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미경 / 농부

 

살구나무를 찾아서 살구나무 동산을 만들고 있다. 올해는 살구나무 마을을 만들려고 한다. 올해 우리 마을에는 많은 살구나무들이 새로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인데, 나는 그것이 북측 회령 백살구나무이기를 바래서, 그것을 구하려 안타깝게 뛰어다니고 있다.
사라진 살구나무를 찾으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살구나무를 잃어버렸듯이 아주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무엇을 위하여 그 많은 것들을 놓아버린 것일까? 여기 연재할 글들은 살구나무처럼 우리가 잃은 것들, 잊은 것들, 두고 온 것들에 대한 진지한 호명이다. / 필자

 

▲ 풍산개 풍이와 동무, 그리고 새끼들. [사진제공-주미경]

강아지 여섯 마리가 마당을 뛰어다니며 노는 풍경은 꽤나 볼만하다. 아무리 오래 바라봐도 지루하지 않고, 아무리 냉정하게 바라봐도 간간히 웃음이 터져 나오곤 한다. 강아지들이 서로 엉기며 노는 소리와 몸짓은 하도 변화무쌍하여 눈으로만 좇아도 여섯 마리는 아무래도 벅차다. 아직 뛰어봐야 깡총깡총이고 귀도 아직 접혀서 나풀거리지만 7주째에 접어든 강아지들은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농장을 몰켜다니며 한참 입쓰는 법을 배우고 연마하는 중이다. 시골 내려오면서 거금을 들여 구해온 풍산개 풍이와 동무의 세 번째 새끼들이다.

어린 시절, 개, 그리고 개밥

줄곧 도시에 살면서 내 손으로 개를 길러본 적도 없고 개를 기르고 싶다는 생각도 언제 한 번 해본 적이 없다. 게다가 요즈음 귀한 대접을 받으며 실내에서 사는 자그마한 애완견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혐오감 비슷한 것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도 개라는 동물이 항상 친근하게 여겨지는 것은 어린 시절 대부분을 개와 함께 살았기 때문일 게다.

어렸을 적 살았던 도심에 있는 집에는 좁으나마 뒷마당이 있었고 그 뒷마당에는 언제나 개가 있었다. 개는 그 곳에서 항상 피어나던 나팔꽃이나 봉숭아나 깨꽃과는 달랐지만, 그래봐야 철부지 아이의 눈에는 그것들과 크게 다를 것도 없는 그냥 움직이는 소품이었나 보다. 봉숭아와 나팔꽃을 구별하듯이, 거기를 거쳐갔던 개들의 이름과 모습을 하나하나 모두 기억은 하지만 그 개들이 어떻게 왔고 어떻게 사라졌는지에 대한 기억은 없는 걸 보면 말이다.

어쨌든 어린 시절의 풍경 속에는 도심에 흔치 않은 커다란 오동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는 막다른 골목과, 그 골목 끝의 푸른색이 바래고 바래 잿빛이 되어가는 허줄한 나무대문과,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꼬리를 치며 나를 알아보는 개가 모습을 바꾸어가며 빠짐없이 등장한다.

그 개들을 먹인 건 여섯이나 되는 식구들 중 그 누구도 아닌 어머이였다. 개사료 같은 것은 물론 개를 돈들여 먹인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개를 먹이기 위해서는 헐치않은 가외의 수고를 감당해야 하건만 우리집은 물론 집집마다 개가 있었고,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바짝 마주보고 있는 골목마다 개들이 돌아다녔다.

어머이는 시장에 갈 때마다 생선전에서 고등어 대가리 같은 것을 잔뜩 얻어다 음식찌꺼기와 함께 푹푹 끓여서 개를 먹이셨다. 연탄 아궁이 위에 커다란 찌그러진 양푼 속에서 개밥이 부글부글 끓던 구질구질한 광경과 그 퀴퀴한 냄새를 지금도 얼마든지 떠올릴 수 있다. 바로 그 모양과 냄새와 느낌으로부터 여러 가지 비유와 은유로 쓰이는 ‘개밥’이라는 낱말이 탄생하는 거다. 그래서 개밥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 양푼을 떠올리곤 한다.

