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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넷째 이야기, 산에는 진달래 들엔 개나리(1)

기사승인 2020.05.30  01:0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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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해랑 연재소설> 노동자 신돌석씨의 하루 (28)

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연재를 다시 시작하며

58년 개띠 노동자 이야기를 다시 하려고 합니다. 잠시 쉰다는 것이 1년을 넘겨 버렸습니다. 그 동안 우리의 주인공 신돌석씨도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세상은 많이 변한 것 같은데 어찌 보면 완강하게 버티며 변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변한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그보다도 변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소소한 일상을 통해 그려 보고자 합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응원과 질책을 부탁드립니다. / 필자

 

   
▲ [삽화-백소(白笑)]

사안에는 지인다알래, 드을엔 개나아아리...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서울에서 늦게까지 모임을 하고, 전철역에 내려서 택시에 타자마자 이미자의 ‘기러기 아빠’가 흘러나왔다. 기사가 나이도 50이 채 안 되었을까 하는 사람인데 뜻밖의 일이었다. 어두워서 잘못 봤나 하고 오른쪽으로 몸을 기울여 봤는데 마스크를 낀 상태라 정확히 알기는 어려워도 이미자 노래를 좋아할 정도의 나이는 아니었다.

“기사님 이미자 노래를 다 들으시네요.”

신돌석씨가 묻자 택시 기사는 씩 웃었다.

“저희 어머니가 생전에 이미자 노래를 무척 좋아하셨죠. 그래서 어머니 생각하면서 듣습니다.”

신돌석씨처럼 서울 변두리에서 자란 사람들은 대중가요를 어린 시절의 추억과 함께 기억한다. 동네 이발소에서 크게 틀어 놓았던 노래를 무심코 따라 하던 기억은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다.

“이 노래가 ‘기러기 아빠’인데 라디오 드라마 주제곡이었던 것 아세요?”

신돌석씨는 말해 놓고는 갑자기 꼰대 티 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입에서 나간 말이었다.

“그런가요? 저는 제목은 아는데 라디오 드라마 주제곡인 줄은 몰랐네요.”

...하긴 그럴 것이다. 신돌석씨가 초등학교 다닐 때 하던 라디오 드라마였다. 그러니 50도 안 된 듯한 기사가 알 리가 없을 것이다. 어쩌다 한번씩 들었고 매우 오래되어서 내용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아빠가 바람피우고 집을 나간 가운데 벌어지는 일들이었다는 것만 기억이 난다.

그래서 신돌석씨는 기러기 아빠라고 하면 바람피우는 아빠라고 생각했는데, 언제부턴가 자녀의 조기 유학 때문에 아내와 자식을 외국에 보내고 혼자 국내에서 사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그러면 그때도 기러기 아빠가 있었나요?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드라마에서는 바람피우는 아빠였는데, 어쩌다 뜻이 바뀌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기러기 아빠에서 시작해서 요즘은 독수리 아빠, 펭귄 아빠, 참새 아빠라는 말도 생겨났다고 하네요.”

기사가 하는 말들을 신돌석씨는 처음 들었다. 독수리는 뭐고, 펭귄은 무엇인가? 참새는 또 무엇일까? 궁금해서 물어보니 기사가 설명하기 시작했다.

“원조가 기러기 아빠이고요, 형편이 좋아서 언제든 외국으로 가족을 보러 갈 수 있는 사람은 독수리 아빠라네요. 여유가 없어 외로워도 국내에서 발만 동동 구르는 사람은 펭귄 아빠이고요, 외국으로 보낼 형편이 안 돼 강남에 소형 오피스텔을 얻어 아내와 자식만 강남으로 보내는 사람을 참새 아빠라고 한다죠. 재밌는 말들이지만 씁쓸하기도 하지요. 저희 형님도 펭귄 아빠로 발만 동동 구르다가 결국 이혼했어요. 형수가 미국에 아주 눌러 살겠다는데 형님이 갈 수도 없고... 헤어지잔 이야기지요. 거기서 놈팡이를 만났는지...”

