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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의 이동(3)

기사승인 2019.06.18  11:4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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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 임영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27년의 역정’ (9)

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상하이서 첫 걸음을 시작해 일제의 패망으로 1945년 11월 고국에 돌아올 때까지 27년간 고난에 찬 투쟁을 이어갔다. 그 사이 임시정부는 상하이,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충칭 등 중국 대륙 곳곳을 누비며 1만3천리(5,200㎞)를 이동했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초기 활동 지역인 상하이와 첫 피신처였던 항저우의 임시정부 유적지를 돌아보았다. 상하이・항저우 유적지 답사기와 함께 임시정부 역사를 10여회에 걸쳐 정리하고자 한다. 이 답사기는 매주 화요일 연재된다. / 필자 주

 

일제의 만주 침략과 한중 연합 시도

1931년 9월 18일 발발한 ‘만주사변’으로 남·북만주지역의 독립운동 환경은 급속히 악화되었다.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세력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였다. 중국 동북항일의용군과 연합하여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지속하는 것과 관내지역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진로를 개척하는 것.

1931년 11월 2일 만주의 한국독립당은 길림성 오상현(五常縣) 대석하자(大石河子)에서 긴급 중앙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에서는 한국독립군을 편성, 총동원령을 내려 모든 군사행동을 개시할 것, 당내 모든 공작을 군사방면에 집중할 것, 길림성 항일군 당국과 합작 교섭을 벌일 것 등을 결정했다. 한국독립군은 동북항일의영군과 연합을 시도하였다. 1932년 1월(음력), 한국독립당은 긴급 임시대회를 소집하여 길림성 당국과 한중 연합을 추진하기로 하고 한국독립군을 소집하기로 했다.(주1)

그러나 한국독립군이 만주에서 버티기에는 현실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결정적으로 무장을 할 수 있는 무기와 탄약을 확보할 수 없었다. 독립군 지휘관회의는 “우리 군의 실력과 환경의 곤란함으로 도시를 공격하는 것은 금일의 계책이 아니”라면서 “산지를 근거로 한 소부대의 기습공작을 제외하고는 결코 대부대의 활동을 취하지 않기로” 했다. 갈수록 상황이 악화되면서 한국독립군 부대들은 변화된 ‘신국면 조성’을 위해 만주를 떠나 중국 관내로 이동하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특히 북만주지역은 국내와 멀리 떨어진데다가 조선인의 숫자도 적었다. 조선인들은 각 지역에 분산 거주했고, 주로 중동선 동부지역에 집중되었다. 그런데 만주사변 이후 중동철도 동부지역은 중국공산당의 세력권에 들어갔으며, 1933년부터 일제는 한인사회를 대상으로 ‘통제’와 ‘안정’ 정책을 집중적으로 시행했다. 일본군의 만주침공과 장악으로 대중적 기반이 취약했던 한국독립군의 활동공간은 더욱 협소해졌다.(주2)

“만주는 마치 실 빠진 누에껍질과 같은 힘없는 허울만 남은 것처럼 되었다. 각지 조선인사회에서는 만주의 험악한 정세에 눌리어 좌고우면 태도를 선명히 하지 못하는 자, 정치운동·사상운동의 대열에서 탈락 또는 은둔하는 자가 속출하여, 우리의 진로에 막대한 장애를 야기한 것이 사실이며, 직접 혁명운동단체에서는 이런 모든 악영향을 참작하여 재출발의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주3)

   
▲ 일본군은 만주를 침략한 뒤 기습공격으로 만주의 주요 도시들을 순식간에 장악했다. 1931년 9월 19일 동북지역 군벌이었던 장쉐량의 군대를 공격해 만주의 중심도시 봉천(심양)을 장악한 뒤 환호하는 일본군들.

만주지역 독립운동세력의 중국 관내 이동

한국독립당세력이 관내지역으로 이동하게 된 것은 일본군과 괴뢰만주군의 공세 강화뿐만 아니라 한인사회의 와해, 한국독립군과 동북항일의용군 일부부대 사이의 갈등 등도 함께 작용했다. 1932년 가을, 일본군 제6·8·10·14·24사단과 조선군 파견부대·간도파견대 및 혼성 제8여단과 만주군은 대규모 ‘토벌전’을 감행했고, 이에 따라 동북항일의용군 상당수가 같은 해 말부터 이듬해 초에 걸쳐 소련과 열하성으로 철수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구국군 전방총지휘를 맡은 오의성이 한국독립군을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구국연합군에 합류할 것을 요구해 갈등이 깊어졌다. 독립군의 통합 요구에 대해 이청천은 “내 민족을 떠나 타민족의 해방운동이 없을 것이고, 또 내 조국을 찾아내기에 독립운동이니, 남의 조국이나 남의 민족을 위한 피나 땀을 흘릴 필요가 없다”라고 하면서 거절했다.(주4)

