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연재를 다시 시작하며

58년 개띠 노동자 이야기를 다시 하려고 합니다. 잠시 쉰다는 것이 1년을 넘겨 버렸습니다. 그 동안 우리의 주인공 신돌석씨도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세상은 많이 변한 것 같은데 어찌 보면 완강하게 버티며 변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변한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그보다도 변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소소한 일상을 통해 그려 보고자 합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응원과 질책을 부탁드립니다. / 필자

 

▲ [삽화-백소(白笑)]

왕언니와 구사장이 싸우는 동안에도 뻐꾸기는 울고 있었다. 신돌석씨는 도시에서 자라서 그런지 어렸을 때는 뻐꾸기 소리를 직접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처음 들은 것이 고등학교 때 남한산성 밑으로 이사 가고 나서였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아버지 돌아가신 뒤 망태산 동네가 대대적인 재개발에 들어갔다. 거기서 얻은 딱지만 갖고는 재개발한 서민 아파트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 결국 투기꾼에게 딱지를 팔고 당시로는 집값이 쌌던 성남으로 가게 되었다.

성남에서도 당시에는 외진 곳이 은행동이었다. 남한산성 바로 밑이었다. 수도가 안 들어와서 펌프를 사용하는 곳인데 바닥에 물이 말라서 종종 물지게로 공용 펌프에서 길어오기도 해야 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뻐꾸기 소리를 들었다. 학교가 멀어서 새벽에 나가고, 밤늦게 들어오곤 하니 뻐꾸기 소리는 생각도 못했는데 방학이 되고 제법 느긋하게 집에 있다 보니 듣게 된 것이었다.

처음에 신돌석씨는 어느 집에서 나는 시계 소리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형이 잘 들어보라고 했다. 뻐꾸기 소리가 맞다는 것이었다. 신기했다. 그때 그 감동이 정말 대단했다. 그런데 얼마 뒤부터는 잘 들리지 않았다. 남한산성 바로 밑에 살다가 공단 쪽으로 이사 가서 안 들리는 것인지, 아니면 신경을 쓰지 않게 된 것인지, 뻐꾸기가 사라진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 소리를 여기 이사 와서 듣게 되었다. 여기서는 남한산성 밑에서보다 훨씬 뚜렷하게 들렸다. 처음에는 출근 준비할 때만 들려서 뻐꾸기는 아침에만 우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귀농한 친구 집에 갔다가 오후에도 뻐꾸기가 운다는 것을 알았다. 어느 날은 새벽에 잠이 깼는데 뻐꾸기가 울었다. 깜깜한 데도 우는 걸 보니 밤에도 울 것 같았다. 그런데 밤에 들어본 기억은 없다.

통장으로 추천되었다가 떨어진 뒤부터 왕언니와 동네 사람들은 오히려 자주 어울렸다. 여자들이 주로 어울려서 아내가 함께 했지만 간혹 신돌석씨도 함께 할 때가 있었다. 한번은 왕언니와 신돌석씨가 바로 앞자리에 앉아서 술을 마시게 되었다. 신돌석씨가 궁금해서 물었다. 어떻게 해서 노동가요를 잘 아느냐고 했다. 왕언니는 씩 웃더니 자기가 기업 도산시키려고 도산에서 교육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신돌석씨는 처음에 무슨 말인가 했다가 이내 알아차렸다. 70년대에 왕성하게 활동하던 기독교 산업선교회를 당시 정권은 도산이라고 불렀다. 거기에 발맞춰서 도산이 들어가면 기업이 도산한다고 언론에서들 떠들어댔다. 물론 신돌석씨는 그런 게 있는지도 모른 채 70년대를 보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 가기 전에 이 공장 저 공장을 다녔지만 자신이 노동자라는 생각을 거의 해보지 않았다. 더욱이 노동운동이란 것은 있는지도 몰랐다.