택시 기사의 말이 이어지자 신돌석씨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창밖만 바라보았다. 잘 알지도 못하는 손님한테 이렇게 이야기를 늘어놓으니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전철역에서 탄 택시는 그린벨트로 묶인 지역을 지나 신돌석씨가 사는 동네로 가고 있었다.

이미 개나리도 지고 진달래도 졌다. 올해는 이 도시가 자랑하는 3대 꽃 축제가 코로나 때문에 모두 취소되었다. 갑자기 듣게 된 노래에 반응을 보여서 말을 걸었다가 괜히 난처해진 느낌이었다. 택시 기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신돌석씨도 말을 하지 않아서 침묵만 흐르는 가운데 밤길을 택시가 달려갔다.

신돌석씨 가까운 사람에는 기러기 아빠가 없다. 워낙 없는 사람들만 주변에 있어서 그런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고교 동창 중에는 잘 사는 친구도 꽤 있었지만 그런 친구들과는 어쩌다 경조사 때 보면 아는 체나 하는 정도라서 그런 사생활은 알지도 못하였다. 노동운동하면서 대학 출신들을 많이 알게 되었지만 그런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딱 한 사람 있었다. 신돌석씨를 노동운동하게 만든 조철구였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노동운동을 알게 만든 사람이었다. 신돌석씨가 알았던 인텔리 중에서 가장 철저하게 운동을 실천하며 살아갔던 사람인데 그가 한때 기러기 아빠로 살았다는 사실이 신돌석씨도 믿어지지 않았다.

신돌석씨가 그를 만난 것은 1984년 가을이었다. 군대를 갔다 오고 나서 여기저기 직장을 옮겨 다니다가 공단에 있는 형광등 갓 제조업체에 취직하였다. 그때 입사 동기가 된 것이 바로 조철구였다. 그는 그때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자기가 대학 출신이란 것을 속이고 공장에 들어왔다. 말하자면 위장취업자였던 것이다.

그와 함께 프레스반에 소속되어서 친목회도 만들고 노조결성준비위까지 만든 상태에서 자연발생적인 파업이 일어나고 그가 노출되어서 해고되었다. 이어서 노조를 결성했으나 회사측의 공격으로 와해되고 결국 신돌석씨도 회사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함께 해고투쟁을 하다가 그가 기획한 가두투쟁에 참여하게 되었고, 경찰의 검거를 뚫고 도망칠 수 있었으나 경찰에 붙잡힌 그를 구하려고 하다가 끝내 함께 들어가서 구류를 산 뒤 신돌석씨의 인생은 대전환을 이루게 되었다.

신돌석씨는 그 뒤 조철구가 속해 있는 조직에서 일하였다. 그러다가 수배가 되었고, 붙잡힌 뒤에 무시무시한 대공분실에 끌려갔다. 그가 있는 곳을 불라고 물고문 매타작을 당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다시는 조철구 근처에도 가고 싶지 않을 텐데 희한하게도 그와 다시 가까워졌다. 대공분실에서 구치소로 넘어가고 집행유예로 석방된 뒤 쉬다가 지역을 옮겨서 다시 현장에 들어갔다.

   
▲ [삽화-백소(白笑)]

조철구를 만난 것은 몇 년이 지난 뒤였다. 1992년 12월에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이른바 문민정부가 이듬해에 출범하였다. 3당 합당을 통해 만들어진 정부라 뭐가 다르랴 했지만 변화는 꽤 있었다. 하나회가 해산되고 전두환 노태우 일당이 구속되었다. 조직 사건에 대한 수사도 거의 대부분 중단된 듯하였고, 수배된 사람들을 더 이상 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는 노동운동단체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체포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공개활동에 나타났다. 이전처럼 가명을 쓰지 않고 실명으로 활동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조직에 속해 있던 많은 사람들이 공개조직 여기저기로 들어갔다. 노동운동단체도 있었고, 노동조합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었다. 시민단체로 들어간 사람들도 있었다.

운동을 그만둔 사람들도 많았다. 사업을 시작한 사람도 있었고, 가게를 차린 사람들도 있었다. 회사에 취직한 사람들도 있었다. 구속된 사람들도 다 석방되었다. 그 중에는 사법고시나 회계사시험에 응시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있었다. 그때 신돌석씨는 다른 지역으로 가서 공장에 취직하였었다.

