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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일곱째 이야기, 우리 동네 아는 형님(3)

기사승인 2020.08.15  01:4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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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해랑 연재소설> 노동자 신돌석씨의 하루 (39)

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연재를 다시 시작하며

58년 개띠 노동자 이야기를 다시 하려고 합니다. 잠시 쉰다는 것이 1년을 넘겨 버렸습니다. 그 동안 우리의 주인공 신돌석씨도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세상은 많이 변한 것 같은데 어찌 보면 완강하게 버티며 변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변한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그보다도 변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소소한 일상을 통해 그려 보고자 합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응원과 질책을 부탁드립니다. / 필자

 

   
▲ [삽화-백소(白笑)]

가방공장에서 나온 뒤 신돌석씨는 경수형과 급격히 가까워졌다. 낮에는 장기 두며 막걸리 갖다 놓고 마시곤 했다. 저녁에는 구종점이나 종합시장 부근으로 나가서 술을 마시기도 했다. 때로는 경수형이 찐하게 사기도 했다. 성남에서는 중동 텍사스라고 하는 곳이 유명했다. 여자 나오는 술집이었다. 스무 살 애숭이지만 사실 신돌석씨는 친구들과 신촌, 공덕동 등의 방석집에 많이 다녀봤다. 열 살도 더 차이 나는 사람과 그런 곳에 가는 것이 좀 거시기했지만 경수형은 아주 자연스럽게 놀았다.

얼마간 놀다가 다시 취직을 생각했다. 이번에는 종합운동장 부근에 있는 공업사에 취직했다. 당시에 성남에 공단이 셋씩이나 있는데도 공단 밖에서 직장을 찾는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아마도 노동자로 계속 살아간다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라고 뒤에 생각해 보았다. 그런 점에서 신돌석씨는 확실히 형과 달랐다. 형은 중학교 때부터 신문을 팔고, 아이스케키 장사를 하고, 무거운 물건을 나르는 일을 서울역 등에서 하면서 돈을 벌려고 했다. 그러면서 기술을 익히려고 했고, 결국 금형 기술자가 되었다.

형은 자신이 노동자라는 것을 안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로서 계속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온 신돌석씨는 애당초 생각이 달랐다. 비록 평준화된 고등학교였고, 공고를 지원했다 떨어져서 간 곳이었지만, 대학을 가기 위해 공부하는 곳이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겠지만 그때만 해도 대학에 가는 사람은 매우 적었다. 신돌석씨가 나온 고등학교에서도 정확히는 몰라도 절반에 못 미치게 대학에 들어갔다. 하지만 대학에 못 가는 사람도 자신이 대학에 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학교를 다녔고, 그 뒤에도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런 것이 계급성인 모양이다. 형은 계급성이 있었고, 신돌석씨는 없었다. 중학교 때쯤인 것 같다. 텔레비전을 보는데 외할머니가 다니던 교회의 목사가 나왔다. 꽤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가 학생들과 대담을 하면서 북한이 쳐들어오면 여러분들은 다 공장에 다녀야 한다는 말을 하였다. 방송에 나온 학생들은 아무런 문제를 못 느꼈고, 신돌석씨 역시 그런가 보다 하고 보았다. 옆에서 딴 일을 하던 형이 화를 버럭 내면서 당장 끄라고 하였다.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당시 사람들 중 방귀깨나 뀌는 사람들에게 공장은 뭔가 부족한 사람이 가는 곳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형의 계급성은 진정한 계급성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즉자적인 계급성, 한계에 갇힌 계급성이었다. 자신이 노동자임을 자각하고, 노동자로서 삶을 살아가겠다는 것까지는 되지만, 노동자계급 전체의 이익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때로는 그 한계를 돌파하려는 사람들을 오히려 적대시하기까지 하는 의식이었다. 그것은 정치적인 문제에서는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형은 특별히 수구적이지는 않아도 당시 야당이나 데모하는 사람들을 배불러서 저런다고 생각하는 의식 수준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경수형을 봐도 그렇고, 삼돌이를 봐도 그렇지만, 계급성이라는 것도 고정불변하지는 않았다. 신돌석씨 역시 그렇다. 신돌석씨는 노동운동을 하면서 많은 인텔리들을 보았다. 그들 중 상당수는 낭만적인 생각에서 노동자에게 접근했다가 이후 본래 자기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렇다고 그들이 노동자를 적대시하거나 멀리하는 것은 아니었다. 노동자를 지원하고, 후원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하기도 하였다. 물론 완전히 수구세력으로 변해 버린 사람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부분은 노동자에 우호적이었다.