1932년 여름부터 한국독립당은 중국정부의 지원을 얻어내고 관내지역 한인세력과 연합을 도모할 방도를 모색하였다. 당시 김구는 자신의 취약한 무장투쟁 역량을 보완하고, 윤봉길의거 이래 임시정부 내에서 소외국면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한국독립군세력과 제휴가 필요다고 판단했다. 만주지역의 대표적인 무장역량인 한국독립군을 활용할 수 있게 되면 윤봉길의거 이래 고양된 자신의 위상을 공고히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도 악화되는 만주지역 상황 때문에 이동이 불가피했다. 한국독립군은 김구의 재정지원을 바탕으로 길림성에서 낙양의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반(이하 ‘한인특별반’)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주5)

   
▲ 1930년 초반 만주지역 민족주의진영의 독립군 조직

하지만 기대했던 한국독립군의 한인특별반 입교를 둘러싸고 문제가 생겼다. 한인특별반 운영을 김구가 주도했기 때문에 지청천의 위상이 애매했던 것이다. 이에 지청천은 한인특별반 내에서 자신의 영향력 아래 있는 30여 명의 입교생들로 ‘한국군인회’라는 비밀조직을 따로 만들었다. 지청천의 이러한 독자세력화에 김구가 견제구를 날렸다. 지청천은 총교도관에 임명되었지만 운영의 실권은 안공근과 안경근 등 김구의 측근들이 장악했다.(주6)

1934년 8월 김구가 자파 입교생을 한인특별반에서 퇴교시킴으로써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은 파국을 맞았다. 지청천과 김구의 갈등이 봉합되기 어려울 정도로 악화되었던 것은 난징지역 한국 독립운동세력의 전체적인 동향과도 관련이 있었다. 1934년 중반 임정반대파들은 조선민족혁명당 창당을 가속화하고 있던 때였고, 지청천은 그 주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김구가 한인특별반 운영을 포기하고 지청천과 결별을 택한 것은 민족혁명당 창당세력과의 차별화를 분명히 하고 독자노선을 걷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만주에서 중국 관내로 이동해온 지청천 등 한국독립당 세력은 김구와 결별하고 독자적인 활동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청천은 1934년 6월 말경 난징의 이규채에게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의 재기를 위해 노력할 것을 지시하는 한편, 1934년 8월 재정지원을 모색하기 위해 한커우(漢口)로 가서 중국정부 요인들과 접촉했다. 재정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지청천 등은 민족혁명당 창당을 위해 함께 노력하고 있던 김원봉의 의열단측에는 지원요청을 하지 않았다. 대신 난징 국민당 산하의 중앙참모본부로부터 매월 500달러를 지원받는 등 기반확충 노력이 성과를 거둠으로써 중국 관내의 유력한 독립운동세력으로 자리를 잡아갔다.(주7)

김구-장제스 회담과 한인특별반 설치

1932년 4월 29일의 윤봉길의거는 중국인의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인식을 일거에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만보산 사건과 일부 친일한인들로 인해 악화되었던 중국민의 한국인에 대한 악감정과 비판여론은 “중국군 100만 대군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냈다”는 칭송에 파묻혔다. 윤봉길의거를 주도한 김구와 한인독립운동 진영에 중국정부와 중국민의 지원금이 답지했고, 희미해져 가던 임시정부의 존재가치가 되살아났다. 국민혁명군 등 중국의 각 방면에서는 한인독립운동가들을 일본군과 일제 침략기관에 침투시켜 정보수집과 파괴공작을 전개하는 활동이 확대되었다.

김구에 대한 중국정부의 지원은 중국국민당 중앙당 조직부장 진과부(陳果夫)를 중심으로 진립부(陳立夫)·소쟁(蕭錚)·공패성(貢沛誠) 등이 담당했다. 윤봉길의거 직후 진과부는 김구를 가흥으로 피신시킨 뒤, 동북의용군후원회 회장 저보성(褚輔成)으로 하여금 김구를 지원하도록 조처했다. 또한 소쟁은 박찬익과 김구·장개석의 면담 및 만주지역의 기병학교 설립계획을 협의했다.(주8) 이 시기 박찬익은 중국국민당 중앙조직부에 파견되어, 진과부의 김구에 대한 지원 실무를 담당했다.(주9)

