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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의 이동(4)

기사승인 2019.06.25  00:2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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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 임영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27년의 역정’ (10)

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상하이서 첫 걸음을 시작해 일제의 패망으로 1945년 11월 고국에 돌아올 때까지 27년간 고난에 찬 투쟁을 이어갔다. 그 사이 임시정부는 상하이,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충칭 등 중국 대륙 곳곳을 누비며 1만3천리(5,200㎞)를 이동했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초기 활동 지역인 상하이와 첫 피신처였던 항저우의 임시정부 유적지를 돌아보았다. 상하이・항저우 유적지 답사기와 함께 임시정부 역사를 10여회에 걸쳐 정리하고자 한다. 이 답사기는 매주 화요일 연재된다. / 필자 주

 

중일전쟁과 항일운동의 정세 변화

1937년 7월 7일 베이징 근교에서 야간 훈련 중이던 일본군 중대에서 총소리와 함께 병사 1명이 행방불명되었다. 병사는 20여분 뒤 부대로 복귀했으나 일본군은 중국군 지역으로 수색부대를 보내겠다고 했다. 하지만 중국군은 이를 거부하였고 다음날 새벽 일본군은 중국군 진지를 포격하며 공격을 개시해 루거우차오(盧溝橋)를 점령했다. 11일 전투가 중지되고 협상이 시작되었으나 일본은 중국이 들어줄 수 없는 무리한 요구를 내세웠다. 협상은 결렬되었고 일본군의 본격적인 중국 본토 침략이 시작되었다. 

7월 말 일본군은 3개 사단을 파병, 화북지역 공격에 나섰다. 1937년 말 일본군은 바오딩(保定), 다퉁(大同), 스좌장(石家莊), 바오터우(包頭), 타이위안(太原)까지 진격했으며 전선은 남쪽으로 상하이, 항저우, 난징까지 확대되었다. 1938년 초반 일본군은 지난(濟南) 이남 및 산시(山西)성 남부지역을 수중에 넣었고, 5월에는 쉬저우(徐州)를, 8월에는 우한(武漢)을 공격하였다. 일제는 9월부터 점령지에 각각 괴리정권을 수립해 중국 국민당 정부로부터 분리시켰다.(주1) 

일제는 중국의 점령지에서 지역 및 민족의 복잡한 환경을 이용해 간접지배 방식을 취했다. 만주에서는 민족협화(民族協和)와 왕도낙토(王道樂土)를 화북지역에서는 북부중국인에 의한 중국북부지역 통치, 내몽고지역에서는 몽고민족의 부흥과 같은 슬로건을 내걸고 각지에 괴뢰정권을 세워 ‘자치’와 ‘독립’을 선언하게 해서 점령지역을 중국 중앙정부와 분리시켰다. 일제는 이러한 통치방식과 구호를 발전시켜 나중에 대동아공영권 이데올로기를 펴게 된다.(주2)

그러나 1938년 10월 광둥과 우한을 점령한 다음부터 일본군의 진격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교착상태에 빠졌다. 일본군은 속전속결로 중국의 항복 선언을 받아낼 생각이었으나 중국  국민당 정부는 지구전 전략을 폈고, 일본군은 광범위한 중국 전선에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의 한계로 더 이상 진격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일본은 중국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1938년 11월 ‘동아시아 신질서’ 건설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 일본이 중국을 침략해 세운 괴뢰 정권들.
   
▲ 2차대전 말기 일본의 중국 침략 상황.

