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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사랑은 하나다

기사승인 2020.02.12  00:4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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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281)

 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마른 물고기처럼 
 - 나희덕

 어둠 속에서 너는 잠시만 함께 있자 했다
 사랑일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네 몸이 손에 닿는 순간
 그것이 두려움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너는 다 마른 샘 바닥에 누운 물고기처럼*
 힘겹게 파닥거리고 있었다, 나는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몸을 비벼야하는 것처럼
 너를 적시기 위해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비늘이 어둠 속에서 잠시 빛났다
 그러나 내 두려움을 네가 알았을 리 없다
 조금씩 밝아오는 것이, 빛이 물처럼
 흘러들어 어둠을 적셔버리는 것이 두려웠던 나는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시든 비늘 위에.

 아주 오랜 뒤에 나는 낡은 밥상 위에 놓인 마른 황어들을 보았다.
 황어를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지만 나는 너를 한 눈에 알아보았다.
 황어는 겨울밤 남대천 상류의 얼음 위에 앉아 잡은 것이라 한다.
 그러나 지느러미는 꺾이고 그 빛나던 눈도 비늘도 다 시들어버렸다.
 낡은 밥상 위에서 겨울 햇살을 받고 있는 마른 황어들은 말이 없다.


 *장자의 ‘대종사(大宗師)’에서 빌려옴. “샘의 물이 다 마르면 고기들은 땅 위에 함께 남게 된다. 그들은 서로 습기를 공급하기 위해 침을 뱉어 주고 거품을 내어 서로를 적셔준다. 하지만 이것은 강이나 호수에 있을 때 서로를 잊어버리는 것만 못하다.”  


 공원에서 한 할아버지가 청소하는 아주머니에게서 핀잔을 듣고 있었다. “왜 비둘기에게 과자를 주세요? 비둘기가 전염병을 옮겨요. 주지 마세요!” 할아버지는 쑥스러운 웃음을 짓고. 

 잠시 후 할아버지는 아주머니가 청소하느라 정신없다고 생각했는지, 또 비둘기들에게 과자를 던져 주었다. 곁눈으로 보고 있었는지 아주머니가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과자를 주지 말라니까! 왜 그러세요?” 

 허름한 옷의 할아버지는 왜 자꾸만 비둘기들에게 과자를 주는 걸까? 예전 같으면 손주들에게 과자를 주었을 것이다. 손주들은 저 비둘기들보다 더 즐거워했을 것이다. 아마 저 할아버지에게는 과자를 줄 손주들이 없을 것이다. 있다고 해도 이제는 과자로는 즐거워하지 않을 것이다. 

 ‘아,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다!’ 우리 모든 인간의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그 마음이 폭력이 되어버린다. 과자를 주워 먹으며 가축화되어가는 비둘기. 전염병까지 옮기는 비둘기. 도시의 비둘기들은 다들 초라해 보인다. 산비둘기 같은 위엄이 없다. 

 사랑이 의도치 않게 폭력이 되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부모는 자식에게 매를 든다. 온갖 험한 말을 내뱉는다. 자식을 위해서! 정치지도자는 국민을 사랑하기에 마구 채찍을 휘두른다. 민족중흥을 위해!

 연인들의 뜨거운 포옹은 어떤가?       

 ‘어둠 속에서 너는 잠시만 함께 있자 했다/사랑일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네 몸이 손에 닿는 순간/그것이 두려움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몸은 정직하게 안다. 사랑의 손길이 거짓이라는 것을.

 ‘너는 다 마른 샘 바닥에 누운 물고기처럼*/힘겹게 파닥거리고 있었다, 나는/얼어 죽지 않기 위해 몸을 비벼야하는 것처럼/너를 적시기 위해 자꾸만 침을 뱉었다’ 
 
 현대인의 사랑은 대부분이 이럴 것이다.

 ‘그러나 지느러미는 꺾이고 그 빛나던 눈도 비늘도 다 시들어버렸다./낡은 밥상 위에서 겨울 햇살을 받고 있는 마른 황어들은 말이 없다.’ 

 우리는 다 미라가 되어버렸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과 ‘공생’을 구분한다. 사랑은 상대방을 성숙하게 하는 것이다. 공생은 정신적 불구가 되어버린 인간들이 서로 엉켜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외로워 사람들을 만난다. 손가락으로 사랑의 표지를 만들어 서로를 향해 마구 쏘아댄다. 헛헛한 가슴을 견디지 못해 마구 포옹한다. 

 중국 고대의 철학자 장자는 말한다. 

 “샘의 물이 다 마르면 고기들은 땅 위에 함께 남게 된다. 그들은 서로 습기를 공급하기 위해 침을 뱉어 주고 거품을 내어 서로를 적셔준다. 하지만 이것은 강이나 호수에 있을 때 서로를 잊어버리는 것만 못하다.” 

 강 속에서는 수십만 마리의 물고기들이 하얗게 몸을 반짝이며 춤을 추듯이 헤엄쳐간다. 

 모두 자유롭게 헤엄쳐가는 데도 서로 부딪치지도 않고 서로의 앞길을 방해하지도 않는다.      

 인간도 이런 시대가 있었다. 수만 년 동안의 원시시대.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 하나가 전체요 전체가 하나인 세상이었다. 

 현대인은 사랑을 잃어버렸다. 자유로운 정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자신 안에서 솟아올라오는 힘으로 사는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네가 필요해!” 이게 현대인의 사랑이다. 

 다들 탐욕에 젖어 부족한 존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석가는 간파했다. 인생의 고(苦)는 만족하지 못하는 고통이라고. 우리는 항상 목이 마르다. 허기가 진다. 

 신종 바이러스가 돌며 우리는 다시 사랑을 간절히 생각하게 되었다. 신종 바이러스가 잠잠해지면 우리는 다시 서로를 사랑할 수 있을까?    

 비둘기가 스스로 먹이를 찾고 야생의 날개를 퍼덕이며 창공을 날아오르는 모습을 무심히 바라볼 수 있을까?   

 

고석근 ksk21ccc@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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