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시민공원에 세워진 5.18당시 무명의 시민군 <김군> 비. [사진-통일뉴스 김익흥 기자]

   “5.18시민군 김군은 1980년 5월 24일 광주 남구 송암. 진월동에서 자행된 
   11공수특전여단의 양민학살에 맞서 지역주민과 동료 시민군의 생명을 구하는 
   과정에서 계엄군에게 사살되었고 그의 시신은 어디론가 유기되었다. 
   이에 그를 기리는 영화 <김군>(감독 강상우)이 제작되었다.

   40주기를 맞이하여 5.18 시민군을 최초로 결성하였던 광주시민공원에 
   이름 없이 사라져간 시민군들을 기리며 비를 세운다.”

  김군동상건립추진위 대표    최진수
  동료시민군                      박창호 이강갑 이재남 최영철
  조각가                            김서경 김운성 
  추진위원                         강진욱 강호성 김용희 박윤경 박정숙 최영심

 

▲ 5.18시민군 <김군> 동상 제막식이 24일 광주시민공원에서 열렸다. [사진-통일뉴스 김익흥 기자]
▲ <김군> 비에 새겨진 글을 낭독하고 있는 박윤경 김군 동상 건립 추진위원.  [사진-통일뉴스 김익흥 기자]

5.18광주민중항쟁 시기 무참히 살해된 어떤 한 시민군, <김군> 동상이 24일 광주시민공원에 세워졌다.

그가 자신들의 눈앞에서 사살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당시의 시민군 동지들, 그 <김군> 덕에 목숨을 건졌다는 미안함을 40년 동안 가슴에 품고 살아낸 최진수(당시 만17세), 이강갑(당시 만22세), 최영철(당시 만18세)씨 등이 <김군>을 진실의 역사로 되살려냈다.

그는 5.18광주민중항쟁을 북한군의 소행으로 날조해온 지만원에 의해 ‘광수 1호’(광수란 광주에 투입된 북한 특수군을 지칭하는 말로, 지만원은 광수 600호까지 있다고 주장)로 지목된 바 있는 사진 속 인물이었다.국가 공식 5.18광주민중항쟁 40주년 기념행사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에 포함되지 못한 무명의 시민군인 <김군>이 그가 시민군으로 처음 나서던 자리인 광주공원에 정확히 40년 만에 동상으로 세워진 것이다.

제막 행사에서 당시 학살현장에 김군과 함께한 시민군 동지 최진수씨는 40년 동안 해마다 5월이면 죄의식에 광주를 피해 다녀야 했다고 돌아보며 “내가 김군 대신 저 자리에 있으면 좋겠다. 살아있는 한 기억할 것”이라는 말로 지난 40년간의 아픔을 곱씹는다.  

▲ 동상 제작자 왼쪽부터 김운성 작가, 김서경 작가. [사진-통일뉴스 김익흥 기자]

<김군 비>를 제작한 조각가 김서경, 김운성 작가는 “형상을 통해 총을 들고 끝까지 싸웠던 수많은 ‘김군’이 87년 민주화투쟁 그리고 촛불을 통해 되살아나는 의지,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생명들을 담아내고자 했으며 아직은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가려진 역사를 김군의 다리가 묻힌 돌무지로 표현하고자 했다”면서 “위안부 할머니들과 함께 작업할 때와는 달리 김군과 같이 신분이 고아, 넝마주이 등으로 아직은 다 밝혀지지 않은 탓에 외롭게 무명으로 있다는 사실에 또 다른 아픈 감정을 간직하며 작업했다”고 창작과정을 돌아봤다.

<김군>을 확인하고 시신을 찾고, 동상을 세워 <김군>을 역사의 수면위로 끌어올리려는 최진수씨의 20년 지기인 강진욱씨는 “4.19때와 마찬가지로 더 많은 희생을 치른 사람이 기억되지 못하는 역사에 대한 아쉬움을 느끼며 이름 없는 무명의 시민군이 더 많이 기려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며, 광주시민 모두가 김군이다, 나도 김군이다, 모두가 김군이 되어야 한다”는 뜻을 담아 추모시를 낭송했다.

▲ <김군> 시를 낭독하고 있는 강진욱 김군 동상 건립 추진위원. [사진-통일뉴스 김익흥 기자]

김 군

민주가 무엇인지, 자유가 무엇인지
몰랐다
박정희가 왜 죽어야 했는지, 전두환이 누군지도
몰랐다
미국이 무엇이고, 분단체제가 무엇인지는
더더욱 몰랐다.

그저 하루하루 배부르게 먹고
동료들과 의좋게 살고 싶었다.
80년 5월 21일 광주 금남로,
군인들이 시민들을 마구 죽이니 총을 들어 시민군이 됐고,
기관총 사수가 되었다.

어떤 이가 그를 ‘광수 1호‘로 지목했다.
‘광주에 투입된 북한 특수군’?
이 웃기는 얘기가 김 군을 역사 앞에 소환했고,
신예 강상우 감독, 김 군을 찾아나섰다.

강변 모래사장에서 구슬을 찾듯 ...
그런데, 알아보는 이가 있었다!
광주시민 주옥 씨,
“이 사진, 김 군 아녀?”
“맞네, 학동 원지교 밑에 살던 넝마꾼!”
그렇게 그는 역사 속에서 살아났다.