미국은 일본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고 영국 또한 미국에 동조했다. 미국은 일본과의 통상항해조약을 폐기하였고, 석유와 계류 등 전략물자의 대일 수출을 전면 금지시켰다. 영국도 중국에 대한 차관 지원을 늘렸다. 소련은 1937년 8월 중소불가침조약을 체결하였고, 이를 계기로 중국에 대한 무기원조를 증대했다. 일본 제국주의는 활로를 찾기 위해 동남아시아로 남진하는 정책을 채택하는 한편, 일본·독일·이탈리아의 3국의 방공(防共)협정을 강화했다. 이렇게 되면서 1930년대 말 국제정세는 미국·영국·프랑스·소련·중국 등 연합국 세력 대 일본·독일·이탈리아의 추축국 동맹 사이의 대립 관계로 바뀌었다. ‘파시즘 대 반파시즘의 대결’로 국제적 대립관계가 형성되면서 제2차 세계대전으로 발전했다.(주3)

1939년 2월부터 일제는 산터우, 홍콩, 하이난섬 등 화남지역으로 전선을 확대했고, 1940년 7월에는 미국·영국의 중국 지원루트인 북부 베트남, 1941년 7월에는 남부 베트남으로 진격했다. 일본의 이 같은 행위는 이 지역에 대한 미·영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이었고, 미국의 대일 경제봉쇄 또한 한층 강화되었다. 1941년 6월 독소 전쟁이 시작되자 일제는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목표로 한 동남아시아 침략을 국책으로 결정했다. 일본군은 12월 7일 미국 진주만을 전격적으로 공격했고 중일전쟁은 마침내 태평양전쟁으로 비화, 확대되었다.

중국의 국공합작과 한인독립운동 진영의 방향 모색

일본군은 우한을 점령한 이래 태평양전쟁 발발에 이르기까지 점차 진흙더미 속으로 빠져들었다. 일본의 중국 점령정책은 ‘점과 선’을 기본으로 했다. 주요도시를 점령거점으로 삼고, 이들 도시를 잇는 철도를 따라 일본군을 배치하는 전략이었다. 최소한의 병력으로 집약적인 점령 효과를 거두기 위한 방안이었다. 그러나 중국의 광활한 대지를 점과 선으로 지배하기란 기본적으로 불가능했다. 도시를 연결하는 철도는 항일무장세력의 공격표적이 되었고, 일본군은 보급선 두절로 곤경에 빠졌다.(주4) 

1936년 말에 발생한 시안 사변을 계기로 국공합작 분위기가 성숙되었다. 1937년 2월 중국공산당은 국민당에 내전중단, 언론·출판·결사·집회의 자유보장, 정치범 석방, 정치세력의 통합을 통한 공동항일체제 구축, 거국적인 대일항전 준비 등을 제안했다. 국민당측이 이를 수용함으로써 제2차 국공합작의 단초가 마련되었다.

   
▲ 시안사건의 주역 장쉐량(좌)과 장제스(우).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6년 7월 17일 장제스 군사위원회 위원장은 루산(廬山)에서 국방위원회 회의를 열고, “최후의 관두(關頭)에 이를 경우, 희생을 불구하고 항전할 뿐”이라는 요지의 담화를 발표했다. 이날 루산에서 국민당대표 장제스와 공산당대표 저우언라이 사이에 국공합작이 논의되었다. 8월 16일 국민당정부는 국가총동원령을 내리고, 전국을 4개 전구로 나누어 항전체제를 갖추었다. 8월 21일 「중·소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고 22일 중국공산당 홍군 3개 사단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 및 신사군으로 개편되었다.(주5)

1936년 9월 23일 장제스 군사위원장은 중국공산당의 지위를 인정하고, 국공합작을 선언했다. 제2차 국공합작으로 국민당정부의 지도자 장제스는 ‘국내 상황의 안정’을 이룰 수 있었고, 공산당은 국민당정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항일전쟁의 동반자로서 대접받는 정치적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11월 17일 중국국민당 정부는 수도를 충칭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1938년 3월 29일부터 4월 1일까지 우한에서 소집된 국민당 임시전국대표대회는 「항전건국강령」을 채택했다. 전시총동원체제 확립을 목표로 국민 민의수렴 기구 구성, 농촌경제의 발전을 위한 대책 마련, 경공업과 수공업의 장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보장 등 일련의 민주화 조처를 시행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거국일치의 항전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주6)

