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3.1운동 이후 친이승만 기독교세력의 활동

1913년 박용만의 초청으로 하와이로 간 이승만은 한인기독학원과 한인기독교회를 중심으로 자신의 기반을 만들었고, 1915년 이후 박용만과 하와이 한인사회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했는데 1918년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에서 실권을 장악했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19년 1월부터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될 것이라는 소식을 접한 이승만은 1919년 2월 말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요청하는 내용의 청원서를 보냈다. 이후 3.1운동이 발발하고 국내와 상하이, 러시아령 연해주 등에서 다수의 임시정부가 조직되었는데 이승만은 여러 곳에서 ‘최고지도자’로 발표되었다. 이승만은 특히 국내에서 만들어진 한성정부에 집정관 총재로 이름이 올랐는데 이를 기회로 미국에서 ‘프레지던트(대통령)’ 명함을 갖고 활동하기 시작했다.(주1)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대통령’에 선출된 이승만은 행적과 행태로 인해 논란이 될 때마다 ‘한성정부 법통성’을 내세웠고 임시정부에 의해 탄핵되어 ‘구미위원부’ 해산명령을 받았을 때에도 한성정부 법통성을 근거로 임시정부에 정면 대항하였다. 그러니까 3.1운동 후 국내에서 조직된 한성정부는 이승만의 정치적 정당성의 핵심바탕이 되었던 것이다.(주2)

한성정부는 1919년 3.1운동 후 4월 초 이규갑, 홍면희, 김사국, 장붕 등 기독교 세력을 중심으로 안상덕, 신태련 등의 천도교측 인물들도 가담해 추진했고, 지도부로 집정관 총재 이승만, 국무총리총재 이동휘, 내무부총장 이동녕, 외무부총장 박용만, 재무부총장 이시영(차장 한남수), 교통부총장 문창범, 군무부총장 노백린, 법무부총장 신규식, 학무부총장 김규식, 노동국총판 안창호, 참모부총장 유동렬(차장 이세영) 등을 선출했다. 한성정부를 표면적으로 주도한 것은 기독교의 이규갑, 홍면희 등이었으나 그들의 배후에는 이상재, 박승봉, 신흥우, 오기선 등 이승만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기독교청년회(YMCA)의 리더들이 있었다.(주3)

특히 주목할 것은 기독교를 대표하는 인물로 이승만의 옥중 동지로 이승만에게 평생 가장 중요한 지원세력이 되었던 이상재와 신흥우의 움직임이었다. 일제의 최남선 신문조서에 따르면 이상재는 최남선이 3.1운동 참가를 권유했으나 독립은 찬성하지만 자신이 연로하고 방법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서명하지 않았다고 한다. 신흥우도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라는 압력을 피하며 3.1운동 당시 평양의 기흘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한성정부 발표 후 문건을 갖고 해외로 나갔다. 이상재는 3.1운동과 한성정부에 표면적으로 관여하지 않았지만 배후에서 한성정부 문건을 지휘하였고, 신흥우는 문건을 이승만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신흥우는 한성정부가 선포되기 하루 전인 4월 22일 미국에서 개최되는 ‘감리교 100주년 기념대회’ 참석을 명목으로 미국으로 출국했는데, 그 때 함께 출국한 선교사 벡(S. A. Beck)의 딸 인형에 ‘한성정부’ 문건을 숨겨서 갖고 나가 이승만에게 전달했던 것이다. 이들 기독교세력의 지원 덕분에 이승만은 3.1운동 후 임시정부 수립 과정에서 ‘임시대통령’이라는 직위를 차지하고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의 최고지도자로 활동할 수 있었다.(주4)

▲ 감옥 동지로 평생 이승만의 든든한 멘토가 되어준 이상재를 비롯한 신흥우 등 조선중앙YMCA 중심인물들.(사진=인터넷)

