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련 / 종주대 단장

 

일자: 2019년 10월 27일
구간: 구룡령-갈전곡봉-왕승골 갈림길-쇠나드리 갈림길-조침령
산행거리: 22.3km(접속구간1.3km)
산행시간: 11시간 30분(식사 및 휴식시간 포함)
산행인원: 8명

              

▲ 가을산이 깊어가고 있다. [사진제공-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겨울의 전령사 서리가 내려앉은 구룡령
                    
깊어가는 가을 밤 8명의 대원들은 인제와 홍천 그리고 양양이 접경하고 있는 구룡령-조침령 구간을 향해 떠난다. 청정 1급수 내린 천이 있고 두메산골 오지로 더 많이 알려졌던 곳.
 
2009년에 서울 양양 간 고속도로가 개통되었고 어느덧 도로는 산 밑까지 닿아 있다. 버스는 내린 천 휴게소에서 잠시 정차한 후 내린 천로를 따라 구룡령으로 향한다. 1000m가 넘는 준령들 사이로 요리저리 굽이치는 내린 천로를 한참 휘감아 돈 후에야 구룡령에 내려놓는다.
 
구룡령 표지석 밑엔 포장마차가 포장이 걷힌 채로 덩그러니 놓여있고, 텅 빈 탁자위엔 살얼음이 얇게 덮여 있다. 풀숲엔 서리가 내려 앉아 있다. 벌써 겨울은 발밑에 와 있다. 백두대간을 분수령으로 영동에 속한 양양의 새벽기온은 영상 10도에 근접하는데 영서지방 홍천은 영하 2도다.
 
22.3km에 달하는 긴 구간의 시작은 언제나 그렇듯 힘찬 발걸음이다. 이구간만 지나면 설악산 구간만 남는다. 대원들의 표정에 여유가 묻어나온다. 차분히 산행준비를 마친 대원들은 갈전곡봉을 향해 어두운 숲속으로 들어선다. 

▲ 다시 찾은 구룡령에서 단체사진. [사진제공-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구룡령 옛길을 지나 최고봉 갈전곡봉에 오르다 

▲ 어둠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심주이, 이석화 대원. [사진제공-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어둠속을 40분 남짓 올라왔을까 구룡령 옛길을 만났다.  일제강점기 이 근방의 철광석을 용이하게 수탈할 목적으로 현재의 구룡령 위치에 임도를 내면서 옛 구룡령은 서서히 잊혀져갔다.
 
복원된 옛길은 문경새재, 문경의 토끼비리, 죽령 옛길과 함께 전국에서 4곳만 지정받은 명품길이다. 묘반쟁이, 솔반쟁이, 횟돌반쟁이 등 이야기가 있는 오솔길이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로 고개 정상까지 4km정도 이어진다.
 
양양의 해산물과 홍천의 농산물을 민초들의 온갖 사연과 함께 이어주던 고개이며, 미시령과 한계령에 비해 고도가 낮아 영동의 선비들도 한양으로 과거를 치르러 갈 때면 넘었다는 고개. 옛길은 깊은 어둠에 잠겨있다.

▲ 구룡령 옛길 안내판. [사진제공-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백두대간 종주를 처음 시작할 때 받은 종주계획표엔 어려운 문제로 가득한 시험지처럼 듣도 보도 못한 지명들로 온통 채워 있었다. 어느 정도 지나고 나서는 가야할 곳들의 지명들을 알아가는 재미를 붙였다.
 
특히 들머리나 날머리에 해당하는 고개와 마을 이름들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늘재, 은티마을, 하늘재, 귀네미골, 삽당령 등의 지명들은 낯선 만큼 상상력 또한 부추겼다.
 
등반능력이 떨어짐에도 지금까지 나름 악착같이 쫓아가는 이유 중 하나는 그 지명들이 뿜어내는 유혹을 견뎌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현지와 와보면 아쉬움 또한 컸다. 옛길과 함께 향토색 짙은 정경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가보지 않은 곳은 이름만 떠올려도 호기심에 마음이 부푼다. 구룡령 옛길은 나중에라도 꼭 걷고 싶은 길이다.
 
