼마 뒤 다른 선배 하나가 젊은 사람에게 화를 냈다. 너 고문당해 본 적 있어? 저 형이 왜 마스크 쓰는 걸 꺼리는지 알기나 해? 이야긴즉 이랬다. 마스크를 쓸 때마다 물고문 당하던 일이 떠오르면서 숨이 가쁘게 된다는 것이었다. 신돌석씨도 상대적으로 가벼운 정도라고 해도 경험이 있다. 얼굴에 수건이나 거즈 등을 씌우고 물을 부으면서 취조를 했다. 어느 때는 고춧가루를 부었다. 그것을 피하는 길은 묻는 대로 답하거나 아니면 거부하다 끝내 기절하는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한 번은 그냥 물을 들이마셨더니 좀 편했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사실 약과였다. 욕조가 있는 곳에서는 두세 놈이 뒤에서 잡고 한 놈이 머리를 계속 욕조에 박는다. 정말 숨이 막혀서 미칠 지경이다. 그러고 나오면 목욕탕만 봐도 경기를 일으키게 된다. 그 이야기를 듣고 앉아 있던 사람들이 다 숙연해졌던 기억이 있다. 신돌석씨는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그 고문하던 놈들은 어디서 무얼 하며 살까 생각한다. 고문당한 사람들은 이렇게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데 고문한 놈들은 아마 손주 크는 것 보며 잘 먹고 잘살고 있으리라. 양심의 가책 따위는 애초부터 없는 놈들이니까.

   
▲ [삽화-백소(白笑)]

광명역을 지나자 날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충청도부터는 비가 내렸다. 일기예보가 맞는 모양이었다. 대전역에 열차가 멈췄을 때 가락국수를 먹던 추억이 생각났다. 형에게 이야기하자 올라오는 길에 가락국수 파는 곳 있으면 먹자고 하였다. 열차 안에 걸려 있는 텔레비전 수상기에서 뉴스를 보여줬다. 소리는 죽이고 자막으로 나왔다. 집중호우에 대한 안내문자가 나왔다. 날을 잘못 잡은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생겼다. 열차가 지나는 곳에서 보이는 하천마다 물이 많이 불어 있었다. 어떤 곳은 제방을 넘어갈 듯 넘실거렸다.

부산 가는 노선과 진주 가는 노선이 갈라지는 밀양쯤에서 비는 일단 그쳤다. 이대로만 그쳐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형이 밀양역을 지나면서 말했다. 밀양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어냐고 하였다. 신돌석씨는 밀양 하면 김원봉이 떠오른다. 그리고 인혁당에 관련되었던 선생님 한 분이 떠오르고, 장기수 선생님도 떠오른다. 하지만 형한테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어머니가 밀양 박씨라서 그게 떠오른다고 하였다.

형이 웃으면서 전도연이 주연한 영화가 떠오른단다. 사람마다 어떤 것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것이 다른 법이라고 하면서, 요즘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속이 터질 때가 많다고 한다. 특히 경상도 쪽으로 일하러 가면 노무현 이야기만 나와도 나라 망친 사람이라고 한다나.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형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자기 같은 사람 때문에 문제라고 하였다. 신돌석씨는 형이야 열심히 올바르게 살아오신 분인데 그렇게 말씀하시지 말라고 했더니 형은 고개만 가로저으며 창 밖을 봤다.

진영역에서 내리니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역 앞에 있는 관광안내판을 보았다. 봉하마을이 가깝게 그려져 있었다. 형이 한 30분쯤 걸리지 않겠냐고 하였다. 신돌석씨도 그것보다는 덜 걸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걸어가자고 하였다. 그런데 택시들이 여느 역과 마찬가지로 줄지어 있었다. 형이 혹시 모르니 택시 기사들에게 물어보자고 하였다. 혹시라도 잘 모르고 갔다가 고생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택시 기사에게 물으니 걸어서 갈 거리가 아니라고 한다. 손님을 태우려고 하는 말 같았지만 그래도 믿지 않고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서 택시를 탔다. 택시를 타고 난 뒤 타기를 잘 했다고 생각했다. 걸어갈 거리는 도저히 아니었다. 10여 분이 걸렸는데 시간은 고사하고 그냥 걸어서 제대로 찾았을지도 의문이었다. 택시가 봉하마을 입구에 내렸을 때 비는 다시 그쳤다. 여기는 비가 오락가락한다고 보아야 할 듯하였다. 마을 입구에 여기저기 꽃을 파는 곳이 있었다. 거기서 국화꽃을 사서 들고 올라갔다.

똑바로 올라가니 바로 눈앞에 우뚝 솟은 산이 보였다. 오른쪽이 사자바위라고 하였고, 왼쪽이 비운이 서린 부엉이바위였다. 왼쪽에 있는 생가와 그 뒤 대통령의 집을 바라보며 ‘만남의 광장’이 있었다. 이곳에서 퇴임 뒤에 사람들이 와서 ‘대통령님 나와주세요’라고 외치면 밀짚모자를 쓴 노무현 대통령이 나와서 시민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 장면들을 포함해서 노무현 대통령과 관계되는 영상물을 틀어 놓은 야외영상관이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상록수’를 부르던 장면들이 나오고 있었다.

묘역 가는 길을 똑바로 걸어가자 입구에 수반이라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 추모의 글들이 셀 수 없이 많이 써 있었다. 18,000여 명이 참여하여 글을 썼다는 안내문이 있었다. 이어서 헌화대가 있어서 마을 입구에서 사온 국화꽃을 놓고 참배를 했다. 묘소라고 할 수 있는 너럭바위는 조금 더 뒤에 있었다. ‘아주 작은 비석만 남기라’는 대통령의 유언에 따라 남방식 고인돌 형태의 낮은 너럭바위만 봉분처럼 올렸다고 한다. 거기서 사자바위와 부엉이바위를 올려보았다. 형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당신을 미워했던 사람이 참회하러 여기에 왔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다시는 저 같은 사람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형이 입구로 나와 방명록에 이런 글을 기재하면서 울먹이듯 말했다. 신돌석씨도 덩달아 울적해지면서 눈물이 나왔다. 노무현 대통령을 두고 형과 논쟁을 벌였던 두 번의 기억이 떠올랐다. 한 번은 2002년 대통령 선거 때였다. 또 한 번은 2008년 대통령직에서 퇴임한 뒤 검찰 조사를 받을 때였다. 자라면서 형과 논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신돌석씨 집에서 형은 절대적인 권위였고, 감히 반론을 제기하거나 할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되었다. 하지만 이때만큼은 달랐다.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정해랑 jhr1376@nave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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