나중에 80년대 중반 이후 노동운동을 하게 되면서 70년대 민주노조 운동을 했던 분들을 많이 만났다. 왕언니가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다는 것이 신기했다. 이 날은 그 정도만 듣고 말았다. 신돌석씨도 80년대에 공장에서 노조 만들었다가 해고되었다는 이야기를 짤막하게 하였다. 그 이상의 이야기는 서로 부담이 되는 자리였다.

얼마 뒤에 왕언니가 막걸리 두 통을 들고 신돌석씨네를 찾아왔다.

“돌석이 있나?”

호칭도 계속 변했다. 처음에는 신씨, 그러다가 신돌석씨, 최근 들어서는 돌석이로 굳혀졌다. 나이 차이로 보면 그렇게 불러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6-70대에 만난 남녀가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만큼 친해졌다는 것일 게다. 노동운동을 했다는 경험의 공통점이 둘을 가깝게 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노동운동을 하고 있고 거쳐 가기도 했지만, 아직도 노동운동이라는  공통점으로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그날 왕언니에게 들은 과거사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왕언니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 갔다. 아버지가 관청 버스를 운전하는 기사였기 때문에 집안이 그렇게 가난한 것은 아니었다. 고집을 부렸으면 상급학교 진학을 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오빠나 남동생을 위해서 일찍부터 취직하는 것이 여자들의 의무처럼 인식되고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강요하지 않아도, 걱정하는 소리만 들어도 바로 그것이 자기 걱정이 되었다. 오빠나 남동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는 이른바 ‘누이 세대’의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아는 사람 소개로 근처에 있는 공장 사무실에서 심부름 등을 하는 일을 했다. 당시에는 그런 일을 급사라고 불렀다. 남이 시키는 잔일만 한다는 것이 체질에 안 맞아서 현장으로 보내 달라고 했다. 거기서 기술을 배웠다. 기술을 배우는 속도가 다른 사람보다 빠른 편이었다. 그러자 욕심이 생겼다. 이렇게 작은 데 있어야 맨날 그 타령일 것 같아서 당시로는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커다란 방직공장에 기술자로 입사 지원을 했고, 합격해서 입사하게 되었다.

왕언니 집안은 가톨릭 신자였다. 아버지가 얼마나 신앙생활에 엄격하냐 하면 일요일 미사를 드리지 않으면 그날 저녁을 주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왕언니는 공장에 다니면서부터 성당에 나가지 않았다. 피곤하다는 것을 핑계로 댔지만 또래들이 학교를 다니고 있기 때문에 만나고 싶지 않아서였다. 성당은 고등학생부, 대학생부가 있어서 노동자는 갈 곳이 없었다. 그런 사정을 눈치챘는지 부모님도 성당에 가라고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에 직장 동료가 성당에 가자고 하였다. 싫다고 했다. 오히려 그 동료에게 마구 퍼부었다.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 너나 나나 하느님이 사랑하지 않는 게 뻔하지 않느냐? 그러니 공부할 나이에 이러고 있지 않냐? 그래도 그 동료는 자기가 권하는 곳은 가톨릭 노동청년회로 노동청년들이 모이는 곳이라면서 끈질기게 가자고 권했다. 노동청년회라는 말에 귀가 솔깃하기는 했지만 그때만 해도 노동자이면서도 자신이 노동자로 규정당하는 것이 싫어서 계속 거절했다.

▲ [삽화-백소(白笑)]

그러다가 1년에 한두 번 조직을 알리는 일반회라는 모임이 있다고 하면서 거기 한번 가보고 판단하라는 권유에 결국 가게 되었다. 가보니 이전에 다니던 성당과는 딴판이었다. 결국 그때부터 가톨릭 노동청년회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현장 상황을 보니 1공장에는 노조가 있는데 왕언니가 근무하는 2공장에는 노조가 없었다. 노동청년회 활동을 하면서 우리 공장에도 노조 한번 만들어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에 가톨릭 노동청년회는 노조 결성 지원 등을 하기보다는 생활 변화, 의식 변화를 위한 활동을 위주로 했다. 당시에는 노동자들에 대한 천시가 워낙 심했다. 공돌이, 공순이라고 불렀고,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그러다 보니 남의 옷을 빌려 입고, 읽지도 않는 책과 노트를 끼고 여대생인 척하면서 출근을 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많았다. 왕언니도 노동청년회에서 활동하기 전까지는 그랬다고 한다.

