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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임시정부 ①

기사승인 2019.04.16  10: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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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연재> 임영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27년의 역정’(2)(주1)

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상하이서 첫 걸음을 시작해 일제의 패망으로 1945년 11월 고국에 돌아올 때까지 27년간 고난에 찬 투쟁을 이어갔다. 그 사이 임시정부는 상하이,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충칭 등 중국 대륙 곳곳을 누비며 1만3천리(5,200㎞)를 이동했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초기 활동 지역인 상하이와 첫 피신처였던 항저우의 임시정부 유적지를 돌아보았다. 상하이・항저우 유적지 답사기와 함께 임시정부 역사를 10여회에 걸쳐 정리하고자 한다. 이 답사기는 매주 화요일 연재된다. / 필자 주


이번 회에는 임시정부 수립을 둘러싼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임시정부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임시정부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활동을 했는지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임시정부를 대한민국 정부의 뿌리로 여기는 사람이라면 세세한 내용은 알지 못하더라도 큰 흐름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역사 속의 사람들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를 이야기 하게 되면 약간은 지루할 수도 있을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오랜만에 독립운동사 공부한다고 생각하고 읽어주기를 기대한다.

대한민국은 3.1운동과 임시정부를 계승했다

1948년에 제정, 공포된 대한민국 제헌헌법 전문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라고 되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1919년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하고 있음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이 헌법전문은 1948년 7월 17일 제정된 뒤 1960년 11월 29일 제4차 개정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정희가 5.16쿠데타를 일으킨 뒤 1962년 12월 26일 개정한 제5차 헌법에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4·19의거와 5·16혁명의 이념에 입각하여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건설함에 있어서”로 바뀌었다. 대한민국의 뿌리에서 임시정부가 제거된 것이다. 이런 내용 헌법 전문문은 전두환 정권까지 비슷하게 유지되었다.

그러나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1987년 10월29일 개정된 제9차 헌법에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하고”로 바뀌었다. 6월 민주화 운동과 함께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다시 임시정부에서 찾게 된 것이다.(주2)

제헌헌법과 1987년 개정헌법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1948년이 아니라 1919년에 건립되었다. 1948년의 대한민국 정부는 1919년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신과 법통을 계승하여 재건한 정부인 것이다. 이처럼 헌법에서 밝히고 있는데도 뉴라이트와 일부 우익세력은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헌법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제헌헌법에 의하면, 대한민국은 1948년에 건국된 것이 아니라 재건되었다. 8월 15일은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광복절’이 되어야 마땅하다.

   
▲ 관보에 게재된 대한민국 초대 헌법. [사진제공-임영태]

정말 ‘건국절’이 꼭 필요하다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진 1919년 4월 11일(주3)을 기념해야 할 것이다. 그날이 대한민국이라는 근대국가의 출발점이니까. 그러나 지금 학계에서는 ‘건국’이라는 구시대적인 낡은 표현 대신에 ‘국가 형성(nation bilding)’이라는 말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국가는 어느 날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고 오랜 시간을 통해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1919년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형성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

한국인들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상황에서 새로운 국가 형성의 첫걸음을 해외에서 임시정부를 세우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나라의 독립을 찾아서 국민의 의사를 묻는 선거를 통해 대표자를 선출할 수 없었기에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그 사이에서 대표를 뽑아 정부를 구성했던 것이다. 임시정부를 세운 것은 독립운동을 보다 체계적으로 이끌기 위해서였다.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기관을 목표로 했던 것이다. 우역곡절이 있었고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기관으로서 충분한 역할을 했다고 말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임시정부가 27년 동안 남의 나라 땅에서 숱한 고초를 겪으면서도 한 번도 문을 닫지 않고 독립투쟁을 이어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3.1운동으로 민족해방운동의 새 장이 열리다

1919년은 우리 역사에서 획기적인 의미를 지니는 해다. 우리 민족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체제에 항거하여 거족적인 민족운동인 3.1운동을 일으켰고, 그 기세를 바탕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3.1운동과 그 열기를 이어받은 임시정부 수립으로 그동안 분산적으로 진행되던 민족운동을 보다 체계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은 국제 상황의 변화에 큰 영향을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파리에서 열린 강화회의가 직접적인 매개체 노릇을 했다. 특히 파리강화회의의 주도국가의 하나인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1918년 1월 발표한 이른바 14개조에 들어 있던 ‘민족자결의 원칙’이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고무시키는 역할을 했다. 1917년 10월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도 피압박민족의 해방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 파리강화회의 대표단 모습. [사진제공-임영태]

