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연재를 다시 시작하며

58년 개띠 노동자 이야기를 다시 하려고 합니다. 잠시 쉰다는 것이 1년을 넘겨 버렸습니다. 그 동안 우리의 주인공 신돌석씨도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세상은 많이 변한 것 같은데 어찌 보면 완강하게 버티며 변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변한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그보다도 변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소소한 일상을 통해 그려 보고자 합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응원과 질책을 부탁드립니다. / 필자

 

▲ [삽화-백소(白笑)]

땡볕에서 1인 시위를 하는 경수형에게 냉커피 한 잔을 사다 주었다. 요즘은 어디 가서 냉커피라고 하면 무시를 당하는데 신돌석씨는 여전히 아메리카노 아이스보다는 냉커피라는 말이 정겨워서 그렇게 부르곤 하였다. 짧은 시간이지만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했다. 월남참전개혁연대의 준말인 월참개혁연대에 함께 하게 된 경수형은 자신이 당연히 받아야 할 돈을 떼먹혔다는 사실에서부터 분노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신돌석씨도 그렇지만 이런 일을 하게 될 때는 그 사람의 기본 성품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누군가 그쪽으로 끌어주는 사람이 있을 때 그렇게 되는 법이다. 월남참전유공자회에 아주 가끔씩 나가다가 눈에 띄는 분이 있더란다. 경수형보다 5-6세 위인 것 같은데 바른말을 아주 잘 했다. 교회를 열심히 나가는 사람인데 경수형이 흔히 아는 개독교인과는 달랐다. 건실한 생활을 하면서도 이웃 사랑을 하였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옳은 것은 옳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할 사람이었다.

월남참전군인들에게 전투수당을 주지 않았다는 것을 경수형에게 가르쳐 준 것도 그 사람이었다. 그런데 공법단체라고 하는 월남참전유공자회는 그런 점에 대해서 일절 말하지 않았다. 처음에 들었을 때 경수형은 잘 믿어지지 않았다. 그럴 리가 있느냐? 아무리 세상이 엉망이라도 그런 일까지 있겠느냐? 그때까지도 경수형은 박정희 대통령이 그런 걸 떼먹을 분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박근혜 국정농단이 나오면서 최순실이 해외로 빼돌린 박정희 일가의 재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황 회장이라고 하는 그 분은 이때 브라운 각서라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우리의 목숨 수당을 박정희가 스위스 은행으로 빼돌렸고, 그것을 최순실이 관리할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다. 황회장이 촛불집회에 나가자고 해서 경수형은 생전 처음 데모를 해봤다. 정말 기분이 묘했지만, 날이 갈수록 분노가 솟구쳤다.

박근혜가 탄핵되던 즈음해서 황 회장은 월남참전유공자회에서 나와서 월남참전개혁연대를 조직했고 경수형도 따라나섰다. 황 회장이 가는 곳마다 수행하고 다녔다. 그러다 보니 이 집회, 저 시위에 가봤고, 토론회나 강연회도 많이 가봤다.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별천지가 보였다. 요즘은 공법단체인 월남참전유공자회의 집행부가 불법을 저지르다 구속되자 그곳을 개혁하면서 동시에 빼앗긴 돈도 받아내자는 취지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단다.

경수형이 한참 말을 하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요즘 보니 우리를 마치 민간인이나 죽이는 일본군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구. 그건 아직도 인정이 잘 안 돼. 전쟁이란 상황에서 민간인인지 베트콩인지 모르는데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어떡하냐구.”

경수형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경수형은 아주 오래 전 신돌석씨와 잘 어울리던 때 어느 마을에 들어가서 주민들을 몰살시킨 이야기를 아주 자랑스럽게 한 적이 있었다. 신돌석씨도 별 생각없이 들었다. 물론 과장된 것인지는 몰라도 조금 끔찍한 이야기를 할 때는 불편해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다지 크게 문제를 느끼지 않았었다. 그 뒤 베트남 전쟁에 대한 내용을 여러 가지로 들었지만 경수형을 떠올리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세월이 한참 흐른 뒤 막상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난감하였다.

“어쨌든 아무 관련도 없는 나라에, 자기 나라 찾겠다고 하는 나라에 미국의 용병으로 간 것이 문제였죠. 군인 개개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고 봐요.”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경수형이 오랜만에 만나서 쓸데없는 소리 했다면서 신돌석씨의 손을 잡았다.

“나도 이제 그 정도는 알제. 하지만 말야. 우리야 가난하니까 한 푼이라도 벌라고 그런 거지. 내 전우가 옆에서 죽어 나가는데 어쩌겠어. 그런데 갓난아기나 어린애들도 무차별로 죽인 것은 정말 잘못했지. 요즘 내가 그걸 참회하면서 살아.”