개를 기르는 까닭은

어머이는 왜 개를 기르셨을까? 반려동물이란 건 개념조차도 없을 때였고, 동물이 아니어도 아이들의 정서교육은 얼마든지 풍부하게 이루어지던 때였으며, 시골에서 흔히 하듯이 잡기 위한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하긴 비단 어머이뿐이 아니다. 어렸을 적 우리동네 거의 모든 집, 현욱이네도, 옥인이네도, 개똥할머니네도, 또 향자나 영원이네도 다 개를 길렀다.

그때 그 시절, 도시 집집마다에 있던 개들은 그러니까 좀도둑 방지용이거나 음식쓰레기 처분용이었을까? 개를 기르는데 있어 옛날부터 정착되어온 우리의 풍습은 ‘똥개’라는 이름 속에 내포되어 있다. 그러니까 어느 집에서든 보통 새댁이 아기를 낳으면 강아지 한 마리도 함께 키웠다. 아기가 자라 똥오줌을 가리게 될 때까지 아기의 똥을 말끔히 먹어 치우고 아기의 엉덩이까지 핥아서 깨끗하게 닦아주는 것이 바로 강아지였던 것이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이런 얘기를 들으면 강아지에게 어떻게 그런 훈련을 시켰을까 궁금해진다. 강아지가 아기 엉덩이를 물어버리지나 않을까? 하찮기는 해도 이런 궁금증은 백과사전으로도 해결이 안 된다. 하지만 우리 동무가 새끼를 낳고 새끼들을 돌보는 것을 보면서 그 일이 개에게 얼마나 자연스러운 것인가를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동무는 새끼들이 자라 집밖으로 나와 똥오줌을 싸게 될 때까지 새끼들의 똥을 말끔히 먹어 치워 집안을 깨끗하게 유지한다. 그것은 개에게 있어 본능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니 사실상 ‘모든 개는 똥개’라고 할 수도 있다.

지금은 문화생활이라고 휴지를 무진장으로 쓰고 있지만, 그런 거 구경할 수 없던 시절에는 신문지 쪼가리나 일력지 같은 것을 썼고, 그것도 없으면 나뭇잎, 호박잎, 짚새기나 새끼줄이 그 용도를 담당했으니, 아무리 비교해봐야 그 역할로는 똥개가 단연 으뜸이라 할 것이다. 이건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 어린 시절의 이야기이니까.

그 시절 도시에서 집집마다 기르던 개들도 그런 역할을 했을까? 내 경험에 비추어 보자면 그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도시에서도 그렇게 흔하게 개를 길렀던 것은 그런 풍습의 연장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유나 용도란 걸 딱히 생각지 않았을지라도 그저 사람사는 집에 개 한 마리 있는 것이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웠던 것에는 그러루한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평범한 우리 사람들에게 있어 개란 그런 존재였나 보다. 태어난 아기와 함께 커가고, 사람사는 집 마당에 그저 함께 어울려 살다가, 때론 고기까지도 제공해주는 동물 말이다. 모양으로 보나 용도로 보나 관계로 보나 그 시절의 개는 그야말로 개다웠던 게 아닐까. 

▲ 남쪽에 들어오는 풍산개에 대한 기사. [사진제공-주미경]

풍산개를 알고 나서

해방되고 74년, 사람살이에 서양물이 흠씬 들면서 씨앗도 나무도 토종을 찾아보기 힘든데 개라고 다를까. 우리나라의 유명한 토종개들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일제 식민지시기부터이지만 해방이 되고도 그 실종은 멈추지 않았다. 최근에 와서는 실태가 이미 점입가경으로 진입하여 도시에선 이미 서양개들이 자리를 다 차지했고 시골에서도 서양개들이 급속하게 영토를 먹어 들어가는 중이다.