그러나 이듬해 1939년 1월 충칭에서 소집된 국민당대회는 ‘용공(容共)·방공(防共)·한공(限共)·반공(反共)’의 방침을 결정하였고, 국방최고위원회를 설치하여 장제스 위원장에게 당·정·군의 통일된 지휘권을 부여했다. 이를 계기로 국민당정부의 중국공산당에 대한 압박이 강화되었고, 제2차 국공합작도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편, 1937년 8월 15일 중국공산당은 「항일구국 10대 강령」을 발표했는데, “일본의 침략에 반대하는 모든 국가와 반침략 동맹 및 항일 군사호조 협정을 체결한다. 국제평화진선을 옹호하고 독일·이탈리아·일본 침략진선에 반대하며, 한국·대만 및 일본국내 노농인민과 연합하여 일본제국주의에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1941년 12월 9일 중국공산당은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일본 노동계급과 한국·대만의 식민지 민족과 동맹을 결성한다는 방침을 재차 확인했다. 

중국국민당정부와 중국공산당정권은 공통적으로 국제 반제·반파시즘 연대투쟁의 슬로건을 내걸고 아시아 피압박민족, 그 중에서도 특히 한국・대만과의 공동항일을 강조했다. 한국과 대만이 일제의 식민지라는 현실과 더불어 지정학적 측면이 고려되었으며, 그에 따라 한국과 대만의 해방이 중국항일전쟁의 일부분으로 평가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중국에서 싸우고 있던 한인독립운동가들이 뜨거운 항일열정과 함께 능숙한 일본어 실력을 기반으로 중국항일전쟁에서 이미 그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던 사실과도 깊은 관계가 있었다.(주7)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한·중 연합의 공동항일’ 구호에 무게가 실릴 수 있었다.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한국 독립운동 진영은 중국항일전쟁의 환경 변화를 한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파악하고 한인운동세력 내부의 단결과 통일에 박차를 가하였다. 

좌우협동전선의 모색

중일전쟁 발발 직후 1937년 7월 16일 임시정부는 “독립전쟁을 개시하여 설욕보국(雪辱報國)의 시기가 도래”했다면서 군무부 산하에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군사위원으로 유동열, 지청천, 이복원, 현익철, 안공근, 김학규 등 조선혁명당를 선임하였다.(주8) 조선혁명당의 중심인물인 지청천, 유동렬, 김학규, 이복원 등은 과거 만주에서의 군사 경험을 바탕으로 임시정부 군무부 군사위원회에 참여하여 임시정부의 군사 활동을 주도하게 된다. 이와 함께 정당 등 독립운동단체의 연합 활동 움직임도 구체화되었다. 

8월 1일에는 한국국민당, ‘재건’한국독립당의 홍진, 조선혁명당의 지청천은 미주 대한인국민회(후에 북미대한인국민회), 하와이의 대한인국민회・대한인단합회・대한인부인구제회・대한인동지회・한인애국단 등 9개 단체는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들은 선언을 통해 “우리 광복운동단체들은 이로부터 한뜻 같은 정성으로 힘을 모으며 발걸음을 맞추어 우리광복전선을 굳은 조직으로 통일강화하여서 우리나라 우리민족의 자유독립을 찾기까지 굳세게 싸워나가기를 이에 선언한다. 이것이 우리민족의 목말라 기다리는 바이며 우리민족의 역사적 사명이다.”라고 하여 조국광복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나타냈다.(주9) 

   
▲ 광복운동단체연합선언. (사진=독립기념관, 연합뉴스)