1933년 봄 김구는 안공근·엄항섭·박찬익과 함께 남경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에서 장제스와 회담했다. 필담으로 이뤄진 대화에서 김구는 장제스에게 재정지원과 군사간부 양성을 위한 지원 방안을 요청하였다.(주10) 장제스는 김구의 지원요청을 수락하고 매월 5,000원의 경상지원비와 임시사업비를 지원하도록 지시했다. 이후 양측은 근대적 군사교육을 통해 군사지휘관을 양성하기 위한 특별교육과정으로서 한인특별반 개설에 합의했다. 한인특별반의 정식명칭은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제2총대 제4대대 육군군관훈련반 제17대’였다.(주11)

한인특별반은 “일본제국주의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노동자·농민을 지휘할 수 있는 독립운동간부를 양성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한인특별반 졸업생은 크게 김구계열 10명, 지청천계열 30명, 김원봉계열 15명, 한국독립당계열 4명, 기타 3명으로 분류되었다. 김구계열의 입교생은 중도에 철수한 25명을 포함하여 적어도 35명 정도였고, 이청천계열 또한 30명이었다. 따라서 한인특별반만 두고 보면, 김구와 지청천의 주도권 경쟁이 가능했던 상황이다.

   
▲ 하남성 낙양시 서공구 개선서로 18호에 위치한 낙양군관학교 자리(사진=독립기념관)

한인특별반 운영은 김구가 고문 자격으로 총괄했고, 실무는 학생보호계 안공근, 생도계 안경근, 보호계 노종균 등이 관장했다. 입교생 훈련은 총교도관 지청천과 교관 오광선·이범석·조경한·윤경천·한헌 등이 담당했다. 입교생에게는 피복 등의 군수품이 무상 보급되었고, 매월 12원의 급여가 지급되었다. 중국정부의 지원자금은 운영을 총괄한 김구에게 교부되었다. 운영자금은 김구가 총괄했지만 교육훈련은 지청천 등의 교관이 주관했다. 이러한 이원적 지휘체계는 김구와 이청천의 주도권 경쟁을 야기한 원인이 되었다.

지청천은 세력 강화를 위해 자파 인물인 고운기(공진원)를 중심으로 한국군인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는데, 그 회원은 30여 명이었다. 이로 인해 김구와 지청천의 갈등이 증폭되었고, 1934년 8월 김구는 자파 입교생 25명을 난징으로 철수시켰다. 김구가 자파 입교생을 철수시키자 이청천·이범석·오광선 등 교관들도 사직했다. 한인교관들이 사직하자 중국정부는 한인교육생들을 중국인 입교생대대에 분산 수용했다가 1935년 4월 62명을 졸업시켰다.(주12)

   
▲ 김구와 장제스 회담(기록화)

김구의 특무조직들과 임시정부 지도력 확보

일제는 한인특별반 폐쇄와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중지를 중국정부에 요구했다. 일제는 한인특별반 설치를 일본에 대한 ‘도전행위’로 간주하여 단호히 대응하겠다고 협박했다. 중국정부는 일제와 국제분쟁을 우려하여 한인특별반을 폐쇄하기에 이르렀다.

1935년 4월 중순 이청천·김원봉계열의 한인특별반 졸업생들은 난징으로 이동하였다. 이후 이청천계열의 졸업생들은 신한독립당 산하 ‘청년군사간부특훈반’으로, 김원봉계열의 졸업생은 민족혁명당 조직으로 흡수되었다. 4월 하순 김구계열 졸업생은 남경으로 이동하여 한국특무대독립군에 수용되었다. 이후 이들은 천진·상해·만주 및 국내에 파견되어, 김구가 이끄는 항일특무조직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1935년 이후 한국국민당의 주요 성원이 되었고, 후에 광복군의 핵심으로 기능하였다.

김구는 한인특별반 운영을 통해 확보한 인력을 바탕으로 한인애국단·한국특무대독립군·학생훈련소 등의 체계화된 특무조직을 운영했다. 이들 조직은 김구 개인의 리더십을 밑받침했을 뿐만 아니라 1935년 말 김구가 임시정부에 복귀한 뒤에는 임시정부의 항일투쟁과 정치적 위상을 강화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임시정부는 산하기관으로 특무대를 설치하고 재무장 김구를 책임자로 선임했다.

임시정부는 재정 수입금의 반을 특무대 활동에 지원하는 한편, 구체적인 특무활동계획과 실행 전반에 관한 사항은 김구에게 일임했다. 임시정부가 특무활동 노선을 택한 것은 침체국면을 타개하기 위한 현실적인 방안이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는 인물난과 취약한 재정 때문에 본격적인 군사활동과 정치활동을 전개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봉창․윤봉길 의거 후 한인애국단은 김구의 지도 아래 독자적인 활동을 이어갔는데, 특히 김구는 ‘한인애국단 단장’ 자격으로 중국정부를 상대했다.

