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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을 오르며

기사승인 2019.08.23  21:4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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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행기> 6.15산악회 창립 12주년 지리산 산행

   
▲ 지리산 천왕봉 산행에 앞서 중산리 탐방 안내소에 모두 모였다. [사진제공-6.15산악회]


#1.

지리산에 오른다.

그동안 615산악회와 함께 북한산, 고대산, 관악산 등을 오를 땐 웬만한 젊은이보다 빠르게 올랐는데 이번엔 몸이 무겁다. 컨디션 조절에 실패한 모양이다.
그동안 여러 집회에 참가하고 이런저런 행사에 빠지지 않았더니, 피로가 누적된 몸으로 무박산행을 하기에는 역시 무리였나 보다.

버스에서 쪽잠을 자고 캄캄한 새벽에 산을 오르니 옛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지나간다.
열여섯 살에 입대해서 전장을 누비던 소년시절과 스물일곱에 맞닥뜨린 생사의 고비. 그리고 내 청춘과 맞바꾼 27년의 수형생활.

마음이 약해지니 걷는 것조차 힘들어진다. 좀 쉬어야겠구나….
57년 전 해주에서 헤어진 아내는 벌써 여든이 넘고, 한 살 반 아들은 이제 환갑이 가까운 나이가 되었을 테니 무심한 세월이 야속타.

다시 걷는다. 
생각해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늘 걷고 있다. 

어린 시절 따발총과 식량 등 45kg의 군장을 메고도 걸었고, 곁에서 남북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쓰러져가도 걸었고, 연락선에서 총상을 입어 사경을 헤매면서도 걸었고, 유신 치하 혹독한 전향공작과 7.4공동성명, 5.18을 거치며 갇힌 몸으로도 걸었고, 여력이 되는 한 나를 필요로 하는 모든 곳에서 걷고 있고, 그런 나를 어머니 품처럼 따스하게 안아주는 지리산을 지금도 걷고 있으니.

걷는 속도도 조절해야겠구나. 소중한 이들이 저리 걱정을 하니….
아쉽지만 힘들어하는 동료들과 함께 로타리대피소에서 하산하자. 
비록 완주는 못했지만 내 마음의 고향 북으로 갈 때까지 현장에서 열심히 걸으리라.


#2.

앗싸! 지리산 간다.

836m 북한산도 가봤으니 이제 나도 천미터 넘는 지리산을 가볼 때가 됐지.
1915m 지리산에 간다고 하니 내 전용 등산 가방이 생긴 것도 좋았고, 내 전용 스틱과 장갑이 생긴 것도 좋았고, 무엇보다 내 전용 헤드랜턴이 생긴 건 정말 짱이다. 아마 5학년 3반에서 헤드랜턴 가진 아이는 나뿐일 것이다. 음하하하~.

버스에서 자다가 내려서 이상한 아저씨가 가르쳐주는 이상한 체조를 하고 새벽 3시반부터 오르기 시작했다.

성능 짱인 내 헤드랜턴을 해뜨기 전까지 열심히 사용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너무 자주 쉰다. 난 빨리 올라가고 싶은데 어른들은 내 맘을 몰라준다.

   
▲ 성능 짱인 내 헤드랜턴. [사진제공-6.15산악회]

이제 쪼끔 힘들다.
무지 많이 올라온 것 같아서 아빠한테 얼마나 더 남았냐고 물었더니 헐~ 이제 시작이란다. 이런 된장…. 그런데 어른들은 또 쉰다.
날이 밝아진다. 이제야 아침이 됐는데 다리도 아프고 춥다. 

한참을 더 걸어서 로타리대피소에 도착했다. 여기서 아침을 먹는다고 한다. 아빠랑 아침 먹고 같이 내려가자고 해야지.

