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망각과의 투쟁이라면, 그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는 기억해야 한다.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서는 남겨야 한다. 오직 남겨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날마다 머릿속에 글을 써온 사람이 있다. 비전향장기수 임방규 선생이다.

그가 날마다 머릿속에 써온 글을 실지로 써서 최근 두 개의 책을 펴냈다. 하나는 두 권으로 된 자서전이고, 다른 하나는 답사기다. 전자의 제목은 『비전향장기수 임방규 자서전』이고, 후자의 제목은 『임방규의 빨치산 전적지 답사기』이다.

□ 『비전향장기수 임방규 자서전』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도 60여년 전에 사라진 사람과의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인가? ‘동지’(同志)와의 약속이라면 가능할까? 게다가 ‘총살당한’ 동지와의 약속이라면 더 가능할까? 『비전향장기수 임방규 자서전』은 한마디로 동지와의 약속, 60여년 전 총살당한 동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쓴 책이다. 그것이 다만 자서전이라는 형태로 나온 것일 뿐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15척 담 안에 또 가시철망으로 둘러진 감옥 안의 감옥 이가사에서, 총살당한 동지들과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하여 펜을 들었다”고 밝힌다. 이가사는 저자가 징역을 살았던 광주교도소를 말한다. 광주교도소 이가사는 저자를 비롯해 “주로 빨치산 투쟁을 하다가 부상을 당했거나 환자 트에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은 동지들 200여 명이 살았던 곳”으로 “1954년 2월 28일을 마지막으로 7명을 제외한 전원이 총살당했다.” 말하자면 저자는 마지막까지 생존한 7명 중의 한 명인 셈이다.

▲ 『임방규 자서전』  백산서당

그러기에 이 책은 산 자만이 쓸 수 있고 또 사형수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동지들 속에 살아온 자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이다. 반체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집행 직전에 황제의 특명을 받아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28세의 젊은 청년 사형수 도스토예프스키는 후에 『죄와 벌』과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등 숱한 명작을 남겼다. 죽음과 맞닥뜨린 사람만의 그 무엇이 있는 법인가? 사형수 임방규도 이 자서전을 수준 높은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저자의 삶을 일별하면 이렇다. 6.25가 난 뒤 1950년 10월 임실 성수산으로 입산했으며, 1952년 3월 체포되어 사형 언도를 받았다가 무기징역·20년 징역으로 감형되어 1972년 석방되었고, 사회안전법으로 재판도 없이 1977년 10월 재수감되었다가 1989년 석방되었다. 32년간 감옥 생활을 한 것이다. 그리고 1977년 4월 결혼했으며, 민중탕제원을 운영하고 2000년 통일광장 대표를 지냈다. 이 책은 저자의 어린 시절부터 중학교를 거쳐 위의 일생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핵심은 빨치산 투쟁과 감옥 생활이다.

먼저, 빨치산 투쟁 이야기를 살펴보자.

이 책은 어느 면에서 전사(戰史)이자 ‘빨치산 투쟁사’이다. 사형 언도를 받은 저자가 1953년 12월 30일 재심을 받을 기회가 있었을 때 고법판사가 묻는 게 “쌍치 돌고개 작전에 참가했나?”, “임실 남원 사이에서 기차를 습격한 사실이 있는가?”, “운암 작전에 참가했나?” 등이다.

이 내용이 책에는 ‘1차 군용열차 습격’, ‘쌍치 돌고개 해방 투쟁’, ‘상운암 해방 작전’ 편에 나온다. 이들 투쟁이 빨치산 투쟁사에서 어느 정도의 위상을 갖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짐작컨대 작지 않은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이들 투쟁들을 실감나고 세세하고 또 신나게 설명하고 있는데, 특히 ‘쌍치 돌고개 해방 투쟁’에 대해 “돌고개를 해방시킴으로써 쌍치 농민들은 팔만여 석에 달하는 알곡을 우리와 함께 추수했다”면서 “농민과 함께 싸운 돌고개 해방작전은 우리 민족사에 영원히 빛날 것”이라고 평하고 있다. 빨치산 투쟁사에서 ‘쌍치 돌고개 해방 투쟁’의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다음으로, 감옥에서의 생활과 투쟁 이야기를 살펴보자.

감방 안에서 사형을 기다리는 사형수들의 심정은 어떨까? 이가사에 있는 사형수들에게는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최후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가 유일한 화두이다. 이가사는 어떤 곳인가? 탈옥사건이 있은 후 이가사 담당 간수는 감방 열쇠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가사는 철조망으로 둘러치고 출입문에 열쇠를 채워놓고 있었기 때문에 자물쇠를 두 번이나 따야 감방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곳이다.

