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배 (21세기민족주의포럼 기획위원)
 

▲ 조희승 지음/이덕일 주해, 『임나일본부 해부』, 도서출판 말, 2019.8. [사진제공 - 도서출판 말]

정상적인 한국인 가운데 누구도 임나일본부설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미 논쟁이 끝난 것으로 믿고 있기 때문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는다. 그저 침략주의 사상에 물든 ‘나쁜’ 일본인들이 떠들어대는 ‘가짜 역사’로 치부한다.

그러다보니 보통 사람들은 임나일본부 같은 식민사관은 진작에 극복된 것으로 믿어왔다. 하지만 우리 내부의 사정을 들여다보면, 그게 아닌 것 같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5년 전 김현구 고려대 명예교수는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이 쓴 『우리 안의 식민사관』(만권당)이 자신의 명예를 훼손하고 모욕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은 3년만에 최종적으로 원고측 즉, 김 명예교수의 패소로 막을 내렸다.

논란의 핵심 사안은 결국 임나일본부였다. 이 소장은, 김 명예교수가 자신의 저서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창비) 등을 통해 앞에서는 식민사학이라며 부정하지만, 뒤에 가선 결국 일본인들의 설을 따르고 있다며 비판을 가했다.

임나일본부란 무엇인가, 그 위치는 어디인가, 그 성격은 무엇인가? 우리나라에서 임나일본부를 둘러싼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현재진행형이다.

임나일본부설을 무너뜨린 북한 연구자들의 힘!

이제는 널리 알려졌지만, 일제 식민사관의 양대 축은 이른바 ‘한사군 반도설’과 ‘임나일본부설’이다. 이 사관에 따르면 우리 역사는 대략 평양 이북은 한(漢)의 식민지인 4군으로, 한반도 이남은 왜의 식민지인 임나일본부로 시작된다. 결국 우리 역사는 식민지로서 출발했다.

한반도는 중간지대에 끼여, 늘 외부적 요인에 의해 운명이 좌우된다. 이러니 살아남으려면 동조동근(同祖同根, 조상이 같은 민족)인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 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일본 침략주의자들이 만들어내고, 이를 한국인들에게 주입시키기 위해 온갖 짓을 다했다. 심지어는 경북 고령에 ‘임나일본부 구지(舊址)’라는 거대한 비석을 세워두고, 철 따라 사람들을 참배시키기도 했다.

북한에서는 일찍부터 이 두 가지 핵심 사안을 물리치기 위해 온힘을 기울였다. 1962년에 나온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말)가 대륙 고조선을 회복시킨 주요한 책이라면, 김석형의 『초기 조일관계 연구』(1964년, 평양)는 “임나일본부란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일본열도 내에 둔 조선분국을 입증”하는 것임을 과학적으로 논증했다.

▲ 평양출판사가 2012년 간행한 조희승의『<임나일본부> 해부』와(왼쪽) 도서출판 말이 이덕일 주해로 펴낸 『북한학자 조희승의 임나일본부 해부』(오른쪽). [사진제공 - 도서출판 말]

조희승은 김석형의 제자로서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1990년)을 발행하여 더욱 진전된 연구성과를 집대성했다. 이번에 도서출판 말에서 나온 『북한학자 조희승의 임나일본부 해부』는 이런 전반적인 연구성과를 일반인들이 알기 쉽게 정리하여, 북한에서 2012년에 발행한 책이다. 책 앞머리에서 이 책의 발행취지가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어떠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임나일본부설’이 조작되었고 그것이 가지는 해독적 후과와 문제의 심각성을 론하였으며 1980년대 중엽 임나일본부의 위치를 밝힌 론문이 발표되게 된 배경과 첫 논문 발표무대가 된 <고구려문화전> 국제토론회의 내용을 당시의 기록자료에 근거하여 서술하였다.”

임나일본부설은 군사작전의 일환으로 창작되었다

저자가 인도하는 ‘임나일본부의 진실찾기 여행’을 떠나보자.

저자는 임나일본부를 따지기에 앞서 가야사를 개관했다. 처음 읽을 때는 인식하지 못했지만, 두세 번 읽으면서 이 책의 최대 장점이 여기에 있음을 깨달았다. 나의 역사란 근본적으로 남이 써주는 것이 아니다. 내 나라 내 역사가 올곧게 자리잡혀 있다면, 거기에 외적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520년(42~562년) 동안 가야사가 왕통의 끊김 없이 이어져 왔다면, 어찌 임나일본부 따위가 끼어들 수 있겠는가! 저자가 명시적으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我)’와 ‘비아(非我)’의 주체성 있는 설정이야말로 역사공부의 첫 걸음임을 행간에서 절절이 말해주고 있다고 느꼈다.