노동청년회 일을 하면서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이런 허위의식을 깨고 당당하게 하느님이 이 세상을 창조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 노동자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1주일 생활 약속을 하고, 1주일 뒤에 실천을 보고하는 일들을 했다. 생활이나 의식에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뭔가 부족했다. 노조를 만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노동청년회의 다른 회원들과 함께 산업선교회를 찾아가게 되었다. 거기서 노동법을 배우고 노조 조직하는 방법도 배웠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1공장에 노조가 있다고 해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 어용노조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어용노조라도 있으면 좋은 점도 있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이 어용노조를 민주화하자는 일에 가톨릭 노동청년회, 산업선교회 등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뜻을 모으게 되었다. 그러면서 투쟁이 시작되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들을 요구하는 투쟁이었다.

일상투쟁도 처음에는 쉬운 것이 아니었다. 중간관리자들이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치고, 심지어 때리기까지 했다. 그럴수록 강하게 나갈 필요가 있었다. 급식 개선을 위해 식판 던지기를 시작했다. 멀건 국물에 멸치 몇 마리 떠 있으니 누구나 공감했다. 처음에 누가 작심을 하고 나가니까 많은 사람이 호응했다. 종 치기 전부터 청소 시작하고 종 치면 바로 옷 갈아입기, 연장 수당, 퇴직금 등 못 받은 임금 받아내기 등도 하였다.

그런 일상투쟁을 하다가 뜻이 모아지면서 노조민주화를 위한 대규모 투쟁이 기획되었다. 때는 1973년이었다. 유신이 선포되고 1년도 안 지난 때였다. 자칫하면 엄청난 희생을 당할 수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싸움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핵심적인 사람들의 신앙심 때문이었다. 당시 노조민주화투쟁을 주도하던 사람들의 다수는 가톨릭 신자였다. 노동청년회 소속인 사람도 있었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희한하게도 현장에서 알게 되면서 참여하게 된 사람들 중에도 가톨릭 신자들이 많았다. 아마도 당시의 살벌한 상황 속에서 그나마 옳은 소리를 외치던 가톨릭의 분위기를 반영한 듯하였다. 그래서 당시 사용한 전술도 성당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1973년 9월 3일에 진행되어서 9.3투쟁이라 하였는데 노조 민주화를 열렬히 원하는 노동자 600여 명이 명동성당으로 집결하는 것이었다.

원래 가톨릭에서는 미사 드리러 갈 때 여자들은 미사포를 쓰지 않으면 들여보내지도 않았다. 그런데 미사포도 쓰지 않은 600여 명이 6시 미사에 맞추어 들이닥치니 성당도 놀라고 경찰들도 놀랐다. 허둥댔지만 막을 도리는 없었다. 특별히 구호를 외치거나 시위를 하지는 않았으니 어찌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중앙정보부와 정권 핵심에 전달되면서 결국 기업 측에 압력을 넣어서 노조 집행부가 교체되었다.

회사는 처음에는 상황을 어떻게든 바꿔 보려고 했다. 대기업이므로 자기들 나름대로 로비할 데가 있었다. 청와대 중앙정보부 보안사 검찰 경찰 등 권력기관에 모두 줄을 대서 새로 선출된 민주노조 지도부를 무효화시켜 보려고 했다. 그들의 로비가 통할 것 같은 상황에서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그 해 송년회에서 사장이 노조 지부장을 폭행한 일이었다.