경수형과 본격적으로 친하게 된 건 가방공장을 나와서였다. 신돌석씨는 가방공장에 다니면서 한 달에 두 번 놀 때도 집에 가지 않았다. 그냥 공중전화로 형한테 잘 있다고만 하였다. 형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토요일 오후에 일을 마치고 나가려는데 형이 찾아왔다. 경수형과 함께였다. 성남에 있는 가방공장을 하나하나 뒤졌다고 한다.

▲ [삽화-백소(白笑)]

성남에는 유달리 가방공장이 많았다. 워낙 열악한 산업이라 그런 것도 있고, 풍국산업이라는 큰 가방공장이 본사로 있어서 그런 것도 같았다. 여기저기 가정집 같은 곳에 들어앉은 가방공장을 다 뒤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평일에는 공장에 나가고 밤중이나 일요일에 찾아 나서는 형을 보고 딱하게 여겨졌는지 경수형이 함께 했다고 한다. 마침 이 공장의 공장장이 경수형 고향 후배라서 좀 더 빨리 찾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결국 가방공장 생활은 그렇게 두 달 정도에 끝날 수밖에 없었다.

가방쟁이로 평생 살겠다는 것도 아니고, 형과 원수져서 나온 것도 아니니 그만두게 된 것이 그다지 서운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얼마간 섭섭한 일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기술을 배울 수도 있었는데 아쉽게도 중단되었다는 것이었다. 신돌석씨처럼 빽도 학벌도 없는 사람이 앞으로 먹고 살아가려면 기술을 가져야 할 텐데 별로 좋은 기술이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이 공장에서 사장이나 공장장이 신돌석씨에게 재단을 가르치려고 했는데 못 하게 됐기 때문이었다.

신돌석씨가 들어간 가방공장에는 공장장이 있고, 오야미싱이 한 사람 있었다. 오야미싱이 경력은 더 오래된 것 같은데 공장을 하다가 망해서 공장장 밑에서 일한다고 했다. 두 사람은 두세 살 차이가 날 것 같은데 친구처럼 지냈다. 사장도 이들과 친구처럼 지냈다. 공장장과 성이 천씨인 오야미싱은 총각이었고, 사장은 결혼해서 막 돌이 된 아들 하나가 있었다. 그 밑에 남동생 세 명이 여기서 일했다. 바로 밑에 동생이 오야미싱이라고 했는데 공장장과 천씨는 그를 오야미싱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 같았다.

사장의 셋째 동생과 넷째 동생은 중미싱 정도로 쳤다. 그리고 중미싱으로 치는 장애인이 하나 있었다. 어렸을 때 소아마비를 앓았다는데 목발을 짚고 다녔고, 바닥에서는 그냥 손으로 짚고 다녔다. 그런 몸으로 미싱을 곧잘 한다는 게 신기했다. 시다미싱이 하나 있었고, 시다가 신돌석씨 말고 둘이 있었다. 그 둘은 형제였다. 이 형제는 사장과 같은 고향이라고 하였다. 경북 상주 어디라고 했다.

형은 어떻게 하면 이 공장에서 나가나 궁리하는 사람이었고, 동생은 이름이 삼돌이인데 조금 모자란 듯이 보이는 아이였다. 형은 열일곱, 여덟쯤 된 것 같았고, 동생은 열 살이 조금 넘은 것 같았다. 동생인 삼돌이를 사장이 고향에서 데려와서는 시다를 시키면서 기술 가르쳐 준다고 하고는 매달 주는 월급을 밥값을 뗀 뒤 사장이 보관해 준다고 하였다. 텔레비전 드라마 ‘수사반장’ 같은 데서나 본 이야기를 현실에서 마주치니 난감한 느낌이 들었다.

야근을 하지 않는 날에는 공장 뒤에 있는 가게에 가서 소주나 막걸리를 마셨다. 가게에 달아 놓고 마시고는 월급날에 일괄 계산했다. 월급은 매달 10일에 받았다. 열흘 치를 깔고 준다고 하였다.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몰랐는데 매달 10일에 그 전달 말일까지 계산해서 준다는 소리였다. 나머지 열흘 치는 다음 달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중도에 그만두게 되는 때는 다음 달 월급날에 받으러 와야 했다.

