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상하이서 첫 걸음을 시작해 일제의 패망으로 1945년 11월 고국에 돌아올 때까지 27년간 고난에 찬 투쟁을 이어갔다. 그 사이 임시정부는 상하이,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충칭 등 중국 대륙 곳곳을 누비며 1만3천리(5,200㎞)를 이동했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초기 활동 지역인 상하이와 첫 피신처였던 항저우의 임시정부 유적지를 돌아보았다. 상하이・항저우 유적지 답사기와 함께 임시정부 역사를 10여회에 걸쳐 정리하고자 한다. 이 답사기는 매주 화요일 연재된다. / 필자 주

 

임시정부의 충칭 정착

1937년 7월 8일 일본군의 중국 본토 침략과 함께 중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내려는 계획이었다. 우세한 전력을 바탕으로 베이징, 텐진, 상하이, 난징, 우한, 창사 등 주요도시들을 점령해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를 압박함으로써 항복을 받아내겠다는 전략이었다. 일본군은 전면적인 공격을 감행해 7월 말경에는 베이징과 텐진 일대를 완전히 장악했고, 8월에는 상하이 공격에 들어갔다.

일본군은 중일전쟁을 시작하면서 3개월이면 중국 전체를 점령할 수 있다고 큰소리쳤지만 상황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중국은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다. 일본군은 8월 3만5천명의 군대를 동원해 상하이 상륙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11월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상하이를 점령할 수 있었다. 상하이 공방전이 벌어지는 수개월 동안 중국군은 바리케이드를 치며 치열한 방어전을 펼쳤고, 일본군은 바리케이드 사이를 오가며 시가전을 펼치며 더디게 전진했다.

상하이를 점령한 일본군은 독이 오를 대로 올랐다. 11월 말 일본군은 난징을 향해 진군을 개시했고, 주변 농촌지역과 작은 도시들을 초토화시켰다. 12월 13일부터 일본군은 국민당 정부의 수도였던 시내로 본격적으로 진입했다. 일본군은 관공서와 은행, 학교와 창고를 점령하고 거리에서 눈에 띠는 대로 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골목길과 대로, 대피호, 관공서, 광장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민간인을 살해했다. 시내로 진입한 일본군은 중국군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집집마다 수색하면서 시민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했다. 시내뿐만 아니라 한적한 난징 근교에서도 닥치는 대로 주민들을 살해했다. 난징 성벽과 강을 따라 연못과 호수 옆 구릉과 산에는 시체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거리와 강과 호수, 연못, 산천이 말 그대로 핏빛으로 물들었다. 일본군의 무차비한 학살은 6주 동안 계속되었고, 그 과정에서 30만여명이 학살되는 대참극이 벌어졌다.(주1)

일본군은 우수한 전력을 바탕으로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내려 했으나 중국은 정면대결을 피하는 지구전 전략을 폈다. 마오쩌둥이 모순론과 실천론, 인민전쟁론 등에서 폈던 것처럼 일본군의 화력이 아무리 우수해도 동원할 수 있는 병력에 한계가 있었고, 거대한 중국 대륙전체를 장악하기는 힘들었다. 일본군이 장악한 것은 중요도시를 중심으로 한 점과 그 점을 연결하는 선에 불과했다. 그 사이는 중국인민과 저항군이 버티고 있었다. 장기전, 지구전을 펼치며 중국 인민은 일본군을 수렁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 난징대학살 당시 희생자들의 시체 더미와 그 옆에 서 있는 일본군인 모습. 패잔병 처리 명목으로 항복한 중국군과 민간인 남성들을 대량 총살했다.(사진=위키백과사전)