그런 가운데 다시 노동자가 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신돌석씨가 아는 사람 중에는 노동운동을 하려고 공장에 들어왔다가 나간 뒤 중산층 정도 생활을 하다가 다시 노동자가 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처음에는 자신이 낮은 곳으로 내려가 노동자가 된 것이지만, 이번에는 노동자로 몰락했다고나 할까? 어떤 사람은 박사까지 하고도 목수가 되었고, 학원을 경영하다가 용접공이 다시 되었고, 식당을 경영하다 요양보호사가 된 사람도 있었다. 어쩌면 그들이 그렇게 간 것도 젊은 날에 노동운동을 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이들에게 노동은 천시해야 할 대상이 아니었고, 자기 삶에 친숙한 무엇이었으리라.

신돌석씨가 찾아간 공업사는 공단 밖에 있었지만 그런대로 규모가 갖추어진 곳이었다. 군수품을 하청 받아 만들었다. 1층에 사무실, 식당, 금형실, 프레스 작업장이 있었고, 2층에 에끼셍 작업장과 기숙사가 있었다. 에끼셍은 말하자면 손으로 돌리는 수동 프레스였다. 프레스로 굳이 할 필요가 없는 것들을 이것으로 돌려서 구부리고, 접고, 자르고 하였다. 신돌석씨는 사무실에서 간단한 수속을 마친 뒤 에끼셍 작업장으로 안내되었다. 주로 아줌마나 10대 청소년들이었다. 초보자라고 하니 이곳으로 보내진 것이었다.

이 공장에서도 기숙사에 들어갔다. 형은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버스를 두 번이나 타야 하는 불편함을 이야기하자 그러라고 하였다. 여기는 야근은 그리 많지 않았다. 1주일에 한 번은 꼭 놀았다. 철야 작업을 한 적이 한 번 있었지만, 저녁 시간은 보통 자유로웠다. 기숙사는 11시면 통제했다. 한 번은 11시 너머까지 술을 마시다 기숙사 담을 타고 넘어간 적이 있었다. 사감을 겸하는 금형 기사에게 잡혀서 기합을 받았다. 그 뒤부터 11시가 넘으면 집으로 가거나 근처에 사는 사람들 집으로 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자고 있는데 갑자기 시끄러웠다. 기숙사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신돌석씨더러 나오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어두워서 잘 몰라봤는데 나가서 보니 이 공장에 다니다가 군대에 갔다. 얼마 전에 제대하고 돌아왔다는 사람이었다. 한 방에 한 사람씩을 불러내서 세워 놓고는 배를 한 대씩 가격했다. 옆에는 몽둥이를 들고 서 있는 사람이 둘 있었다. 그러면서 일장 연설을 했는데 각 방에 둘째들을 불러냈다는 것이다. 기숙사 기강이 엉망인데 잘하라는 것이었다.

한 대 더 치려고 할 때 신돌석씨가 팔을 잡았다. 그가 놀라더니 뭐라고 소리쳤다. 옆에서 몽둥이를 잡고 있는 자가 몽둥이를 휘둘렀다. 하지만 빗나갔다. 신돌석씨가 소리를 질렀다.

“야 새끼들아, 니들이 뭔데 사람을 패? 그래 패 봐. 내일 아침에 함께 경찰서 가자.”

몽둥이를 든 자가 다시 달려들었지만 처음에 일장 연설을 하던 최고참인 듯한 자가 말렸다. 그리고는 신돌석씨를 으슥한 곳으로 불렀다. 기숙사가 너무 엉망이라서 군기를 잡으려고 하니까 이해해 주라고 사정조로 말했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구타는 없는 것이다. 신돌석씨는 이때 이미 폭력을 쓰는 자는 강하게 저항하는 사람한테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후 이들은 신돌석씨와 형 동생 하거나, 친구로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일 끝나면 함께 술 마시러 가고, 쉬는 날에는 곤지암이나 경안 등으로 놀러 가기도 하였다.