2시간여의 산행 끝에 오늘의 최고봉 1,204m의 갈전곡봉에 닿았다. 아쉽게도 최고봉이란 수식에 어울리지 않게 정상석은 없고 표지판만 나무에 걸려 있다

▲ 정상석이 없어 아쉬웠던 최고봉 갈전곡봉에서의 단체사진. [사진제공-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갈은 칡이다. 지명은 칡밭이 지천임을 나타낸다. 양양 내면 방향 산 아래 마을이름은 갈천
리다. 산골마을에 식량이 부족하여 칡으로 연명하느라 개울이 칡 씻은 물로 가득했다 해서 갈천리라 불린다.
 
고등학교 시절 동네 형의 할머니 댁이 있는 양양의 어느 산골마을로 놀러 간 적이 있었다. 그 형과 소식이 끊어져 양양 어디였지만 알아 볼 길은 없지만 할머니께서 해주셨던 감자 섞인 밥과 뒷산 잣나무를 털어 아궁이에다 잣을 태워 알을 깨 먹던 기억만은 여전히 남아 있다.
 
40여년 전 그 때는 강릉 가는 완행열차와 시외버스를 갈아타고 한참을 간 후에도 시골길을 하염없이 걸어야 했던 곳이다. 갈천리라는 지명에는 고단한 강원도 산골의 궁벽이 배어있다.

여명은 밝아오고 아침가리엔 운무가 가득하다
 
갈전곡봉 이후론 정상이라 불린 만한 봉우리가 없이 30여개의 야트막한 산세가 가볍게 너울거리듯 이어진다. 왕승골 갈림길, 연가지골 갈림길, 진흙동 갈림길, 쇠나드리 갈림길, 바람불이 갈림길이 중요 분기점 역할을 한다.
 
그래도 왕승골까지 서너 개의 봉우리는 오르내림의 부침이 심해 땀이 맺힌다. 깊은 어둠속에 낙엽과 돌들이 나뒹구는 긴 내리막과 급한 오르막을 헤드랜턴에 의지하며 걷는다. 동편 능선 위론 그믐으로 향해가는 하현반달이 희미한 달빛을 내려 보내고 있다.  .
 
불현듯 앞산 능선에 여려 개의 불빛이 나타났다. 조침령에서 새벽 1시에 출발했다는 종주대인데 우리보다 1시간 40분 먼저 등반을 시작했다 해도 참 빠른 속도로 이곳까지 왔다.
 
그들은 구룡령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진고개까지 무려 45km에 달하는 거리를 종주를 한단다. 굳이 구분하자면 그들은 프로고 우리는 순수 아마추어라고나 할까. 짧은 엇갈림 속에서도 덕담을 건네고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지 묻고 답한다.

▲ 어둠을 뚫고 붉은 태양이 떠오른다. [사진제공-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그들과 헤어져 수풀에 가려 조망이 없는 어둠을 헤쳐 가는 즈음 먼동이 산 능선위로 붉은빛을 일제히 뿜어 올리기 시작한다. 

▲ 양양 방면 산능선에 여명이 밝아온다. [사진제공-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여명에 산 속의 풍경은 서서히 장막을 걷고 모습을 드러낸다. 쌓인 낙엽과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흩날리는 이파리들, 기나긴 겨울을 버텨내려 강다짐하듯 앙상해가는 나무들로 가득하다.
 
눈으로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쌀쌀한 바람소리와 한결 둔탁해진 대기는 뜨거웠던 여름과 오색 단풍으로 물들었던 가을을 지운다.

홍천과 인제 방향 계곡을 가득채운 운무가 눈에 들어온다. 오른편 양양 쪽은 나뭇가지 사이로 첩첩이 산그리메다. 