친이승만 기독교세력은 1921년 워싱턴 군축회의를 전후하여 본격적으로 국제적 교류 활동을 진행하는데 기독교청년회를 통로로 하여 이상재와 윤치호, 신흥우 등이 주도하여 이승만과 국내의 연계를 도모했다. 특히 신흥우는 1921〜25년에 거의 매년 미국을 왕래하며 이승만과 국내 기독교 세력의 연계 활동을 이끌었다. 신흥우은 YMCA 이사·총무라는 합법적 신분을 이용해 해외여행 마음대로 다니면서 이러한 일들을 했는데, 이승만의 입장에서 신흥우는 실질적인 국내의 연락책이었다.(주5) 이승만이 임시정부에서 최고 지도자로 추대되고 국내에 꾸준히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은 기독교세력과의 연계활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친이승만 기독교세력의 국내외 활동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것은 1923년 하와이 한인기독학원모국방문단이다. 1923년 6월 20일 민찬호·김영우·김노디가 인솔하는 하와이 한인기독학원 학생 20명(남 12, 여8)으로 모국방문단이 하와이 호놀룰루를 출발해 6월 30일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7월 2일 국내에 도착했다. 이들은 국내 각지를 순방한 후 9월 7일 하와이로 돌아갔는데 모금과 기부금을 대거 확보했는데 경비를 제외하고도 당시 환전시세로 3,600달러를 남겼다. 모금액은 당초 목표에 크게 미달했지만 이를 통해 이승만은 국내 연계의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었다.(주6) 하와이 내의 이승만의 핵심 측근인 민찬호·김영우·김노디가 국내의 이승만 지지세력인 이상재·유성준·신흥우·구자옥·김윤수 등과 직접 대면함으로써 1925년 흥업구락부 조직의 밑바탕을 마련했던 것이다.(주7)

▲ 1912년 이승만의 출국 후 역대 YMCA 총무들과 이상재(뒷줄 우), 윤치호(앞줄 좌), 신흥우(앞줄 가운데). 이들은 모두 친이승만 기독교세력의 핵심들이었다. 특히 신흥우는 YMCA 이사·총무 등의 직함을 갖고 미국을 합법적으로 왕래하며 이승만과 국내 기독교 세력의 연계를 책임졌다.

이승만의 사조직 동지회의 조직과 활동

1925년 3월 이승만은 임시정부 대통령에서 탄핵당하고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구미위원부’를 폐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조치에 ‘한성정부 법통론’을 내세우며 정면으로 맞섰고, 구미위원부 폐지를 거부하고 유지하여 자신의 재정기반 확보의 기반으로 활용했으나 1928년에 가서는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1930년대 임시정부의 실세로 김구가 부상하면서 이승만과의 연계를 모색했으나 일시적이었고 제한적이었다. 이처럼 이승만은 임시정부 등 독립운동 진영 내에서 불안정한 위치에 놓였고, 안창호·박용만 등 정적들과 끊임없이 경쟁, 대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승만은 1919년 한성정부 집정관 총재, 임시정부 대통령에 추대된 후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1921년 7월 그의 추종자들로 사조직이나 다름없는 동지회를 조직하였는데 이는 미주 및 하와이 지역에서 이승만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 유지, 강화하는 가장 중요한 조직적 기반이 되었다. 또한 이승만은 기독교 활동을 통해 끊임없이 국내 세력과의 연계를 도모하였는데 동지회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는 흥업구락부가 1925년 3월 국내에서 조직되었다. 동지회와 흥업구락부는 친이승만 세력의 핵심조직이라 할 수 있으며, 이들은 해방 후 미군정과의 연계 및 이승만의 단정 노선 실현에서 중요하게 활약하였다.

▲ 1924년 하와이 한인대표회를 마치고 기념촬영

이승만은 1921년 7월 21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민찬호·안현경·이종관 등과 함께 동지회를 창립하였는데, 선포문에서 “임시정부를 옹호하며 대동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조직을 결성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동지회는 임시정부 옹호를 내걸었음에도 임시정부 지지나 봉대를 내걸지는 않았다. 이승만이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은 임시정부를 옹호하지만 조직 운영과 방향을 임시정부에 맡기지는 않는 이승만의 사조직이었다. 동지회는 교민들의 경제적 상호부조도 목표로 내걸었는데 이를 위해 1925년 동지식산회사를 설립하고 교민 공동체라 할 수 있는 동지촌 건설도 시도하였다. 그러나 동지식산회사 잘못된 운영으로 부채가 늘어나 파산상태로 내몰렸고 동지촌도 별 성과가 없었다.(주8)

▲ 지영희와 김창순의 동지회 회원증(사진=인터넷)