   
▲ [삽화-백소(白笑)]

하지만 이 공장도 석 달을 넘기지 못했다. 한 달이 지난 뒤 신돌석씨는 프레스 작업장으로 내려갔다. 어두컴컴한 데서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니 은근히 겁이 났다. 공장이라고는 가방공장밖에 다녀 보지 못해서 거기는 왠지 부담이 되었다. 하지만 일은 단순했다. 그냥 물건을 대고 페달만 밟으면 되는 것이었다. 문제는 물건을 위치에 놓을 때 절대로 페달을 밟으면 안 되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졸리거나 아니면 딴생각을 하다가 사고가 나곤 하였다. 공장장이나 반장이 그 점을 계속 강조하였다.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사고가 났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젊은 사람 하나가 그만 손가락을 잘린 것이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피가 튀었고, 손가락이 바닥에서 뒹굴었다. 그의 비명소리를 듣고 반장과 공장장이 달려왔다. 고통스러워서 팔짝팔짝 뛰는 그를 두고 다들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반장과 공장장은 욕부터 했다.

“야 씨팔놈아, 정신을 어따 팔아먹고 손가락을 날려?”

순간 신돌석씨는 욱하고 성질이 났다.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을 두고 저게 할 말인가? 신돌석씨는 한마디 하고 싶은 걸 참느라 애를 먹었다. 그러는 너는 정신을 팔아먹고 손가락 잘렸냐고 하고 싶었다. 반장도 공장장도 사장까지도 이 공장에서 손가락이 멀쩡한 사람이 없었다. 신돌석씨의 형도 몇 년 전에 손가락이 잘리는 재해를 당해서 신돌석씨에게는 그렇게 새로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참았다. 괜히 나서서 수습하기 어려운 상황이 오기 전에 참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였다.

그는 병원으로 옮겨졌고, 얼마 후 퇴사하였다. 그날 저녁에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과 술을 마시며 신돌석씨가 그 이야기를 해봤다. 그 중에는 손가락 세 개가 날아간 사람도 있었다. 사람이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는데 욕부터 해댈 수가 있냐는 것이 신돌석씨의 주장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말에 아무도 동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손가락이 없는 사람조차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뭐 그런 일로 흥분하냐고 신돌석씨에게 타박을 하였다. 황당하여서 더 이상 술을 마실 마음이 나지 않았다.

신돌석씨는 이 공장에 더 다닌다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의미 따지고 다닌 것은 아니었지만 의리라는 것을 신조로 알고 살아온 신돌석씨에게 이들은 너무 자기만 아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생각은 뒤에 많이 바뀌었다. 그때의 관리자들도 동료 노동자들도 어쩔 수 없는 그런 환경 속에서 나날이 심성이 그리 되어버린 것이다. 문제는 그런 사회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런 생각으로 그만둔 뒤 한참 동안 신돌석씨는 백수 생활을 하였다.

백수로 지내다가 서울 성수동까지 가서 취직을 하기도 했다. 시곗줄을 만드는 공장에서 바레루라는 기계를 돌렸다. 시곗줄을 광나게 하는 기계였다. 다시 성남으로 들어와서 공 만드는 하청업체에 다녔다. 때로는 건축 현장에 가기도 했다. 친구들과 포장마차도 해보았다. 그러면서 77년, 78년을 보내고 신검을 받아 현역입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입영 날짜를 얼마 앞두고 그만 공사장에서 떨어져 다쳤다. 자연스럽게 입영은 연기되었다. 다리가 골절되어서 좀처럼 낫지 않았다. 지루한 날들을 보낼 때 경수형과 김반장은 좋은 벗이었다.

