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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상은 바로 우리 아버지의 모습”

기사승인 2019.05.13  18: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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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 강제징용노동자상의 의미-과거] 한국노총 대전본부 김용복 본부장

8월 15일, 대전에 일본의 만행을 잊지 않겠다며 강제징용노동자상을 세우겠다고 선언한 사람들이 있다. 평화나비 대전행동, 민주노총 대전본부, 한국노총 대전본부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며 일제의 만행을 잊지 말자고 외치고 있다. 대전 강제징용노동자상의 의미를 릴레이 인터뷰를 통해 과거-현재-미래의 순으로 되새겨본다. 문의 평화나비 대전행동(042-223-0615)

 

“한 손에 곡괭이를 들고 있는 노동자상의 모습은 바로 우리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갱도를 파는 공사에 끌려가 죽지 못해 살아 돌아오셨다는 아버지는 한평생 일제의 만행을 잊지 못하셨습니다.”

   
▲ 한국노총 대전본부 김용복 본부장이 일본으로 강제징용 당했던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김병준 통신원]

김용복 님은 “대전 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 선포 기자회견” 당시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평화나비 대전행동, 민주노총 대전본부, 한국노총 대전본부는 지난 4월 10일 대전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다가오는 8월 15일 소녀상 옆에 ‘대전 강제징용노동자상’을 건립하겠다고 선언하며 기자회견을 가졌다.

강제징용노동자상의 모형을 보고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렸다. 일본에 끌려가 갱도를 파는 데에 동원되어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쉬지도 못하고, 일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 온화한 성품에도 불구하고 일본이야기에는 “쳐 죽일 놈들”이라며 욕을 할 수밖에 없던 아버지. 돌아가실 때까지 한 마디의 사과도, 1원의 배상도 받지 못해 한을 품으셨던 아버지.

“1927년생인 아버지는 41년경 강제징용 되어 일본으로 끌려가셨다고 합니다. 45년 해방 이후 다른 집 자식들은 다 돌아오는데 우리 아버지는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아들을 잃은 울분에 할아버지는 화병으로 돌아가시고, 장례를 치를 사람이 없어 동네 사람들이 장례를 치렀다고 합니다.”

아버지에 대한 아픈 기억을 되돌려가며 그가 처음 한 이야기는 할아버지의 죽음이다. 동네에서 함께 징용에 끌려간 다른 사람들은 돌아오는데 돌아오지 않는 아들이 죽었다고 생각한 그의 할아버지는 결국 화병으로 목숨을 잃은 것이다.

“원래 아버지가 징용에 끌려갈 차례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나이도 15살 정도로 매우 어린 나이고. 그런데 동네 부자가 구장(일제강점기에는 통장과 이장을 묶어 구장이라고 했다고 한다)에게 돈을 써 자기 자식들 차례를 빼버리니, 할당을 채우기 위해 아버지가 끌려가신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자기가 가난해서 아들이 사지에 내몰렸다고 분노하셨고, 다른 이들은 다 돌아오는데 아들만 돌아오지 않자 홧병이 나신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 시대를 살아온 수많은 이들의 아픔이 그의 집안에도 그대로 서려 있었다. 돈 있고, 권력 있는 자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면제되지만 힘없는 서민들만 고통을 받고 있는 현실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상황이다.

“아버지 말씀으로는 일본에서 돌아오는 배에 타려고 했는데 못 타셨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그 배가 일본 앞바다에서 침몰해 버렸고, 오히려 배를 못 타신 아버지가 우여곡절 끝에 돌아오신 것이죠. 할머니 말씀으로는 ‘거지도 상거지 꼬락서니’로 아버지가 해방 한참 후에야 집으로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가 타려고 했던 배가 바로 “우키시마호”로 보여진다. 해방 직후 일본은 ‘이 배가 조선으로 가는 마지막 기회’라며 7,000여명의 조선인을 태웠다. 12,000여명이 탑승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8월 21일 아오모리 현을 출발한 우키시마호는 8월 24일 교토 인근에서 갑작스런 폭발과 함께 침몰했다. 일본해군의 폭발물 설치로 인한 자폭이 유력한 원인으로 추정되는 사건이다.