1934년 12월 하순 김구는 한인특별반 출신을 모체로 한국특무대독립군을 조직했다. ‘김구구락부’로도 불렸던 한국특무대독립군은 김구의 정치활동을 뒷받침하는 사조직으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주요 간부들은 김구와 동향 출신이라는 지연관계와 동지적 연대로 강하게 결속되어 있었다. 안공근 등 김구의 측근들은 이들에게 인원 점검과 세계정세 및 혁명운동에 관한 정신교육을 실시했다. 이들은 『도왜실기(屠倭實記)』(주13)를 구독하거나 3·1운동 당시 일제의 한인학살 사진 및 태극기를 배경으로 촬영한 이봉창·윤봉길의사 사진이 수록된 사진첩 열람 등을 통해 항일투쟁 결의를 다졌다.(주14)

1935년 2월부터는 학생훈련소도 운영했다. 한인특별반에서 교육받을 한인청년을 모집, 사전 예비교육을 실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학생훈련소는 김구계열 청년들의 수용·대기시설의 성격을 띠었다. 그러나 이들의 존재가 일제 정보망에 노출되고 자금 압박까지 더해지면서 어쩔 수 없이 훈련소를 폐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의 협박과 항의로 중국정부가 한인특별반을 조기에 폐쇄함으로써 애초의 목적을 제대로 이루지는 못했지만 이 과정에서 김구는 각지에서 모집한 한인청년들을 자신의 지휘권 아래 귀속시킴으로써 잠재적인 역량을 키워갈 수 있었다. 특히 한인애국단은 특무활동의 모체로서 중국정부와의 교섭활동과 대외활동 때 김구의 입장을 뒷받침하는 공식기구 노릇을 했다. 1935년 하반기 김구는 이들 특무조직을 기반으로 한인독립운동의 재편성 과정에서 독자적인 입장을 견지할 수 있었고, 임시정부에 복귀한 다음에도 임시정부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주15)

   
▲ 안중근의 5촌 조카인 안춘생의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졸업증명서(1936. 6. 16)(사진=국사편찬위원회)

김원봉의 의열단, 한중 연합 모색

1931년 만주사변과 함께 일제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 되자 의열단은 그동안의 활동을 검토하고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였다. 의열단은 중국 국민당 정부로부터 재정적 군사적 지원을 받아 무장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김원봉은 이를 위해 국민당 정부와 연합할 수 있는 방안을 타진하였다. 의열단 지도부 가운데 황포군관학교 출신들이 다수 포진해 있어서(주16) 중국 당국과 교섭하기 유리한 면이 있었다. 김원봉 등의 제의를 검토한 중국 국민당 지도부는 이를 수락하였고 장제스 군사위원장은 구체적인 추진을 지시하였다.(주17)

장제스가 김원봉과 의열단의 요청을 받아들인 것은 김원봉과 의열단 지도부가 황포군관학교 출신이라는 점이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고, 이와 더불어 북벌과정에서 높이 평가된 한인 혁명가들의 역량과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계기로 형성된 한국독립운동진영에 대한 신뢰감이 큰 역할을 했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장제스가 김원봉 등의 의열단을 적극 지원한 것은 김원봉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최근의 논란에도 일정한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주18)

의열단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 아래 1932년 10월부터 1935년 9월까지 3년여 동안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이하 ‘간부학교)를 운영했고, 이를 통해, 1기생 26명, 2기생 55명, 3기생 44명 등 130여 명에 이르는 ‘청년투사’를 양성했다. 간부학교의 정식 명칭은 ‘중국국민정부 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 제6대’였다. 간부학교는 일제의 대륙침략에 대응하기 위하여 의열단과 중국정부 사이에 형성된 한중연합의 결실이었다. 중국정부는 이봉창·윤봉길의거를 통해 과시된 한인의 항일투쟁역량을 그들의 ‘반만항일’ 투쟁체계 속으로 수용하려 했던 것이다.(주19)

의열단은 중국정부와의 연대를 항일투쟁의 침체국면을 탈피할 수 있는 계기로 인식했다. 의열단의 간부학교 운영은 국제적 연대 측면과 의열단 활동의 활성화라는 양면성을 가졌던 것이다. 의열단의 입장에서는 간부학교가 1920년대 후반 북경에서 운영했던 레닌주의정치학교의 후신의 성격도 갖고 있었다. 간부학교 졸업생을 국내에 침투시켜 대중조직 건설 사업을 전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간부학교의 설립목표는 ‘한국의 절대독립’과 ‘만주국의 탈환’이었다. 졸업생들은 일만(日滿) 요인의 암살, 재만항일단체와의 제휴, 국내·만주지역 노동·농민층에 대한 혁명적 준비공작, 위조지폐 남발을 통한 만주국의 경제교란, 특무활동에 의한 물자획득 등을 목표로 활동했다. 중국국민당 산하 삼민주의역행사 민족운동위원회가 간부학교 운영과 관련한 경상비와 임시사업비, 활동자금, 교육훈련에 필요한 무기·탄약과 장비·인력 등을 제공했다. 반면 운영 전반에 관한 사항은 의열단에 위임했다.(주20)

