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7일 운명한 고 오종렬 의장. 2011년 5월 단짝 정광훈 의장을 먼저 보내며 추모사를 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섬마을 선생님! 어이 이리 황망히 가시나요.

작년 5,18민주묘역 정광훈 의장 추모식에서 제 앞줄에 앉으실 때 불편했던 몸뚱이가 여기까지 였던 걸까요. “나도 이제 갈 때가 된거야...” 눈웃음 인사로 건넨 말이 이렇게 현실이 되니 황망한 마음 이를 길이 없습니다.

제가 농민운동의 길로 들어서며 먼발치에서 우러러 뵈던 의장님은 추상같은 면모이셨습니다. 워낙 풍채도 남다르셔서 제가 농으로 해주오씨 한반도 유입설을 말씀드리니 호탕하게 웃으시며 “허 그래, 그렇쿠마.” 짐짓 인정 하시잖았습니까.

면모야 일러 무엇 하겠습니까. 의장님은 언제나 매사에 신중, 엄격하셔서 운동하는 동지들이 살갑게 대하지는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마찬가지구요.

특히 제가 전농 의장을 결심하고 의장님께 넌지시 말씀드렸을 때 냉정하게 잘라 말씀하셨을 때를 전 늘 기억하고 기억 합니다. 전선의 한 축을 지도하고 이끈다는 것이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니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했습니다. 한 치의 빈틈도 보이시지 않던 의장님 이렇게 이별이 가능 한건가요.

2008년 한국진보연대에 세 분의 어른이 계셨지요. 먼저 유명을 달리한 정광훈 의장님, 한상렬 목사님, 그리고 오종렬 의장님. 이렇게 세 분이 오순도순 한집에서 머무실 때 가끔 저도 그 방에 기어들어가 함께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었드랬지요.

의장님은 가장이시고 정광훈의장님은 마치 어머니 역할이시고 한상렬 목사님은 삼촌 같은 한가족 구성원들이 조분조분 살아가시는 모습이 이상스럽게 조화롭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설거지를 하려니 “다 몫이 있는 것이야. 한 의장은 손님이니 커피나 마시고 앉아있게” 이리 정리하시곤 또 껄걸 웃으셨더랬습니다. 공적인 시간이나 사적인 시간이나 흐트러지는 법 없이 한결같으셨던 의장님의 꼿꼿하신 모습이 그렇게 믿음직스럽고 부러웠습니다.

인생에서 사표가 될만한 사람을 한사람 대라고 한다면 저는 단연코 의장님을 생각합니다. 언젠가 광주에서 회의를 하는데 오병윤 전 의원이 인사말을 하고 그 뒤에 오종렬 의장님이 인사를 하러 올라서며 “까불지마. 저 오병윤 의원이 광주에서 나하고 일하던 사람이요. 그래서 까불지마라고 한 것이요.” 사람들은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는데, 오 의원이 바쁘니 그런 식으로 경고를 한 것이겠지요. 잘 하라고 잘 해서 민중이 총 단결하고 나라의 통일 위업을 달성하는데 한목숨 바치라고 그리 다짐을 받아낸 것이지요. 그리 할 수 있는 힘은 의장님의 추상같은 성품이라서 가능 한 것이고 이해되는 것 이였습니다.

요즘 홍콩투쟁이 점입가경 (우리가 이해하는 모습으로는)입니다. 의장님! 2005년 홍콩투쟁 기억 하시죠? 그때 저하고 몇 사람 같이 버스를 타고 빅토리아 공원으로 이동 할 때 “아이 한 의장. 한 의장이 역사를 잘 아니까 물어 보는데 홍콩이 언제 반환 됐지?” 저는 당황했습니다. 제가 역사를 잘 안다니요. 저는 역사가도 아니고 제가 뭘 안단 말씀이신지. 그렇게 부끄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해서 우물쭈물 하다가 기억을 끄집어냈습니다. “97년인가 98년에 됐습니다.” “영국이 안 내 놓으려고 많이 우겼지?” 그 말씀에는 나라가 힘이 있어야 아귀같은 제국주의에 대항해 땅도 찻을 수 있다는 말씀이셨습니다.