일본은 만주와 내몽골, 베이징과 허베이, 난징 등 점령지를 중국에서 분리해 괴뢰정부들을 세웠지만 내륙으로의 진격은 한계에 부딪쳤다. 일본군은 1938년 10월 광둥과 우한을 점령한 뒤 더 이상 중국 내륙으로 진격할 수 없었다. 점령지에 85만명의 병력을 배치해 치안유지에 나섰으나 끊임없는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1939년 9월 지나(중국) 총사령부를 설치해 초토화 작전과 함께 중국정부를 상대로 한 ‘평화공작’을 병행했으나 국민당의 중국혁명군과 중국공산당 홍군, 항일유격대세력의 반격으로 무산되었다. 1944년 일본군이 전면적인 공격을 재개할 때까지 중일전선은 소강국면을 유지하였다. 중일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일본은 1938년 11월 ‘동아시아 건설’을 주장하며 동남아로 방향을 돌렸다.(주2)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일본과의 장기항일전을 펴기 위해 난징을 포기하고 충칭으로 수도를 옮겼다. 중국정부가 충징에 임시수도를 정한 것은 일본군이 쉽사리 공략하기 어려운 지형과 기후조건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주3) 충칭은 중국대륙 서남쪽 쓰촨성 동부 끝자락에 위치한 도시로 후난성, 후베이성과 경계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쓰촨성은 네 개(장강, 민강, 타강, 가릉강)의 큰 강이 흐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충칭은 자링(嘉陵)강과 양쯔강이 합류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충칭은 큰강이 합류하는데다가 주위가 큰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대기층이 안정되고 복사열에 의해 안개가 자주 발생해서 폐나 기관지가 좋지 않은 사람에게는 매우 생활하기 힘든 곳이다. 그러나 11월부터 2월까지 도시 전체에 안개가 끼어 일본군의 공습을 완벽하게 막아낼 수 있는 천연조건을 이루었다.(주4)

이러한 자연조건 때문에 일본군의 공습은 여름에만 이루어졌고, 중국 정부는 매년 봄마다 시민들을 도시 외곽으로 소개시켰다. 그 때문에 충칭의 인구는 철마다 늘었다 줄었다 했는데, 겨울에는 130만명까지 늘어났다가 여름에는 100만명 미만으로 줄었다고 한다.(주5) 충칭은 스촨성의 요지로 산협지대이면서도 교통이 편리한 곳이었고, 그 때문에 중국 정부가 일본군의 공습을 피할 수 있는 이곳을 임시수도로 정한 것이었다. 중국 고대 ‘삼국시대’ 촉나라 땅으로 오지였던 이곳이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임시수도가 되면서 역사무대의 중심에 등장하게 되었다. 임시정부 또한 국민당 정부를 따라 충칭으로 옮겨왔고, 이곳에서 1940년 9월부터 일제가 패망해 환국하게 되는 1945년 11월까지 활동하게 된다.

▲ 지금의 충칭시 모습과 위치(사진/지도=중앙일보)

한국독립당 창당과 활동

임시정부는 1939년 5월 치장(綦江)에 도착한 직후부터 기반을 확대하고 조직과 체제를 정비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1930년대 중반 이래 민족주의세력은 크게 김구를 중심으로 한 한국국민당, 조소앙과 홍진이 주도하던 재건한국독립당, 지청천을 비롯하여 만주에서 이동해 온 독립군 출신들이 주축이 된 조선혁명당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들 민족주의 3당 세력을 통합하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3당 합당은 각 조직을 완전히 해산하고 새로운 조직체를 결성하는 방식으로 추진되었다. 1939년 10월 2일 치장에서 한국국민당의 조완구·김붕준·엄항섭, 재건한국독립당의 홍진·조소앙·조시원, 조선혁명당의 지청천·최동오·안훈 등 3당 대표들이 참가한 1차 통일회의가 열렸다. 1940년 3월 24일부터 일부 대표가 교체된 가운데 제2차 통일회의가 열렸다. 회의에서 당명을 한국독립당으로 정하고 당의·당강·당책·당헌에도 합의했다.

1940년 5월 9일 한국독립당 창립총회가 열렸고, 「한국독립당 창립선언」이 발표되었다. 당 대표인 중앙집행위원장에는 김구가 선출되었다. 중앙집행위원으로는 홍진, 조소앙, 조시원, 지청천, 김학규, 유동열, 안훈, 송병조, 조완구, 엄항섭, 김붕준, 양우조, 조성환, 박찬익, 차리석, 이복원이 선출되었다. 감찰위원장 이동녕, 감찰위원 이시영, 공진원, 김의한 등이었다.(주6) 