그래서인가 보다. 시골에 오면서 풍산개를 키워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건 그것이 토종개라는 것도 상당한 부분을 차지한다. 토종개는 물론 개 자체에 대해 큰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지만 쌀과 씨앗에 대해 공부하면서, 통일문제에 대해 공부하면서 무엇이건 ‘토종’이라는 것이 마음 속에 크게 자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풍산개가 남쪽에 처음 들어온 것은 1993년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신문에도 기사가 실렸던 모양인데 내가 풍산개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 것은 김대중 대통령 시절 6.15의 벅찬 감동과 함께였다.

온 신문들의 1면을 가득 채운 6.15를 상징하는 엄청난 사진과 더불어 김대중 대통령이 북에서 선물로 받아온 풍산개에 대한 이야기도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풍산개를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지만 이름만으로도 단박에 커다란 친밀감을 가졌던 것은 바로 ‘풍산’이라는 지명 때문이었다.

어머이의 풍산

‘풍산’이란 나에겐 매우 익숙한 지명이다. 살아서 못나온다는 유배지였던 삼수갑산은 소월의 시로 읊어져 사자성어가 되어 회자되지만, 삼수갑산 다음에 풍산이라는 것은 거의 아는 이가 없다. 백두산 아래 개마고원, 해발 1,300미터가 넘는 고원지대 첩첩산중, 게다가 꿈에서조차도 갈 수 없는 북녘의 그 고장이 마치 언젠가 살아보기라도 했던 것처럼 익숙한 것은 어머이로부터 풍산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어머이의 고향이 풍산인 것은 아니다. 어머이의 고향은 함흥이다. 어머이는 함흥사람이고 아버지는 북청사람이니 나로 말하자면 함경도의 자손이라 할 것이다. 한 번 가본 적도 없고 가볼 수도 없는, 그러나 꼭 가보아야 할 그곳은 험하고 높은 산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청명한 햇살처럼 맑은 물이 흐르는 고구려와 발해의 땅, 북녘의 땅이다.

그곳에 대한 이야기를 어렸을 적부터 귀가 닳도록 들으며 자랐으니, 아버지 어머이의 기억과 회상과 거기에서 배어나오는 그리움을 통해 언제인가부터 그곳은 내 마음 속에도 ‘고향’이라는 이름으로 단단히 자리잡게 되었다. 나고 자라지 않았어도 고향이란 그렇게 이어지는 것인가 보다.

함흥사람인 어머이가 풍산을 이야기한 것은, 그곳이 외할아버지의 임지로 외할아버지를 따라 함흥을 떠난 어머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기 때문이다. 어머이가 고향인 함흥보다도 풍산 이야기를 더 많이 하신 것은 어머이 여든여덟 굽이굽이 파란만장한 생애에 있어 풍산의 시절이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운 기억으로 새겨져 있는 까닭이다.

어머이가 생전에 쓰신 꽤 두툼한 자서전 속에는 당시 풍산행의 노정이 자세하게 쓰여 있다. 함흥역을 떠난 기차가 동해안의 아름다운 고을 ‘홍원’ ‘신포’를 지나 북청에 도착한다. 북청에서 하루 밤을 자고는 자동차를 타고 풍산으로 향하는데, 해발 1335m 후치령 고개를 굽이굽이 돌아 오르며 열 살 어린 아이의 눈에 비친 고원의 풍경이 꿈결처럼 묘사되어 있다. 그 길이 바야흐로 개마고원 지대로의 진입인 것이다.

구름을 밑으로 보면서 안개 속에 피어있는 이름 모를 빨간 꽃들과 지천에 피어있는 나리꽃, 가도가도 푸른 소나무 한 그루 볼 수 없이 우거진 고산대의 잡목들, 그 사이로 겨우 난 길을 돌고돌아 정상에서 마주친 ‘황수원’ 넓고 푸른 호수, 그 노정에서 유일하게 만난 마을다운 마을 ‘파발’에 대한 이야기들은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색적인 풍경을 저절로 떠올리게 한다.