어른들은 대피소 관리하는 삼촌한테 혼나면서도 또 술을 몰래 먹는다. 그리고 나는 막걸리 안 먹는데 아빠는 내 가방에 막걸리 하나 꽂아 넣었다. 이모들이 강하게 키우는 거냐고 아빠한테 물었지만 나는 아닌 거 다 안다. 나는 크면 그러지 말아야지.

역시 산에서 먹는 전투식량이 최고다. 맛있다.
기분 좋게 아침을 다 먹고 아빠한테 내려가자고 했는데 아빠는 안내려간단다. 가려면 나만 가란다. 배신자 아빠….

어차피 내려갈 사람이 너무 많아서 나는 짤렸다. 할아버지 두 분과 나보다 힘들어하는 이모 등 다 어른들이 내려갔다. 
아빠한테 얼마나 남았냐고 백 번째 묻고 뒤를 봤는데 우와~ 정말 멋있다. 내가 구름보다 위에 있다. 역시 힘겹게 올라온 보람이 있다. 엄마랑 동생이랑 친구들한테 자랑해야지.

   
▲ 드디어 정상 천왕봉에 올랐다. 내가 대단하다. [사진제공-6.15산악회]

천왕봉이다. 드디어 정상이다. 내가 대견하다. 그런데 집에 빨리 가고 싶다.
내려올 땐 다른 길로 내려왔다. 아무래도 어른들이 일부러 꼬불꼬불 더 오래 걸리는 길로 내려가는 것 같다.

힘들다.
정상에 올랐을 때까지만 해도 참을 수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사나이 체면이고 뭐고 아무 생각이 없다. 엉엉 울면서 내려왔다.

몇 걸음 걷고 “아빠 쉬고 싶어요” 하면 아빠가 같이 쉬어줬다. 아무래도 튼튼한 아빠 다리도 풀린 걸 보니 아빠도 쉬고 싶다는 내 말을 기다리는 것 같다.
하지만 다행이다. 나보다 못 걷는 합창단 이모도 있으니.
다음엔 산에 안 올 테다.


#3.

지리산이다.
20대에 오르고 잊고 살았던 산이다.
그것도 무박산행. 내가 잘 해낼 수 있는지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번 산행지가 지리산이라니 그냥 가고 싶었다.

아침으로 먹을 도시락을 간단하게 삼각김밥 25개와 계란말이 세 통을 준비했다.
아차, 내려가는 버스 안에서 이종문 사탄이 푼 오미자주와 소주 2팩을 마주하고는 잘못된 판단임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이제 잠도 잘 오겠지….

합창단 찬비 언니와 종문 오빠의 서먹한 관계를 돈독한 관계로 만들어주고자, 찬비 언니의 옆자리를 양보하고 차지한 종문 오빠의 두 자리를 침대 삼아 곱게 누웠는데…. 
자다가 날벼락 맞았다.

올려놓은 손잡이를 뒤에 앉은 모씨가 거침없이 내리는 바람에 오른쪽 눈에 1억 볼트의 번개가 내리쳤다. 아… 따뜻한 양보의 미덕도 죄더란 말인가.

며칠 후 내 눈탱이 밤탱이 됐다.

새벽길의 지리산은 습하고 더웠다.
앞선 사람의 걸음과 뒷선 사람의 빛을 동무삼아 다른 때보다 수월하게 올랐다. 체력이 좋아졌나보다.

산행 때마다 늘 가볍고 빠르게 산에 올라 우리를 무안하게 만들었던 박희성 선생님의 상태가 좋지 않다. 언제나 아픈 나를 치료해주신 놀랄 만큼 건강한 양희철 선생님도 힘겨워 하신다.
로타리대피소에서 몇몇은 하산하기로 결정했다. 현명한 판단이었던 것 같다.

   
▲ 천왕봉에서 바라본 광경. [사진제공-6.15산악회]

아름다웠다.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는 둥그렇고 따뜻한 봉우리들.
봉우리를 둘러싸고 피어오르는 구름.
천왕봉 위에 그려진 황홀한 흰송이들.
말과 사진으로 담을 수 없는 지리산을 품고 왔다.