신돌석씨는 이전의 조직 사람들이 여기저기 노동운동단체나 노조연합체 등에서 일하게 되자 자신도 거기에 가서 일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무도 불러주지 않았다.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불러주었어도 가서 일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당시 노동운동단체 등에서는 거의 봉급이 없었다. 있어도 활동비 조금 주는 정도였다.

지역을 옮기고 나자 아내는 취직을 하지 않았다. 봉재공장 하청업체에서 재하청을 받아서 집에서 미싱 일을 하였다. 이제 신돌석씨네 집에서 가정 경제의 주책임자는 신돌석씨가 되었다. 아내는 그 점에 관해서는 단호했다. 힘찬이와 아름이가 학교에 들어가고 집안 살림 규모가 조금씩 커져 가자 아내가 혼자 돈 벌고 신돌석씨가 하고 싶은 일 하고 사는 것은 사치 그 자체였다.

신돌석씨도 징역에서 나오자마자 공개적인 노동운동연구소에서 잠시 임시직으로 일한 적이 있었다. 외국인노동자 실태조사를 위한 설문지를 배포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일이 끝나자마자 할 일이 없었다. 그것 때문에 잠시 취직을 미뤘는데 아내는 이제 다시는 그런 식으로 일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렇게 불안정하게 살아서 되냐는 것이었다.

그때 아내는 인텔리들과 우리는 다르다는 것을 유난히 강조하였다. 누구는 아내가 의사다. 누구는 약사다. 교사다. 누구 부부는 둘 다 일한다고 하지만 후원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만두면 먹고 살 일들을 잘만 찾더라. 우리는 아니다. 우리가 정신 바짝 차려서 길에 나앉지 않게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아내의 주장이었다. 그렇게 보려고 하니까 보이는지 신돌석씨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아내는 많이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런 사정을 잘 아는 조직 사람들이 배려해서 노동운동단체에 나오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현장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더 필요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부터 노조연합조직이나 노동운동단체에서 하는 행사들, 민중운동단체에서 하는 집회 등에 오라는 연락을 자주 받았다. 조철구와도 그래서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씩 보게 되었다.

조철구에 대한 신돌석씨의 신뢰는 상당히 크기 때문에 고민이 되는 일이 있을 때마다 찾았다. 사회주의권이 붕괴되었을 당시에는 조철구가 수배 상태이기 때문에 보기가 어려웠는데 그 뒤 그에 대한 견해를 많이 들었다. 문민정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많이 했다. 물론 주로 조철구의 말을 듣는 것이었다.

2019년 이른바 조국 사태로 많이 혼란스러울 때 신돌석씨는 조철구 생각이 많이 났다. 하지만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10년 전인 2009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니어서이기도 하지만 아마 그가 살아 있었어도 명쾌한 답을 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 역시 이런 문제로 고민했던 이른바 운동권 사람 중의 하나였으니까.

신돌석씨는 조국이라는 사람을 잘 알지 못한다. 비합법조직인 사노맹에 가입해서 활동하다 구속된 전력이 있고, 사법개혁에 대한 신념이나 이론적 깊이가 남다른 사람이라는 정도만 알고 있다. 그가 최초로 검사 출신 아닌 민정수석이 되었을 때 괜찮은 인사라고 생각했고, 법무부 장관이 될 때도 이 사람 정도면 잘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내정되자마자 난리가 났다. 그의 과거 전력에 대한 것이 먼저 나왔으나 이제는 사람들이 그런 문제에 대해 별로 민감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의 비리라는 것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비리라고 하지만 그게 좀 요상했다. 대체로 장관에 내정된 사람의 비리라면 부동산 투기, 병역 비리, 탈세, 주민등록위장전입 등이었는데, 그런 점에서 이 사람은 하나도 문제될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그에게서 문제가 된 것은 공직에 있으면서 사모펀드에 투자한 것, 자녀 입학과 관련된 것, 집안이 운영한다고 볼 수 있는 사학재단에서 동생이 저지른 비리 등 모두 가족과 관련된 것이었다. 사모펀드 투자 문제는 복잡하기도 하고 일반인에게 별로 다가가지 않는 문제였고, 사학재단 비리 역시 진위가 명쾌하게 가려지지 않았다.