결국 이가사 사형수들은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에 모아졌다. 저자는 “인생을 값있게 마감하겠다는 평상시의 생각과 실제로 총살당하러 나갈 때 결행할 행동과는 차이가 있지 않을까? 긴장이 되었다. 절대로 그래선 안 된다. 호명이 되고 나서 옆 동무와 악수를 나누고 전체 동무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리며 당당하게 가신 동무들이 있고, 호명과 동시에 사색이 된 동무, 맥을 못추던 동무도 있지 않았는가”하고는 “절호의 기회.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고 다짐을 한다.

여기에서 저자의 사생관이 나온다. 저자는 “끝을 세멘바닥에 갈아놓은 굵직한 대젓가락을 쥐고 오늘 호명하면 동무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문 밖에 나가서 비호처럼 몸을 날려 적의 급소를 박거나 쳐서 무기를 탈취하여 불을 뿜으며 사동을 다니면서 아지프로를 하고 만세를 부른다. 구덩이를 파놓은 총살 집행장이 아니라 감옥에서 최후를 맞을 것이다”고 최후를 그린다.

그러기에 최후를 기다리는 날들은 고통의 시간이기보다는 “우리에게 마지막 투쟁은 커다란 희망이었다. 불충분하고 부족했던 자신을 온전히 조국에 바칠 이번 투쟁이야말로 기필코 성공적으로 수행하겠다는 결의를 다져가는 나날”이었던 것이다.

천운일까? 사형에서 무기로 감하는 일이 벌어진다. 1954년 3월 12일 오후 3시경 전방(轉房)할 때의 광경이다. “이가사 방문을 나와서 철조망 출입문을 벗어났다. 무장한 놈들도 없고 간 수 한 명이 우리를 인솔하여 삼사 쪽으로 갔다. 그 지긋지긋한 무덤 같던 이가사를 떠나는 것이다. 텅빈, 문이 열려 있는 이가사! 무슨 괴물처럼 보였다. 삼사 처마 밑에 따뜻한 봄볕이 고여 있었다.”

이어 다 총살당하고 최후의 7명이 무기로 확정되어 광주 이가사를 떠나 대전 감옥으로 이감한다. 대전 감옥에서 사복을 벗고 관복으로 바꿔 입으면서 저자는 “그렇게도 부럽던 푸른 옷 아닌가. 어려서 이후 푸른 수의처럼 부러워해 본 옷이 없다. 사형을 면해야 푸른 옷을 입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푸른 옷을 입고 나서야 ‘사형을 면했구나’하고 마음이 놓였다”고 회상한다.

철조망으로 쳐진 이가사와 삼사 처마 밑에 봄볕을 대비시켜 사형과 무기의 차이를 시사하는 대목이나 푸른 수의로 사형에서 감형되는 것을 그린 이들 묘사는 어느 문학작품보다도 백미이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한 자서전이기보다는 예술작품에 가깝다. 저자는 60여년 전에 한 총살당한 동지들과의 약속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 『임방규의 빨치산 전적지 답사기』

▲ 『빨치산 전적지 답사기』 백산서당

이 책은 저자가 활동했던 지역 외에도 빨치산 투쟁이 벌어졌던 모든 지역을 찾아 쓴 답사기이다. 모두 19개의 빨치산 전적지 답사기록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이 갖는 가장 큰 미덕은 “지난날의 빨치산 24명이 자신들이 활동한 지역에서 증언”을 한 귀중한 자료들이라는 점이다.

이에 저자는 “전체 빨치산 활동의 2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쉬웠다”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고 생생한 빨치산 자료를 모으고 글로 남겨서 한편으로 흐뭇했다”고 밝히고 있어 그 사료적 가치를 짐작케 한다.

앞서 정관호 선생이 빨치산 투쟁사를 기록한 정사(正史)로 된 『전남유격투쟁사』와 야사(野史)로 된 5권의 『남도 빨치산』 책이 나온 적이 있다. 이제 『임방규의 빨치산 전적지 답사기』 발간으로 빨치산 투쟁사에서 비워있던 부분이 새롭게 채워져 빨치산사가 보다 입체적으로 세워지기를 기대한다.

마침 위의 두 책 발간을 기념하는 ‘비전향장기수 임방규 선생 출판 기념회’가 22일 오후 6시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4층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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