동지회는 1930년 7월 동지미포대회(同志美布大會)를 열고 그때까지 명목만 유지하고 있던 동지회의 부흥을 논의하였는데 이때 새롭게 등장한 김원용·김현구·이용직 등의 간부진과 이승만 사이에 불화가 발생해 재판과 분규가 연이었다. 이승만은 동지회의 파산을 구제하기 위해 교민단과 교회의 재산을 저당잡히라고 요구했으나 이를 거절하자 불화가 발생했다. 또한 당시 『태평양주보』 주필이었던 김현구에게 이승만의 설교 내용을 실을 것과 한인기독교 목사인 이용직을 해임하기 위해 목사와 교회에 반역자가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실을 것을 요구했으나 거부하자 이승만이 이들을 음해하면서 분규가 일어났다. 이승만은 미주 본토에서 하와이로 온 김현구·김원용·이용직 등이 자신의 말을 잘 듣지 않자 이들이 교민단의 공금을 횡령하고 일본 영사관과 연결되어 있으며, 음탕하고 비도덕적인 행동을 하였으며, 심지 그들 가운데는 마약을 하는 친구도 있다는 식의 비방전을 폈다. 1931년 하와이 교민사회에서 이승만측과 새로 등장한 반이승만측이 폭력 충돌까지 일으켜 큰 충격을 주었다.(주9)

이후 동지회는 하와이의 9개 지방회를 비롯하여 미주 대륙에 시카고·뉴욕·몬타나·디트로이트·로스앤젤레스 등에 지방회를 두었으며, 특히 1929년 10월에 결성된 라성(LA)동지회는 1943년 확장하여 동지회 북미총회를 설립, 이승만을 후원하였다.(주10)

친이승만 국내조직 흥업구락부의 조직

1923년 기독학원 하와이모국방문단의 국내 방문과 1924년 6월 답방 형식의 YMCA야구단의 하와이 방문은 친이승만 기독교 세력의 연대와 교류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1924년 직접 하와이로 갈 예정이었던 이상재 대신 해방 후까지 친이승만 세력의 핵심인물로 활동한 윤치영이 참여했다. 윤치호의 사촌동생 윤치영은 이때 윤치호, 이상재, 김성수 등이 보내는 5만 달러의 자금을 이승만에게 전달했으며,(주11) 이후 미국에서 국제법학을 공부하는 한편 이승만의 심복이 되어 동지회 기관지 ‘태평양’의 편집, 제작과 구미위원부 활동을 했다.(주12) 윤치영은 1935년(또는 1937년 6월)(주13) 귀국한 후 친이승만세력의 국내 조직이었던 흥업구락부에서 핵심 역할을 담당했다.(주14)

1924년 5월 조선YMCA(조선중앙기독청년회)는 일본기독교연합회에서 독립하여 세계YMCA연맹 및 세계기독교학생연맹에 직접 가맹하는데 성공했다. 이상재·윤치호·신흥우가 이를 주도했는데, 신흥우는 스위스 제네바로 가서 직접 일을 마무리지었다. 이후 신흥우 등 국내 이승만 지지세력은 세계YMCA·기독교학생연맹의 국제대회를 명목으로 합법적인 미국여행이 가능했고 이를 통해 이승만과 접촉하며 연대를 이어갔다. 1924년 제네바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신흥우는 10월 25일 호놀룰루에서 이승만을 직접 만났다. 이때 이승만은 미국에서 동지회를 조직해 활동하고 있는데 동지회와 같은 목적을 지닌 단체를 국내에서 조직해 달라고 부탁했다.(주15)

▲ 1929년 도쿄에서 열린 제3회 범태평양회의 참가 대표들. 좌로부터 백관수, 송진우, 윤치호, 유억겸, 김활란(사진=위키백과).