이 같은 국제 정세의 변화를 예민하게 감지한 것은 해외의 독립운동가들이었다. 특히 상해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가들, 그 중에서도 여운형 등이 조직한 신한청년당이 가장 먼저 움직였다. 신한청년당은 1919년 1월 독립청원서를 작성해 김규식을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했다. 김규식은 일본의 견제와 강대국들의 무관심으로 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그러한 움직임은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자극제가 되었다.

신한청년당은 장덕수를 일본에 보내 유학생과 접촉하게 했다. 여운홍은 2월 8일 도쿄 YMCA 회관에서 감행한 유학생들의 독립선언을 참관하고 그 소식을 국내의 이상재, 최남선, 함태영, 이갑성 등에게 전해주었다. 선우혁은 국내로 들어와 이승훈 등을 만나 파리 강화회의 소식을 전하고 지금이 독립운동을 펼칠 적절한 시점이라고 설득했다. 신한청년당의 대표 겸 총무로 있던 여운형은 연해주로 가서 이동녕, 박은식 등을 만나 파리 강화회의 대표 파견 사실을 알리고 향후 독립운동에 대해 논의했다.

1919년 2월 연해주에서도 윤해, 고창일 등을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파견했다. 미국에서도 이승만, 정한경 등이 파리에 가기 위해 비자를 신청했으나 미국 정부가 내주지 않았다. 도쿄에서는 1919년 1월부터 유학생들이 모임을 가졌고 여러 차례의 비밀 회합과 준비를 거쳐 ‘2.8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은 3.1운동의 촉진제가 되었다.

국내에서도 그 전부터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손병희, 최린을 중심으로 한 천도교에서 가장 먼저 독립운동을 준비했고, 기독교로 움직였다. 천도교와 기독교는 민족대연합 전선이 필요하다는데 합의했고, 불교계와 유림계도 참여시키기로 했다. 유림은 김창숙이 부친상을 당해 서울에 오지 못하는 바람에 끝내 대표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으나 불교계는 한용운, 백용성이 서명했다. 그렇게 해서 천도교계 16명, 기독교계 15명, 불교계 2명 등 33인 명의의 독립선언서가 준비되었다.

3.1운동은 한국독립운동의 새장을 열었다. 3.1운동 직후 국내외에서 여러 세력이 임시정부를 시도하였고 그 바탕 위에서 상해의 통합 임시정부가 출범할 수 있었다. 3.1운동 이후 만주와 연해주에서는 40여개의 독립군 단체들이 조직되어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나들며 일제와 싸우며 독립전쟁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항일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날 봉오동・청산리의 승전보를 울렸다.

3.1운동 이후 일제의 무단통치가 다소 완화되자 그 틈새를 비집고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학생운동, 형평운동, 여성운동 등 민중운동이 발전했고, 사회주의 운동이 자라났다.

3.1운동을 통해 한국 민중은 새롭게 태어났다. 전근대적 봉건질서에서 벗어나 자유와 평등, 자주와 독립을 바라는 시대의 요구에 맞게 새로운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 3.1운동은 국내외 독립투쟁과 민족운동 발전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3.1운동은 세계사적으로도 중대한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다.(주4)

대한국민의회와 한성정부 등 여러 정부의 등장

제1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 열강의 세력 다툼으로 시작되었지만 민족해방운동 발전에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1차 대전 말기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고민 끝에 향후 방향을 정부수립과 대동단결로 잡았다. 3.1운동은 정부수립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가장 먼저 임시정부가 만들어진 것은 러시아령에서였다. 1919년 2월 25일부터 3월 초까지 러시아의 니콜리스크(현재의 우수리스크)에서 한국인을 대변할 정부조직을 세우기 위해 전체 러시아조선인 회의(전로조선인회의)를 개최했다. 회의에는 러시아뿐만 아니라 중국 서간도와 북간도, 국내 대표 등 모두 80여명이 참석했다. 2월 28일부터 대한국민의회 구성에 착수해 의장에 문창범, 부의장에 김철훈과 김알렉산드르, 서기에 오창환, 외교부장에 최재형, 선전부장(후에 군무부장)에 이동휘, 재정부장에 한명세 등을 선출했다. 대한국민의회는 상설의원 30명과 통상의원 40~50명으로 구성되었는데, 단순히 의회 기능만이 아니라 행정과 사법까지 포함한 삼권을 하나의 기관에 담아낸 소비에트적인 조직체였다.(주5)