이와 함께 당면정강(當面政綱)으로 “우리민족은 광복전선을 굳은 조직으로 통일을 강화”하고 “광복전선의 통일을 촉진하기 위하여 우리 광복운동에 필요한 당면 공작을 통공합력으로 진행할 것”, “임시정부를 옹호 지지할 것” 등 세 가지를 제시했고, 구호로는 “광복전선을 통일하자”, “임시정부를 옹호지지하자”, “광복전선을 혼란케 하는 일체 반혁명분자를 숙청하자”고 하였다.(주10) 이어 8월 17일에는 9개 단체 명의로 「한국광복운동단체의 중・일 전국(戰局)에 대한 선언」을 발표하였고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일명 ‘광복진선’)를 결성하였다. 이로써 임시정부는 중국 관내 독립운동진영에서 중심적인 조직으로 확실하게 자리잡게 되었다.(주11)

   
▲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선언’의 일부(사진=독립기념관)

우파 민족주의 세력은 광복진선으로 단결하면서 역량이 강화되었으나 내부의 세력판도에 변화가 일어났다. 김구 중심체제가 출현함으로써 ‘재건’한국독립당이나 조선혁명당 일부세력이 소외되었다. 조선혁명당의 비주류세력은 김구와 지청천 등을 공개적으로 비난했고, 조선혁명당은 내분에 휩싸였다. 1938년 5월 장사에서 벌어진 이른바 ‘남목청 사건’은 조선혁명당과 광복진선 내부에 잠복해 있던 세력다툼이 표면화된 것이었다. 이 사건은 김구가 광복진선 내에서 주도권을 확실하게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주12)

한편,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세력과는 다른 입장을 갖고 있었던 민족혁명당 등 좌파계열도 세력 규합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37년 지청천, 조소앙 등의 탈당 이후 조선민족혁명당은 남경한족회, 조선혁명자 연맹 등 좌익세력과의 연합을 통해 세력을 강화하려 했다. 중일전쟁과 광복진선의 결성은 이러한 움직임을 가속화게 만들었다. 1937년 12월 초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맹 등 세 단체는 우한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이하 ‘조선전선연맹’)을 창립했다. 

조선전선연맹은 강령으로 전민족적 반일통일전선 건립, 전민족의 혁명적 총동원, 중국항일전쟁 참가, 세계 모든 반일세력과의 국제적 연대형성과 함께 민주주의 독립국가 건설, 국민기본권 및 남녀평등 보장 등을 제시했다. 전선연맹은 기관지 <민족혁명>을 한글과 중국어로 발행했고, 1938년 10월에는 김원봉을 총대장으로 하는 ‘조선의용대’도 결성했다. 조선의용대는 궁극적으로는 “전국적 총폭동을 조직하고 군사행동의 실행을 준비”하기 위한 과정이었다.(주13) 1940년 2월경 314여명 가량의 대원으로 편성된 조선의용대는 일본군 포로에 대한 심문, 일본군을 상대로 한 반전선전, 중국인을 상대로 한 선전활동 등을 벌였다.(주14) 

   
▲ 북상항일을 주장하며 화북지역으로 이동해 중국공산당과 연합해 활동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주요 활동 상황. 

7당통일회의의 실패와 진로 모색

중일전쟁 발발 이후 중국에서는 국공합작이 성사되고 거국일치의 항일체제가 성립되었다. 이와 함께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은 적극적으로 한국인과의 연합전선을 실현하려 하였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중국 국민당 정부는 광복진선과 조선전선연맹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장제스 중국군사위원회 위원장은 1938년 11월 김구를, 이듬해 1월 김원봉을 충칭으로 초청해 회담하면서 합작을 종용했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항일전쟁 참여를 한국 해방과 독립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있던 독립운동세력은 중국의 합작 종용을 거부할 수 없었고, 그들 스스로도 단결과 통일이 급선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주15) 