이승만의 제안에 동의한 신흥우는 국내에 귀국한 뒤 11월 YMCA의 이상재, 구자옥, 유억겸, 이갑성, 박동완, 안재홍 등에게 제안해 찬성을 얻어냈다. 준비과정을 거쳐 1925년 3월 22일 신흥우의 집 응접실에서 이상재, 유성준, 윤치호, 장두현, 오화영, 이갑성, 유억겸, 구자옥, 박동완, 신흥우 등 10명이 참가한 가운데 표면적으로 친목단체를 가장한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를 창립했다. 흥업구락부의 규약은 “실업의 발달과 상호부조”를 내걸었으나 실제로는 “조선인의 실력, 특히 경제 방면의 실력을 양성하고 시기를 보아 내외 호응하여 혁명을 일으킨다”는 동지회와 같은 내용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주16)

흥업구락부 창립총회에서 부장에 이상재, 회계 윤치호·장두현, 간사 이갑성·구자옥을 선임하고 회원으로 유성준·박동완·유억겸·오화영·홍종숙·안재홍·신흥우를 결정하였다. 이들은 비밀엄선주의를 선택하였는데, 1938년까지 창립회원 12명을 비롯해 신입회원 40명을 합해 총 52명이 가담하였다. 1938년 5월 흥업구락부 사건 발각 당시 회원은 총 38명이었다.(주17)

회원 구성원들은 대체로 서울·경기·충청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양반·관료층·중인층 출신이 다수였고, 학교는 배재학교·한영서원·YMCA학당·협성신학교 출신들이 많았으며 미국과 일본, 독일 등 해외 유학생 출신이 많았다. 기독교 교파로는 감리교가 많았고 독립협회 이후 이승만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거나 동지회와 노선을 같이하는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 기독교 단체를 표방하지는 않았으나 구성원 모두 중앙YMCA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중앙YMCA의 친이승만 인사들이 주도하였다.(주18)

창립회원 12명 중 핵심인물인 신흥우·유성준·윤치호·이상재 등은 1) 지역·계급 기반에서 기호지방 양반 출신, 2) 대한제국기 독립협회 등 개화파 활동의 정치지향성, 3) 1900년대 초 함께 투옥된 경험을 공유한 정치·종교적 동지의식, 4) 옥중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거나 YMCA 창립멤버 및 핵심인물로 활동한 기독교도, 5) 3.1운동에 소극적 태도를 보이고 1920년대 실력양성운동과 개량주의운동을 선호한 독립운동노선, 6) 친미 성향 등에서 이승만과 대부분 공통성을 갖고 있었는데, 이러한 경향은 흥업구락부 전체의 성향과도 일치하였다.(주19)

전체 부원 52명 중 미국 유학 12명, 일본 유학 11명, 독일 유학 2명 등 외국 유학출신자가 전체의 절반가량 될 정도로 많았다. 이러한 학력 분포를 두고 볼 때 흥업구락부는 당대 한국사회 최고 지식인들의 집합체였으며, 유학과 해외여행 등을 통해 세계정세와 흐름에 대해 비교적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의 높은 교육 수준과 계급적 기반을 고려할 때 이들은 한국 독립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지극히 온건한 사고를 했을 것으로 볼 수 있고, 기독교 및 선교사가 세운 학교 출신들로서 미국의 영향력을 크게 받은 친미적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주20)

직업에서는 교사·교수·교장을 합쳐 18명이고, YMCA 직원으로 분류된 기독교청년회학교 교장(홍병덕)·교사(육정수)를 포함하면 교육자가 총 20명이나 된다.(아래 표 참조) 이러한 직업 분포를 통해 흥업구락부 관련자들이 교육 보급과 실업 부흥 등 실력양성운동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육자·의사 중에서도 연희전문·배재고보·송도중학·배화여고 등 기독교계 학교가, 언론계에서는 이상재가 사장으로 있었던 조선일보 관련자(김준연·안재홍·이관구·장두현·김동성·이상협)가 압도적이었다. 종교는 대부분 기독교도(감리교)였고, 지역적으로 기호지방이 다수였으며 서북 출신은 한명도 없었다. 김준연(전라), 이갑성·최현배(경상), 이만규(강원)를 제외하면 모두 서울·경기·충청 출신이었다. 흥업구락부의 지역적 편중 현상은 서북 지방을 근거지로 한 흥사단·수양동우회와 지역감정·대결의식을 초래했다.(주21)

▲ 흥업구락부 인물들의 직업 분포(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355쪽)