어머이가 기억하는 풍산은 4월에도 봄의 기척이 없는 고장이고 5월에도 우물 속에 얼음이 있는 곳이다. 늦게 봄이 오면 산들이 모두 진달래로 빨갛게 물들고, 실개천은 수정같이 맑은 물이 넘쳐흐르고, 밭이랑 너머 낙엽송 숲이 차츰 녹색으로 짙어가며 하늘에 흰구름이 꿈같이 떠가는 곳이다.

학교가는 길목에 하늘높이 줄지어 서있는 포플러나무 터널과, 산에 오르면 만나는 군생하는 딸기밭과, 매젖이라는 길쭉한 보라색 열매의 쌉싸름한 맛과, 가을에 포도주보다 짙은 보라색 음료를 내는 들쭉과, 껍질을 벗기는데 애를 먹어도 맛만큼은 고소한 개마리 열매에 대해 쓰고 있는 글 행간으로 어머이가 어쩔 수없이 묻어둔 짙은 그리움이 뚝뚝 묻어난다.

어머이는 열 살 남짓에 새롭게 만난 궁벽한 그 고장에 대해 “훗날 아버지의 길지 않은 생애에 있어서나 나의 생을 통해서 가질 수 없는 기쁨의 날들을 가져다 준 아름답고 행복했던 고장”, “함흥에서 그냥 성장했더라면 경험하지 못했을 갖가지 추억을 간직하게 해준 아름다운 고장”이라고 쓰고 있다.

어머이가 풍산에 대해 이런 꿈같은 이야기만 남긴 것은 아니다. 어렸을 적 들었던 풍산에 대한 이야기는 오히려 반대다. 밤늦게까지 잠들지 않고 어머이 치마꼬리에 감겨 옛날 얘기를 해달라 보채는 우리 형제들을 놓고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았으니까.

새댁이 읍에서 국수를 뽑아 채반에 이고 밤중에 집에 돌아와서 보니 채반에 국수가 하나도 없더란다. 하얗게 밤을 밝힌 다음 날 아침 왔던 길을 되짚어가니 커다란 나뭇가지에 국수들이 죄다 너줄너줄 걸려있더라는 이야기, 사나운 바람이 부는 밤이면 얼굴 붉은 중년의 사나이들이 창문으로 무서운 얼굴을 들이밀며 굵은 목소리로 “엄장이 계시오~”하는데 머리에 뿔이 달려있더라는 이야기들은 첩첩산골 풍산이라는 고장에 대한 심상에 더 선명한 흔적을 남겼다.

그래서 어머이의 이야기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었던 풍산은 ‘고향’이라는 낱말에서 흔히 느끼는 것처럼 아련하고 애잔하고 낭만적이기보다는 풍성하고 장엄하며 고색창연한 자연을 품은 곳, 편안하게 안기기보다는 결기있는 도전을 요구하는 곳,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중간계를 연상시키는 비현실감과 신비함을 간직한 곳으로 마음 속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 리인모 선생의 책표지. [사진제공-주미경]

리인모 선생의 풍산

이렇게 형성된 풍산이라는 고장에 대한 심상에 커다란 전환을 가져온 일이 일어났으니, 자연스럽게 깔린 바탕에 강렬한 채색을 입혔다고 할까. 그 장본인은 바로 리인모 선생이다.

리인모 선생의 함자 앞에는 항상 비전향 장기수, 전 인민군 종군기자, 최초 송환자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는 1950년 전쟁에서 인민군 문화부 소속 종군기자로 낙동강까지 남하하였다가 인민군 후퇴시 지리산에 입산하고 대성골에서 포로가 되어 자그마치 34년간의 말로는 다 형언할 수 없는 처절한 옥고를 치른다.