1932년 10월 20일 1기생 입학식이, 1933년 4월 20일에 졸업식이 거행되었다. 2기생은 1933년 9월 16일 45명이 입교했는데(이후 전체 인원은 55명), 대부분 입교 전에 의열단에 입단한 상태였다. 졸업식은 7개월 후 1934년 4월 20일에 거행되었다. 3기생은 1935년 4월 1일 난징 교외 상방진 황용산 소재 천녕사(天寧寺)에서 교장 김원봉 이하 교관 8인, 훈련생 28명(이후전체 44명), 중국정부 요인 1인 등이 참석한 가운데 입교했고, 1935년 9월 30일 교육훈련이 종료되었다.(주21)

   
▲ 강소성 남경시 강령구 상방진 장산림구 천녕사에 위치한 조선혁명군사정치학교 훈련소 자리(사진=독립기념관)

김원봉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간부학교의 교육내용은 크게 정신교육·정치교육·군사교육으로 구분되었다. 정신교육은 단체생활 수칙·혁명정신 및 인생관의 배양에 치중했고, 정치교육의 내용은 한국역사·주의·사상·정치제도 등이었다. 군사교육은 군사법령·군사지식·정보·폭파·전술 등 군사기능 숙련에 역점이 두어졌다. 교육과목에는 특무공작에 요구되는 전문적 활동지침이 포함되었다. 통신·선전·폭동공작·연락·집합·폭탄제조 및 투척·숙박·피신·변장·미행·보행·방문·면담·숙소임대·서류은닉·선전문건살포·표어기재·암살·무기운반·폭동조직·철로폭파·열차습격·열차운전 등 정보·첩보전 수행의 필수적인 활동수칙이 주지되었다. 이 밖에도 변증법·정보학·사회과학·사격술교범·교통교범 등이 교육내용에 포함되었다. 교육은 파괴·기습·유격전 등 특무활동 내용이 강조되어, 전체 교육시간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주22)

의열단은 간부학교 운영을 통해 양성한 ‘청년투사’를 정보·첩보전 형태의 특무공작에 동원하여 국내와 만주지역의 의열단 조직을 확충하고 대중투쟁을 고양시키려 했다. 의열단 투쟁 전략의 핵심은 만주지역과 국내의 대중투쟁 역량을 기반으로 국지적·부분적 수준의 항일투쟁 국면을 거족적인 대중투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1기 졸업생 중 상당수는 활동 중에 일제기관에 검거되었고, 나머지는 후일 민족혁명당 당원으로 활동했다. 2기생 가운데 20명은 졸업 직전 간부학교를 떠났고, 이들 중 14명은 1기생 진우삼과 함께 1934년 2월 하순부터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반으로 이동했다. 이는 김구의 요청으로 이뤄졌는데 김원봉과 의열단이 김구의 항일투쟁에 협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김원봉의 축적된 체험과 조언이 김구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당시 김구는 민족운동진영의 연합조직 결성에 냉소적인 입장을 보이면서 한인애국단과 한인특별반 운영을 통해 독자적인 항일투쟁 역량을 강화하고 있었다. 1935년 민족혁명당과 한국국민당이 창당되는 전후부터 두 사람은 경쟁적 위치에서 중국 관내 독립운동의 양대 지주 역할을 하게 되지만, 민족혁명당이 결성되기 전까지만 해도 상보적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주23)

2기생의 일부는 한인특별반에 들어갔고 상당수는 특무활동 중 일제기관에 체포되었다. 대다수는 졸업 후 민족혁명당에 입당했다. 3기생 중에는 만주지역 출신이 다수 있었는데 이들은 의열단이 민족혁명당에 합류하는 것을 반대했다. 간부학교 출신들은 졸업 후 국내와 만주지역에 파견되었다. 임무는 의열단의 확충과 훈련생 모집, 자금모금 등이었다. 이들은 주로 국내와 만주지역에서 활동했으나 일부는 일본에 침투, 활동하기도 했다.