▲ 한국독립당 제1차 중앙집감위원(1940. 5. 16). 앞줄 왼쪽부터 김붕준, 지청천, 송병조, 조완구, 이시영, 김구, 유동열, 조소항, 차리석. 뒷줄 왼쪽부터 엄항섭, 김의한, 조경한, 양우조, 조시원, 김학규, 고운기, 박찬익, 최동오.(사진=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당의 창당은 1930년대 중반 이래 여러 정당으로 분산되었던 민족주의세력들이 하나의 정당으로 결집하면서 민족주의세력의 통일을 이루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한국독립당 창당으로 임시정부의 기반도 크게 강화되었다.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를 유지, 운영하는 기초세력이자 여당 역할을 했다. 한국독립당은 1940년 5월 창당된 이래 1945년 11월 환국할 때까지 그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주7)

한국독립당은 당의와 당강에서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에 기초한 신민주국을 건설한다’고 했다. 이러한 정치적 목표는 1930년 1월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이 처음 창립될 때부터 이미 정립되어 있었다. 한국독립당은 이후 1935년 5당통일로 민족혁명당을 결성할 때 해체되었다가 한국국민당과 재건한국독립당으로 나뉘었고, 1940년 5월 통합해 한국독립당으로 거듭 태어났다. 이처럼 우여곡절 속에서도 상하이에서 정립된 정치적 목표는 대부분 그대로 계승되었다.

한국독립당의 당의와 당강은 삼균주의에 근거하고 있었다. 삼균주의는 1920년대 후반 조소앙에 의해 창안된 것으로, 균등사회를 건설한다는 정치이념이었다. 삼균주의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통해 개인과 개인의 균등생활을 실현하고, 이를 토대로 민족과 민족·국가와 국가의 균등생활을 이루며, 나아가 세계일가를 추구한다”는 것이다.(주8) 한국독립당은 이러한 삼균주의를 채택 수용하고, 이를 근거로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에 기초한 신민주국을 건설한다’는 정치적 목표를 세웠다.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와 표리관계를 이루며, 임시정부를 유지 운영하는 기초세력으로 기능했다. 임시정부는 모두 한국독립당 인사들로 구성되었다. 한국독립당 소속 인사들이 주석을 비롯하여 정부 부서를 맡았다. 임시정부 직원들도 대부분 한국독립당 인사들이었다. 그러다가 1944년 4월 좌우연합정부가 구성되면서 한국독립당뿐만 아니라 조선민족혁명당을 비롯한 좌익진영의 인사들이 임시정부 조직에 공동으로 참여하게 된다.

한국독립당은 임시의정원에서는 여당 역할을 했다. 1942년 10월 좌익진영의 인사들이 임시의정원에 참여해 의원으로 선출되면서 임시의정원은 한국독립당과 좌익진영의 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연맹 소속 의원들로 구성되게 된다. 이들 좌익인사들이 참여하면서 임시의정원은 다당제가 되었다. 좌익진영의 의정원 참여와 함께 한국독립당은 여당, 조선민족혁명당을 비롯한 좌익진영의 단체들은 야당 역할을 했다.

한국독립당에는 크게 두 세력이 있었다. 김구·조완구·박찬익·엄항섭 등 통합 이전에 한국국민당에서 활동하던 주류세력과 조소앙·홍진·유동열 등의 비주류세력이었다. 창당 당시에는 주류가 주도권을 장악했지만 1943년 5월 제3차 전당대회에서 조소앙이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되면서 1945년 7월까지 조소앙 체제로 운영되었다. 일제의 패망이 가시화된 상태에서 당의 재정비가 있었고, 중앙집행위원장에 김구, 부위원장에 조소앙이 선출되었다.(주9)

한국광복군 창설과 확대·발전

임시정부는 치장에 도착한 뒤 광복군 창설을 추진했다. 1939년 10월 국무회의에서 조성환을 주임으로 한 군사특파단을 구성하여 서안(西安)에 파견하였다. 당시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화북지역에는 약 20만 명에 달하는 한인들이 이주해 있었다. 서안은 화북지역과 최전선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에 군사특파단을 파견하여, 화북지역에 이주해 있는 한인들을 대상으로 병력을 모집하는 초모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이다.(주10)

광복군 창설에 필요한 재정 준비도 해나갔다. 하와이를 비롯한 미주지역에 있는 교포들에게 광복군을 창설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재정 지원을 요청했다. 미주교포들은 적극적으로 모금활동을 벌였다. 미주에서 발행되는 <신한민보>의 주도하에 “광복군 조직은 3·1운동 이후 처음 있는 큰 사건”이라며, “힘이 있으면 힘을, 돈이 있으면 돈을 내자며” 모금활동을 전개했다.