1939년 5월 10일 김구·김원봉 두 사람은 「동지·동포 제군에게 보내는 공개통신」을 발표함으로써 연합에 원칙적으로 합의하였다. 이와 함께 중국정부의 주선 아래 좌우연합을 위한 한국혁명운동통일7단체회의가 개최되었다. 통합회의는 거의 성사 직전까지 갔으나 끝내 견해차를 좁히지 못하고 실패했다.(주16) 국민당정부는 결렬 원인으로 “첫째, 민족성에 단결정신이 결여되어 있다. 둘째, 위대한 영수인재가 결여되어 있다. 셋째, 중심사상이 부족하다. 넷째, 각 당파의 시기가 너무 심하다”라고 지적했다. 국민당정부는 “합작이 불가능한 원인을 생각해보면, 사상문제가 제일 크고, 조직문제는 그 다음이다”라고 분석했다.(주17)

   
▲ 3.1절 기념식을 마친 뒤 기념 촬영. 왼쪽부터 김구, 조소앙, 신익희, 김원봉. 임시정부가 좌우와 중도를 포함한 연합정부로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사진이다.(사진=임시정부기념사업회)

이처럼 당시 한국 독립운동세력 사이의 대립에는 이른바 ‘사상문제’가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한국광복진선측에서는 “김원봉이 공산주의 사상을 신봉하지 않는다는 선언을 하면, 통일문제에 대한 협상을 재개할 용의가 있다”고 했으나, 김원봉은 “민족혁명당은 지금까지 좌경사상이 없었으므로, 특별히 공산주의를 신앙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발표하기 곤란하다”면서, “광복진선이 통일의 성의가 결여되어 있고, 합작을 이루려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립・ 갈등의 이면에는 주도권 문제가 자리잡고 있었다. 사상과 조직방식 등 겉으로 드러난 명분도 있었지만 ‘국제적 호기’가 도래한 상황에서 누가 당의 주도권을 장악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사실은 더 중요했던 것이다.(주18) 

7당통일회의가 실패하자 국민당 정부는 1940년 4월 광복진선과 조선전선연맹의 양대 세력을 유지하며 지원한다는 원칙을 결정했다. 황하 이남과 장강(양자강) 이북 지역은 한국독립당 공작구역으로, 장강 이남지역은 민족혁명당의 공작구역으로 구분해 지원하기로 했다. 그러나 1942년 7월 국민당은 한인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정책을 재검토해 ‘하나의 단체를 원조한다’는 원칙을 정했고, 그 상대역으로 한국독립당이 결정되었다. 1943년 3월 중국정부는 “정부는 마땅히 임시정부를, 당은 한국독립당을, 군은 지청천의 광복군을 원조하는” 방침을 확인했다.(주19)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7당통일회의에서 해방동맹과 전위동맹이 탈퇴한 후, 나머지 5당(주20)이 ‘순전히 민족주의적인 새 당’을 조직했으며, 각 단체대표들이 8개조의 협정에 서명했으나, 민족혁명당이 조선의용대 대원들의 반대를 이유로 재차 탈퇴해버림으로써 통일회의가 파열되었다고 적었다.(주21) 1939년 9월 22일 5당이 ‘전국연합진선협회’를 결성했으나 며칠만에 민족혁명당이 탈퇴함으로써 해체되고 말았던 사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후 광복진선과 전선연맹은 각각 따로 진로를 모색하게 된다. 

광복진선의 3당은 우파세력의 통합을 적극 추진했다. 1939년 10월 2일부터 기강에서 3당 통합을 위한 제1차 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1940년 3월 24일부터 개최된 제2차 대표회의에서는 신당의 당명을 ‘한국독립당’으로 결정하고, 당의·당강·당책 등에 합의했다. 임시정부 또한 우파연합을 실현했다. 10월 3일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임시정부 국무위원의 수를 11인으로 늘리고 ‘재건’한국독립당의 조소앙·홍진과 조선혁명당의 지청천·유동열을 국무위원으로 선임함으로써 ‘3당 연립내각’이 구성되었다.(주22) 

   
▲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가 류저우를 떠나면서 중국의 각 단체 대표들과 함께 찍은 사진(1939. 4. 4)(사진=국사편찬위원회)