1933년 6월 25일 국내와 만주로 파견하고 남은 17명의 졸업생들은 의열단의 명칭을 ‘조선혁명무장동맹’으로 변경할 것을 요청했다. 이 요구는 중국정부가 의열단을 지원하고 있다며 반대한 김원봉 등에 의해 거부되었지만, 세대 차이와 함께 세계관·혁명관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차이는 후일 조선의용대 대원들의 ‘북상항일’ 주장과 화북지역 이동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1·2기생 중 난징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잔류인원과 3기생은 민족혁명당의 활동체계에 편입되었는데, 김원봉과 의열단의 민족혁명당 주도권 장악의 ‘인적기반’이 되었다. 이들은 조선의용대의 핵심세력으로 성장했고 일부는 다시 광복군의 주요 무장역량이 되었다. 조선의용대의 일부는 후에 화북지역으로 이동하여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주력이 되었다. 이들은 해방 후 중국 내전에 공산당군으로 참전하거나 북한으로 넘어가서 이른바 ‘연안파’의 주요 성원이 되었다.(주24)

   
▲ 조선의용대 성립 기념 촬영(1938. 10. 10). 앞줄 왼쪽부터 이익성, 엽홍덕, 신악, 이집중, 한지성, 주세민, 박효삼, 김성숙, 윤세주, 최창익, 김원봉, 이해명, 권채옥, 김위 등(사진=국사편찬위원회)

3당 통합노력과 남목청 사건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과 함께 일본군의 중국 침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12월 13일 국민당정부의 수도인 난징이 함락되었다. 11월말 임시정부 가족은 진강과 남경을 뒤로 하고, 호남성의 수도인 창사(長沙)로 이동했다. 임시정부가 창사로 옮겨간 것은 이곳의 곡식 값이 싸서 많은 식구를 거느린 임시정부가 활동하기 유리했기 때문이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신변보호도 받을 수 있었고, 선전 활동도 활발하게 할 수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도 물가가 싸서 많은 식구들이 생활하기에도 좋았다.(주25)

그동안 매번 이름을 바꿔가며 살아야 했던 김구도 창사에 도착한 뒤 본명을 썼다. 김구 등 임시정부진영과 독립운동세력은 중일전쟁을 한국독립의 ‘호기’로 판단하고 그동안 흩어져 있던 운동세력을 통합하기 위한 작업을 서둘렀다.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있던 광복운동단체연합회 소속의 우파 3당의 통합문제가 떠올랐다. 3당은 지(이)청천, 유동열, 최동오, 김학규, 황학수, 이복원, 안일청, 현익철 등의 조선혁명당, 조소앙, 홍진, 조시원 등의 한국독립당, 김구,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차이석, 송병조, 김붕준, 엄항섭, 안공근, 양묵, 민병길, 손일민, 조성환 등의 한국국민당을 말했다. 

1938년 5월 6일 장사의 남목청 청사에서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등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소속 우파 3당의 통합 문제가 논의되었다. 그런데 통합회의 장소에 조선혁명당의 청년간부 이운환이 뛰어들어 권총을 난사해 김구·지청천·유동렬・현익철 등이 총격을 입는 사건이 일어났다. 현익철은 병원에 도착 후 절명했고, 유동열과 김구는 중상이었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났으며, 지청천은 경상을 입었다. 이운환은 평소 독립운동 어른들이 자기편 견해를 고수해 일의 진전이 없고 조선혁명당 청년들에게 주는 생활비가 적어 불평이 많았다고 한다. 사건 후 이운환은 중국 당국에 넘겨졌으나 탈옥해 배후가 누구인지, 무슨 이유로 일을 벌인 것인지 밝혀지지 않았다.(주26) 

‘남목청 사건’은 한국 독립운동 세력 사이의 갈등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중일전쟁이란 호기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독립운동 진영의 협동과 단결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대의명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편협한 경쟁의식과 시기질투가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일본군의 공격으로 전황이 급박해지자, 임시정부 가족은 다시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이 과정은 그야말로 극적인 상황의 연속이었다.

1938년 7월 19일 새벽 4시경 장사를 떠나 광주행 월한선(粵漢線: 광저우[廣州]와 우한[武漢]을 잇는 열차노선) 기차에 올라 탄 이들은 사흘만인 22일 광주에 도착했다. 이때 갑작스런 일본기의 공습으로 기차가 멈추고, 사람들은 기차에서 내려와 주변의 수풀 속에 숨어 적기가 사라지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기차가 멈췄다 섰다를 반복했고, 그때마다 사람들은 수풀, 시냇가, 나무 밑에서 가만히 몸을 눕히고 숨어있었다.(주27)