한편, 김구는 중국 정부와 교섭하여 장제스로부터 광복군 창설 계획을 허락받았다.(주11) 중국영토 내에서 군대를 조직하려면 중국당국의 승인과 양해가 필수적이었다. 광복군 창설을 위해서는 중국의 재정 원조도 필수적이었다. 임시정부는 광복군이 중국의 항일전에 유익하다는 논리를 폈다. 중국의 한국담당자들은 임시정부의 주장에 공감했다. 임시정부는 광복군 창설에 대한 계획서를 중국측에 제출했다. 1940년 5월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 김구 명의로 ‘한국광복군편련계획대강’을 장개석에게 제출했다.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편성하여 중국군과 함께 연합작전을 전개하겠으니 광복군 창설을 인준하고 재정 지원을 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장개석은 “광복군이 중국항전에 참가한다”는 전제하에 이를 승인했다.(주12)

▲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좌)과 김구 주석(우)(사진=국사편찬위원회)

광복군 창설을 위한 실무작업이 추진되었다. 실무작업은 임시정부의 군사간부들이 맡았다. 과거 만주에서 독립군을 조직해 무장투쟁을 벌였던 지청천·이범석·유동열·김학규 등 군사간부들을 중심으로 한국광복군창설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위원회는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고 있던 만주독립군 출신의 군사간부들과 중국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에 복무하고 있던 한인청년들을 소집하여 총사령부를 조직한 다음, 이를 기반으로 산하 부대를 편성한다는 방안을 마련했다. 1940년 9월 15일 임시정부 주석 겸 한국광복군창설위원회 위원장 김구 명의로 “광복군은 중화민국 국민과 합작하여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을 계속한다”는 내용의 「한국광복군선언문」을 발표했다. 이어서 9월 17일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을 거행하고 광복군을 창설했다.(주13)

▲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후 한중 대표 기념 촬영. 앞줄 왼쪽 여섯 번째부터 홍진, 지청천, 김구, 차리석, 한사람 건너 이시영, 세 사람 건너 조완구(사진=국사편찬위원회)

광복군 조직은 먼저 지휘부로 총사령부를 세우고, 병력을 모집하여 하부 조직 체계를 갖추어 나가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일차적으로 총사령부와 함께 단위부대로 4개 지대를 편제했다. 창설 초기의 부대편제와 지휘관은 총사령 지청천, 참모장 이범석, 제1지대장 이준식, 제2지대장 공진원, 제3지대장 김학규, 제5지대장 나월환 등으로 결정되었다.(주14) 광복군은 총사령부가 성립된 다음 병력을 모집하여 1년 후에는 최소한 3개 사단을 편성한다는 목표를 세웠다.(주15)

임시정부는 화북지역 한인들과 일본군에 징집된 한인 병사들을 대상으로 병력을 모집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황학수를 총사령 대리로 한 광복군 총사령부를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에 설치했다. 시안은 일본군의 점령지역인 화북지역과 최전선을 이루는 곳으로써 일본군에 징집된 한국인들을 모집하기에 가장 근접한 지역이었다. 총사령부는 시안을 근거로 삼아 병력을 모집하기 위한 초모활동에 들어갔다. 초모활동은 북쪽으로는 내몽골 바오터우(包頭)에서 남쪽으로는 난징·상하이에 이르기까지 중국대륙 전체를 대상으로 했다.