노는 날에는 함께 희망대 공원 같은 데 놀러 가기도 하였다. 같이 축구도 하였다. 그런대로 어울리면서 재미있게 두 달 정도를 지냈는데 형과 경수형이 찾아오는 바람에 그만두게 된 것이었다. 사장과 공장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순순히 가라고 했다. 짐도 별로 없었다. 가방 하나에 들어갈 옷가지뿐이었다. 두 달 정도이니 정들 사이도 없었지만 그래도 눈에 밟히는 것이 많았다. 특히 원단을 굴리던 재단대가 눈에 자꾸 어른거렸다.

사장과 공장장은 신돌석씨에게 재단을 가르쳐 주려 하였다. 가방공장 미싱사라는 것이 사실 초등학교도 졸업할까 말까 할 나이부터 배우는 것이라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무 살이 된 신돌석씨가 배우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였다. 시다를 하면서 쪼까이로 실밥을 따는 일 등을 하며 한 달 정도 지났을 때 사장이 작업장에 오더니 신돌석씨에게 원단을 펼칠 때 한쪽에서 받으라고 하였다.

옆에서 볼 때 쉽게만 보이던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둘둘 말려서 원통으로 되어 있는 원단을 펼치는 작업인데 저쪽에서 굴리면 이쪽에서 받은 뒤 정렬을 하고 다시 굴려서 상대에게 굴리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신돌석씨가 제대로 받지 못하였고, 굴릴 때도 옆으로 벗어나기 일쑤였다. 그걸 제대로 하는 데 일주일 정도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나서는 칼로 원단을 재단해야 한다. 물론 가방에 따라 다양한 재단을 해야 제대로 된 재단사이겠지만 처음에는 작업 지시대로 해야 한다.

사장과 공장장은 신돌석씨를 좋게 본 듯하였다. 사실 신돌석씨 정도의 학력이라도 가진 사람이 가방공장에서는 드물었다. 신돌석씨는 그런 점을 전혀 모르고 전봇대에 붙어 있는 광고만 보고 찾아갔다. 전화를 걸어서 찾아갔더니 그 집에서 기다리라고 한 뒤 오토바이를 탄 사람이 와서 서로 무슨 말을 주고받더니 따라오라고 했다. 아마도 인력 수급을 함께 하는 모양이라고 나중에 생각하였다.

그때는 그것도 모르고 갔다가 시키는 대로 오토바이 탄 사람을 따라서 근무하게 된 공장에 가게 된 것이었다. 가자마자 사장이 가방일 해 봤냐고 물어봐서 초보라고 했더니 약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는 왜 그런지 몰랐는데 나중에 안 것이지만 가방공장 시다는 초등학교를 막 졸업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안 다닌 애를 데려다가 마구 시켜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그런데 스무 살이나 먹은 사람이 와서 초보라고 하니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 [삽화-백소(白笑)]

재단을 배우는 것을 포기하게 된 것 말고 또 한 가지는 삼돌이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삼돌이 형이 어느 날 둘만 술을 마시자고 하고는 삼돌이에게 한글 좀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였다. 사장과 동향이라서 올라왔는데 정말 불쌍한 아이라는 것이다. 자기는 중학교 나오고 농사짓다가 올라왔는데 이제 그만둘 거란다. 삼돌이는 초등학교도 못 다니고 팔리듯이 올라왔다는 것이다. 한글도 모르니 어디 가서 사람 구실하겠냐면서 돌석이형만 믿는다고 하였다.

처음 들었을 때는 좀 황당했는데 삼돌이와 지내면서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 끝나고 저녁을 먹은 뒤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삼돌이가 마음을 열지 않았다. 형이 하라니까 하기는 하는데 영 마음이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신돌석씨도 그런 삼돌이에게 억지로 가르치고 싶지 않았다. 잘 안 받아들이니까 화도 났다. 그렇게 얼마를 지난 뒤 삼돌이 형이 공장을 그만두었다.

그만두던 날 사장에게 편지를 남기고 싶은데 써달라고 부탁해서 신돌석씨도 못 쓰는 글이지만 짧게 써주었다. 고맙다고 하더니 삼돌이에게 한글만이라도 읽을 수 있게 해달라고 다시 부탁을 하고 떠났다. 그래서 삼돌이를 불러 이야기를 시작했다. 잘 때도 옆에 누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보았다. 그렇게 해서 마음을 열었고, 아주 기본 글씨는 읽게 되었는데 신돌석씨가 그만두게 된 것이다.