임나일본부설은 학문이 아니다. 사가들의 치열한 연구 결과 도출된 역사론이 아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군사작전을 토의하는 륙군참모부가 력사학설을 창시한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괴이한, 현대지성인의 귀를 의심케 하는 일이 19세기 말년에 일본에서 벌어졌다.”

아울러 저자는 “조선을 병탄하고 련이어 만주를 삼키며 나아가서 온 아시아의 맹주가 될 것을 꿈꾸었다. 그 침략적 야망을 부채질하는 데 효과있게 써먹은 것이 다름 아닌 <일본서기>의 기사들이었다.”고 지적했다.

1884년 참모부에서 파견한 밀정이 광개토성릉비문 탁본을 가져오면서, 임나일본부설을 둘러싼 ‘간교한 짓’은 절정에 치달았다. 하다하다 광개토호태왕의 위업을 기리는 비문 내용조차 ‘왜의 업적을 칭송하는 것’이라고 왜곡하기까지 했다.

이후 일본군부에선 이 작업을 동경대 등 유수한 대학들로 이전해, 우리 역사를 망가뜨린 어용사가들과 일종의 군민(軍民) 협동체제를 만들었다. 즉 이들이 생산해낸 이론이란 본질적으로 조선 침략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즉 이성에 바탕을 둔 합리적인 논의의 대상이 되기 어려움을 뜻한다.

임나일본부 없으면 존황론, 신국론, 정한론도 없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670년까지 ‘일본’이란 이름은 없었다. 백제 멸망 후 백제부흥운동에 동원되었다가, 수천의 백제인들이 수하의 왜병(물론 백제계가 다수였을 것)을 거느리고 663년에 왜 땅으로 들어간다. 그들은 670년에 국호를 ‘일본’으로 바꾼다고 신라에 통보하고, 701년에 정식으로 국호를 선포한다. 즉 그 이전의 ‘일본’이란 모든 기록은 허구일 수밖에 없다. 당연히 일본부란 명칭은 후대에 붙인 이름에 불과하다.

712년에 <고사기>를, 720년에 <일본서기>를 지으면서 만들어진 용어임을 알 수 있다. 이 책들 속에 이른바 ‘신공왕후의 삼한정벌’ 설화가 들어간다. 연대도 불분명하게 등장하는 신공왕후가 신라를 정벌하고, 나아가선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조공을 받았다는 믿거나말거나 식 기록이다.

그런데 이 ‘삼한정벌설’은 임진왜란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비롯한 숱한 일본 침략론자들의 단골 메뉴로 떠오른다. 명치유신의 정신적 스승이며 야스쿠니 신사의 제1위에 올라 있고, 현 수상 아베 신조가 존경해 마지않는다는 요시다 쇼인은 <유수록(幽囚錄)>에 이런 글을 남겼다.

“황조에서 신공황후가 삼한을 정복하고, 호조 도키무네가 몽골을 섬멸하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정벌한 것은 모두 호걸이 한 일이라 할 수 있다 …… 조선과 만주는 서로 붙어서 일본의 서북쪽에 있고 모두 바다를 사이에 둔 가까운 나라다. 또한 조선은 과거 일본에 신하로 복속했는데 최근 점점 거만해졌다. 우선 조선의 풍속과 종교 등을 자세히 파악해 그 나라를 다시 수복해야 한다 …… 조선을 독촉해 인질과 조공을 바치게 하고, 북쪽으로는 만주를 취하며, 남쪽으로는 대만‧필리핀 섬 등을 우리 손에 넣어 점차 진취적인 기상을 나타내야 한다.”(이상 이기용 저 『정한론』에서 인용)

1868년 명치유신 전에 이들은 존황론(尊皇論), 신국론(神國論), 정한론(征韓論)이라는 3종 세트를 만들어낸다. 즉, 순수한 혈통으로 이어진 만세일계의 천황은 영원하며, 일본은 순수한 야마토인이 사는 신성한 땅이며, 4세기부터 미개한 한반도를 지배해왔다는 설이다.

하지만 만일 당시 왜의 세력이란 것이 형편없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어떻게 될까? 한반도에 임나일본부는커녕, 거꾸로 일본열도 곳곳에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에서 세운 소국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는 것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진다면, 아마도 대다수 일본인들은 황망해질 것이다. 존황론 3종 세트의 존립 자체가 어려울지도 모른다.

네 가지 관점에서 임나일본부설 논파

위(僞)조선총독부가 앞장서고 어용사가들을 총동원하여, 고고학적으로 임나일본부를 입증한답시고 일제의 어용 사학자들을 동원하여 이 땅 곳곳의 문화유적을 헤집었다. 이는 ‘눈 뜨고 못 볼 정도가 아니라 치가 떨리는 참상’이었다.

