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라디오 뉴스 
- 최영미
 
무언가 버틸 것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지 
그게 아이든 집이든 서푼 같은 직장이든
어딘가 비빌 데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지 
아프가니스탄의 총소리도 잊을 수 있고 
사막의 먼지 위에 내리는 눈* 녹듯 잊을 수 있고 
종군위안부의 생생한 묘사, 아나운서의 침착한 목소리 
아이 떼놓고 울부짖는 엄마의 넋나간 얼굴도, 창밖으로 
훌훌 털어버릴 수 있지 
버스만 내리면, 이거 또 지각인가 
손목시계 내려다보며 혀 끌끌 차며 
정말 아무렇게나 잊을 수 있지 
무언가 버틸 게 
있다는 건 무조건 좋은 일이지 
특히 오늘같이 세상 시끄러운 날은

        * 오마르 하이얌 『루바이야트』에서 


 정의연(정의기억연대)과 이용수 할머니의 갈등이 일파만파로 퍼져나가고 있다. 마음이 착잡하다. 

 언론과 여론은 정의연을 파렴치한 집단으로 몰아가고 있다. 한순간에 오랫동안 사회적 지지와 존경을 받아온 한 시민단체가 악의 축으로 전락했다. 정의연의 어떤 억울함의 하소연도 분노도 통하지 않을 듯이 보인다. 

 ‘윤모 장모 사건, 나모 자녀 사건, 김모 성폭행 사건...... ’ 등은 그리도 쉽게 묻히면서...... .   

 한 인간, 한 조직을 선악, 도덕의 잣대로 재어 하루아침에 악의 축으로 만들어 단죄하는 건, 너무나 오래된 지배세력의 통치방식이다. 

 사실 인간사, 세상사는 선악의 잣대로 잴 수 없다. 선과 악이 얼마나 복잡하게 뒤얽혀 있는가! 

 하지만 지배세력이 한 인간, 한 조직을 악으로 규정하고 나면 어느 누구도 거기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선악으로 뼛속까지 길들여진 우리의 노예의식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자 니체는 피를 토하듯이 외쳤다. “신은 죽었다!” 그는 인간을 살리기 위해 선악의 근원, 도덕의 근원인 신을 죽인 것이다. 

 우리 대다수는 소시민들이다. 도덕과 의무의 무거운 짐을 지고 햇살이 뜨겁게 내리쬐는 사막을 묵묵히 걸어가는 낙타들이다. 

 ‘무언가 버틸 것이/있다는 건 좋은 일이지/그게 아이든 집이든 서푼 같은 직장이든/어딘가 비빌 데가/있다는 건 좋은 일이지’

 ‘아프가니스탄의 총소리도 잊을 수 있고/사막의 먼지 위에 내리는 눈* 녹듯 잊을 수 있고/종군위안부의 생생한 묘사, 아나운서의 침착한 목소리/아이 떼놓고 울부짖는 엄마의 넋나간 얼굴도, 창 밖으로/훌훌 털어버릴 수 있지/버스만 내리면, 이거 또 지각인가/손목시계 내려다보며 혀 끌끌 차며/정말 아무렇게나 잊을 수 있지’

 “어흥, 나는 자유야!” 낙타가 자신의 등에 진 짐을 훌훌 벗어버리고 산천초목을 향해 포효하는 사자가 되면, 도덕과 의무의 허상이 훤히 보일 텐데.    

 우리가 니체의 사자가 되고 초인이 되어야 지금의 사태가 제대로 보일 텐데. 

 그래야 정의연의 큰 공적이 보일 텐데.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그들의 만행을 세상에 알리고 배상을 받아내려 힙겹게 싸워온 그들의 공적과 아픔이 훤히 보일 텐데. 그 아픔 위에 ‘회계부정’ 같은 허물도 함께 보일 텐데. 
 
 나는 한 운동단체에서 몇 년 간 활동한 적이 있다. ‘수도자의 길’을 걷는 활동가들을 많이 보았다. 그들은 많은 분들이 지지하고 격려해주었기에 그 길을 갈 수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또한 대중의 격려와 지지를 잃어가는 스스로 기득권화되는 운동권 출신들도 많이 보았다. 

 그래서 오랫동안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려온 분들에 대해 뭐라고 말한다는 건 두렵다. 그 분들의 공과 과는 우리 모두가 앞으로 함께 감당해야 할 몫이기 때문이다.  

 벌써 보수, 수구세력들은 수요 집회와 소녀상을 없애라고 데모를 하고 위안부를 매춘부라고 망언을 하지 않는가! 

 우리는 광주 항쟁, 6월 항쟁, 촛불 혁명에서 소시민이었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당당한 시민이 되는 기적을 수없이 보아왔다.

 우리는 소시민을 믿어야 한다. 그들의 집단지성을 믿어야 한다. 
 
 파사현정(破邪顯正), 결국 잘못된 건 깨져나가 옳은 게 드러나게 되어있다. 우리는 우리 모두의 일반 상식이 선악, 도덕을 넘어 깊이 사유할 수 있을 때까지. 수구세력이 감히 우리 역사의 광장에 발을 내딛지 못하는 그날까지. 우리는 계속 거듭나야 한다. 역사의 강물이 되어 함께 도도히 흘러가야 한다.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중학교 졸업 후 고향을 떠나 철도고등학교 운전과를 졸업한 후 기관조사로 근무하다 충북대학교 사회교육과에 진학했습니다.

졸업 후 중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동안 잠시 전교조 활동을 했습니다. 교직을 떠난 후 빈민단체(주거연합)에서 활동하다 한길문학예술연구원에서 시 창작을 공부했습니다. ‘리얼리스트 100’에서 주는 제6회 민들레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지금은 경기도 부천에서 살며 글을 쓰고 인문학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시집 ‘나무’ 산문집 ‘명시 인문학’ 에세이집 ‘숲’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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