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연재를 다시 시작하며

58년 개띠 노동자 이야기를 다시 하려고 합니다. 잠시 쉰다는 것이 1년을 넘겨 버렸습니다. 그 동안 우리의 주인공 신돌석씨도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세상은 많이 변한 것 같은데 어찌 보면 완강하게 버티며 변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변한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그보다도 변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소소한 일상을 통해 그려 보고자 합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응원과 질책을 부탁드립니다. / 필자

 

▲ [삽화-백소(白笑)]

올해 초에 주차장 담장에 주민자치회 위원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붙었다. 신돌석씨는 관심이 많은 것이었기 때문에 유심히 보았다. 신돌석씨가 사는 도시는 시범 동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올해부터 시범 동을 확대한다면서 위원 모집 공고가 붙은 것이었다. 작년에 했어야 할 일이었는데 시 의회에서 민주시민교육 조례안이 부결되면서 주민자치회 위원 교육의 근거가 마련되지 않아서 미뤄졌다고 했다. 마침내 시작되는 모양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잘 안 보이는 곳에 조금만 붙여 놓는지가 의아하기는 하였다.

신돌석씨가 주민자치회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얼마 안 된 일이다. 현재의 대의민주주의가 한계를 갖고 있고, 직접민주주의시대가 열리려면 주민자치가 확실하게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여러 군데서 들었다. 그런데 그것이 주민자치회와 관련이 있는지는 별로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주민자치회와 지금 있는 주민자치위원회가 잘 구별이 되지 않았다. 서울의 시범 자치구에서 나온 책자를 보고, 여기저기 설명회나 토론회에 가보니 대략 알 것 같았다. 그런데 선뜻 자신이 한다는 생각은 안 났다.

지역 단체에서는 주민자치회에 대해서 크게 관심이 없는 듯했다. 시범 동이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도 그런 것 같았다. 2018년이 되면서 서울에서 시범 동이 늘어나고 여기서도 관심을 갖는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시민단체 활동가인 김성길이 자기 단체에서 주최하는 직접민주주의 교육을 들으러 오라고 권했다. 주 1회씩 평일 저녁 시간에 8회를 하는 교육인데 여기서 직접민주주의, 국민발안제, 마을공화국, 민회 등 신돌석씨에게는 낯설지만 신선한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주민자치회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강사마다 의견이 다른 것 같았다.

아예 언급을 하지 않는 강사가 대부분이었다. 관의 들러리라고 혹평하는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어떤 강사는 주민자치회는 현 정권의 홍위병을 양성하는 곳이므로 직접민주주의의 방해물이 된다고까지 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스위스의 직접민주주의를 극찬하였고, 포데모스, 오성운동 등에 대해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모델인 듯이 말했다. 강사들이 말하는 대로 하면 유럽의 몇몇 나라는 지상 낙원인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중에서 주민자치회에 대해 소개하면서 거기에 들어가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강사가 있었다. 그 사람은 주민자치회가 설사 관 주도로 되어도 우리가 주민 대중을 직접 만날 수 있는 장인데 그걸 외면하면 안 된다고 하였다. 노동운동이 초창기에 어용노조에 들어가 활동하거나 노사협의회도 활용했던 것을 생각해 보라고 하였다. 신돌석씨는 그 말을 듣자 확 와 닿았다. 역시 먼 나라 이야기보다 우리의 경험이 설득력이 있었다.

교육이 끝난 뒤 김성길이 신돌석씨에게 민회라는 것을 조직해 보자고 제안하였다. 처음에 그것이 무엇인가 하고 의아했는데 관과는 구별되는 상태에서 직접민주주의를 추진하는 조직이라고 하였다. 교육에서 들은 내용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라서 좋고, 신돌석씨는 김성길의 헌신성과 합리적인 면에 상당한 신뢰를 했기 때문에 함께 하기로 하였다. 김성길은 지금 단체의 주요 활동가들은 고정관념이 강해서 차라리 단체에 소속되지 않은 사람들로 조직을 하겠다고 하였다.

그렇게 해서 지역민회 준비모임이 만들어졌다. 준비모임이라고 하지만 고작 여섯 명이 하는 것이었다. 남자 넷에 여자 둘이었다. 김성길과 신돌석씨. 그리고 70이 다 된 전직 국영기업체 간부라는 환경운동가, 30대의 청소년단체 활동가, 지역에서 학부모운동, 예산참여 등을 했던 40대의 주부, 서울에 있는 시민단체에서 활동했던 50대 여성 등이었다. 첫 모임은 수인사 정도로 끝났다.

