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우 / 전 인천대 교수

 

필자의 말

현대 사회에서 미디어는 소통의 도구이자 사회 현상을 반영하는 거울입니다. 미디어를 읽는다는 것은 거울에 비친 우리 자화상을 본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미디어를 통해 사회를 성찰하고 뒤돌아보는 글이 되고자 합니다. 이 글은 매주 목요일에 게재됩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 미국 작가 코맥 맥카시의 소설이고 코엔 형제가 동명의 영화로 만들었다. 최고의 현대 미국 작가 중 한명으로 꼽히는 맥카시의 원작 소설도 뛰어나지만, 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코엔 형제의 연출력도 빼어나다. 

제목이 자극적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니, 한국에서 이런 발언을 했다가는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기 십상이다. 급격하게 고령화가 진행된 한국은 오히려 "노인을 위한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사회적으로 냉대받고 어려움을 겪는 노인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 사회는 노인을 공경하는 것이 당연한 가치인 사회이고, 노인을 위한 복지도 꾸준히 확대되고 있다. 오히려 청년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하기도 한다.

지극히 미국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노인에 대한 태도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제목에서 암시되듯이,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 소설과 영화는 노인에 대한 솔직한 태도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겉으로는 노인에 대한 공경을 말하지만, 한 꺼풀 들춰보면 속내는 복잡한 한국과 비교해 볼만하다.

베트남전 참전 용사인 주인공 모스는, 갱들끼리 총싸움을 벌이다 모두 죽어버린 마약 거래 현장을 우연히 목격하고 마약대금 2백만 달러가 들어있는 돈가방을 챙겨 온다. 돈가방을 어떻게 할지 잠시 고민을 했지만, 위험을 감수하기로 결정 내리고 돈을 챙겼다. 물론 짐작대로 모스는 마약상이 고용한 냉혹한 살인청부업자 안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영화는 모스와 안톤 간의 쫓고 쫓기는 숨 막히는 추격전을 따라간다. 사건을 맡게 된 보안관 에드는 모스와 그의 아내 칼라 진을 살인청부업자 안톤으로부터 보호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결국 보안관 에드는 모스와 칼라의 죽음을 막지 못한다. 오랜 경험을 통한 통찰력과 직관으로 에드는 사건의 전모를 즉시 파악하지만, 이미 늙어 은퇴를 앞두고 있는 에드는 그저 방관자에 지나지 않는다. 신중을 기하는 에드는 번번이 모스와 안톤보다 한 발짝 늦고,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반면 위험을 알면서도 이를 기꺼이 감수하는 모스와, 그를 쫓는 안톤은 철저하게 자신들의 힘과 판단 능력을 믿고 행동에 옮기는 혈기 넘치는 젊은이들이다. 

에드는 두 젊은이들이 벌이는 한판의 처절한 폭력 사태 앞에 철저하게 무력하다. 은퇴한 에드의 무기력한 모습을 비춰주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그래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젊은이들이고 노인들은 오랜 경험으로 상황 파악은 정확하게 하고 있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관조할 뿐.

원작에서 노인을 상징하는 보안관 에드는 50대 후반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러니까 미국적인 기준에서 보자면 노인은 50대 후반부터 시작인 셈이다. 물론 50대 후반은 생물학적으로 노인이라기보다는 사회활동을 마무리하고 은퇴하여 세상을 관조하는 나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하지만 미국적 기준으로 50대 후반이면 사회에서 물러날 때이고, 이들은 더 이상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코맥 맥카시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반면, 한국 사회는 노인을 위한 나라이다. 물러나서 관조하고 있어야 할 나이의 사람들이 전면에 나서 있다. 최고조의 능력을 발휘할 20, 30대 나이의 청년들은 경험 없고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 취급을 받고, 소위 "어른"들의 그늘에 가려져있다.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 예컨대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들은 30대 이전에 발표했던 아이디어가 나중에 입증되어 늦은 나이에 상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신체적 능력은 물론이고, 창의력과 같은 지적 능력도 청년기에 최고조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청년들을 미숙하다고 무시하고, 늘그막의 노인들은 완숙하고 현명하고 노련하다고 추켜세우며 청년 위에 군림한다. 

그래서 노인을 위하는 나라는 없다와 같은 작품은 한국에서 나오기 어렵다. 전통인 경로사상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전반적 사회 분위기의 영향이 매우 크다. 예를 들어, 언제 적 386세대인데 이미 586, 686이 되었어도 여전히 사회 모든 분야의 전면을 차지하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물론 나이 들었다고 무조건 은퇴하라는 것은 나이 차별이 되겠지만, 이들이 청년들의 발전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애물이 된다면 사회적 문제이다. 젊은이들이 좌절하고 활력을 잃어버린 사회는, 희망이 사라지고 망해가는 사회이다.

현명한 어른이라면 찬란한 청춘의 꽃 앞에서 한발 물러서 그 아름다움을 감상할 줄 알아야 한다. 아무리 태극기를 들고 뛰어다니고 싶더라도, 조용히 물러서서 청춘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그들이 이끌어가는 세상을 관조할 줄 아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 노인이 될 것인지 어른이 될 것인지 판단을 내릴 줄 아는 어른이 대다수인 사회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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