뇌관은 자녀의 대입과 관련된 문제였다. 인턴으로 2주간 있었는데 체험활동확인서가 허위라는 것, 그리고 나서 논문의 제1저자로 등재되었다는 것, 부인의 친구가 교수로 있는 공주대에서 인턴을 했는데 허드렛일을 해놓고 인턴을 했다고 했다는 것, 부인이 재직하는 대학에서 받은 딸의 표창장이 위조된 것이라는 등의 혐의였다. 이런 가짜 스펙의 결과로 의과대학전문대학원에 다닌다는 것이었다.

신돌석씨는 너무나 생소한 이야기들이었다. 자식 둘을 대학입시를 보게 했지만 스펙이 뭔지 알지도 못했다. 그런 식으로 자식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는 길이 있고, 운동을 했다는 사람들이 그것을 활용하고 살았다는 사실에 의아할 뿐이었다. 물론 신돌석씨도 주변의 인텔리들이 노동운동할 때와는 다르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대학 입시에 이렇게 한다는 이야기는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조국 청문회가 열리면서 또 다른 감정이 생겨났다. 조국이 너무 저자세로 청문회에 임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 보면 인사청문회에서는 최대한 저자세로 하는 것이 좋다고들 하였다. 일리가 있기는 한 것 같았다. 역시 그에게 부동산, 병역, 위장전입 따위는 없었다. 단지 사노맹 전력을 물고 늘어지려는 공안검사가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별다른 반향이 없었다.

자식 입학과 관련된 문제, 사학재단과 관련된 문제들이 오랜 시간을 끌었다. 그러다가 자정이 다 되어 갔다. 자유한국당 측 의원들이 아내가 기소되면 장관내정자 사퇴를 하겠냐고 계속 물었다. 법사위원장까지도 질문을 했다. 국민의 당 소속인 박지원이 사퇴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것으로 공방을 하다가 자정을 넘겨서 청문회는 끝나 버렸다. 그런데 곧바로 검찰이 조국의 아내 정경심 교수를 기소했다는 속보가 떴다.

이럴 수가 있나. 그렇다면 검찰과 자유한국당 법사위원 사이에 뭔가 오고 가는 것이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같이 청문회를 보던 아내와 힘찬이가 흥분해서 이야기들을 하였다. 신돌석씨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검찰이 기소할 준비를 해놓고 자한당 의원들이 밀어붙여서 사퇴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럴 듯한 기획이다. 이거야말로 검찰 개혁을 못하게 하려는 정치검찰과 그에 야합해서 정권을 공격하려는 야당의 짓이라고 신돌석씨는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사흘 뒤 대통령이 조국 법무장관 임명을 재가하였다. 어차피 청문보고서는 채택될 수 없는 상황이었고, 결국 대통령이 임명을 강행한 것이었다. 검찰의 수사는 이럴 수 있나 싶게 샅샅이 파헤쳤다. 딸과 아들을 비공개 소환조사하였고, 수십 군데를 압수수색하였다. 동생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하여 결국 구속시켰다. 마침내 조국의 집까지 압수수색하였다. 현직 법무장관의 집이 압수수색을 당한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발전인지 아니면 정치검찰의 난동인지 헷갈리는 상황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 가자 조국을 수호하겠다는 사람들이 서초동 검찰청사 앞에서 촛불시위를 하며 항의하기 시작하였다. 신돌석씨는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다. 수도 얼마 안 되었고, 그것이 이슈가 될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세 차례 소규모 집회가 있은 뒤 9월의 마지막 토요일인 28일에 대규모 집회가 있을 거라고 하였다. 신돌석씨는 한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규모가 얼마나 될지 한번 보자는 생각이었다.

 

필자 정해랑(鄭海郞)

서울에서 태어나 여의도 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노동정책연구소 정책실장, 경희총민주동문회 회장,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재생의 담론 21세기 민족주의>(2010년, 공저), <공주와 도둑들>(2017) 등이 있다

 

 

정해랑 jhr137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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