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강성주 (KAL858기 사건 연구자)

 

한국의 이른바 우방국을 중심으로 많은 나라들이 KAL858기 사건 관련해 (북쪽을 지칭하거나 그러지 않는 형태로) 규탄성명을 발표한다. 대북제재 조치가 발표되기도 했는데, 정부로서는 만족스럽지 못할 때도 있었다.

일본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1988년 1월 18일 박쌍용 당시 외무부 차관은 오타 히로시 한국 주재 일본대사대리를 만나 오부치 게이조 관방장관의 논평이 “북한을 분명하게 지칭하였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이라고 말한다(2017060070, 7쪽).

이규호 당시 일본 주재 대사는 1988년 1월 25일치 문서에서 “일측 조치내용에는 아국정부가 요청한 일.북 경제교류제한 및 조총련을 기지로 한 대아국 파괴활동에 대한 규제조치가 포함되지 않은것은 유감이라고 말하고” 일본이 이러한 조치를 앞으로 취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보고한다(24쪽).

또한 박쌍용 차관은 오타 일본대사대리를 다시 만난 자리에서 관방장관이 담화를 통해 “조치를 “당분간” 취한다고 하고 또한 구두 보충설명에서 “올림픽 종료시 수정을 검토한다”고 하는것은 금번조치가 올림픽 종료시까지만 유효하다는 의미인지”라고 물으며, 대북제재가 오래 유지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내비쳤다(29쪽).

정부 기대에 못 미쳤던 우방국의 대북규탄

▲ 서독 주재 대사는 독일 연방정부의 성명 내용이 기대에 어긋나는 점이 있다고 외교부 장관에게 보고했다(2017060071, 36쪽).[자료사진 - 통일뉴스]

신정섭 당시 서독(독일) 주재 대사의 경우, 주재국 외무성 관계자를 만나 “성명 내용중 “연방 정부가 조사결과를 평가할 입장에 있지 않으나 동 조사결과가 사실이라면” 이라는 문구 및 보복조치 자제를 종용하는 문구등 우리 기대에 어긋나는 점이 있”다고 말했다(2017060071, 36쪽).

미국은 제재조치의 하나로 북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하게 된다. 아울러 한국의 요청에 따라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의 감축문제를 검토하기도 했는데, 미국은 “사건과 유엔 북한 대표부 활동과의 직접 관련증거가 없으며 동대표부 직원수가 9명에 불과”한 점 등을 이유로 “감축시도가 어려울것으로 판단”했다(2017060069, 4-5쪽).

정부는 캐나다에 대해 특히 불만이 있었던 듯한데 “성명문 발표의 지연 및 발표문 문구 내용에서도, 아국정부내에서 크게 실망하고있음을” 알렸다(2017060073, 96쪽). 대북제재를 취하지 않은 것과 관련, 캐나다는 북쪽과 “아무런 실질관계가 없기때문에 별다른 조치를 강구할 수없는 입장”이라고 설명했다(97쪽).

한편 캐나다가 수사관을 서울에 파견해 1988년 2월 1일 김현희를 면담했는데, 이는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다(96쪽). 캐나다 외무부 관계자는 이 수사관의 보고 등을 바탕으로 한국의 “수사발표내용이 전반적으로 사실”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한다.

이처럼 정부 입장에서는 외국의 대북규탄 관련해 아쉬움이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봤을 때 정부는 1988년 1월 28일 기준, “우방국가, 국제기구 세계언론의 대북규탄은 이미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했다(2017060056, 123쪽).

그럼에도 국제무대에서의 규탄 활동은 계속되는데, 앞선 글에서도 지적했듯 정부가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였다. 외무부의 국제기구조약국이 1988년 1월 24일 작성한 “KAL기 폭파사건 유엔 안보리 대책(안)”에 따르면, 네 가지 방식이 검토되고 있었다. “(1) 장관 성명문 발표 및 안보리 문서로 배포 (2) 안보리 의장 명의 성명 (3) 안보리 소집 및 토의 (4) 안보리 결의안 제출”(87쪽).

조심스러웠던 유엔 안보리 문제

박근 당시 유엔 주재 대사는 이 가운데 안보리 의장 성명 방식을 건의해왔다. “[유엔 주재] 미국대사가 사견으로 안보리 토의 제기(결의안 여부 불문)를 원치 않고 있음. … 친북한 국가들은 북한을 공개적으로 비호하고 사건 조작 운운하는 북한 입장 지지 예상. 안보리 토의 또는 결의안 채택 시도시 아측에 불리한 기록(결의안 부결 사실 포함)이 남게되므로, 아국이 국제무대에서 이미 향유하고 있는 유리한 입장이 약화될 우려” 등을 고려한 결과였다(108쪽). 곧, 결의안 제출은 물론이고 유엔 안보리에 사건을 제기하는 것 자체부터 쉽지 않았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정부의 수사결과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꼼꼼했다면 과연 그랬을까라는 물음을 던지게 된다. 실제로 당시 유엔 주재 잠비아대사는 안보리 문제와 관련된 박근 대사와의 면담에서 “안보리에 제기하려면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을수 있는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고 보며 국제적으로 인정한 수사결과가 나오면 이를 근거로 제기(CLAIM) 할수 있을 것으로 생각함. 83년 칼기 격추시에는 최소한 소련에 의한 격추사실에는 이론이 없어 안보리 토의가 가능했으나 금번 경우에는 토의의 기초가 없다고” 말했다(2017060072, 165쪽).

(대통령 선거와) 총선을 의식했던 대북규탄 활동

정부는 유엔 문제를 조심스럽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유엔 주재 대사는 “안보리 토의 및 의장 성명대신” 가장 낮은 단계라 할 수 있는 안보리 문서 배포 방식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다. “ICAO[국제민간항공기구]에서 중립적인 국제조사를 시행토록” 할 것도 건의한다(2017060056, 140쪽).

▲ 최광수 외교부 장관이 유엔 주재 미국 차석대사에거 '총선계획'을 언급한 것으로 확인됏다(2017060056, 118쪽). [자료사진 - 통일뉴스]

그런데 최광수 당시 외무부 장관은 1988년 1월 28일 허버트 오쿤 유엔 주재 미국 차석대사에게 다음과 같이 토로하기도 했다. “솔직히 이야기하여 정부의 총선계획등에 비추어 만일의 경우 아국이 안보리 소집 요청을 하였다가 의제 채택이 되지않은 경우라도 발생한다면 우리 외교의 실패로 인식되어 국내문제화될 가능성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음”(118쪽).

이 대목은 그동안 적어도 내 자신이 크게 고민하지 않았던 부분을 살펴보게 한다. 13대 총선이 1988년 4월 26일에 있었는데, 정부는 대북규탄 효과의 하나로 이 선거를 주목했던 듯싶다. 참고로 정부가 사건을 대통령 선거에 이용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무지개 공작’의 추진기간은 1988년 5월 31일까지였고, 이는 총선시기도 포함한다. 정부가 대선은 물론 총선에도 사건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려 했다는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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