함께 총을 들었던 최진수
출정하던 김 군의 모습을 증언했다.
흰색 머리띠 ‘하라..김’은
‘김대중을 석방하라’
뒤를 돌아보는 매서운 눈빛은
카메라 셔터 소리가 언짢아서였다고.

중앙일보 이창성 기자
사진 찍지 말라는 그의 뒤에서 셔터를 눌렀고
그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다시 셔터를 눌렀다.
5월 22일 아니면 23일
그렇게 사진을 남긴 김 군은
다음날 송암동에서 ...

육군 교도대와 격돌한 11공수 특전여단 
김 군 등을 향해 무차별로 발포
어느 민가로 피신했으나 곧바로 포위
“여기서 끝나는가 ...”
총을 거머쥐는 순간 
“집에 아그들 있어라 ... 총 쏘면 모다 죽소!”
주인의 만류

‘손들고 투항하라’ 는 말에 순순히 ...
머뭇거리는 동료 대신 앞으로 ...
숭악한 총잽이 
김 군의 우측 관자놀이에 ...
쓰러지던 그의 눈이 최진수의 눈을 스쳤다.

억울하다 분하다 했을까 
기억해달라 했을까
...  ...
그 눈빛을 목숨빚이라 여긴 
최진수
오늘 광주의 들녘에 김 군을 세운다.

2020년 5월 24일 


지만원에 의해 광수 71호, 황장엽으로 지목된 80년 당시 도청 상황실장 박남선(당시 만26세)씨는 “광주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자위적으로 무장한 시민군은 한마음 한뜻으로, 개인의 영달과 이익이 아닌 의로운 마음으로 나선 이름 없는 분들인데 이렇게 이제라도 본받을 모습으로 서게 된 것은 뜻 깊은 일”이라며 술을 올렸다.

▲ 518기념재단 조진태 상임이사. [사진-통일뉴스 김익흥 기자]

5.18기념재단 조진태 상임이사는 이름 없는 무명의 시민군을 그들의 동료들이 직접 나서서 조형물을 세우는 이 일은 “어떤 자세로 진상규명과 기념사업을 해야 하는 지를 일깨워 주며, 가장 참혹한 송암동 학살을 되새기게 된다.”는 소회를 밝히며 앞으로 발포자 규명, 헬기 사격, 양민학살 등 진상규명에 정성을 다 할 것을 다짐했다. 

▲ 김군이 사살될 당시 현장에서 생존한 시민군 동료. 좌측부터 최진수(당시 만17세)씨, 최영철(당시 만 18세)씨, 이강갑(당시 만 22세)씨. [사진-통일뉴스 김익흥 기자]

김군이 사살될 당시 현장에 함께 있었던 동료시민군 이강갑씨는 40년 만에 뜻하지 않게 진행된 김군 동상 건립에 대해 감사하며 반기면서도 “송암동 학살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의도된 조준사격이었으며 이를 밝히는 것이 진상규명의 중요한 과제중 하나”라고 힘주어 말했다.

▲ 영화 <김군> 강상우 감독. [사진-통일뉴스 김익흥 기자]

5.18 기록사진으로부터 <김군>을 추적하여 영화로 제작한 강상우 감독은 “영화 김군은 호기심에서 출발했지만 광주시민, 당시 시민군을 만나서야만 가능했던 작업이며 일깨워준 분들께 감사하며 이제 김군 동상이 세워짐으로써 진실규명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는 의미가 있다.”며 김군 작업의 성과에 대해 말했다.

▲ 80년 광주민중항쟁 당시 도청 상황실장 박남선씨(왼쪽) 최진수씨 등이 광주시의 김군 동상 철거방침에 대해 대응방안을 의논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김익흥 기자]

한편, 광주시청의 안이한 행정태도에 광주 5.18관련단체들의 불만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적법한 절차를 통해 2019년 10월 15일부터 김군 동상 건립 허가를 요청했음에도 직무유기적 무대응으로 일관한 광주시청은 동상 설치 당일 불법시설물 운운하며 철거를 지시하고 현수막을 제거하는 등 권위적인 태도를 보여 참가자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광주의 여러 시민단체들이 이에 대해 항의하며 온전히 김군의 동상을 보전하고 5.18의 진실을 규명하는 일에 적극 참여해 줄 것을 촉구하는 것으로 제막식은 마무리되었다.

▲ 이날 제막식 사회를 본 모성용 범민련 부의장이 동상을 살피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김익흥 기자]

“나라면 그 때 도청에서 어떻게 했겠는가를 자문하는 것 차제가 희생자들에 대한 응답”이라고 올해 광주민주항쟁 기념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던진 언급은 “무명의 희생자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와 진실에 얼마나 절실하게 다가서려하는가라는 물음에 응답하는 것으로 되어야 할 것”이라는 지적은 타당해 보인다.

아직도 광주의 진실이 역사의 전면에 바르게 기록되지 못하고 온전히 기억되지 못하고, 시간이 갈수록 진실규명의 어려움이 더해지는 상황에서 5월 12일 시작된 5.18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에 모든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고 참가자들은 입을 모아 지적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신채호 선생의 말은 이미 너무 많이 듣던 말이 아닌가?

▲ 제막식 후 참가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통일뉴스 김익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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