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나다 (성경)

 
 네게로
 - 최승자
 
 흐르는 물처럼
 네게로 가리
 물에 풀리는 알코올처럼
 알코올에 엉기는 니코틴처럼
 니코틴에 달라붙는 카페인처럼
 네게로 가리.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매독처럼
 삶을 거머잡는 죽음처럼.   
 
 
 대학 때 함께 스터디를 하며 꿈을 꾸었던 옛 벗에게서 문자가 왔다. 만난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구나! ‘죽기 전에 한번 봐야지!’로 시작하던 글이 ‘큰 딸이 결혼한다.’로 끝을 맺었다.
 
 이런 문자를 많이 받는다. 연락이 뜸하던 옛 벗들이 보내오는 청첩장들. 가끔 머릿속에 떠오르던 벗들. 결혼식장에 가지 않으면 절교가 되어 버린다. 이렇게 끝이 나버린 옛 벗들이 참으로 많다.
 
 이번에 문자를 받은 벗은 오랫동안 인연을 맺고 싶었는데. 오래 전에 만났을 때 그는 모 공기업의 지점장이 되어 있었다. 이제 곧 은퇴를 한단다. 평소에 소탈하던 그가 조직의 ‘짱’이 되면서 어깨에 힘이 많이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그와의 인연이 끝날 때가 되었구나!’    
 
 그는 내가 답이 없자 전화를 했다. 받지 않았다. 그렇게 그와의 오랜 인연이 끝이 났다. 한 점쟁이가 내 사주에 ‘외로울 고(孤)’가 있다더니 결국 그렇게 되어가는구나! 나는 나의 인연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학창 시절의 꿈이 사라진 낙엽 같은 생(生)이 되어 계속 만나야 하나? ‘옛날에 옛날에......’를 읊조리며. 나는 옛날이야기를 하는 만남을 하고 싶지 않다.
 
 50대 여성이 아파트 엘리베이트 앞에서 주민 3명에게 염산을 뿌리고 흉기를 휘둘러 부상을 입혔다고 한다. 그녀는 속으로 무슨 말을 했을까?

 10여 년 전 쯤, 달리는 전동차 안에 불을 지른 중년 남성이 있었다. 그는 속으로 이렇게 울부짖지 않았을까? ‘함께 살지 않으려면 함께 죽자!’
 
 인간은 ‘더불어 사는 존재’라 ‘혼자’를 견딜 수 없다. 그래서 죽어서라도 함께 있고 싶어 한다. 
 
 ‘흐르는 물처럼/네게로 가리/물에 풀리는 알코올처럼/알코올에 엉기는 니코틴처럼/니코틴에 달라붙는 카페인처럼/네게로 가리./혈관을 타고 흐르는 매독처럼/삶을 거머잡는 죽음처럼.’   
 
 우리는 언제나 ‘네게로’ 가고 싶다!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고 진정으로 만나는 것인가? 연극하듯 쇼를 하는 게 만나는 것인가? 사람들을 만나고 나면 진이 빠진다. 기진맥진해서 집으로 돌아온다.
 
 나도 오랫동안 사람을 찾아 미친 듯 헤맸다. 그러다 이제 나이 들어 고독하게 머물 줄 안다. 진정으로 사람을 만나는 건 혼자 고요히 머무는 것이다.  
 
 내가 내 안에 깊이 침잠할수록 나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아주 깊은 곳에는 ‘전인류(全人類)’가 있으리라. 모래 한 알에 우주가 있듯. 한 사람에게는 인류가 있기에.    
 
 우리는 이웃들에게 염산을 뿌린 여자를 싸이코패스라고 명명할 것이다. 그렇게 그녀를 이 세상에서 추방하고 나면 당장엔 기분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또 다른 무수한 그녀로 부활하여 우리에게 염산을 뿌려댈 것이다. 우리가 그녀를 ‘나’로 받아들일 때까지.
 
 나는 가끔 명상을 한다. 고요히 나를 죽이고 그냥 머문다. 그때 ‘나는 나다’. 부족함이 없는 존재. 하지만 눈을 뜨면 아, 다시 목이 마르다. 네게로 달려가고 싶다. 너와 나를 죽이고서라도 하나가 되고 싶다.
 
 그래서 나는 그냥 나로 머문다. 너무나 네게로 달려가고 싶기에. 처절하게 혼자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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