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일원로 안재구 선생(우측)이 8일 새벽 8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사진은 2013년 11월 서강대 동문회관에서 열린 자서전 『끝나지 않은 길』 출판기념회에 아들 영민 씨와 함께 감사의 말을 하고 있는 안재구 선생. [통일뉴스 자료사진]

통일원로이자 수학자인 안재구 선생이 8일 새벽 4시 30분 군포 소재 새소망요양원에서 심정지로 별세했다. 향년 87세.

고인은 1933년 10월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외갓집에서 태어나, 경남 밀양에서 항일혁명가인 조부 안병희 선생 슬하에서 성장했다. 

1947년 5월 밀양중학교 1학년 때 노동절 집회 참가사건으로 퇴학당했다. 1948년 2·7구국투쟁에 참가했고, 남로당 밀양군당 연락원으로 활동했다. 1949년~1951년 대구시 달성군 구지국민학교 교사 생활을 했다.

1952년 3월 경북대 사범대학 수학과에 입학했다. 1970년 이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경북대 문리대 수학과에서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 교수를 역임했다. 

1979년 10월 남민전 사건으로 체포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며, 1988년 12월 가석방됐다. 1994년 6월 구국전위 조직사건으로 다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1999년 8월 15일 형집행 정지로 석방됐다.

석방 후 청년학생, 노동청년에게 세계관, 인생관 등 철학과 해방투쟁사에 관한 내용을 강연하고, 과학기술과 수학사에 관한 내용과 사회비평에 관한 문필활동을 계속해 왔다.

한편, 2013년 1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저서로는 『우리가 함께 부르는 노래』(광야, 1989), 『철학의 세계 과학의 세계』(죽산, 1990), 『수학문화사』(일월서각, 1990), 『할배, 왜놈소는 조선소랑 우는 것도 다른강』(돌베개, 1996), 『아버지 당신은 산입니다』 (아름다운사람들, 2003) 등이 있다.

특히, 안재구 선생은 2011년 6월부터 2013년 6월까지 만 2년 간 124회에 걸쳐 <통일뉴스>에 선생의 회고록 「통일운동가 안재구 자서전 ‘어떤 현대사’」를 연재했으며, 이는 『끝나지 않은 길』(내일을여는책, 2013) 두 권으로 묶어 출간됐다.

유족으로는 딸 소정과 소영, 아들 세민과 영민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종로구 대학로 서울대학교 병원 장례식장 1호실(3층)이며, 9일 오후 7시 30분 1층 영결식장에서 추도식이 거행된다. 

발인은 10일 오전 6시이며, 장지는 경남 밀양 선영이다.

(추가, 오후 11시 20분)

 

안재구 선생 약력

아버지 안의환(安義煥), 어머니 김태숙(金兌淑) 두 분의 장남으로 1933년 10월 24일 달성군 구지면 외갓집에서 출생
고향 밀양에서 항일혁명가이신 할아버지 우정(于正) 안병희(安秉禧) 선생 슬하에서 성장