흥업구락부 사건 관련자들의 친일 활동

흥업구락부 참가자들은 대부분 물산장려운동(유성준, 김윤수, 박동완, 박승철, 이갑성, 장두현, 오화영), 민립대학기성회(이상재, 김윤수, 김일선, 유성준, 이갑성, 장두현, 정대현) 등의 실력양성운동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1927년 2월에 조직된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타협적 민족주의자(민족개량주의)의 분기점이 되었는데, 이상재를 비롯해 이갑성, 박동완, 안재홍, 유억겸, 정춘수, 이관구 등이 신간회에 적극 참여하였다. 흥업구락부에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로 볼 수 있는 이상재·안재홍을 비롯해 민족주의 우파 감리교 세력인 박동완·신석구·오화영·정춘수, 친일파로 분류되는 유성준·윤치호·정대현 등이 함께 참여하였다. 따라서 흥업구락부에는 비타협적 민족주의 지향과 대일 타협적 지향이 공존했다고 볼 수 있다. 어느 쪽이 주도적인가는 지도부와 정세 변화에 따라 달랐다고 할 수 있다. 이상재와 안재홍이 주도한 초기단계(1925〜27년)에는 반일민족주의적 지향이 전면에 내세워진 반면, 이상재가 사망한 후 윤치호가 조직을 주도하면서부터 특히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민족주의적 지향은 사라지고 사교구락부로 전락했다.(주22)

한편 흥업구락부는 비밀엄선주의와 만장일치제를 채택했기 때문에 추천된 후보자 가운데 44명이 선출되지 못하였다. 44명의 탈락자 가운데는 권동진·최남선 등 3.1운동의 중심인물과 윤종식 등 친일파, 조만식·이종린 등 민족주의자, 허헌·백남운 등 사회주의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부원으로 추천된 인물 가운데 거부 의사를 밝힌 경우는 양주삼이 유일했다. 또한 윤치영은 일제의 심문 과정에서 흥업구락부원은 아니지만 영향력 아래 있는 서울 거주자의 명단을 진술했는데, 그 가운데는 동아일보-보성전문-경성방직 계열의 핵심인물인 김성수·송진우·백관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일제의 조사결과 신흥우, 구자옥, 백관수, 김도연, 유억겸, 김양수, 장덕수, 김성수, 김활란, 홍병선 등은 서울에 거주하는 동지회원으로 흥업구락부를 조직한 것으로 드러났지만, 김성수·백관수·송진우는 흥업구락부 사건과 관련해 조사를 받거나 처벌받지 않았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이승만의 국내 지지기반은 흥업구락부와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세력, 귀국한 동지회원(윤치영, 최순주, 김양수, 신흥우, 허정, 장덕수, 이기붕 등), 동아일보-보성전문 그룹 등이었다.(주23)

흥업구락부원들이 관계한 단체로는 청구회(1930.6, 유억겸, 이관구, 변영로, 장택상, 강세형 등), 우생회(1932. 8, 구자옥, 김준연, 백인제, 방응모, 여운형, 송진우 등), 소년척후단(1923, 이상재, 윤치호, 신흥우, 유억겸 등), 조선물산장려회(1923, 유성준, 오화영, 김응집, 현동완 등), 조선교육협회(1922, 이상재, 유진태, 유성준 등), 수교구락부(1932.2, 김응집, 이건춘, 김을한, 이의식 등), 우리친목회(1925, 이상재, 유성준, 윤치호, 안재홍, 오화영, 홍종숙, 홍병덕 등), 조선일보사(이상재, 안재홍, 이관구 등), 조선어학회(최현배, 이만규 등) 등이 있었다.(주24) 이들은 이 단체에서 프락션 활동을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흥업구락부가 일제에 드러난 것은 1937년 5월인데 발단은 연희전문학교 경제연구회 사건이었다. 경제연구회 관련자의 자택 수색 과정에서 우애회가 발견되었는데, 1923년 5월에 창립된 표면적으로 친목단체로 연전 부교장인 유억겸과 하감 이춘호가 중심인물로 드러났다. 그러나 유억겸은 순종황제의 동서여서 수사가 불가능했는데 동우회 사건의 기소유예자 이묘묵·현제명을 통해 유억겸이 이승만의 동지회에 가입했고 우애회가 동지회 계통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또한 유억겸이 도미해 이승만과 연락했고 1937년 1월 인도에서 개최된 기독교 세계회의에 윤치영과 함께 참가해 조선독립 문제를 논의했으며 윤치영이 동지회와 구미위원부 간사였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5월 17일 윤치영에 대한 취조를 통해 흥업구락부의 존재와 명단이 드러났고, 5월 19일 구자옥을 심문하면서 자택 온돌 안에 은닉해 두었던 『흥업구락부원명부』와 『흥업구락부일기』 상·하 2권이 발견됨으로써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주25)