“아버지는 너무나 온화한 성품이셨습니다. 올가미에 걸려 있는 토끼도 풀어주고, 붕어, 잉어를 잡아다 놓으면 방생해주실 정도로. 하지만 일본 이야기가 나오면 ‘쳐 죽일 놈들’이라며 분노를 감추지 못하셨죠. 돌아가실 때까지도 단 한마디의 사과도, 단 한푼의 배상도 받지 못한 한이 너무나 크게 남아 있으셨습니다.”

일본에 대한 아버지의 감정이 어떠했는지는 물어보니 그의 대답은 단호했다. 돌아가실 때까지도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하나도 놓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4년간의 강제노동의 대가가 겨우 목숨만 부지하여 귀국한 것이니 일본에 대한 분노는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정부에서 조사는 해 갔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어떠한 조치도 없었다는 것이 아버지가 더욱 분노하는 지점이었습니다. 결국 일본정부와 마찬가지로 우리 정부도 실제 강제징용 피해노동자들에게 어떠한 조치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기록이 남아 있다면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봅니다. 이제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몇분 남아계시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분노가 그에게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강제징용에 대한 사과는커녕 인정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있는 일본. 그리고 이러한 일본과 10억 엔에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했던 박근혜 정부, 김종필을 통해 청구권 문제를 모두 일축시켰던 박정희 정부등 우리 정부의 대처에도 문제가 많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갱도를 파는 일을 하셨다던 아버지의 모습이 바로 강제징용노동자상의 모습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제대로 된 장비도 없이 갱도 안에 들어가 망치와 정, 그리고 곡괭이를 가지고 갱도를 파셨다는 아버지. 깡마르다 못해 갈비뼈가 다 들어날 정도의 모습. 곡괭이를 한손에 들고 눈부신 듯 다른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는 노동자상은 갱도에서 일하다 나오신 바로 우리 아버지의 모습일 것입니다.”

소금 묻힌 주먹밥 하나와 짜디 짠 단무지 반개로 한끼 식사를 때우셨다고 슬피 고백하시던 아버지를 기억하며 그가 눈물끼 가득 내뱉듯이 이야기한다.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으로 피해를 당한 이 땅의 수많은 아버지, 할아버지의 모습이 바로 강제징용노동자상의 모습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잊지 못하고,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이유는 그들이 바로 우리의 선배 노동자들이고, 아버지이고,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오는 8월 15일, 시청 북문 앞 평화의 소녀상이 있는 바로 그 곳에 강제징용노동자상을 세울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며, 우리의 후대들이 다시는 이러한 일을 겪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우리의 결심입니다. 시민 여러분 관심 가지고 동참해 주십시오. 여러분이 함께 해주셔야 가능합니다.”

노동자상을 준비하며 시민들에게 부탁드린다는 그의 마음이다. 그에게 있어 노동자상 건립은 아버지에 대한 위로이며, 다시는 일제강점기와 같은 치욕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그리고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우리 역사를 기억하겠다는 다짐이다.

   
▲ 대전 강제징용노동자상을 만드는 사람들. 왼쪽부터 이대식 본부장(민주노총 대전본부), 오광영 시의원(대전시의원), 김용우 상임대표(평화나비 대전행동), 김용복 본부장(한국노총 대전본부). [사진-통일뉴스 김병준 통신원]

오는 8월 15일, 평화의 소녀상이 있는 대전시청 북문 앞 평화공원(보라매근린공원)에는 김용복 님의 아버지의 모습을 꼭 닮은, 그 시절 강제징용으로 고통당했던 우리 아버지들의 모습을 꼭 닮은 노동자상이 세워질 것이다.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와 공동게재 됩니다. / 편집자 주)

 

 

대전=김병준 통신원 tongil@tongilnews.com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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