민주화된 노조 집행부와 회사 측의 만남은 처음에는 그런대로 부드럽게 나갔다. 양쪽 다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술이 한두 잔 들어가다가 사장이 반말로 지부장에게 말하면서 노조가 생산량 증가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말을 하였다. 민주화된 집행부의 지부장이 그 말을 듣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회사가 어떻게 하느냐가 둘 사이의 관계를 정할 것이라고 맞받았다.

사장의 인상이 구겨졌지만 참아 넘겼는데 그러다가 갑자기 주먹을 날렸다. 그리고 하필 그 주먹에 항상 자랑처럼 여기는 육사 출신 반지가 끼어 있었다. 지부장의 얼굴에 피가 흘렀다. 이런 인간들은 신돌석씨 경험으로도 노동자들이 자기와 평등하게 되는 것을 도저히 참지 못하였다. 처음 공장에서 노조 만들 때 전무라는 자는 평소 점잖은 척했는데 노조 만든다니까 마구 폭력을 휘두르면서 난리를 쳤었다.

송년회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지부장은 병원으로 옮겨졌고, 집행부가 일제히 사장을 성토하면서 회사 측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조합원들도 술렁였다. 결국 이 사건은 노조 민주화를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상대의 실수가 역사의 진보를 이루는 데 기여하는 일은 커다란 국가 차원의 일이나 일개 사업장의 일이나 마찬가지인 듯하였다. 물론 그 이후도 어려운 일은 없지 않았지만 민주노조의 힘찬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 [삽화-백소(白笑)]

왕언니는 이 이야기를 할 때 잠시 숨을 고르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 모습이 그렇게 경건해 보일 수가 없었다. 신돌석씨도 오래 전 일을 떠올렸다. 왕언니가 노조를 민주화했다는 때로부터 12년이 지난 1985년 파업을 하고, 노조를 결성하였다. 아무것도 모르던 사람들이었다. 파업을 할 때 아는 노동가요가 없어서 ‘진짜 사나이’ 등을 개사해서 불렀다. 그런데 당당히 노조를 만들었던 것이다.

“요즘 성평등을 이야기하는데 노조가 생기고, 민주화가 되어야 성평등도 되는 거야. 우리가 어용노조일 때 남녀 임금차별이 7 : 3이었어. 민주노조가 되면서 임금차별 없애는 안건을 넣어서 5 : 5가 되었어. 젊은 여성들 만나면 그런 이야기를 해. 민주화 없이, 노동인권 없이 성평등 안 된다. 아니 그런 성평등은 다 거짓부렁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아내가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언니. 성차별 누가 당해요? 우리 같은 사람들이 당하지. 잘난 뇬들은 그런 거 안 당해요. 아니 당해도 그냥 남자들보다 더 높아지지 못한다는 거지요.”

  신돌석씨는 옆에서 허허 웃었다. 하긴 신돌석씨의 경험과도 일치하는 내용이다. 물론 여검사들이 성추행 당한 이야기들을 보면 이른바 ‘잘난 여자’들이라고 성차별 당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쨌든 힘이 약할수록 그 정도는 심했다. 신돌석씨도 노동운동을 하기 전에는 그런 걸 잘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노동운동을 하면서 눈이 뜨이다 보니 성차별이 바로 계급차별의 한 형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왕언니 말대로 노조가 생기자 그런 게 없어지기 시작했다. 노조준비위를 하면서, 또 파업을 하고 노조를 결성하면서 공장 내에서 그리 흔하던 성희롱이 사라졌다. 관리자들의 폭행, 폭언도 사라지고 얼마나 좋았던가. 그러나 몇 달의 꿈이었다. 노조가 깨질 때의 그 아픔, 그리고 해고 투쟁의 처절함. 지금 돌이켜 보면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냉정하게 되돌아보면 슬픈 기억이었다.