▲ 흥업구락부가 관계한 단체(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386쪽)

9월 3일 일제는 신흥우 등 54명에 대해 사상전향서를 받은 다음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유예 처분을 내림으로써 사건은 종결되었다. 흥업구락부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인사가 100명이 넘었지만 그 가운데 일부만 조사를 받았고 구속자 대부분은 기소유예 처분 이전에 석방되는 등 이례적인 대우를 받았다. 이는 비슷한 시기에 발생하였고 동일하게 회유 대상으로 파악한 수양동우회 사건과 비교해보더라도 확연히 이례적이었다. 1937년 6월 검거가 시작된 동우회 사건의 경우, 1938년 3월까지 안창호·주요한·이광수 등 총 181명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되었고, 같은 해 8월 41명이 정식으로 기소되었는데, 이들은 1941년 11월 경성고등법원 상고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을 때까지 피고인 신분을 유지해야 했다. 더욱이 동우회는 최고 지도자 안창호가 사건 와중에 사망함으로써 조직적으로 큰 타격을 받아야 했다.(주26)

수양동우회나 흥업구락부 모두 개량주의 단체로서 사실상 활동 정지 상태에 있었고, 일제에 큰 위협이 되지 않았으나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본격화된 전시 파시즘 체제 아래서는 이 조차도 용인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두 단체의 경우 근본적인 위협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관대한 처분을 내렸는데 특히 흥업구락부는 그럴 이유가 있었다.

우선 흥업구락부 관련자들이 갖는 사회적 영향력과 파급력이 컸다. 수양동우회의 안창호·이광수의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었지만 흥업구락부는 서울 중심의 한국 상층 지식인·엘리트를 대표했고 학교·교회·언론 등에 미치는 파장력이 더욱 컸다. 흥업구락부의 핵심간부였던 윤치호는 당시 국내 기독교계의 최고 원로(75세)였고, 유억겸은 순종황제의 동서이자 연희전문 부교장이었으며, 신흥우는 YMCA 총무로 국제적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전쟁 동원 체제를 위해 총후 단결을 외치는 일제로서는 이들을 처벌하기보다 사상전향서를 받아서 국민동원에 활용하는 것이 유리했다. 다음으로 흥업구락부의 상당수가 이미 친일 색채가 짙어진 마당에 처벌보다는 회유를 통해 친일 활동에 이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주27)

일제의 기소유예 처분과 함께 관련자들도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실천했다. 윤치호는 신흥우·유억겸 등 8명과 함께 전향성명서를 작성한 후 9월 3일 “민족자결의 미망(迷妄)을 청산하고 내선일체(內蘇-體)의 사명을 구현”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9월 5일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을 만나 ‘희망3요항(希望3要項)’을 일본 붓글씨로 하사받고 9월 13일에는 흥업구락부원들을 이끌고 조선신사를 참배했으며, 신흥우·이춘호·유억겸 등과 함께 본격적인 친일 활동 계획에 나섰다. 이들은 (1)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조선방공협회·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에 가입하고, (2) 미나미 총독의 희망요항을 기독교회를 통해 전국적으로 선전하며, (3) 매월 일정액(2∼50전)을 국방헌금으로 내기로 했다. 이후 이들은 매월 정례 ‘애국좌담회’를 열고 그때마다 정기적으로 국방헌금을 냈다. 특히 윤치호·윤치영·신흥우 등은 친일논설과 강연에 분주했고, 유억겸·구자옥은 거의 매월 일본을 드나들며 친일행각을 벌였다.(주28)

▲ 흥업구락부 전향성명서(매일신보, 1938.9.4.)
▲ 흥업구락부 기소유예 처분 소식과 전향성명서를 실은 신문기사(동아일보 1938.9.4.)

안창호가 조직했던 흥사단·수양동우회도 그랬지만 이승만의 국내 비밀조직이었던 흥업구락부 출신들은 일제 말기 모두 전향해 상당수가 적극적인 친일행각을 벌이며 반민족행위자 대열에 합류하였다.