1989년 월간 「말」지에 연재된 「전 인민군 종군기자 수기」를 나는 극심한 충격 속에서 읽었다. 1988년 10월에 청주보안감호소에서 일흔둘의 병든 몸으로 출소하여 불과 한 해도 못되는 사이에 원고지 400매 분량의 원고를 마무리하였으니, 선생은 스스로 부여한 ‘죽을 날이 다된 인민군 종군기자의 최후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해낸 것이다. 선생의 수기는 이후 보충 재완성되어 「전 인민군 종군기자 수기 이인모」 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수 차례 읽고 또 돌려 읽어 너덜너덜해진 색바랜 책을 오랜만에 다시 펼쳐본다. 선생은 한 권 책분량의 원고를 정리해 마무리하면서, 전쟁 당시 전황을 송고하고는 ‘오늘은 죽어도 되겠구나’ 했던 그 심정을 40여년 만에 다시 맛본다고 적고 있다. 그것이 바로 풍산사람의 면모일까?

선생의 수기가 그토록 강렬했던 것은 그것이 풍산사람 리인모의 이야기이고, 풍산사람 리인모가 회상한 풍산사람들의 이야기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열여덟 청상과부의 유복자 아들로 태어나 소년시절부터 항일투쟁에 몸을 잠군 그의 이야기가 바로 풍산을 무대로 펼쳐지고 있었던 까닭이다.

선생에 의하면, ‘풍산은 개마고원 중에서도 가장 높은 화전지대로서 북청 등지에서 일제에 뜯겨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 사람들이 들어와 산에 불을 질러 화전을 일구어 귀리와 감자농사로 겨우 먹고 사는 곳’이다. 선생은 어려운 집안살림에 아이조차 기르기 쉽지 않은 어머니 곁을 떠나 네 살 때부터 자식 없는 외삼촌 곁에서 자라나 ‘파발소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 풍산면 ‘파발’이라는 곳이 열 살 어머이가 외할아버지를 따라 풍산읍으로 가는 노정에서 유일하게 만난 마을다운 마을이라고 묘사한 고장이다. 선생은 그곳에서 말할 수 없이 못되게 동포들을 괴롭히던 ‘오빠시’(땅벌)라는 별명의 왜놈 순사부장을 백두산 무장부대 대원이 총으로 쏘아 죽인 현장을 목격한다.

그것은 1930년 「파발리의 총성」이라는 명제로 알려진 유명한 사건, 풍산군이 해방 후 김형권군으로 개명된 연유를 말해주는 사건, 한 명석한 소년을 일찍이 철들게 만들고 항일투쟁의 길로 이끌어간 사건, 바로 리인모 선생의 평생 일관된 삶을 결정지은 사건인 것이다.

선생의 회상 속에서의 풍산은 그렇듯 항일 무장부대의 활동지였고, 소년들까지 포함한 여러 가지 형태의 항일조직이 살아 움직이는 고장이었고, 그래서 일제에 의한 대검거의 설한풍이 몰아치던 곳이었고, 그리하여 항일투쟁가들의 젊은 피가 선연히 뿌려졌던 지역이었다.

그렇게 풍산은 어머이의 풍산을 뼈대로 하여, 한 인민군 종군기자의 풍산으로 살을 붙이면서 마음에 새겨졌다. 그렇게 어머이의 풍산과 리인모 선생의 풍산은 내 마음 속에서 만나 하나의 그리움이 되었다.

어머이가 선생의 책을 읽으시고는 “이 사람 고향이 풍산이구나”하시며 주름진 얼굴에 떠올리던 쓸쓸하고 고적한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여기 내려와 계실 때 밭 가장자리에 서서 숲을 망연히 바라보시던 뒷모습도 마음 깊이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어머이는 거기서 풍산의 장엄한 숲을 더듬고 계셨던 것일까?

풍산개는 그런 어머이를 위한 것이었다. 또한 풍산에 대해 막연하고도 절실한 동경을 갖고 있는 나에게 희미하게나마 풍산의 냄새를 맡을 수 있게 해주리라는 기대를 갖게 하는 현실의 존재였다. 풍이와 동무 두 마리 풍산개와의 생활은 그렇게 시작된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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