▲ 조경동 계곡 방면에 운무가 가득하다. [사진제공-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운무가 가득한 곳은 아마도 아침가리계곡일 것이다. 조경동은 아침가리의 한자말이다. 아침나절에만 잠시 볕이 들어 밭을 경작할 수 있다는 곳.
 
조선에 유행했던 정감록류의 예언서에 이곳을 ‘삼둔 사가리’라 부르며 삼재(병란, 전염병, 풍수해)로부터 몸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로 꼽았다. 아침가리는 삼둔 사가리 중 한 곳이다.
 
외부와 격리된 채 60년 전까지만 해도 화전민들만이 살았다는 이야기는 이젠 전설이 되었다. 접근성이 좋아지면서 자연 생태 관광지로 탈바꿈하고 있다.
 
산림청에선 백두대간 산 아래 오솔길을 연결하는 백두대간 트레일(오솔길)을 조성하고 있다. 지금은 인제 홍천구간만 운영 중인데 아침가리 계곡길이 그 중에서도 백미에 속한다고 한다.
 
마을에서 시작하는 오솔길과 계곡을 따라 조성된 숲길을 걷는 맛은 장쾌한 백두대간의 수려함과는 또 다른 경이로운 체험일 것이다.

▲ 왕승골 가는 길에 긴 내리막. [사진제공-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심한 오르내림을 반복한 끝에 첫 번째 분기점인 왕승골 갈림길에 도달한다.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양양의 왕승골이며 왼쪽은 인제의 조경동이다.
 
안부가 꽤나 넓다. 이런 곳이라면 화적떼들이 은거지로 삼지 않았을까 뜬금없는 상상을 해본다. 이곳이 청석골이라면 구룡령 옛길은 쇠도리깨 도적 곽 오주가 오가는 행인들을 숨어서 기다리던 곳쯤 될까?

▲ 왕승골 갈림길에서 전용정대장, 이계환.김성국 대원이 후미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제공-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왕승골 갈림길을 지나면서 부침이 한결 누그러진다. 퇴색한 낙엽이 쌓이는 능선엔 아침햇살이 내려와 천지가 옅은 분홍 빛이다. 

▲ 아침햇살에 낙엽이 뒹구는 능선이 붉게 타오르고 있다. [사진제공-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 산죽을 헤치며 나오는 심주이, 오동진 대원.[사진제공-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시간은 어느덧 7시 30분을 가리킨다. 2시 40분경 출발하여 5시간 가까이 야간산행을 했다.  심주이 대원이 배가 너무 고픈지 무척 허기진 표정이다.
 
삼각점이 있는 968봉에서 아침식사를 한다. 겨울이 다가올수록 식사하는 일이 쉽지 않다. 금강산도 식후경이고 먹는 재미가 인생의 즐거움 중에 하나인데 몸에 열이 식고 손이 꼽아 곤혹스러울 때가 종종 있다. 아직은 그런대로 견딜만하다.
 
식은 밥일지언정 따뜻한 국물에 한 술 넘기니 어둠속을 정신없이 걸어온 몸은 원기를 회복한다.
 
해가 떠올랐지만 쌀쌀한 날씨는 긴 휴식을 허용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걸은 거리는 10km남짓, 남은 거리는 11km가 넘는다.  

▲ 968봉에서 아침식사를 하다. [사진제공-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엄마등에 업힌 아이처럼  꿈꾸듯이 대간길을 걷다

연가리골을 향하는 능선 왼편은 계곡이 줄이어 있고 기온이 낮아선지 운무가 산봉우리 근방까지 꾸역꾸역 채우고 있다.

▲ 양양 방면 산그리메가 굽이친다. [사진제공-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오동진 대원이 느닷없이 “저기 산불이 났나봐. 연기가 가득해” 하고 외친다. 장난기가 발동했다.
 