▲ <조광> 1942년 2월호에 실린 유억겸의 친일 논설 글

해방 후 ‘이승만 신화’의 배경이 된 단파방송 사건

친이승만 세력의 국내 조직이었던 흥업구락부는 1938년 5월 일망타진되었고, 이들은 모두 기소유예처분을 받는 대신 친일파의 길로 들어섰기에 이승만의 국내 기반은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해방 후 이승만이 독립운동의 거물로서 국내에 알려지며 특히 좌익이 만든 ‘인민공화국’ 주석으로 추대되며 대중적 명망을 날린 것은 어떤 연유 때문일까?

이와 관련해 정병준 교수는 이승만 신화의 배경을 태평양 전쟁기 미국의 지원 아래 내보냈던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에서 찾았다. 1945년 초 일본군을 탈출한 한국 학생들이 미국 OSS(전략첩보국) 중국지부에 밝힌 한국 저명인사의 명단에는 이승만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았다. 1945년 한국 진주를 준비 중이던 미 제24군단 정보참모부(G-2)에서 15명의 유식한 한인 포로에게 ‘지하운동을 하고 있는 지도자’를 선정하게 했더니 여운형·윤치호·이광수·김일성 등이 거론되었으나 이승만은 거명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국내 대중들에게 이승만은 잊힌 존재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지식인들과 여론주도층이라고 할 수 있는 좌우파 지도자급 인사들 사이에서는 미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승만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이들이 이승만을 민족 지도자로 생각하게 된 것은 미국에서 한 방송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다.(주29)

변은진의 연구에 따르면, 일제 말기 국내 독립운동가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자 독립 후 적합한 지도자로 지목된 것은 여운형이었으며, 민중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것은 만주의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무장부대였다고 한다.(주30) 중국관내 항일운동은 국내민중에게 그다지 큰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상대적으로 임시정부에 대해서는 1940년 한국광복군이 창설되면서 관심이 커졌다고 한다. 임시정부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으나 1923년 분열 이후 사실상 정부로서의 기능은 하지 못하는 ‘하나의 개별 독립운동단체 수준’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다. 단파방송은 1941년 충칭 임시정부가 먼저 시작했고 이승만은 1942년 중반부터 시작했는데 이승만의 방송 소식이 일반대중에게는 거의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중적 파급력은 거의 없었던 셈이다.(주31)

반면에 정병준에 따르면, 이승만의 단파 방송 내용이 국내에 전해지면서 좌우익 지도자급 인물들 사이에서 이승만의 존재에 대해 재차 인식하는 계기가 만들어졌고, 이는 해방 후 이승만을 민족지도자로 인식하게 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일제 말기 비밀리에 조직한 건국동맹을 바탕으로 해방 직후부터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며 가장 먼저 대중지도자로 부상한 여운형도 절친한 동지였던 홍증식에게 이승만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미국에서 조선독립운동을 하고 있으며 조선 대통령의 대우를 받고 있다”고 언급했고, 허헌, 한설야, 이증림(해방 직전 여운형의 건국동맹 함남지역 책임자) 등 다른 좌파지도급 인사들도 이승만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고 한다. 우익의 경우도 송진우, 김병로, 함상훈, 백관수, 윤보선, 이인, 송남헌 등이 이승만의 방송 소식을 알고 있었다.

이승만의 방송 내용을 처음 전파한 것은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1942년 5월 미국으로 추방된 쿤스 등과 교류하면서 단파 수신기를 통해 중일전쟁·태평양전쟁에 대한 정보를 입수해 송진우·윤보선 등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던 홍익범이었다. 홍익범은 쿤스가 추방되면서 단파 라디오를 통한 정보 입수가 어려워지자 경성 방송국에 근무하고 있던 후배 양제현을 통해 청취한 단파 방송을 받아서 유포하였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아동작가로 활동하던 송남헌이 중간에서 전달자 역할을 했다. 하지만 홍익범은 1943년 3월 26일 체포되어 11월 18일 단파방송 사건 관련자로 최고형인 2년을 선고받았으며 고문 후유증으로 1943년 사망하고 말았다. 홍익범이 유포한 이승만의 ‘미국의 소리’ 방송 내용은 해방 전후 허헌, 한설야, 이증림 등을 통해 조선공산당(박헌영)으로 흘러들어갔고, 여운형, 홍증식, 오건영 등을 통해 건준과 인공 등에 전파되었으며, 함상훈, 백관수, 송진우, 김병로, 윤보선, 이인 등을 통해 한민당과 동아일보 등 우익세력에 전달되었다. 이처럼 대중들에게는 잊힌 존재였던 이승만이 좌우익 여론주도층에게 단파방송을 통해 과장된 이미지로 각인됨으로써 해방 후 최고 지도자로 부각하는데 결정적인 바탕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주32)