1979년 10월 중순이었다. 성남 비행장에서 엄청나게 많은 비행기가 남쪽으로 날아갔다. 특전사 하사관 출신인 김반장은 공수부대를 실은 비행기가 뜨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공수부대가 왜 저렇게 많이 남쪽으로 날아갈까? 그것을 알게 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부산과 마산에서 엄청난 시민항쟁이 벌어졌고, 그 얼마 후 대통령 유고라는 신문기사와 함께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을 맞고 죽었다고 하였다. 어리둥절한 채 만난 세 사람과 회사원인 또 한 사람은 저녁 시간에 바구니 공장에 모여 막걸리와 소주를 건네면서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신돌석씨는 사실 그때 그러려니 하는 것밖에 별 생각이 없었다. 마음 한구석이 무너지는 듯한 이상한 느낌이 들기는 했다. 그렇다고 무엇을 할 수도 없었다. 그 점에서는 경수형, 김반장, 회사원 아저씨 모두 마찬가지인 듯한데 정도가 조금씩 다른 것 같았다. 회사원 아저씨는 뭔가 나라가 민주화될 것 같다는 느낌을 말했다. 물론 아주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이었다. 경수형과 김반장은 북한이 쳐내려 올 것을 우려하는 말을 하였다. 그런데 왠지 그럴 거라고 믿는 것은 아닌 듯했다.

한 달 조금 더 지난 어느 날 이후 의견들이 갈리기 시작했다. 김반장은 전두환 사령관이 제대로 해낼 거라고 했다. 역시 특전사 출신다웠다. 경수형은 그 대머리가 욕심 때문에 망할 거라고 했다. 박정희와는 달리 전두환에게는 반감을 보인 것이었다. 회사원 아저씨는 전두환이 욕심을 부리면 나라가 큰일이라고 하였다. 12. 12군사반란이 일어난 뒤에 생각들이 갈라진 것이었다. 신돌석씨는 뭐가 뭔지 몰랐다. 공식 발표로는 정승화 참모총장이 김재규와 공모한 혐의가 있어서 체포했는데 저항이 심해서 군대가 동원되었다고 하였다.

세 사람 다 신돌석씨에게 하는 말은 네가 정말 운이 좋다는 것이었다. 다친 것은 안 됐지만 이럴 때 군대 안 간 것이 정말 다행이라는 이야기였다. 나라가 좀 안정된 뒤 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괜히 개죽음 당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개죽음까지는 아니더라도 신돌석씨 친구 중에는 그 당시 쿠데타군으로 동원되어서 어이없는 경험을 한 사람이 여럿 있었다. 신돌석씨가 보기에도 그런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은 해가 바뀌면서 더욱 굳어졌다. 광주에서 일어났다는 일은 정말 경악할 정도였다.

그해 여름이 지나고 신돌석씨는 군에 갔다. 군에 가기 전 날 경수형이 총각을 떼게 해준다고 중동 텍사스에 데리고 갔다. 김반장과 회사원 아저씨도 함께였다. 하지만 술에 잔뜩 취한 신돌석씨는 그냥 잠들어 버렸다. 신돌석씨는 술에 찌들어 사는 아버지를 두었지만, 아버지는 절대로 여자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고, 여자 있는 술집을 간다든가 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성희롱 같은 것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와 다정하게 지내는 것을 본 적은 없었지만 어머니를 항상 존중하는 것 같았다. 왜 그런지 정확히는 몰랐지만 그것은 아버지가 신돌석씨에게 남겨준 유산이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공단에 있는 공장에 취직한 뒤 신돌석씨의 일생은 급변하였다. 그리고 경수형을 잊어버렸다. 그러다가 한참 시간이 지난 뒤 김반장의 딸이 시집간다는 말을 형으로부터 들었다. 그것 때문에 경수형, 김반장, 회사원 아저씨를 모두 만났다. 이때는 이들이 이미 50이 넘은 나이들이었다. 피로연에서 식사를 하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김반장은 혼주이니 잠깐 왔다 간 정도였고, 이야기는 주로 경수형과 회사원 아저씨가 하였다. 신돌석씨와 형도 간간이 이야기를 보탰다.

   
 

회사원 아저씨는 다니던 회사에서 승진해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는 듯하였다. 성남에서 분당으로 이사를 했단다. 분당도 성남의 일부인데 분당 사는 사람은 꼭 성남과는 다른 데 산다고 말하곤 하였다. 1987년 6월 항쟁 때 신세계 백화점 앞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워낙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기 때문에 서로 그러려니 하고 씩 웃고 악수만 하고 헤어졌다. 신돌석씨 생각에 회사원 아저씨는 아마도 넥타이 부대로 참가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이전도 이후도 그 사람의 생각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었다.

