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피리


▶ 봄은 왔건만 봄을 등지고 북녘 창 앞에 끓어 앉은 「메마른 심정」이 있다.

옛날이면 십년여일(十年如一)히 빈 창자를 얼싸안고 삼간초옥(三間草屋)에서 사서삼경(四書三經)에 몰두하는 남산골 샌님도 있었다. 부귀영화를 등지고 누항(陋巷)에서 천하대세를 논하되 절개가 등등했던 남산골 샌님 가운데 사육신(死六臣)의 정열이 쏟아져 나왔는가 하면 허생(許生)처럼 뜻만 있으면 의리에 따라 일확천금하는 세욕(世俗)의 이재(理才)도 숨어 있었다. 오늘의 「메마른 심정」을 분석해보더라도 소외(疏外)되어가는  「휴매니즘」과 미치광이처럼 날뛰는 득세자와의 모순이 볼만하다.


▶ 조카 단종을 물리치고 하상(下床)에 앉아 힐문하는 세조를 보고 「이 쇠가 차니 다시 구워오라」외친 성삼문의 기개가 삐틀어진 사회조건으로부터 완전히 소외되어가는 오늘의 야심적 「인텔리」 노동자 농민에게 전연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은 큰 착각이다. 악마의 편을 드는 자와 천사의 편에 선 이 숱한 양심의 저항이 다탄한 한강수모양 매섭게 몰아치며 소용돌이친다.


▶ 대낮의 어둠이 민주주의라는 허울 좋은 간판아래서 짙어만 가는 이 메마른 땅위에 멀리서 가까이 울려오는 「보리피리」 소리가 있다. 봄이 와 산과 들에 생기가 돌라치면 누구의 악기도 될 수 있는 이 피리는 이 땅의 흙에서 태어나, 흙과 더불어 뒹굴다가 필경 흙으로 돌아가는 이 나라 주인공의 하소연을 전해주는 다시없는 벗이요. 어떠한 총칼도 핵무기(核武器)도 어림없는 굳건한 정의의 무기도 될 수 있다. 그 구슬픈 가락이 「오후의 목신(木神)」을 맒아 흥타령으로 바꿔질 수 있어, 때로 조심스럽게 때로 성난 사자의 울부짖음처럼 아름다움과 올바른 것을 위하여 끊임없이 항의하고 설복하여 마지 않으니...


▶ 우리 모두들 「보리피리」를 손에 들어 입에 물고 삼천만의 대「심포니」가 되어 노래 부르자. 자유와 빵과 장미꽃의 교향곡을 민주와 평화와 통일조국의 합창을 힘차게 시작해 보자.


▶ 경상도라 청송군, 약수터로 이름난 어느 산마루에서 이 서방과 김 생원은 후유- 한숨을 짓는다. 「보리피리」가 머리에 떠오르기에는 너무나 배고프고 지치고만 그들인가 보다. 돈이 없어 중학을 집어치우고 시골집을 튀어나온 명동의 「슈샤인·보이」는 오늘도 병든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구두만 닦는다. 가고파라 집으로 - 소년은 노래를 잊었다.

 
▶ 사월은 오고 사월이 오면 청명, 한식, 곡우가 잇달아 오건만 노래를 잊어버린 절량농가나 배틀어진 도회의 동심은 언제나 가셔질는지- 우리 모두들 정말 마음과 귀를 가다듬어 「보리피리」소리에 새로운 앞날에의 희망을 걸어보세. 노래 부르며 일하고 싸워나가세.

▲ 보리피리 [민족일보 이미지]

<민족일보> 1961년 4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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