한편, 임시정부는 중국관내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한인무장세력을 광복군으로 편입시키는 활동도 전개했다. 먼저 서안에는 활동하고 있던 나월한을 중심으로 한 1백여명의 한국청년전지공작대원들이 대상이었다. 임시정부는 시안에 총사령부를 설치하면서 이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고, 전지공작대는 ‘혁명역량을 한 곳으로 집중시켜야 한다’며 1941년 1월 1일 광복군에 편입되었다. 이들의 편입으로 광복군은 창설 4개월만에 1백 명이 넘는 병력을 갖추게 되었다.(주16)

▲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전례식 후 한중 대표 기념 촬영. 왼쪽 두 번째부터 지청천, 김구, 류치(劉峙)(사진=국사편찬위원회)

1942년에는 좌익진영의 조선의용대도 광복군에 편입되었다.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조선민족혁명당을 비롯한 좌익진영이 창설한 무장조직이었다. 이들은 창설 이후 중국의 여러 전선에서 중국군과 함께 대일항전을 전개했으나 1941년 3월 대원들 중 상당수가 중국공산당 관할구역인 화북으로 넘어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중국군사위원회의 광복군과 통합하라는 압력에 따라 조선의용대는 1942년 7월 광복군 제1지대로 편제되었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이어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됨으로써, 중국관내 무장세력이 모두 광복군으로 집결하게 되었다.(주17)

이와 함께 일본군에 있던 조선인 사병들이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에 참여했다. 일제는 1943년에 대학생들을 학병으로, 1944년 9월에는 징병이란 이름으로 한인청년들을 징집했다. 이들이 일본군으로 중국의 각 전선에 배치되면서 일본군을 탈출한 것이다. 1944년부터 이들의 탈출이 이어졌고 광복군을 찾아왔다. 1944년 7월 중국 쉬저우(徐州)의 쓰가다 부대에 배속되어 있던 장준하, 윤경빈, 홍석훈, 김영록 등은 일본군 부대를 탈출해 6천리 길을 걸어서 충칭 임시정부를 찾아와 광복군이 되었다. 이들은 미군 OSS의 지원 아래 국내 침투작전을 위한 훈련을 받았으나 일제가 조기에 항복하는 바람에 실행조차 옮기지 못하였다.(주18)

중국군과 일본군의 전투과정에서 적지 않은 조선인 사병들이 투항하거나 포로가 되었고 이들 중 상당수가 광복군으로 편입되었다. 광복군 창설 직후부터 추진된 초모활동은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한국청년전지공작대와 조선의용대가 편입되고, 일본군으로 끌려나왔던 조선인사병들의 탈출이 이어지면서 광복군의 병력은 크게 증강되었다. 광복군은 일제가 패망하는 1945년 8월경에는 700여 명의 병력을 갖추게 되었고 총사령부와 3개 지대를 갖춘 군사조직으로 발전했다.(주19)

▲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에 참석한 내빈 방명록(사진=국사편찬위원회)

광복군과 관련해 언급하고 넘어갈 중요한 문제는 중국의 요구로 작성된 「대한광복군 9개항 행동준승」에 대한 것이다. 임시정부는 중국정부의 재정지원과 군대 승인을 위해 중국정부와 교습했는데, 중국정부는 광복군이 성립한 지 1년 2개월이 지난 1941년 11월 15일 ‘9개항의 준승(準繩)’(주20)을 보내왔다. 그 핵심내용은 광복군의 통수권을 중국군이 가지며 활동범위를 극도로 제약한다는 것이었다. 임시정부는 논란 끝에 1941년 10월 19일 굴욕적인 ‘9개 준승’을 승인했다. 중국의 재정지원이 없으면 활동은커녕 생계유지도 어려운 형편이었다.(주21) 이러한 규정 때문에 심한 제약을 받으면서도 광복군은 꾸준히 활동역량을 키웠고, 중국정부와 끈질긴 교섭 끝에 이러한 제약을 바꿀 수 있었다. 임시정부는 1945년 4월 4일 “광복군의 통수권은 임시정부에 있으며, 재정지원은 차관으로 한다”는 등의 주요 내용을 담은 군사협정인 「원조한국광복군판법」을 중국정부와 체결하게 된다.(주22) 70여년 가까이 미국으로부터 군 작전권을 돌려받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을 생각할 때 남의 곁방살이를 하면서도 끝내 광복군의 통수권을 되찾은 임시정부가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임시정부 정비와 단일지도체제 확립

임시정부는 1939년 5월 치장에 도착한 후 정부 조직을 확대, 정비하기 위해 재건한국독립당과 조선혁명당 인사들을 정부 운영에 참여시키는 방안을 추진했다. 한국독립당과 조선혁명당은 한국국민당과 함께 1937년 8월 임시정부를 옹호 유지한다는 전제 위에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한국진선)를 조직했으나 임시정부 운영에는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 10월 치장에서 제31차 의정원 회의가 개최되었고, 홍진·이청천·최동오·조시원·황학수·유동열·김학규 등 18명의 의원을 새로 선출했다. 이들은 대부분 재건한국독립당과 조선혁명당 소속 인사들이었고, 이로써 의정원은 종전의 두 배가 넘는 35명으로 늘어났다.