하지만 <일본서기> 외에는 임나일본부를 입증할 어떤 문헌 기록도 없고, 우리 땅에서 나온 온갖 유물들은 도리어 한반도의 일본 지배를 입증할 뿐이었다. 아울러 일본 내에서 발굴되는 수많은 유물들이 그 원산지가 한반도임을 나타냈다. 영국에 있는 로마의 유물 자체로 로마의 영국 지배를 증명하듯이, 일본에 존재하는 유물 자체로 한반도의 일본열도 지배를 증명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명쾌하게 침략주의자들의 모든 시도가 실패했다고 단언한다. 임나일본부는 이 땅에 없었다. 만일 그게 존재하려면,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전제가 충족돼야 한다.

첫째, 4세기 후반에 야마토왜가 서부 일본을 통합했어야 한다.

이미 밝혀진 바와 같이, 당시 일본에는 제철기술 자체가 없었다. 잘해야 6세기에나 도입된다. 그러니 당연하게 기마전을 알 수도 없다. 이런데도 왜가 수만의 기마병단을 운용하는 삼국과 가야를 지배했다? 야마토왜 세력은 당시 오늘날의 나라 분지조차 제대로 벗어나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둘째, 백제 칠지도가 백제에서 야마토왜에 바친 공납품이어야 한다.

백제 칠지도가, 백제의 공납품이 아니라 백제에서 관할 제후국의 후왕에게 하사한 물건임을 이제는 일본학자들조차 인정하고 있다. 일본육군참모부와 짝을 이뤄 칠지도를 임나일본부의 유력한 증거물로 삼으려 획책했던 간 마사토모의 헛된 노력은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 백제 칠지도는 백제에서 관할 제후국의 후왕에게 하사한 물건이다. 이 책의 표지에도 칠지도가 포함됐다. [사진제공 - 도서출판 말]

셋째, 에다 후나야마고분 출토 칼이 야마토왜 정권이 하사품이어야 한다.

이 무덤은 규슈 구마모토에 있다. 5세기초 조성된 무덤으로서, 여기에서 출토된 칼이 야마토왜의 하사품이라고 함으로써, 야마토왜가 나라 지역을 벗어나 규슈까지 진출했음을 증명하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이 칼 역시 백제의 왕이 하사한 물건으로 비정되고 있다. 아울러 무덤에서 출토된 각종 부장품들도 하나같이 백제의 물건들이다. 오히려 당시 이 지역을 백제가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넷째, 광개토성릉비문에 나오는 왜가 야마토왜임에 틀림없다.

광개토성릉비문을 두고 일본육군참모부는 온갖 모략을 전개했다. 앞의 세 가지 사항을 살펴보면, 이 능비문에 나오는 왜가 야마토왜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참고로, 저자는 능비문의 왜가 자리잡고 있던 지역이 바로 규슈 지역 이토지마반도라고 단언한다. 지리적으로 가야나 신라와 가까우며, 전일본적으로 기마 전투무기가 가장 일찍이 출현한 지역이라는 것이다.

이상 네 가지 사항을 통해 임나일본부는 사실상 논파되었다. 즉 임나일본부는 한반도에 존재하지 않았음이 논증되었다.

▲  광개토성릉비문에 나오는 왜가 야마토왜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진제공 - 도서출판 말]

임나일본부설은 외려 삼한의 일본지배를 입증한다

저자는 이처럼 임나일본부가 조선에 있었다는 것은 허구임이 낱낱이 밝혀졌다고 하면서도, “<일본서기>에 실린 임나관계 기사들이 일정한 력사적 사실을 반영”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각종 문헌기록과 유적유물 등을 검토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일본서기> 임나관계 기사에 나오는 임나일본부라는 것은 기비 지역(오늘날의 혼슈 오카야마 현 일디) 임나가라에 설치된 야마또 정권의 전권대표격인 행정적 출장기관 또는 그 기관을 책임진 관리였다. 이것이 기내 야마또정권이 파견한 임나일본부의 실체이고 정체였다.

임나일본부의 실체가 과학적으로 해명됨으로써 일본 땅에 있었던 임나일본부를 조선의 남부 지방에 있었던 것으로 외곡 조작하여 저들의 침략적 본성을 가리우고 야마또 민족의 우월성을 론증하려고 하였던 일제의 죄악에 찬 력사와 아직도 사이비학설을 정설처럼 고집하는 일본인들의 후안무치함과 도덕적 저렬성은 세계의 면전에서 낱낱이 까밝혀지게 되었다.”