왕언니의 노조는 무려 9년 동안 민주노조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9월에 민주화되었고, 9월에 깨졌다. 1982년 9월 27일. 무자비한 경찰의 침투로 마침내 민주노조는 와해되고, 600여 명이 해고되었다. 70년대 민주노조가 하나 둘 깨져 나가면서 가장 늦게까지 민주노조의 깃발을 지키던 왕언니의 노조도 민주노조를 존재하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전두환의 폭압 앞에서 끝내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불과 몇 년 뒤에 구로동맹파업도 나고, 전국 곳곳에서 민주노조가 우후죽순처럼 생겼다. 6월 항쟁 뒤에는 7, 8, 9월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났다. 노동운동하면서 동지들과 여러 번 다짐하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조직은 뿌리 뽑혀도 운동은 뿌리 뽑히지 않는다. 이 땅에 모순이 있는 한 조직이 깨져도 누군가가 또 운동을 한다. 우리는 패배가 불가피할 때는 잘 져야 한다. 다음 사람들이 보고 배워서 좀 더 나은 운동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왕언니의 노조는 어땠을까? 노조가 침탈당한 9월 27일을 전후해서 매년 모인다. 노조에 그때 9개 부서가 있었는데 부서별 모임도 하고, 소모임별로 보기도 한다. 이렇게 모이면 1년에 4-5회 정도 보게 된다. 지금도 모이는 사람이 150명 정도 된다. 해고당한 사람이 600여 명인데 당시 안기부, 경찰 등이 명단을 가지고 가서 지금 연락되는 사람이 그 정도다. 남편들이 같이 오기도 하고, 자녀들도 모인다. 자녀들끼리 결혼한 사람들이 네 쌍이나 된다.

노조가 침탈당해도 40년 가까이 모일 수 있는 이 단결력이 부러웠다. 신돌석씨의 노조는 깨지고 난 뒤 어떻게 되었나? 해고투쟁 한다면서 잠시 같이 모였을 뿐이다. 그 뒤로는 함께 모이기는커녕 개인적인 연락도 거의 없었다. 신돌석씨는 지난 삶을 되돌아보며 반성하는 마음이 들었다. 다음 직장에서 노조활동도 하고, 여기저기 싸움하는 데 많이 다녔지만 정작 처음 노조 만들었을 때의 동지들은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았었다.

물론 당시 조합원들은 너무 갑자기 당한 일들이라서 그들의 의식이 상황을 좇아가기 어려운 점도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노조의 연대활동을 하면서 여기저기서 노조활동을 하는 사람들 몇을 보기는 했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 조직한다는 생각은 일찍 접었다. 왜 그랬을까? 왕언니네는 달랐다. 모토가 ‘못 다 이룬 꿈도 아름답다’이다. 그리고 자녀들의 모임이 ‘못 다 이룬 꿈을 이어가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정말 대를 이어서 가는구나.

왕언니가 그렇듯이 여기저기서 활발하게 산다고 한다. 국회의원, 지방의회의원, 유명인사가 되는 것만이 잘 사는 게 아니다. 분리수거 리더도 하고, 통반장 하는 사람도 많다. 아파트 사람들 설득해서 경비실에 에어컨도 놔주고, 전기요금이 많이 나오니 태양광을 설치하기도 한다. 아주 신나게들 산단다. 언제 어디서든 좋은 일 하면서 살아가자는 신념으로 산다는 것이다. 이런 분들이 있는 아파트에는 갑질을 해서 경비원이 극단적 선택하게 만드는 일도 없으리라. 이웃 주민 모르게 굶어 죽거나 병들어 죽는 일도 없을 것이다.

 

필자 정해랑(鄭海郞)

서울에서 태어나 여의도 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노동정책연구소 정책실장, 경희총민주동문회 회장,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재생의 담론 21세기 민족주의>(2010년, 공저), <공주와 도둑들>(201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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