또한 대한국민의회는 행정부를 조직하여 대통령에 손병희, 부통령에 박영효, 국무총리에 이승만, 내무총장에 안창호, 강화대사에 김규식 등을 추대했으나 실권은 군무총장 이동휘, 탁지총장 윤현진, 산업총장 남형우, 참모총장 유동열 등이 주도하도록 했다.(주6)

노령의 대한국민의회는 국내의 3.1운동 소식에 한층 고무되어 3월 17일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윤해・고창일 등을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했다. 노령 대한국민의회는 3.1운동 이후 최초로 수립된 한국인의 정권기관(임시정부)이었다.

   
▲ 러시아령 우수리스크에 세워진 대한국민의회가 있던 건물. 왼쪽 2층에 국민의회 사무실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학교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다. [사진제공-임영태]

국내에서는 한성정부가 추진되었다. 3.1운동 직후 이규갑, 김사국 등 기독교 세력이 주동이 되어 국민대회를 준비했는데 신태련 등의 천도교 측 인물들도 가세했다. 1919년 3월 17일 이규갑, 한남수 등은 ‘비밀독립운동본부’ 조직하고 정부 수립에 대한 구체적인 절차와 방법을 논의했다. 이들은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13도 대표자회의를 열어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국민에 공포하기로 계획하였고, 「임시정부 약법」 등을 만들고 임시정부 각원, 평정관, 파리강화회의 파견 국민대표 명단 등을 작성했다. 집정관 총재 이승만, 국무총리총재 이동휘, 내무부총장 이동녕, 외무부총장 박용만, 재무부총장 이시영(차장 한남수), 교통부총장 문창범, 군무부총장 노백린, 법무부총장 신규식, 학무부총장 김규식, 노동국총판 안창호, 참모부총장 유동렬(차장 이세영) 등이었다.

김사국 등은 4월 23일 정오 서린동 춘추관에서 임시정부를 선포하고, 노동자를 동원해 종로 보신각을 중심으로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했다. 그날 종로 일대에 「임시정부선포문」과 「국민대회취지서」가 뿌려졌고 현장에서 주동자가 검거되었다. 이 사건과 관련해 모두 270여명이 검거되었다. 4월 11일자 <천진대공보>와 4월 16일자 <상해시보>에는 한성정부의 조직과 각료 명단이 보도되었다. 그러나 한성정부는 종이정부에 불과했다. 국내 13도 대표가 참석하는 국민대회는 아예 열리지도 못했고 참석자들 또한 이승만으로 대표되는 기독교세력과 기호출신이 대부분이었다. 후에 이승만이 임시정부와 갈등을 빚을 때마다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한성정부를 들먹였지만 한성정부는 실체가 없었다.

한편, 4월 23일 한성정부 수립을 선포하기 위해 조직한 국민대회에서 ‘조선민족대회’ 명의로 「임시정부선포문」과 「임시정부령 1・2호」가 함께 뿌려졌는데, 이것은 신한민국정부 추진세력이 제작한 것이었다.(주7) 신한민국정부는 집정관 이동휘,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부장 미정(차장 조성환), 외무부장 박용만(차장 김규식), 재정부장 이시영(차장 이춘숙), 교통부장 문창범(차장 이희경), 노동부장 안창호(차장 민찬호) 등이 선정, 발표되었다.(주8)

이 밖에도 ‘쪽지정부’, ‘전단정부’로 표현되는 ‘조선민국임시정부’와 ‘대한민간정부’ 등이 있었다.(주9) 이처럼 3.1운동 이후 정부를 표방하는 여러 조직들이 등장하지만 실제 실체가 있었던 것은 상해 임시정부와 노령 국민의회였다.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지다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활동은 상해에서 가장 조직적으로 진행되었다. 상해에서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였고, 나라 안팎에 대표를 보냈으며 이를 통해 3.1운동을 간접적으로 지원하였다. 3.1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상해의 독립운동가들은 적극적으로 정부 수립에 나섰고, 상해의 움직임이 전해지면서 독립운동가들이 곳곳에서 상해로 몰려들었다.