▲ 임나일본부는 기비 지역(오늘날의 혼슈 오카야마 현 일디) 임나가라에 설치된 야마또 정권의 전권대표격인 행정적 출장기관 또는 그 기관을 책임진 관리였다. [사진제공 - 도서출판 말]

한편 일본 고대사와 관련해 3백편이 넘는 논문과 수십 권의 연구서를 발간한 고 최재석 전 고려대 교수는 『백제의 대화왜와 일본화 과정』(일지사, 1990)에서 “국호가 ‘일본’으로 바뀌기 이전의 ‘대화왜’의 역사는 한국사의 일부분이고 국호가 ‘일본’으로 바뀐 시기부터는 한국사에서 떨어져 나간 역사”로 보아야 한다고 하며, 대화왜를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임나(신라‧백제의 속령)과 함께 한국사의 표로서 정리하여 제시했다(439쪽).

이것은 김석형 원사와 조희승 박사의 연구와 궤를 같이 하는 결론으로서,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왜 일본은 기를 쓰고 ‘<삼국사기> 불신론’을 펼치는가?

임나일본부를 창작한 일본 어용 혹은 우익 학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신성한 땅의 만세일계 천황이 온 일본을 통일하여 한반도까지 점령했으니, 그 땅은 미개해야 한다. 즉 제대로 된 나라가 존재해선 안 된다. 그것이 곧 ‘<삼국사기> 불신론’을 펼쳐댄 이유이다. 한마디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이른 시기 국가건설을 모두 부정한다.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지금도 그렇게 가르치는지 모르지만, 고구려는 소수림왕, 백제는 근초고왕, 신라는 법흥왕 때에 와서야 국가체제를 갖추었다는 등의 헛소리를 펼친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천황에 앞선 고조선의 ‘단군’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리하여 이른바 유사종교라는 작명까지 해대며 단군을 존숭하는 대종교를 탄압했다. 하지만 구한말 및 임시정부 기간 동안 수많은 독립투쟁 인사들이 단군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아 한데 뭉쳤으며, 그 결과 개천기원과 개천절을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이 개천절이 남북한을 한데 묶을 상징으로 떠오른 것은 너무나 의미가 깊다.

일제 강점시기 동안 우리 민족은 단군을 원점으로 삼은 민족사 세우기에 힘겨웠지, 일본 어용학자들의 ‘전면적이고도 총체적인 횡설수설’에 맞대응해 다툴 만한 여력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일본 학자들의 구구한 논리를 일일이 논박하는 작업이 이뤄지지 못했다. 겨우 해방과 전쟁 뒤에야 거짓 학설 소굴의 ‘본진’을 깨뜨리는 데 나설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선봉장 역할을 김석형이나 조희승 같은 북한 학자들이 맡았다. 남한에도 임나일본부설을 공략하는 학자들이 있었지만, 아쉽게도 이 땅에선 일제의 침략사관을 완벽하게 불식하지 못하였다. 언젠가 남북의 귀한 연구결과가 서로 조화를 이루며, 바른 역사‧진실한 역사로 재정립되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임나일본부를 알아야 오늘의 일본을 안다

현 일본수상 아베 신조는 정한론 설파자 요시다 쇼인을 가장 존경하는데, 쇼인의 수제자 다카스기 신사쿠의 ‘신’ 자를 자기 이름에 넣었다. 다카스기는 20대에 군사조직을 만들어 에도 막부를 깨뜨리며 명치유신의 물길을 튼 인물이다. 그는 전쟁터에서 사망한 군인들을 위한 초혼제를 치렀는데, 조슈번의 후예들은 군국주의의 길로 나서면서 이 초혼제를 야스쿠니 신사로 전환시켰다. 당연히 야스쿠니 신사에는 요시다 쇼인과 다카스기 신사쿠가 자리잡고 있다.

오늘날 아베 신조는 요시다 쇼인이 설파한 대동아공영권을, 다카스기 신사쿠의 결단력을 본떠 실행하겠다는 꿈을 다시 꾸고 있을지 모른다. 아베는 때마다 그 두 인물의 무덤을 찾아가고,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하면서 서슴없이 이런 말을 내뱉는다.
“나를 군국주의자라 불러도 좋다.”

이런 아베를 제대로 인식하려면 ‘존황정한론’의 실체를 알아야 하고, ‘존황정한론’을 알려면 임나일본부설을 알아야 한다. ‘존황정한론’은 삼한정벌설 혹은 임나일본부설을 양분 삼아 독수를 뻗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거꾸로, 우리가 만약 임나일본부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된다면, 일본의 ‘존황정한론’이라는 것이 얼마나 엉성하고 하잘것없는 토대 위에 서 있는지를 간파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한다.

이 책 『북한학자 조희승의 임나일본부 해부』는 과거 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명백히 오늘과 내일을 향한 기준점을 밝혀주고 있는 책이다. 이제 임나일본부는 한반도에 존재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일본열도 내 어디에 존재했는가로 문제의 초점이 바뀌었다. 책을 통해 ‘역사의 전환점’을 통렬히 느껴보았다고나 할까. 읽는 내내 가슴이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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