내친 김에 한 술 더 뜬다. “어! 저기는 눈이 쌓였는데” 운무를 연기와 눈으로 바꿔버리는 어린아이 같은 해맑음에 잠시 힘든 줄도 모르고 낄낄대며 웃는다.
 
왕승골 갈림길을 지나면 고만 고만한 봉우리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빨래판 구간이다. 이곳을 지났던 종주대들은 조망도 없이 이어지는 이 구간을 악몽의 구간이라 부르며 지루함에 혀를 내두르곤 한다.

▲ 능선에 아침 햇살이 내리꽂힌다. [사진제공-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장거리를 산행할 때 탄성을 자아내는 전망이나 기암괴석의 봉우리를 마주하면 피로가 말끔히 사라진다. 반면 우리가 걷는 이 길엔 옷을 벗어던지고 있는 나무들과 한 겹 한 겹 쌓여가는 낙엽에 어깨까지 자란 산죽이 있을 뿐이다.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운무와 먼 산의 윤곽은 풍광이라 하기엔 미진하다. 
 
그런데 끝없이 이어지는 봉우리를 넘나들면서도 지루하다는 생각보다 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지칠 때가 안됐기도 하고  힘이 부치다 싶으면 어느덧 야트막한 봉우리에 올라섰으며, 평탄한 능선 길을 조금 걷다보면 다시 내려가는 식이다. 낙엽은 적당히 쌓여 발바닥은 푹신하다.

▲ 지는 단풍에 가을산이 쓸쓸하다. [사진제공-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걸으면서 평화롭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엄마 등에 업혀 꿈꾸는 아이처럼 아늑하다. 아삭거리는 낙엽 길을 걸으며 어머니의 등과 같은 포근함에 빠진다.

▲ 진흙동 갈림길 가는 숲속에서 전용정 대장, 이지련.오동진 대원. [사진제공-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정겨운 마을이름, 그리고 이름 없는 수많은 봉우리들
 
빼어난 봉우리도 탁 트인 전망도 없는 것이 이 구간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이따금씩 나타나는 국가지정번호가 있는 이정표가 가야 할 거리를 알려준다. 안부에 간혹 있는 쉼터엔 오래된 통나무가 비바람에 썩어가고 있다.
 
왕승골 갈림길에 이어 연가리골 갈림길, 진흙동 갈림길을 지난다. 연가리골도 삼둔 사가리 중 한 곳이다

▲ 쉼터에서 담소중인 이계환. 김성국. 이석화 대원. [사진제공-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진흙동 갈림길을 지나면서 서서히 지쳐간다. 남은 거리는 4.2km. 산세가 부드러운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이제부터는 발이 떨어지는 대로 터벅터벅 걷는다. 선답자들이 투덜댔던(?) 심정이 이해가 된다. 마디마다 결리고 거리는 쉬이 줄지 않는다.

▲ 진흙동 갈림길 이정목에 선 오동진 대원. [사진제공-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앞선 박명한 대원이 길섶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보고 있다. 붉은색 알갱이들이 촘촘히 달린 열매를 살펴보는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산삼열매 같지 않아요?” 뒤 따라 오던 오동진 대원, “설마 산삼이 이런 곳에 있을 턱이 없지” 시큰둥해 한다. 아쉬운 듯 손 털고 걸어가는 박명한 대원의 뒤에 대고 “산삼 맞는데” 오동진 대원의 장난기가 또 발동한다.

오동진 대원이 이따금씩 쳐주는  깨소금 같은 양념은 잠시나마 지루함을 잊게 해준다. 

▲ 박명한 대원의 산삼찾기. [사진제공-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멀리 양양 쪽으로 아스라이 동해가 어렴풋하고  갈천리까지 이어지는 도로가 시야에 들어온다.

▲ 양양 방면 멀리 동해가 어렴풋하다. [사진제공-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쇠나드리 갈림길이 나오고 곧이어 바람불이 갈림길이다. 소를 방목하였다고 해서 쇠나드리, 바람이 심하게 불어 소가 날아갔다고 해서 바람불이다.
 