정부 수립 움직임과 독립운동가의 상해 집결 속도는 비례했다. 독립운동 진영의 인물들이 상해로 집결하기 시작하자 상해 프랑스조계에 독립임시사무소가 설치되었고,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을 세우기 위한 한시적인 실무기구 역할을 담당했다.

독립임시사무소에는 이광수, 최근우를 비롯하여 미국에서 온 여운홍, 국내에서 ‘민족대표 33인’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상해로 파견된 현순 등이 참가했다. 특히 현순은 독립임시사무소의 총무를 맡아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그는 상해에 있던 여러 나라의 공관을 찾아다니며 독립선언서를 돌리고 국내에서 전개되던 독립운동 상황을 언론에 알렸다. 2월 1일 프랑스 파리로 출발한 신한청년당 대표 김규식과 미국에 있던 이승만에게도 그 소식을 알렸다.

현순이 이처럼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국내에서 파견한 대표라는 점 외에도 독립임시사무소의 설치와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훈은 천도교 측으로부터 받은 자금 5천원 가운데 2천원을 현순에게 주었고, 이 돈이 초기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조직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19년 3월 26〜27일 상해 프랑스조계의 한 예배당에서 독립운동을 이끌 최고기관을 논의하기 위한 모임이 열렸다. 3월 말경에는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조성환, 김동삼, 조영진, 조소앙 등 독립운동계의 중진들이 대거 상해에 도착하면서 임시정부 수립 논의에 탄력이 붙었다. 독립임시사무소는 ‘8인위원회’를 구성해 논의한 끝에 4월 초 ‘임시의회’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4월 10일 오후 10시 프랑스조계 김신부로(金神父路)의 한 셋집(주10)에서 정부수립을 위한 첫 회의가 시작되어 4월 11일 오전 10시까지 이어졌다.

회의에서는 먼저 각 지방을 대표하는 29명으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임시의정원)을 구성하였다. 현순(서울, 국내), 손정도(평남, 상해), 신익희(경기, 일본), 조성환(서울, 노령), 이광(충북, 만주), 이광수(평북, 일본), 최근우(경기, 일본), 백남칠(경상), 조소앙(경기, 만주), 김대지(경남, 국내), 남형우(경북, 국내), 이회영(서울, 만주), 이시영(서울, 만주), 이동녕(충남, 노령), 조완구(서울, 노령), 신채호(충북, 북경), 김철(전남, 상해), 선우혁(평북, 상해), 한진교(평남, 상해), 진희창(서울, 상해), 신철(서울?), 이영근(경남), 신석우(서울, 상해), 조동진(경상), 조동호(충북, 상해), 여운형(경기, 상해), 여운홍(경기, 미국), 현창운(?), 김동삼(경북, 만주) 등이었다. 각 지방 대표라고 했으나 실제로는 서울과 경기, 충청지역 출신이 반이나 됐다.(주11)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세우면서 가장 먼저 입법기관인 임시의정원을 출범시킨 것이다. 임시의정원 의장에 이동녕, 부의장에 손정도, 서기에 이광수・백남칠이 선출되었다. 임시의정원은 대한민국 국회의 기원이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임시의정원은 먼저 국호와 연호를 제정하였다. 국호는 ‘대한민국’, 연호는 ‘민국’이었다. 대한민국을 국호로 정한 것은 10년 전 국권을 상실한 ‘대한제국’에서 ‘대한’을 되살린 것이었다. 또 ‘제국’이 아니라 ‘민국’을 연호로 한 것은 한국역사에서 최초로 공화정, 민주정치 체제를 채택한 것을 의미했다. ‘민국’이란 연호는 중국의 신해혁명에서 영향을 받았다.

정부조직은 국무총리를 수반으로 하고 6개 부서를 두었는데 각부 책임자를 총장으로 칭했다. 하지만 총장으로 선출된 인물 가운데 법무총장 이시영만 상해에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언제 도착할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상해에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던 젊은 인물을 차장에 뽑아 업무를 맡겼다. 국무총리 이승만(국무원 비서장 조소앙), 내무총장 안창호(차장 신익희), 외무총장 김규식(차장 현순), 재무총장 최재형(재무차장 이춘숙), 군무총장 이동휘(차장 조성환), 법무총장 이시영(차장 남형우), 교통총장 문창범(차장 선우혁) 등이 선정되었다.