약력

1940년 4월 - 밀양제이심상소학교에 입학,
1941년 1월 - 아버지를 따라 경주 계림심상소학교로 전학했다가
1943년 9월 - 밀양제이국민학교로 되돌아왔음
1945년 8월 15일 - 고향 밀양시 초동면 성만리 선산 마을에서 일제 식민지 해방을 맞이함
1946년 8월 - 밀양제이국민학교가 밀성국민학교로 개명되었고 이 학교를 졸업
1946년 9월 - 밀양중학교 입학
1947년 5월 - 밀양중학교 1학년 때 노동절집회 참가사건으로 퇴학. 이에 항거투쟁하다가 구속, 5월 미소공동위원회 재개 정치범 석방 때 석방됨. 그 후 학생운동과 중·고 학교과정 독학
1948년 2월 - 2. 7구국투쟁에 참가, 그 후 밀양군당 조직 레포(연락원)와 농민위원회 오르그(조직지도원)로 투쟁 참가
1949년 4월 8일 - 달성군 구지면 도동동의 외갓집에서 피신
1949년 6월 - 초동교원 채용 준교사시험에 합격
1949년~1951년 - 대구시 달성군 구지국민학교 교사
1951년 9월 - 대구시 영남고등학교에서 고등학교 2학년 수료 학력을 인정받아 고등학교 3학년에 입학
1952년 3월 -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수학과 입학
1956년 경북대 사범대를 졸업하고, 경북대학교 대학원 수학과 석사과정 입학. 경북대 수학과 강사. 영남고등학교 교사, 1961년 2월까지 근무
1958년 3월 - 경북대학교 대학원 수학과 석사과정 졸업
1959년 10월 21일 ~ 1960년 10월 21일 - 교보병(교사병역특례로 1년복무)으로 20사단 전방 근무
1956년 -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수학과에서 강사,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 교수로 역임.
1960년 - 경북대학교에서 근무
1964년 - 한일굴욕외교 반대투쟁 때 이재문 동지와 함께 학생운동을 지원. 그 후 이재문 동지, 이대룡 동지들과 함께 청년학생운동을 지원.
1969년 - 이재문 동지와 여정남 동지들과 함께 경북대 사회과학 동아리 정진회(正進會)를 조직지원하고 3선개헌반대투쟁을 지원
1970년 - 정진회의 후신으로 정사회(正思會)를 조직하고, 이재문 동지, 여정남 동지, 임구호 동지와 함께 교련반대투쟁을 조직 지원
1970년 8월 - 이학박사학위 취득
1972년 10월 - 이른바 유신체제로 모든 학생운동 동아리를 해체하자 위장 학술연구 동아리인 한국풍토연구회를 조직
1973년 10월 - 유신체제 반대운동이 서울에서 일어나자 11월 5일 위 위장 동아리의 조직을 가동하여 경북대학교에서도 1000여명이 궐기하여 시위하고 경북 도경에서 연좌, 중앙통을 지나 2.28기념탑에서 바람처럼 해산하여 박정희 파쇼정권이 크게 당황
1974년 1월 - 유신헌법 반대를 탄압하는 긴급조치 1호, 2호의 발동
1974년 4월 - 민청학련사건으로 여정남 동지, 임구호 동지 체포됨. 여정남 동지 사형 선고를 받고 이듬해 1975년 4월 9일에 처형.
1976년 2월 - 20년간 재직해 온 경북대 교수직에서 ‘국가관 미확립’이라는 구실과 ‘학생운동’에 동정적이라는 이유로 재임용 탈락
1976년 9월 ~ 1977년 2월 - 동국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대우 강사
1976년 9월 ~ 1979년 10월 - 체포될 때까지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가입.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교양선전선동부책 겸 통일전선부책으로 활동
1977년 3월 - 동국대학교 문리과대학 수학과 교수로 재임명
1979년 9월 - 숙명여자대학교 이과대학 수학과 교수로 전임
1979년 10월 -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조직노출로 검거. 1심에서 사형. 세계수학자들의 항의와 진정으로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
1988년 12월 - 만 9년 2개월의 징역을 살고 가석방
1990년 - 1학기 서강대학교 총학생회에서 개설한 ‘과학과 사람’이라는 강좌를 강의. 이 강의를 정리하여 ‘철학의 세계 과학의 세계’를 출간함
1991년 3월 - 경희대학교 서울캠퍼스와 수원캠퍼스에서 교양학부 강사. 강좌 현대사회와 과학
1994년 6월 14일 - 구국전위 전위조직사건으로 재구속 무기징역 선고
1999년 8월 15일 - 형집행정지로 석방

석방 후 청년학생, 노동청년에게 세계관, 인생관 등 철학과 해방투쟁사에 관한 내용을 강연하고 과학기술과 수학사에 관한 내용과 사회비평에 관한 문필활동을 하고 있음.

저서

‘우리가 함께 부르는 노래’ (광야, 1989)
‘철학의 세계 과학의 세계’ (죽산, 1990)
‘수학문화사 (일월서각, 1990)
‘할배, 왜놈소는 조선소랑 우는 것도 다른강’ (돌베개, 1996)
‘아버지 당신은 산입니다’ (아름다운사람들, 2003)
기타 수학에 관한 교양서적 다수

(통일뉴스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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