나라의 힘은 국민들의 단결된 힘이겠죠. 단결된 힘은 미군을 철수시킬 수 있는 힘이 되고 WTO도 받아칠 수 있다는 말씀이고요. 우리는 의장님 가르침으로 홍콩에서 싸웠고 승리했습니다. 그 싸움의 모습이 지금 홍콩인들에게 각인된 민중운동의 모습으로 재현된 것으로 감히 생각합니다.

의장님의 비장한 노래 한가락이 생각납니다. “비내리는 고모령” 혹시 장례식장에서 누가 불러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언젠지 기억이 나질 않지만 금강산에 회의 차 다녀오던 길이었죠. 누군가 의장님께 노래 한곡을 부탁했는데 의장님께서 의외로 호남 특유의 커쿨진 목소리로 비내리는 고모령을 부르시고 해설도 하셨는데 의장님도 목이 메고, 저도, 같이한 사람 모두 목이 메었더랬습니다.

노래 한곡을 해도 우리민족의 한과 염원을 유감없이 표현하셨습니다. 그 힘은 아무래도 오랜 동안 민중투쟁을 고민 하고 지휘하면서 발로된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민중이 금강산에서 통일을 논의하고 희망찬 가슴으로 내려오던 그 길에서 의장님의 노래는 저를 비롯한 동지들에겐 비타민제 같은, 아니면 각성제 같은 효과를 발휘했던 것입니다.

노래하니까 생각나는 노래가 또 있군요. “섬마을 선생님” 이 노래는 제가 불렀던 거 같습니다. 그랬더니 “아이 한 의장, 그거 내 노래야” 그래서 의장님의 청년시절을 말씀 하셨죠.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표명렬 회장님과 육군사관학교 시험을 봤는데 표 회장님은 합격하고 당신은 낙방을 하셔서 섬마을에 선생으로 가게 되었노라고... 그래서 그 노래가 당신의 로맨스라고 우스개 말씀을 하셨지요. 결국은 다시 만나 민중운동의 전선에서 각자의 역할을 해내시는 의기는 모두의 귀감이라 생각됩니다.

제가 개불알풀꽃이라는 시집을 만들면서 여는말씀을 부탁드렸더니 “아, 이 사람아 내게 그런 어려운 걸 부탁하고 그러면 어떻게 해. 내가 시를 알아야지. 원고 보니 말 그대로 까만 건 글자고 하얀 건 종인데 뭘 어떻게 써야하는가.” 그렇게 말씀하시고도 시집 발간 서문으로 최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중 일부를 옮겨 봅니다.

《살아있는 농사꾼 한도숙은 글쟁이가 아닙니다. 그는 쇠스랑으로 시를 쓰고 낫으로 신자유주의를 벱니다. 곡갱이로 분단장벽을 부수고 싸리비로 사대주의를 쓸어냅니다. 제 땀과 눈물로 민중의 아픔을 씻어냅니다.》

저 보다 더 감성적인 글귀를 구사하셨음에도 당신은 시를 모르는 인간이라고 겸하해 하시니 무릇 도량을 헤아릴 수가 없으신 분입니다. 병석에서도 한 사람 한 사람 손을 붙드시고 민중의 단결과 조국통일에 대한 염원을 불사르시던 모습을 어이 잊을 수 있단 말입니까. 한 사람에게 이렇게 신랄한 지적을 유감없이 하시는 선생을 이제 어디서 다시 만난단 말입니까.

저는 의장님의 이 글을 신조로 삶고 살아가겠노라는 다짐을 했습니다. 의장님께서는 제게 너무 많은 것을 주셨는데 저는 의장님의 의도에 부응하지 못하는 듯해서 서글퍼지기도 합니다.

이제 다시는 뵈올 수 없게 되었지만 의장님 가르침을 잊지 않고 따르는 의장님의 동지가 되렵니다.
의장님 편히 영면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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