삼돌이의 살아온 날을 들으면 정말 어이가 없었다. 경상도 상주 어딘가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 엄마는 두 형제를 놔두고 집을 나갔다. 아버지는 술만 마시고 제대로 형제를 돌보지 않았다. 가방공장 사장이 고향에 왔다가 아버지와 이야기가 되어서 데려갔다. 초등학교에 들어갔어야 할 나이인 여덟 살 때였다. 조건은 월 3만 원에 먹고 재워준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3만 원을 자기에게 부치라고 하였는데 사장은 자기가 저금해 놓는다며 안 부치고 있다.

삼돌이가 서울로 간 뒤 2년 뒤에 그 형도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왔다. 중학교까지는 외가에서 도와주었는데 더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지금의 가방공장을 찾은 것이 신돌석씨가 들어가기 한 달 전이었다. 얘는 지 동생과 달리 공장보다는 술집 같은 곳에서 웨이터를 할 생각이었다. 아직 어리다고 받아주지 않자 역전 식당에서 심부름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갈 곳이 마땅치 않아지자 동생이 있는 가방공장에 왔고, 다시 나간 것이었다.

삼돌이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공장장은 다른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는 걸핏하면 삼돌이를 두들겨 팼다고 한다. 심지어는 망치를 던져서 머리에 맞아 피를 흘린 적도 있다고 한다.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거기에 가도 아버지한테 얻어맞는 일밖에는 없을 것 같았다. 술 취한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아는 신돌석씨라서 이해가 됐다. 물론 신돌석씨의 아버지는 두들겨 패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술에 만취되었을 때의 행동거지는 알만했다.

삼돌이가 자기 이름을 쓰고 신기하게 생각하면서 수십 번 어쩌면 수백 번을 쓰자 신돌석씨도 마음이 매우 흐뭇했다. 놀라운 것은 그러고 나서 삼돌이가 사장에게 자기가 한글 공부해야 하니까 맡긴 돈을 달라고 한 사실이었다. 사장도 깜짝 놀랐고, 신돌석씨도 그 말을 듣자 놀랐다. 사장 바로 밑의 동생이 욕을 했다. 이 새끼가 미쳤나 하면서 주먹을 휘둘렀는데 사장은 신돌석씨에게 눈치가 보이는지 동생을 말리면서 연필과 공책을 사주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사장은 삼돌이에게 노는 주마다 천 원씩 주었다고 한다. 그것으로 뭐 먹고 싶은 것 사 먹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발비나 목욕비는 그때마다 주기는 했다. 그 외에는 일절 돈을 주지 않았다. 옷도 3년 동안 두 벌 사줄 정도였다. 이제 그 돈을 내놓으라고 하니 사장도 당황했을 것이다. 한글을 배우는 것이 어쩌면 삼돌이의 권리의식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는지도 몰랐다. 그런 삼돌이를 두고 오니 마음이 언짢았다. 과연 더 한글을 깨칠 수 있을까 염려가 되었다.

신돌석씨가 당시에 노동자의 권리의식을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훗날 노동운동을 하면서 이때를 생각해 보면 그런 기질이 신돌석씨에게 있기는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가면서 마음에 걸리기는 했어도 삼돌이를 금세 잊어버렸다. 깔아놓은 봉급을 받으러 가방공장에 찾아갔다가 못 받고 다시 또 갔을 때 삼돌이를 보았다. 삼돌이가 별다른 감정 표현이 없어서 서운하기는 했다. 삼돌이는 그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군대를 갔다 오고 공장에 들어갔다 해고가 된 뒤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그때까지 삼돌이를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지역의 여러 해고자들, 노동조합 들을 만나다가 조직사건이 터지기 직전에 가방공 지역노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기했다. 그러면서 옛날 일이 생각나서 이전에 다니던 공장이 있는 곳을 찾아가 보았다. 없어졌다. 동네 사람들도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하였다. 잘 가던 가게도 없어졌다. 왠지 마음이 허전했다.

그런데 가방공 지역노조 사람들과 만나면서 놀라운 것을 알았다. 삼돌이가 이 노조의 대의원으로 있다는 것이었다. 이름을 바꾸어서 활동했기 때문에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삼돌이가 일하는 신흥동의 공장에 가서 만났다. 10년도 더 지난 세월 뒤에 만난 것이었다. 삼돌이는 의젓한 오야미싱이 되어 있었다. 그날 새벽까지 함께 술을 마셨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이제 한글을 줄줄 읽는 것은 물론이고, 노동법도 꽤 알았다. 노동법 개정투쟁을 위한 노동자대회에도 참여한다고 했다. 

 

필자 정해랑(鄭海郞)

서울에서 태어나 여의도 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노동정책연구소 정책실장, 경희총민주동문회 회장,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재생의 담론 21세기 민족주의>(2010년, 공저), <공주와 도둑들>(201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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