“공습이 지나고 나면 흘러가는 물에 세수도 하고 목을 축이기도 했다. 기차가 도중에 도시를 지나게 되면, 우리 한교(韓僑)들은 각 가족 당 배급받은 돈을 가지고 나가서 먹을 것을 사왔다. 음식물을 살 돈은 임시정부의 재정을 맡은 분이 가족 수에 따라 돈을 나눠 줬다.”(주28)

광주에 도착한 임시정부는 중국군이 일본군에 계속 밀리자 또 다시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 임시정부의 이동은 장사에서 광주로, 광주에서 유주로, 유주에서 기강으로 계속되었다.(사진=임영태)
   
▲ 임시정부의 이동은 마침내 중경에서 끝났다.(사진=임영태)

장정길의 고난

1938년 9월 19일 임시정부 식구 일행은 배편으로 광주시에서 서쪽으로 25㎞ 정도 떨어진 불산(佛山)으로 갔다가 다시 삼수(三水)로 가기 위해 열차에 몸을 실었다. 장개석 위원장의 전보를 받고, 광동성 정부가 제공한 특별열차 편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열차 이동 중에도 일본군의 공격과 공습이 있어서 위기가 계속되었다. 이때의 위기와 극적인 상황을 정정화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백여 명이 넘는 우리 임시정부의 식구들이 짐까지 다 꾸려서 객차 한 칸에 탔으니, 옴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 새벽 두 시에 기차는 삼수를 향해 불산역을 출발했다. 기관총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 삼수역을 바로 눈앞에 두고 짐들을 챙기느라 또 한번 객차 안이 어수선해지기 시작할 즈음에, 갑자기 바깥에서 요란한 총소리가 연이어 났다. 일본 비행기의 공습이었다. 기차는 멈췄고 차에서 내려 길가로 피하라는 군인들의 고함소리가 들렸다.”(주29)

임시정부 가족들은 삼수에 도착한 다음에는, 다시 삼수현 정부에서 제공한 목선을 타고 주강(珠江)을 거슬러 올라갔고, 10월 26일 오주(梧州)를 거쳐, 28일 광서성(廣西省) 계평현(桂平縣)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들을 태운 목선을 끌고 갈 기선을 구하지 못해 20여 일을 부두에서 지내야 했다. 임시정부 일행은 삼수 선박사령부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기선을 구하여, 11월 16일 오후 4시 반경 북상하기 시작하여, 보름 만인 11월 30일 유주(柳州)에 도착했다.

유주로 가는 동안 중국 선원들이 밥은 해줬지만, 반찬은 직접 해결해야 했다. 된장·고추장 같은 짠 반찬을 해서 밥을 먹는 것이 보통이었기에 “배가 어딘가에 잠시 정박하기만 하면 육지로 올라가서 반찬거리가 될 만한 것을 구해오는 게 일이었다.”(주30) 장족·묘족·동족(洞族) 등 소수민족의 거주지역 유주에 도착했지만 그곳 생활은 고달팠다. 어느 순간 폭격의 희생물이 될 지 알 수가 없었다. 매일 매일을 생명을 내어놓은 경험을 해야 했다. 일본기의 공습을 알리는 경보가 울릴 때마다, 피난처를 찾아 숨는 생활이 반복되었다.(주31)

하지만 임시정부 식구들은 그런 고난 속에서도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등 민족주의세력이 임시정부를 구심점으로 통합하는 것을 보면서 위안과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처럼 힘든 상황에서도 임시정부 주변의 청년들은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를 조직하여, 중국인들을 상대로 선전물 배포·횃불시위·가두행진·연극공연 등의 활동을 벌였다.

삼수를 떠난 지 한 달 열흘을 배 위에서 꼬박 지나고서야 류저우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류저우에도 오래에 머물지 못하고 다시 떠나야 했다. 1939년 4월 6일, 임시정부 식구 중 1진 40여 명이 먼저 충칭을 향해 떠났다. 4월 22일에는 2진 20여 명을 태운 버스가 출발했고 깎아 세운 듯 기묘하고 험악한 산세를 따라 깊고 높은 산길을 돌고돌아 구이저우성(貴州省)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1939년 4월 30일 마침내 2진 일행은 쓰촨성(四川省) 치장(綦江)에 도착하여 스촨성 정부가 제공한 ‘태자상(台子上)’이라는 건물에 짐을 풀었다. 치장은 쓰촨성과 구이저우성의 접경지대로 그곳에서 곧장 삼십여 리를 위로 올라가면 바로 최종 목적지 충칭이 있었다.(주32)

충칭은 1년의 반이 안개 낀 날이어서, 일본군 비행기의 폭격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하여, 중국국민당정부가 전시수도로 정했는데, 치장은 바로 충칭의 관문이 되는 곳이었다. 임시정부는 1939년 4월 말 치장에 도착하여 1940년 10월 충칭으로 옮겨갈 때까지 이곳에서 지냈다. 1940년 3월 1일 임시정부는 ‘태자상 30호’ 뒤뜰에서 3·1운동 21주년 기념식을 거행하면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확인했다.