경수형은 여전히 사는 게 어려운 모양이었다. 바구니 만드는 일은 그만두었다고 한다. 성남 어딘가에 살면서 동네 미장이 노릇을 하고 있다고 했다. 손재주 하나는 뛰어났던 사람이므로 무난히 할 수는 있으리라. 하지만 요즘 인테리어 사업자가 많은 판인데 동네 미장이가 제대로 돈을 벌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는 하였다. 그래도 유쾌한 성격은 여전하였다. 피로연장이 떠나갈 듯이 떠들어서 가끔 회사원 아저씨나 형이 눈총을 주고 제지를 하기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잔치 잔치 열렸네’라는 노래 구절을 부르며 흥겹게 하는 것이 하객의 도리라고 하였다.

잠깐 봤지만 김반장의 변화가 놀라웠다. 그는 12.12군사반란 때도 5.18광주민중항쟁 때도 전두환을 옹호하다가 경수형이나 회사원 아저씨한테 핀잔을 들었었다. 그런 그가 짧은 이야기 속에서도 ‘전두환 그 나쁜 새끼’라는 말을 두 번씩이나 했다. 자기들 만나는 특전사 하사관 동지회에서도 전두환에 대한 욕을 많이 한단다. 혼자 다 처먹고 나 몰라라 하는 놈이라는 것이다. 민심의 변화인지 아무튼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반장은 이전 그 동네에 나들가게를 내서 그 나름대로 살고 있다고 하였다.

그 뒤로 언제 또 봤는지 기억이 분명하지 않았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경수형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경수형은 1인 시위를 그만 둘 시간이 되었다고 하면서 오늘 자기가 회의가 있어서 술 한 잔 하기 어려우니 꼭 연락하라고 하면서 명함을 주었다. 신돌석씨도 이제 들어가 봐야 할 시간이라서 아쉽지만 그대로 작별하기로 했다. 경수형은 마지막으로 어디 사냐고 물었다. 자기는 성남 떠나서 다른 데로 갔다고 하였다. 신돌석씨도 그렇다고 하였다. 그래서 어디냐고 거의 동시에 물었다. 이럴 수가 있는가? 바로 까치울. 신돌석씨 동네였다. 자세히 이야기를 해보니 신돌석씨가 사는 골목에서 두 골목 떨어진 곳이었다.

사람이 인연이 있으려면 이렇게도 있는 모양이다. 스무 살 때 열 살 이상 위인 경수형을 만나서 함께 장기 두고 이바구하고 술 마시면서 보내다가 한참을 못 만나고 띄엄띄엄 봤는데, 오늘 우연히 마주치고 보니 사는 곳도 비슷했다. 무엇보다 신기한 것은 경수형의 생각이 많이 변해서 신돌석씨의 생각과 근접해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신돌석씨도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기도 했다. 이렇게 사람들의 생각이 변하는 한 우리에게 희망은 있는 것이리라.

“김반장 본 적 있어?”

“딸 결혼식 이후로는 전혀 본 적 없어요.”

“그 친구 태극기, 성조기 들고 광화문에 나와. 특전용사 어쩌구 하면서 말야. 나랑 여러 번 부딪혔어. 따로 술 한 잔 하면서 그 딴 데 나가지 말라고 했지.”

하긴 전두환에 대해 욕하는 것을 보기는 했지만 특전사 하사관 출신이니 성조기 부대에 갈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뭐라고 하던가요?”

“횡설수설하더라구. 딸 하나 있고, 그 밑에 아들 둘 있잖아. 자식 보기 창피해서도 인제 그만 나올까 한다고 하더라구. 손주도 꽤 컸는데 할아버지는 뭣 때문에 그런 데 나가세요 라고 하더래. 김강식이하구 넷이서 한 번 보자구. 김강식이는 잘 살아. 자식들도 꽤 잘 됐구.”

김강식은 회사원 아저씨를 말하는 것이었다. 말을 마치고 지하철 출입구로 걸어가는 경수형의 뒷모습을 보면서 제일 어린 신돌석씨가 한번 연락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삼돌이도 한번 꼭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역사는 진전하고 있다는 지금까지의 생각이 옳다고 속으로 되뇔 수 있는 하루였다. 

 

 

정해랑 jhr1376@nave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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