이와 함께 국무위원도 보강, 확대되었다. 임시약헌에는 국무위원 수를 최대 11명까지 둔다고 했으나 7명밖에 채우지 못하고 있었다. 1939년 10월 23일 의정원 회의에서 국무위원을 헌법 규정대로 11명으로 확대하기로 하고, 기존 한국국민당의 이동녕 등 7명 외에, 재건한국독립당의 홍진・조소앙, 조선혁명당의 이청천・유동열을 각각 국무위원으로 선출했다. 행정부서도 증설하여 한국독립당재건・조선혁명당 인사를 부서 책임자로 임명했다. 10월 25일 개최된 국무회의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주석의 임기는 3개월로 하고 기존의 내무·외무·군무·법무·재무의 5개부서 외에 참모부를 증설하기로 결정했고, 주석 이동녕, 내무장 홍진, 외무장 조소앙, 군무장 이청천, 참모장 유동열, 법무장 이시영, 재무장 김구, 비서장 차이석 등이 선출되었다. 이렇게 해서 1930년대 중반 이래 한국국민당을 기반으로 유지되어온 임시정부의 조직기반이 대폭적으로 확대되기에 이르렀다.(주23)

▲ 김구 어머니 곽낙원 장례식(충칭 손가 화원, 1939. 4). 왼쪽부터 김신, 김인, 김구(사진=국사편찬위원회)

1940년 3월 13일 석오 이동녕이 스촨성 치장현에 있는 임시정부 건물 2층 자신의 침소에서 71세의 고령으로 세상을 떠났다.(주24) 그는 상하이에서부터 지금까지 성재 이시영, 백범 김구와 함께 임시정부를 지켜내는데 중심역할을 했던 인물로 최고지도자이기도 했다. 이시영과 함께 임정의 기호파를 대표했고, 김구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였다. 김구는 이동녕과의 인연을 이렇게 백범일지에 기록하고 있다.

“내가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30여년 전이다. 을사늑약 때 경성의 상동예수교당에서 진사 이석으로 행세할 때 상봉하여 같이 상소운동에 참가하였다. 합병 후 경성 양기탁의 사랑에서 밀회하여 장래의 독립운동을 위한 서간도 무관학교 설립에 관한 일체 사무를 선생에게 위임하였다. 그후 기미년 상해에서 또다시 상봉하여 20여년 고초도 같이 겪고 사업도 함께 해오면서 한마음 한뜻으로 지냈다.”(주25)

김구는 “선생은 재덕이 출중하나, 일생을 자기만 못한 동지를 도와서 선두에 내세우고, 스스로는 남의 부족을 보충하고 고쳐 인도하는 일이 일생의 미덕이었다. 최후의 한순간까지 선생의 애호를 받은 사람은 오직 나 한 사람이었다. 석오 선생이 별세한 뒤, 일을 만나면 당장 선생 생각부터 하게 되니 이는 선생만한 고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어찌 나 한 사람뿐이랴. 우리 운동계의 대손실이라 할 수 있다”며 애석해 했다.(주26)

▲ 국장으로 거행된 임시정부 주석 이동녕의 장례식(기강, 1940. 3. 17)(사진=국사편찬위원회)

이동녕 사후 김구는 명실상부한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임시정부는 충칭에 정착한 후 종전의 집단지도체제를 단일지도체제로 바꾸는 작업을 추진했다. 집단지도체제가 가지고 있는 장점도 있었지만, 집단지도체제로는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해 전쟁이 중국대륙 전역으로 확대되고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함께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비상 상황에서 임시정부도 전시태세를 갖출 필요가 있었다. 광복군을 창설하여 군사활동을 전개하기 위해서도 강력한 지도력이 요구되었다.