임시의정원은 임시헌장도 제정했다. 임시헌장은 서두에 헌법 전문 형식의 선포문이 나오고 이어서 10개 조항의 규정으로 구성되었다. 선포문은 3.1운동과 국민의 신의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임시정부는 완전한 자주독립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임시의정원의 결의로 임시헌장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임시헌장은 국체와 정체, 기본권 등에 관한 규정을 담았다. 제1조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임을, 제2조는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해 통치한다는 점을 밝혔다. 한양대 박찬승 교수에 의하면, 헌법에 ‘민주공화정’이 명기된 것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계 최초’라고 한다.(주12)

   
▲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6회 회의 기념촬영(1919. 9. 17). 앞줄 왼쪽부터 이유필, 신익희, 윤현진, 안창호, 손정도, 정인과 최창식, 이춘숙. 둘째줄 왼쪽 첫 번째 차균상, 네 번째 고일청, 오른쪽 끝 김구. 그 뒤쪽에 김병조, 장붕, 왕삼덕, 황진남, 전재순, 조완구 여운형 등이 자리하고 있다. [사진제공-임영태]

임시의정원 회의는 마지막으로 임시정부 명의의 선서문과 정강을 채택했다. 선서문에서는 3.1운동을 찬양하고 임시정부의 국토광복의 사명을 다짐했다. 정강은 간단히 6개항으로 이뤄졌는데, 민족・국가・인류평등의 선전, 외국인의 생명과 재산보호, 모든 정치범의 특사, 그리고 절대독립의 서도(誓圖) 등의 내용을 담았다.

1919년 4월 10일 밤부터 다음날(4월 11일) 오전 10시까지 진행된 임시의정원 첫 회의는 사실상 제헌의회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헌법인 임시헌장을 결정하고, 거기에 따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기 때문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의 제헌의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1948년에는 상당 기간의 준비 작업을 거쳤으나 1919년에는 일단 첫 회의에서 정부 수립을 결정하고 차례대로 내용을 수정, 보완하는 방식으로 진행된 점이 달랐다. 임시헌장을 헌법으로 바꾸고 직제와 구성원을 교체했으며, 다른 임시정부와의 교섭을 통해 통합정부를 구현해갔던 것이다.

   
▲ 상하이 하비로에 있었던 통합임시정부 1호 청사 모습. 2층 외벽에 태극기가 걸려 있다. [사진제공-임영태]

이렇게 해서 1919년 4월 11일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선포되고, 이를 운영할 임시정부가 만들어졌다. 3.1독립선언서에서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했는데, 그 독립국은 바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을 의미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공화국이 세워지고 근대국가가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주13)

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출범하다

임시의정원의 활동과 임시정부 수립 발표에도 불구하고 주요 각료들이 취임을 유보함으로써 상하이임시정부는 정체상태에 빠졌다. 특히 국무총리 이승만(한성정부의 집정관 총재)과 군무총장 이동휘(신한민국정부의 집정관)의 취임거부는 임시정부의 출범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었다.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로 지명된 이승만은 이미 미국 워싱턴에 ‘대한공화국 임시사무소’라는 한성정부 간판까지 내걸고 활동하였다. 그는 상해임시정부와 한성정부 양쪽에서 정부수반에 선임되었지만 한성정부만 받아들이는 태도를 취했다. 한성정부가 「약법」을 통해 독립 국가로서 정식 국회가 개원될 때까지 정부수반에게 절대 권력을 보장해주었기 때문이다. 반면, 상해임시정부는 정부수반의 선출권과 탄핵권을 임시의정원에 부여하고 행정권을 국무총리가 중심이 되는 국무원에 일임하여 자신의 독주를 제도적으로 차단하고 있었다.(주14)

이동휘도 사정은 비슷했다. 1919년 4월 13일 상해 임시정부 성립 사실이 내외에 공포되고 그 사실이 연해주와 만주일대에 알려진 뒤에도 그는 신한민국정부의 ‘집정관’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또 그는 4월 말경 노령에서 중국 만주로 들어와 대한국민의회 훈춘지부를 설치하는 한편, 4월 24일부터 3일간에 걸쳐 회의를 열고 국내 침투를 결의했다.