뒤풀이를 갔는데 여기서 서로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민회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서로 같은 생각을 갖고 있지 않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서로의 생각을 존중한다는 선에서 더 이상 나가지는 않았다. 민회가 만민공동회 같은 군중집회인지, 주민자치회와 경쟁하는 자치조직인지, 아니면 회의체인지 아리송하였다. 생각이 다른 것도 있지만 각자 생각이 분명하지 못한 점도 있는 것 같았다. 그 점은 김성길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김성길이 발제를 해오고 책을 정해서 공부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다음 번에 김성길이 발제해 온 것을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김성길은 일시적인 군중집회보다는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조직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것이 또 다른 단체를 만드는 것 아니냐는 반론이 나왔다. 그러려면 차라리 단체들에 참여 공문을 보내서 함께 논의하는 것이 낫지 않냐는 이야기도 있었다.

모임에서 주민자치회 이야기도 나왔다. 시청에서 주민자치회 활성화를 위한 정책토론회를 한다고 하면서 누가 가보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신돌석씨는 그 이야기를 듣고 일부러 시간을 내서 가봤다. 꽤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런데 그걸 한다는 사실 자체를 왜 일반 시민들은 모를까 하는 점이 의아했다. 거기 온 사람들은 서로 잘 아는 것 같았다. 나중에 가만 보니 그 사람들은 대부분 현재 존재하는 주민자치위원회 위원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시작하면서 시장이 인사를 했는데 주민자치회의 활성화에 상당히 적극적인 것 같았다. 행정안전부 소속인 연구원, 어느 대학 교수 등이 발제를 했는데 내용은 들을 게 많았다. 토론자는 대학 교수, 시의회 의원, 시민단체 활동가 등이었다. 시의회 의원은 정치인답게 토론자로 나서면서도 자기를 알리는 데 중점을 두었다. 청중의 질문을 받는데 주민자치회의 불필요성을 유도하는 질문을 했다.

이상한 상황이었다. 관청에서 적극적이고, 청중으로 온 시민이 부정적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청중 대부분은 주민자치위원회 위원들로서 자신들의 영역이 침범당하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적극적인 시청에서 왜 이런 것을 주민들에게 널리 알리고 정책 토론회를 하지 않는 것인가? 진정으로 주민들이 참여하는 것보다는 그런 외양을 띠는 선에서 머무르려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지역민회 준비모임에서 갔다 온 이야기를 하자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반응들을 하였다. 그런 것을 기대할 필요없다는 것이었다. 30대인 청소년단체 활동가가 특히 강하게 그런 주장을 하였다. 그는 민회는 지금의 체제를 부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5.18광주민중항쟁은 체제를 부정했는데 촛불항쟁은 체제 내에서 문제를 풀려고 했기 때문에 오히려 후퇴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두 여성들이 이전에 듣던 것과 너무 다른 이야기라고 하였는데 김성길이나 환경운동가라는 사람은 아무런 언급을 안 했다. 신돌석씨도 자신이 없었지만 5.18광주민중항쟁도 체제를 부정했다기보다는 부정한 권력에 대한 항쟁의 성격이 강했다고 반론을 폈다. 그랬더니 그가 시민군이 뭐냐는 것이다. 시민이 군대를 만들었다는 것은 현체제의 군대를 부정한 것이고, 그것이 바로 체제 부정이라는 것이다.

▲ [삽화-백소(白笑)]

결국 그는 다음 모임부터 나오지 않았다. 신돌석씨는 정리가 잘 되지 않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구나 생각을 했다. 80년대에 5.18광주민중항쟁에서 무장투쟁의 의미를 중요하게 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보기는 했다. 그렇지만 6월항쟁과 이후 과정을 겪으면서 그런 생각은 상당히 정리된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닌 모양이다.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과 공감을 하는지 모르지만 황당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어서 그 다음 모임에서 70이 다 된 환경운동가가 더 이상 나오지 않겠다고 했다. 이 모임은 투쟁도 하지 않고 공부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지금 이 도시에서 커다란 환경 파괴가 벌어지고 있는데 당장 맞서 싸우면서 시민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 뚫는 고속도로의 진출입로를 만드는 문제를 일컫는 것이었다. 벌써 5년 넘게 끌어오던 문제인데 지역 주민들의 반대로 주춤했다가 다시 공사를 시작하려고 하였다.

얼마 전부터 그 주변에 ‘초등학교 옆 고속도로 진출입로 결사 반대’ ‘어린이 보호 구역 내 고속도로 진출입로 결사 반대’ ‘우리 동네 산 파괴하는 고속도로 진출입로 결사 반대’ 등이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그는 이것을 저지하기 위해 지금 당장 도로에서 연좌농성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교통이 마비될 것이고, 사람들이 왜 그러나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신돌석씨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갑자기 연좌농성을 하자니.