조선민족혁명당은 당내 일부세력의 화북 이동, 태평양전쟁의 발발, 중국정부의 지원 감소 등으로 세력이 현저히 약화되자 1942년 10월 임시정부 참여로 선회하게 된다. 1943년 1월에는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한국독립당통일동지회·조선민족당해외전권위원회 등을 흡수하여 당세의 확장을 시도했다. 또한 해방동맹은 1941년 11월 “반일역량을 집중시키기 위하여 모든 단체는 공동으로 임시정부 아래에서 우선 민족해방운동을 완성하고 사회주의혁명은 민족해방 이후에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임시정부 참여를 선언했다. 이렇게 해서 임시정부는 충칭에서 좌우연합을 실현하게 된다. 

   
▲ 조선의용대 창립 1주년 기념(1939. 10. 10). 조선의용대는 본부를 광시(광서)성 구이린(桂林)으로 이동하였고, 이곳에서 1주년을 기념하였다.(사진=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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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1938년 9월 장자커우(張家口)를 중심지로 한 차하르난자치정부(察南自治政府), 10월에는 산시성을 중심으로 한 진베이자치정부(晉北自治政府)와 쑤이위안성(綏遠省)을 중심으로 한 멍구연합자치정부(蒙古聯合自治政府), 11월 장자커우를 중심으로 한 멍구장연합자치정부(蒙疆聯合自治政府), 12월에는 베이징을 중심으로 한 중화민국임시정부, 1939년 3월에 난징을 중심으로 한 중화민국유신정부, 9월에 장자커우를 중심으로 한 멍구연합자치정부, 1940년 3월에 난징을 중심으로 한 중화민국국민정부 등의 괴뢰정권을 세웠다. 

2) 임성모, 「만주국협화회의 대민지배정책과 그 실태: ‘동변도치본공작’과 관련하여」, 『동양사학연구 42』, 동양사학회, 100~101쪽

3) 한상도, 『대한민국임시정부사 2 – 장정시기』, 독립기념관, 2008, 190〜191쪽

4) 한상도, 위의 책, 191쪽

5) 한상도, 위의 책, 192쪽

6) 한상도, 위의 책, 194쪽

7) 한인 독립운동가들은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비롯하여 의열단과 한인애국단의 대일본 의열투쟁에서 그 진가를 보여주었다. 또한 한인공산주의들의 경우 중국공산당과의 광둥코뮌과 대장정 과정에서 그리고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 만주지역 동북혁명군과 동북항일연군 활동에서 한인 혁명가들의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게다가 일본어 구사가 능숙한 한인들의 경우, 대일본 첩보전과 폭파, 특수활동에서도 뛰어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다. 중국 국민당이든 공산당이든 한인독립운동가들은 가장 믿을 수 있는 동지이자 연대세력이었다. 

8) 신주백, 「대한민국임시정부와 1930년대 정당통일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80주년기념논문집』(한국근현대사학회편), 국가보훈처, 1999, 529쪽 

9) “독립기념관,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선언 최초 공개”, 연합뉴스, 2011. 8. 9

10) “독립기념관,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선언 최초 공개”, 연합뉴스, 2011. 8. 9

11) 신주백, 위의 글, 529쪽

12) 신주백, 위의 글, 530쪽

13) 신주백, 위의 글, 530쪽

14) 김영범, 「조선의용대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 1988, 478〜498쪽 참조

15) 한상도, 위의 책, 269〜270쪽

16) 신주백, 위의 글, 532〜534쪽 참조

17) 한상도, 위의 책, 293〜294쪽

18) 한상도, 위의 책, 294쪽

19) 한상도, 위의 책, 296쪽

20) 광복진선측의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과 민족전선연맹측의 조선민족혁명당, 조선혁명자연맹의 5개 조직을 말한다. 

21) 김구/ 도진순 주해, 『백범 일지』, 380〜381쪽 

22) 황묘희, 『중경 대한민국임시정부사』, 경인문화사, 2002, 15〜18쪽

 

임영태 ytlim2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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