이처럼 핵심인물들의 보이콧으로 표류하고 있던 상해 임시정부가 제대로 가동되기 시작한 것은 1919년 5월 내무총장 안창호가 상해에 도착하면서부터였다. 안창호는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승만과 이동휘의 취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안창호의 취임요구에 대해 이승만은 “국무총리를 대통령으로 바꿀 것”과 “애국금을 폐지하고 공채만 발행할 것”을 요구했다. 안창호는 후자에 대해서는 거부했으나 전자에 대해서는 받아들였다. 안창호는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어떤 직함도 사용할 수 있으며 우리는 반대하지 않는다”고 회신했다.(주15)

   
▲ 1921년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신년 축하식(국가기록원). [사진제공-임영태]

상하이임시정부가 이승만을 집정관총재로 하는 한성정부를 수용한 것은 이동휘를 상해로 불러들이는 데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이동휘는 상하이임시정부에서는 군무총장이었지만 한성정부에서는 집정관총재 다음가는 국무총리였다. 상하이임시정부와 대한국민의회의 통합협상 또한 임시정부에 유리한 명분을 제공했다. 한성정부, 노령정부, 상해정부 등 세 세력은 우여곡절 끝에 정부의 개조안에 합의했다.

1919년 9월 6일 수개월에 걸친 논의 끝에 통합임시정부의 개정헌법이 탄생했다. 9월 7일 임시의정원은 이승만의 요구를 받아들여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정부 조직을 6부에서 7부1국으로 개조했다. 9월 11일 임시정부는 신헌법을 공포하고 내각을 발표했다.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내무총장 이동녕, 외무총장 박용만, 군무총장 노백린, 재무총장 이시영, 법무총장 신규식, 학무총장 김규식, 교통총장 문창범, 노동국총판 안창호 등이었다.

통합 임시정부가 출범하는 데는 러시아령 대한국민의회의 양보가 큰 역할을 했고, 통합 추진의 핵심 역할을 한 안창호가 스스로 말석의 노동국총판을 맡는 희생정신을 발휘함으로써 가능했다.(주16)

<대한민국 통합임시정부 초대 각료 및 주요 인사>

직위

이름

경력

비고

대통령

이승만

프린스턴대 박사, 독립협회, YMCA. 미주와 하와이. 박용만과 대립. 임정에서 탄핵(1925). 미주위원회 활동. 국무원과 갈등

1875 황해 평산. 임정 초대대통령. 외교론

국무총리

이동휘

대한제국 육군 참령. 서북학회, 신민회, 105인 사건. 한인사회당/고려공산당(상해파) 당수. 레닌 자금 사건.

1873 함경도 단천. 독립전쟁론.

내무총장

이동녕

독립협회, 신민회, 신흥무관학교 초대 교장, 권업회. 상해 임시의정원 초대 의장. 국무령, 국무총리, 대통령 직무대행

1869 천안. 임정 고수파. 김구의 멘토, 지원자

외무총장

박용만

보안회 사건 투옥. 네브레스카 소년병학교, 대한국민군단. 이승만의 정적. 최후 암살

1881 강원도 철원. 무장투쟁론

군부총장

노백린

게이오의숙, 일본 육사, 일본 육군 소위, 연성학교 교장. 신민회, 국민군단. 임정 국무총리.

1875 황해 송화. 1926년 병사

재무총장

이시영

김홍집의 사위, 대한제국 관료. 신흥무관학교.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1968 서울. 임정 고수파

법무총장

신규식

중국 동맹회 신해혁명 참가. 신아동제사, 대동단결선언. 신한청년단 조직 지원. 중국통로.

1880 충북 청원. 1922 병사

학무총장

김규식

독립신문, 언더우드 선교사. 프린스턴 석사, 박사과정 수료(영문학). 파리강화회의대표. 민족혁명당. 충징 임시정부 부주석.