중산리탐방안내소에서 오르기 시작해 칼바위능선을 지나 로타리대피소를 거쳐 천왕봉에 도착하니 양심수후원회 손일순님과 배경석님이 반갑게 맞아준다. 내려와서 푸짐하고 맛있게 먹은 백숙과 시원한 맥주를 후원해주신 고마운 분들이다.

예정시간보다 조금 늦어졌으니 하산에 속도를 내라는 안내에 따라 한결이와 함께 돌멩이를 밟으며 콩콩 뛰었다. 이때만 해도 좋았다.

   
▲ 천왕봉에서 바라본 지리산 종주 능선. 저 멀리 반야봉이 보인다. [사진제공-6.15산악회]

장터목대피소를 지나 백무동으로 내려오는 길은 멀고도 길었다. 선발대와 후발대의 거리가 점점 벌어지더니 급기야 조난 수준의 낙오자가 발생했다. 그 앞에 내가 있었다. 정말 다행이다. 고마운 윤경 언니….

어느 순간부터 한결이 얼굴에 울음기가 가득하다. 계속 참아내다 너무 힘들었는지 소리 내서 울기 시작한다. 아빠한테 업어주라고 하고 싶었지만 태훈이도 이미 다리가 풀려있다.
내 첫 산행이 생각났다. 

두타산. 20대 초반에 선배들을 따라 오른 두타산에서 탈진했다. 해가 져버려서 어둑해진 길을 내려오며 나와 동행해주는 선배 뒤에서 나도 모르게 한결이처럼 울었다.

한결이에게도 뒤쳐져 걷고 있는데 걱정되어 다시 올라온 두 분의 고함소리가 들린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백두대간팀의 한 분과 느린 걸 참지 못하고 우리를 버리고 갔던 종문 오빠다. 얼마나 남았는지 몰라서 뛰어 내려갔다가 샤워까지 하고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아서 걱정되어 다시 올라왔단다. 지금까지 내 등위에 올려져있던 배낭을 대신 매준다며 가져간 순간 아… 그 가벼움이란. 그래도 내 다리는 이미 내 다리가 아니다.

   
▲ 백무동 능선으로의 하산길은 시종일관 큼직한 돌을 밟아야 해서 무척 힘들었다. [사진제공-6.15산악회]

내려와서 시원한 맥주로 내 다리와 정신줄과는 이별했다. 
예상보다 3시간 이상이 지체되어 기사아저씨는 화가 나있고, 기다리다 지친 다른 분들도 예민해져있다. 그래도 부상자 없이 산행을 무사히 마치게 된 것은 갑자기 세상을 떠나신 김래곤 총무님의 어머님의 보살핌 덕분이 아닐까 싶다. 책임감 강한 아들이 참석지 못한 산행을 보살펴 주신 것일 게다. 

11시가 넘어 서울역에 도착한 후 종문 오빠와 조문을 가서 김래곤 총무님을 만났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일어서려는데 어머님이 마지막으로 베푸는 술이 달다며 종문 오빠는 잘 가란다. 이런 간장종지 같은 종무니. 역시나 배려가 뿜뿜 뿜어져 나올 것 같은 김익흥님이 택시 잡아주고 오라는 타박에 생각 짧은 종문오빠의 배웅을 받고 긴 하루를 마쳤다.

그 후 심한 근육통과 함께 온 몸살로 끙끙 앓았다. 맨소래담 매니아 종문 오빠의 충고대로 한 번도 사용해본 적이 없는, 그게 파스인지도 몰랐던 내가 시도 때도 없이 듬뿍 발라도 상관없다는 대답을 믿고 사무실에서 듬뿍 발랐다.

그날 내 다리에 불났다. 사무실 동료들의 후각마비로 인한 타박은 덤이다.

 

서효정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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