▲ 개성방송국과 경성방송국 직원들의 단파 방송 청취 사건(서대문역사형무소)

이승만은 태평양 전쟁 발발 후부터 충칭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통해 임시정부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미국과의 외교 전권을 위임받아 활동하게 되었다. 주미외교위원부는 내부 분열과 갈등으로 인해 원활하게 운영되지 못하였으나 이승만은 김구와의 긴밀한 비밀협조 관계를 유지하며 주도권을 장악한 상태에서 미국의 임시정부 외교승인을 목표로 움직였다. 그러나 임시정부 승인과 독자적인 한인부대 창설을 목표로 한 이승만의 국무부 및 국방부를 향한 대미외교는 성공하지 못하였다.(주3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이라는 직함과 단파 방송을 통한 국내 여론지지층의 자신에 대한 인식 제고를 통해 해방 후 권력 장악에서 유리한 고지에 설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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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한철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통령제”,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80주년 기념논문집(상)』, 국가보훈처, 1999, 130〜134쪽

2) 이명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국민대표회의”,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80주년 기념논문집(하)』, 국가보훈처, 1999, 482쪽

3) 김권정, 일제하 친이승만 기독교세력의 형성과 활동, 한국교회사학회지 29(2011.11), 233〜234쪽

4) 김권정, 위의 글, 234〜235쪽

5)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306쪽

6) 고정휴, 『이승만과 한국독립운동』, 연세대출판부, 2004, 283쪽

7) 정병준, 위의 책, 308〜313쪽

8) 정병준, 위의 책, 334〜340쪽

9) 김도형, 1930년대 초반 하와이 한인사회의 동향, 한국근현대사연구 9집, 1998, 204〜229쪽

10) 정병준, 위의 책, 341쪽

11) 윤여준 인터뷰, “내가 겪은 20세기 (14) 동산 윤치영 박사 묻혔던 생애 비화 후세에 남기련다” 경향신문, 1972.4.8.

12) 윤치영, 『윤치영의 20세기』, 삼성출판사, 1991, 84〜122쪽

13) 정병준은 윤치영의 귀국을 1935년으로 보고 있으나 윤치영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14년간의 체미 생활을 끝내고 귀국한 것은 1937년 6월”이라고 적고 있다.(윤치영, 위의 책, 123쪽). 그러나 윤치영의 흥업구락부 활동 등을 놓고 볼 때 1935년 귀국이 맞은 것으로 보인다.

14) 정병준, 위의 책, 313쪽

15) 정병준, 위의 책, 341〜343쪽; 김권정, 위의 글, 240쪽

16) 정병준, 위의 책, 346〜347쪽

17) 정병준, 위의 책, 348〜349쪽

18) 김권정, 위의 글, 240〜241쪽

19) 정병준, 위의 책, 354쪽

20) 정병준, 위의 책, 355쪽

21) 정병준, 위의 책, 355〜357쪽

22) 정병준, 위의 책, 357〜362쪽

23) 정병준, 위의 책, 363〜368쪽

24) 정병준, 위의 책, 385〜386쪽

25) 정병준, 위의 책, 387〜389쪽; 김상태, 1920〜30년대 동우회·흥업구락부 연구, 한국사론28, 1992. 12., 252〜253쪽; 조배원, 수양동우회·동우회 연구,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이논문, 1997, 62〜64쪽

26) 김상태, 위의 글, 258쪽

27) 정병준, 위의 책, 390〜391쪽

28) 정병준, 위의 책, 392〜393쪽

29) 정병준, 위의 책, 399〜424쪽

30) 변은진, 『파시즘적 근대체험과 조선민중의 현실인식』, 도서출판 선인, 2013, 453〜486쪽; 정병준, 위의 책, 400쪽

31) 변은진, 위의 책, 466〜471쪽

32) 정병준, 위의 책, 420〜424쪽

33) 한시준, 『대한민국임시정부사3-중경 시기』, 독립기념관, 2009, 154〜1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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