임시정부는 지도체제를 바꾸기 위해 1927년에 제정 공포한 임시약헌을 개정했다. 1939년 10월 8일 주석을 행정수반으로 하는 내용의 헌법개정안이 통과되었다. 집단지도체제가 단일지도체제로 바뀌었다. 행정수반의 명칭을 주석으로 하고, 종래 국무위원이 교대로 맡던 주석을 임시의정원에서 선거하도록 했다. 주석이 강력한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권한을 강화했다. 주석은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행정수반으로 국군(광복군)의 통수권을 가졌고, 긴급명령 발동과 정치범을 특사할 수 있었다. 주석의 지위를 국가원수와 같은 존재로 규정하였고, 주석이 정부의 행정권을 장악하여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주27)

개정 헌법에 따라 정부가 새로 구성되었다. 1939년 10월 9일 의정원 회의에서 김구가 주석에 당선되었다. 국무위원으로 이시영·조완구·조소앙·차이석·조성환·박찬익 등이 선출되었고, 내무장 조완구, 외무장 조소앙, 군무장 조성환, 법무장 박찬익, 재무장 이시영, 비서장 차이석, 참모총장 유동열, 고문 홍진·송병조 등이 결정되었다. 이렇게 해서 임시정부는 김구를 주석으로 한 강력한 단일지도체제를 확립했다.

임시정부는 충칭에 정착한 뒤 당(한국독립당), 정(임시정부), 군(한국광복군)의 조직체제를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구가 당·정·군의 핵심 지도자로 부상했다. 김구는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 임시정부 주석, 광복군 통수권자가 되었고, 임시정부는 김구 주석의 단일지도체제 아래서 새로운 충칭시대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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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일본의 우익들은 ‘난징대학살’을 부정한다. 부정의 형태는 다양하다. 사망자가 수만 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부터 시작해 극단적인 경우, 아예 학살 사건 자체가 없었다는 주장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난징대학살은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고, 그 증거는 차고 넘친다. 자세한 내용은 『난징대학살』(아이리스 장/ 김은령 옮김, 끌리오, 1999)을 참조.

2) 한상도, 『대한민국임시정부사』, 독립기념관, 2009, 190〜191쪽

3) 황묘희, 『중경 대한민국임시정부사』, 경인문화사, 2002, 13〜14쪽

4) 정정화, 『장강일기』, 학민사, 1998, 186쪽

5) 정정화, 위의 책, 186쪽

6) 김구/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381쪽

7) 한시준, 『대한민국임시정부사 3-중경시기』, 독립기념관, 2009, 12〜13쪽

8) 한시준, 「조소앙의 삼균주의」, 『한국사시민강좌 10』, 일조각, 1992, 109쪽

9) 조범래, 『한국독립당연구(1930〜1945)』, 중앙대박사학위논문, 2006, 153〜156쪽

10) 한시준, 『대한민국임시정부사 3-중경시기』, 독립기념관, 2009, 18〜19쪽

11) 김구/도진순 주해, 위의 책, 382쪽

12) 한시준, 위의 책, 19〜20쪽

13) 한시준, 위의 책, 20쪽

14) 신용하, 『한국 항일독립운동사 연구』, 경인문화사, 2006, 472〜473쪽

15) 한시준, 위의 책, 21〜22쪽

16) 한시준, 위의 책, 24쪽

17) 한시준, 위의 책, 24〜25쪽

18) 장준하의 행적과 활동에 대해서는 그의 수기 『돌베개』(돌베개, 2015)에 잘 기록되어 있다.

19) 한시준, 위의 책, 25쪽

20) 준승(準繩)이란 먹줄, 일정한 법식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규정, 규칙의 의미다. 광복군 행동 규칙(준칙, 규정)의 의미인 셈.

21) 신용하, 위의 책, 474〜479쪽

22)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광복군」 항목 참조

23) 한시준, 위의 책, 28쪽

24) 정정화, 위의 책, 178쪽

25) 김구/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389쪽

26) 김구/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389〜390쪽

27) 한시준, 위의 책, 29〜31쪽

 

(제목 수정-7월4일 오후 2시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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