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산 김원봉의 생애와 톡립투쟁이라는 주제로 인천 생명평화기독연대가 주최한 159차 생명평화포럼 세미나가 5일 부평 아트센터에서 진행됐다. [사진-통일뉴스 권오철 통신원]

'약산 김원봉의 생애와 독립투쟁'이라는 제목으로 인천 생명평화기독연대가 주최한 159차 생명평화포럼 세미나가 5일 부평 아트센터 세미나실에서 열렸다. 

강사는 작가이면서 평론가인 동국대힉교 겸임교수 이원규 선생. 

2005년에 저술한 『약산 김원봉』을 14년 만에 개작하여 다시 발표한  『민족혁명가 김원봉』을 중심으로 학술적인 연구와 현장감 넘치는 르포, 취재 그리고 수준 높은 평론을 가미하여 설명도 아주 재미있게 해서 두시간이 금방 지나갈 정도였다.

필자는 '아나키스트 의열단'에 관여하고 '조선 의열단'과 '약산 김원봉 기념사업회'등에 괸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참석하였다. 이번 강의를 통해 익히 알려진 내용외에 작가의 독자적 분석이나 새로 소개된 자료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구한말 전라도 쪽은 동학혁명등으로 항쟁의 씨가 말랐으나 경상도 쪽은 왕산 허위 선생 등을 잇는 의병계열 비밀결사인 '대한광복회'로 명맥이 살아 있었다. 김원봉도 그 한줄기이다. 

▲ 이원규 작가의 '민족혁명가 김원봉' [사진제공-한길사]

훗날 해방된 조국에서 김원봉이 월북을 감행한 사연은 이렇다.

의병장 허위(許蔿, 1854.4.1~1908.10.21) 선생이 이조참판을 지낼 때 장택상의 아버지 장승원에게 군수 벼슬을 주니 장승원이 20만냥을 바치자 허선생은 '추후 무장운동 자금으로 쓸일이 일어나니 보관하라'라고 하고 자신은 의병투쟁중 1908년 경성감옥 1호 사형수가 된다.

한일병합 후 허위 선생의 형과 제자가 장승원을 찾아가 투쟁자금을 달라고 하니 그가 생각하기에 만약 그 자금을 주면 일제에 의해 문제가 될 것을 우려했거나, 세상이 바뀌었으니 주지 않았다. 탐관오리의 전형인 그의 심중이 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들을 밀고하려던 장승원은 후에 대한광복회원들에 의해 처단당하고 만다. 

해방후 장승원의 아들인 수도청창 장택상이 수사국장 노덕술을 시켜 김원봉을 체포해 오라고 명령했다. 노덕술은 반민특위에 의해 고문왕으로 알려진 김태석과 함께 의열단의 처단 대상이었다.

지금까지는 장택상이 자기 아버지를 죽인 개인적 감정으로 노덕술을 앞세워 김원봉을 체포, 모욕하고 이에 김원봉이 월북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미군정의 작품으로 드러났다는 것이 이원규 선생의 해설이다.

공개된 미군정 문서에는 김원봉의 체포에 대해 안재홍이 "내 손도 떠나 있었다. 미군정의 명령이었다"고 한 증언이 있다는 것.

결국 배후에는 예나 지금이나 미국 CIC의 조종에 의해 돌아가는 나라 사정이었다. 김원봉이 노덕술에게 끌려간 것으로 알려진 장소도 여동생 김학봉 여사가 증언한 청계천 인근 수표교가 아니라 서울역 인근이며, 미군정경찰이 김원봉을 미행하고 체포해 괴롭혔다는 것이 최근 공개된 미군정 자료에 나와 있다고 한다. 

▲ 슬라이드에 나와 있는 김원봉은 1958년 북한에서 노동상을 지내던 당시(60살)의 모습으로 최초 공개이다. 정창현 전 민족21 대표 제공. [사진-통일뉴스 권오철 통신원]

이 선생은 노덕술이 김원봉의 빰을 때리고 할 입장도 아니고 장택상이 단독으로 체포한 것도 아니라고 덧붙였다.

김원봉의 월북은 여운형이 암살당하고 그 다음은 장례위원장인 자신의 차례라는 위기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 북쪽의 많은 군 간부들은 사실상 중국에서 김원봉의 영향력하에 있었던 인물들이거나 추종자들이었다.

북에서 비록 소련파인 김일성이 집권했다고는 하지만 중국 출신 역전의 용사들인 1,500여명이 거의 간부이니 김원봉의 위세는 대단했다고 한다. 

그래서 김일성은 김원봉에게 '검열상'이라는 사정기관을 맡겨서 그의 권위에 기대어 나타난 문제점을 해결하였을 것이다.

이 선생은 김원봉이 노동상을 하던 중 1958년께 다시 월남을 시도 하다가 체포되어 간첩 등 여러 죄목으로 조사 받다가 자살 했다는 것이 정설이라고 말했다. 당시 소련대사의 일기장에 관련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여기서 다시 드는 생각은 지난 6월 현충일 추념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김원봉의 조선의용대를 국군과 한미동맹의 뿌리로 언급하며 논란이 불거진 일과 관련해 그의 서훈은 어찌하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해방전 사망하면 훈장을 주었겠지만, 그후에도 살았으니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요약하면, 김원봉은 공산주의 사상가는 아니며 당시 풍미한 아나키즘,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은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의 공적은 통일의 날에 다시 재평가하여 정당한 대우를 민족사에 빛나는 인물로 자리 매김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 일제가 두려워 한 것은 '의열단'이었다. 

언젠가 일제 정보보고서를 본 기억이 있다. "공산당은 말로만 떠들고 파업정도이니 신경 쓸 것 없고, 임시정부는 그냥 오합지졸 노인네들끼리 자리다툼이나 하니 따질 가치도 없고, 흥사단 YMCA 이런 건 수양 건전 단체이니 더욱 그렇고, 만주 조선군사조직(독립군)은 관동군과 만주군에 비하면 영향이 별로 없고, 그런데 이 의열단 만이 두렵다."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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