한편, 그동안 임시정부를 지켜온 터줏대감이자 주석 이동녕이 1940년 3월 13일 과로로 이곳에서 71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석오 이동녕은 백범 김구와 함께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조직된 뒤부터 20여년간 임시정부를 사수해온 대표적인 인물이었고, 최고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다. 김구에게는 멘토 같은 사람이었고, 가장 든든한 지원자였다. 임시정부 가족들은 이동녕의 장례식을 치룬 1940년 3월 17일은 “2·3일 내리던 비는 멎었으나, 봄바람이 심히 부는 날”이었다. 또한 병중에 있던 백범의 모친 곽낙원 여사도 이동녕이 떠나기 1년여 전인 1939년 4월 26일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40년 가을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옮겨가면서 항일투쟁의 마지막 시기 충칭 임시정부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 대한민국임시정부 국장으로 거행한 임시정부 주석 이동녕의 장례식(기강, 1940. 3. 17)(사진=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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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한상도, 『대한민국임시정부사 2-장정시기』, 58〜59쪽

2) 박창욱, 「1920~1930년대 재만 민족주의계열의 반민족운동」, <역사비평> 27, 241·247쪽

3) 최형우, 『해외혁명운동소사 2』, 동방문화사, 1945, 44〜45쪽

4) 한상도, 위의 책, 61〜63쪽

5) 한상도, 위의 책, 66쪽

6) 한상도, 위의 책, 67쪽

7) 한상도, 위의 책, 67〜68쪽

8) 김구/ 도진순 해제, 『백범일지』, 355쪽

9) 胡春惠/신승하 역, 『중국안의 한국독립운동』, 단국대출판부, 1978, 48쪽

10) 김구/ 도진순 해제, 『백범일지』, 355〜356쪽

11) 한상도, 위의 책, 71쪽

12) 한상도, 위의 책, 72〜76쪽

13) 1932년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재무장과 군무장을 맡고 있던 김구가 윤봉길, 이봉창 사건의 진상을 중국인에게 알리고자 중국어로 쓴 진상보고서 형식의 책. 김구/엄항섭, 『도왜실기』, 범우사, 2002 참조.

14) 한상도, 위의 책, 80〜81쪽

15) 한상도, 위의 책, 83〜84쪽

16) 간부학교 운영에 관여한 의열단 간부 중 황포군관학교 출신으로는 4기생 김원봉・권준・박건웅・김종・노일용・이집중, 5기생 신악, 6기생 이춘암 등이 있다.

17) 한상도, “김원봉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운영(1932〜35)과 그 입교생”, 『한국학보』 15권 4호(일지사, 1989), 162쪽

18) 어느 유력한 정당의 정치인은 김원봉에 대해 ‘뼈 속까지 공산주의자’라는 식으로 표현했는데, 이는 잘못된 판단이다. 김원봉은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로 출발해 민족좌파 노선을 견지했지만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그의 주변에는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가 많았고, 그는 이들과 여러 일들을 같이 했지만 김원봉이 공산당에 가담하거나 공산주의자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는 ‘사회주의적 평등주의’를 받아들였지만 정치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와는 거리가 있었고, 프롤레타리아독재와 같은 공산당의 입장과는 거리가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19) 한상도, 『대한민국임시정부사 2-장정시기』, 85쪽

20) 한상도, “김원봉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운영(1932〜35)과 그 입교생”, 165쪽

21) 한상도, “김원봉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운영(1932〜35)과 그 입교생”, 167〜173쪽

22) 한상도, “김원봉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운영(1932〜35)과 그 입교생”, 173〜177쪽

23) 한상도, 『대한민국임시정부사 2-장정시기』, 95〜96쪽

24) 한상도, 『대한민국임시정부사 2-장정시기』, 100〜101쪽

25) 김구/ 도진순 해제, 백범일지, 368쪽

26) 김구/ 도진순 해제, 백범일지, 369〜370쪽

27) 정정화, 『장강일기』, 학민사, 151〜152쪽

28) 양우조·최선화/ 김현주 정리, 『제시의 일기』, 혜윰, 1999, 33~34쪽

29) 정정화, 『장강일기』, 156~157쪽

30) 양우조·최선화, 『제시의 일기』, 46쪽

31) 정정화, 『장강일기』, 158~162쪽

32) 정정화, 『장강일기』, 167쪽; 한상도, 『대한민국임시정부사 2-장정시기』, 207〜212쪽

 

임영태 ytlim2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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