도로에 연좌농성을 한다는 것을 생각하자 1985년 노조 만들기 직전에 그 지역 해고자들 10명이 했던 싸움이 생각났다. 처음에는 유인물을 돌리는 것으로 시작했는데 경찰이 제지하다가 몸싸움이 벌어지면서 결국 도로에서 연좌농성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당시 그 지역 공단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신돌석씨는 그때 아직 해고되지 않을 때였다. 출근길에 그 광경을 목격했다. 출근 뒤 현장에서도 하루종일 그 이야기가 오고 갔고, 노조준비위도 굉장히 고무되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 그 도시에는 제대로 된 기동대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을 오래 끌 수 있었고, 도로 연좌농성의 파급 효과가 적지 않았다. 또 그때 해고자들은 온몸을 바쳐 싸우겠다는 각오가 있었다. 그런 사람이 10명 정도는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뜬금없이 그러자고 한다고 그럴 사람이 있기나 하나? 더욱이 김성길은 이 싸움으로 몇 년 전부터 공사장 부근에 천막을 치고 싸웠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 앞에서 이렇게 쉽게 연좌농성 이야기를 해도 되는 것일까?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둘째 모임 이후 책을 보고 토론을 하자고 했는데 다들 바빠서 그런지 제대로 읽어 오지 않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얼마나 공부를 많이 하는지를 이야기하면서 자기보다 젊은 사람들이 왜 그러냐고 질책을 했다. 신돌석씨는 그 이후에도 그가 그런 싸움을 했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리고 그는 왜 그렇게 자기 자랑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뒤로 그 모임은 흐지부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날 왕언니는 말했다. 노조가 깨진 뒤 죽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자기들 수의 서너 배나 되는 경찰이 와서 농성하는 자신들을 끌어냈다.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다. 맞는 일이야 어려서부터 숱하게 해온 일이라 견딜 만했다. 그들이 끌어내면서 욕하는 말들을 참기 어려웠다. 이 공순이년들아. 조용히 일이나 하지 니들이 뭘 안다고 깝쳐 하면서 두들겨 팼다. 그러다가 지부장이나 남성 간부들과 몇 번 잤냐는 식의 말도 하면서 여기저기 몸을 만지기도 했다.

노조를 하면서, 노조 민주화를 하면서 살아난 자존심이었다. 그것이 이런 폭압으로 무너지면서 정말 살 마음이 없었다. 죽지 못해 살면서 그래도 동지들 보고 버텼는데 불과 2년 뒤에 구로동맹파업이 난 것이었다. 그것도 여성 사업장 중심으로 났다는 것에 왕언니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다. 내가 이놈들 망하는 꼴을 보기 전에 죽을 수야 없지. 그러면서 여기저기 노동청년회, 산업선교회 등을 찾아다니면서 뭔가 찾아서 열심히 일을 하려고 했다.

왕언니는 시간이 흐르면서 뭔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인텔리들이 문제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왜 자꾸 어려운 걸 만들어 내서 분열시키는 것인가? 그런데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인텔리냐 노동자냐가 중요한 건 아닌 듯했다. 그러는 사이 자신도 늙었다. 노동운동을 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찾은 것이 바로 지역에서 생활 속의 실천을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자기만 옳다고 하고, 뭔가 새로운 걸 만들어 냈다고 하는 인간들 보면, 저건 아니다 하는 생각을 해. 지금 부족한 게 이론인가? 넘쳐 나는 게 이론 아니야? 한 사람이라도 올바로 살고, 올바로 살게 설득해야지.”

신돌석씨는 언젠가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 운동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운동은 현재의 모순을 제거해 나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지금도 주변에서는 새로운 이론이라고 떠드는 사람들이 많다. 새로울 것도 없는 걸 가지고 그러거나 외국의 이론을 갖고 그러는 경우도 많다. 신돌석씨는 그런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 동네 왕언니 같은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더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신돌석씨는 주민자치회 위원 모집 공고를 보고 왕언니에게 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말을 들은 왕언니는 그거 관청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것 아니냐는 반응을 보였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설득을 하니까 돌석이가 같이 하면 하겠다고 하였다. 신돌석씨는 아직 자기가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되면 자기는 안 한다고 할 수가 없었다. 결국 함께 신청하고 여섯 시간 교육도 받았다. 그런데 신돌석씨는 그만 추첨을 통해 떨어지고 말았다.