쇠나드리 갈림길은 조침령의 옛길이다. 쇠나드리 마을로 가는 길은 선명하게 나있는데 어쩐 일인지 나뭇가지로 막아 놓았다.  양양 방향엔 숲이 무성하여 옛길은 자취조차 없다. 마을이름들이 토속적이면서 예쁘다.
 
이렇게 아름다운 이름들이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억지로 갖다 붙인 한자말로 바뀐 곳이 수두룩하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지명의 유래도 뒤죽박죽인 곳이 많다. 쇠나드리, 바람불이 얼마나 정겹고 살가운가.
 
쇠나드리 마을이 있는 진동리 도로가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아직도 3km 남짓 남았다. 결코 이대로 도로 쪽으로 하산하지 않을 것이다. 백두대간 2년 6개월이 그냥 간 것은 아니다. 거리와 시간을 대충 가늠할 만큼은 되었다.  앞으로도 대여섯 봉우리를 더 넘어야 할 것이다.

▲ 진동리에 도로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사진제공-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지명 또한 존재의 집일 것이다. 물론 지명이 없다고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무명봉에 위로를 보내고 싶었다.
 
지나온 수많은 봉우리들은 비록 이름을 부여받지 못 했어도 오대산의 비로봉, 동대산, 점봉산등이 그렇게 높이 솟구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봉우리들이 같이 치받아 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권력의 주인이면서도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민초처럼 이름 하나 부여받지 못하고 흔한 정상석 조차 없는 무명봉들이 안쓰러웠다. 그래서 하산주를 나눌 때 ‘이름 없는 봉우리들을 위하여’를 외치는 것으로 그들의 ‘묵직한 자리 지킴’에 경의를 보냈다.

▲ 바람불이 갈림길에 환하게 웃는 전용정 대장. [사진제공-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도로가 보이면 힘이 솟는다. 길은 같은 길인데 이곳에 오기위해 숨 가쁘게 달려왔던 길이 의욕과 호기심으로 충만했던 길이라면 지금의 이 길은 지친 나그네를 집으로 보내주는 따뜻한 귀향길이다.

▲ 조침령이 가까워지자 다시 힘이 솟는 대원들. [사진제공-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새도 쉬어간다는 조침령에 내려서다

진동리 쪽에 도로는 봉우리를 오르면 나타나고 내려가면 사라진다. 조침령으로 이어지는 긴 목책이 시야에 들어온다. 새도 쉬었다 넘는다는 조침령이다.

▲ 이제 조침령이 코앞이다. 목책 위에서 기뻐하는 대원들. [사진제공-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목책을 내려서면 1980년대 공병부대가 조침령 옛길 대신 개설한 임도가 나있다. 우측으로 돌아 걸어가면 군이 설치한  구 표지석이 나오고 이어 새로 새운 조침령 표지석이 나온다. 모처럼 단체 사진을 남긴다. 정상다운 정상이 거의 없다 보니 단체사진은 들머리 구룡령과 갈전곡봉 그리고 날머리 조침령 3군데뿐이다.
 
표지석 옆으로 조침령 단목령 들머리가 긴 나무계단을 드러내고 있다. 올해의 종주 산행은 11월 2째 주말에 예정된 설악산 1박2일로 끝난다. 조침령 단목령 구간은 내년 봄에 찾을 것이다.

다시 목책 있는 곳을 지나 임도를 따라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내려간다.

▲ 임도로 내려가는 길. [사진제공-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 억새가 임도가에서 잘 가라는 듯 손을 흔든다. [사진제공-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서울 양양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터널위에서 우리들의 애마가 반겨준다. 
 
집을 떠나올 때 호기심과 열정으로 가득했던 마음과 몸은 오랜 산행으로 지쳤지만 욕망을 다 털어낸 지금 마음만큼은 깃털처럼 가볍다.

▲ 날머리 조침령 단체사진[사진제공-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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