▲ [삽화-백소(白笑)]

주민자치회 위원은 정원이 50명이다. 신청자가 정원을 초과하면 추첨을 하게 되어 있다. 직접민주주의의 정신에 따라 투표가 아니라 추첨으로 하는 것이다. 신돌석씨는 처음에는 의아했지만 추첨으로 하는 것이 주민의 능력을 믿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신돌석씨의 동은 77명이 신청을 했는데 교육을 모두 이수한 사람은 57명이었다. 이 사람 중에 추첨을 해서 7명이 떨어지는 것인데 하필 신돌석씨가 거기에 들어갔다.

왕언니는 돌석이가 떨어졌으니 자기도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런데 코로나19 때문에 제대로 모임이 되지 않고, 5월 들어서 분과위를 구성하면서 위원 아닌 사람도 분과위 활동은 할 수 있다고 하자 함께 하자고 하면서 그만두겠다는 말을 접었다. 그러던 중에 왕언니는 주차 문제에 관심이 꽂히면서 주민자치회를 통해 뭔가 해보겠다는 생각을 했다. 서울에 있는 주민자치회에서 주차장 운영 등을 한다는 사례도 알아보았다.

신돌석씨 동네에 있던 군부대가 장소를 옮긴 지 벌써 2년이 되었다. 거기를 무엇으로 쓸 것인지에 대해 주민들의 관심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돈 좀 많은 사람들이나 부동산업자, 건축업자 등은 거기에 아파트를 지어야 동네가 산다고 하였다. 시민단체에서는 도서관이나 박물관을 짓자고 하였고, 일부 주차 시설을 만들자는 의견도 있었다. 녹지공원을 만들자는 의견을 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의견들에 대해 지역구 국회의원, 도의원, 시의원, 그리고 동장이나 주민센터에서는 토양정화사업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근거로 즉답을 회피하였다. 그런데 토양정화사업은 벌써 작년에 끝났다. 그것을 버젓이 부대 정문에 붙여 놓고도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지 않으면 그런 소리들을 했다. 왕언니는 이걸 관철해야겠다는 생각을 갖는 듯하였다. 주민자치회에서는 연 1회 주민총회를 하게 되어 있는데 이때 반드시 이 문제를 의제화하겠다고 하였다.

신돌석씨가 저녁에 퇴근하는 길에 골목을 지나는데 저쪽에서 왕언니가 오고 있었다. 손을 번쩍 들더니 외쳤다.

“돌석이, 오늘 주민자치회 전체 회의를 해서 내가 한마디 했고, 다들 호응했어.”

“뭔데요. 골목 주차를 강제하는 거요?”

신돌석씨는 아침 일도 있고 해서 구사장을 응징하는 이야기를 했나 하고 생각했다. 골목 주차를 강제하는 것에 대해 동네에서 이야기가 안 된 건 아니었다. 신돌석씨도 시청과 도시공사에 가서 말한 적도 있었다. 직접 담당한다는 주차시설팀에 갈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실행되기는 어려운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왕언니가 그 문제에 집중하니 그것을 의제화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어이 돌석이, 내가 누구야? 주민을 위해서 일하는 주민자치위원 아니야? 그런데 짜잔하게 구사장 응징하는 의제를 제출해? 안 되지. 저 사람 꼴 보기 싫은 것은 내가 계속 싸우면 되는 거고, 주민 전체를 위해 군부대 주차 시설 설치 건을 주민자치회 이름으로 제안하고, 주민총회에서 안건으로 다루자는 거야.”

“아, 그렇군요. 축하합니다. 누님. 정말 잘 하셨어요.”

“코로나 19 때문에 조금 주저되지만 주민총회를 8월에는 꼭 하자고 했어. 안 되면 온라인으로라도 하자고 했지. 요즘 화상통화 못하는 사람 없잖아. 못하면 옆에서 도와주면 되고. 돌석이도 꼭 참석해서 좋은 이야기해야 돼.”

“네 누님. 여부가 있겠습니까? 축하주로 막걸리 한 잔 하시죠. 저희 집에서.”

“그럴까?”

왕언니의 얼굴에 기쁜 기운이 가득했다. 신돌석씨는 오늘도 술자리가 끝날 때쯤 왕언니가 ‘사노라면’을 부르겠지 하고 생각하며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왕언니는 요즘 드라마에 이 노래가 나오더라면서 무척 좋아했다. 70년대 노조할 때 부르던 노래라며 2절의 ‘고운 님’을 ‘우리 동지’로 바꿔 부르곤 하였다. 오던 길을 되돌아서 가게에 가서 막걸리를 사오면서 신돌석씨도 ‘사노라면’을 흥얼거렸다. 

 

필자 정해랑(鄭海郞)

서울에서 태어나 여의도 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노동정책연구소 정책실장, 경희총민주동문회 회장,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재생의 담론 21세기 민족주의>(2010년, 공저), <공주와 도둑들>(201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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