1881 동래. 국민대표회의 창조파

교통총장

문창범

무오독립선언서. 권업회(우수리스크 지회). 대한국민의회 임시정부. 고려공산당 연추지부

1870 함북 경원. 취임 거부

노동국총판

안창호

독립협회, 미국 샌프란시스코, 신민회, 흥사단

1878 평남 강서. 실력양성론

경무국장

김구

동학운동, 치하포 사건(일본인 살해). 신민회, 105인 사건. 내무총장, 국무령. 충칭임정 주석. 한인애국단-이봉창, 윤봉길 의거. 임정의 터줏대감이자 상징 인물

1876 황해 해주. 임정 고수파


그러나 통합임시정부가 실제로 출범하기까지는 적지 않은 난관이 도사리고 있었다. 안창호는 통합 임시정부에 대해 ‘정신적’으로는 한성정부를 승인하면서도 실제로는 정부로서의 기능을 발휘하고 있던 상하이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개편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한국민의회 조직을 해산하고 통합임시정부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노령정부 사람들로서는 이러한 조치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상하이에서 임시정부를 해체하지 않고 한성정부 모습으로 개조한 것을 확인한 이동휘와 문창범은 통합정부 내각 취임을 거부했다.(주17)

통합정부의 출범과 활동에서는 이승만도 중요한 걸림돌이 되었다. 이승만은 통합정부가 출범하기 전부터 대통령 직함을 고집했을 뿐만 아니라 윌슨 대통령에게 ‘위임통치’를 제안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심각한 분란이 일었다.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려 했으나 미국정부가 비자를 발급해주지 않아서 참석할 수 없게 된 이승만은 1919년 2월 25일 미국 대통령에게 청원문을 보냈는데, 그 요지는 “파리강화회의에 위임통치에 관한 청원서를 제출해줄 것과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 두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신채호는 이 사실을 듣고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생기지도 않은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사람”이라고 강렬한 어조로 비판했다. 신채호는 이승만의 대통령 선임을 격렬히 반대했고, 그의 반대에도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임되자 상해를 떠나 북경에 터를 잡고 아예 임시정부 반대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이동휘도 선뜻 임시정부에 참가하기 힘들었다.(주18)

문창범은 끝내 교통총장에 취임도 하지 않은 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 대한국민의회를 재차 조직했다. 통합임시정부 출범이 물거품이 될 것 같은 위기감이 생길 지경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11월 3일 이동휘가 국무총리에 취임하고, 내무총장 이동녕, 재무총장 이시영, 법무총장 신규식 등이 함께 취임식을 가져 가까스로 통합정부가 출범할 수 있었다. 이동휘로 대표되는 한인사회당 세력이 참가함으로써 임시정부가 통합정부뿐만 아니라 최초의 좌우합작정부가 되었던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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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임시정부는 1919년을 임시정부1년 또는 민국(임시정부의 연호)1년으로 표기했고, 1945년을 임시정부(민국)27년으로 표기했다. 임시정부의 활동기간을 임정이 표기한 대로 27년으로 바꾼다. 전체 제목도 너무 길어서 간략히 줄였다.

2) 이재훈, “‘1919년 임시정부 법통’ 헌법 조항 박정희가 삭제했다”, <한겨레>, 2015.11.6.

3) 지난해까지는 일본 자료에 근거해 4월 13일 기념했지만, 올해부터 충칭임시정부가 여러 차례 정부수립기념일로 기념했던 4월 11일로 수정되었다.(이명경, “독립선언언서 공약3장, 한용운이 안 썼다 한국, 헌법에 ‘민주공화정’ 세계 첫 명기”, 한겨레, 2019. 4. 10)

4) 임영태, 「3.1운동」, 『스토리 세계사 8』(21세기북스, 2014), 269〜278쪽 참조.

5) 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 1-상해정부시기』(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40쪽.

6) 신용하, 『일제강점기 한국민족사(상)』(서울대출판부, 2002), 317~318쪽;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6』(인물과사상사, 2008), 193쪽.

7) 이현주, 「임시정부의 수립과 초기 활동」, 『한국사 48』(국사편찬위원회, 2001), 114쪽.

8) 김희곤, 위의 책, 45쪽; 이현주, 위의 글, 112~113쪽.

9) 김희곤, 앞의 책, 46〜47쪽.

10) 정확한 주소에 대해서는 22호, 60호 등 학계에 견해차가 있다고 한다.

11) 김희곤, 앞의 책, 57〜58쪽.

12) 이명경, 앞의 글, 한겨레, 2019. 4. 10

13) 김희곤, 앞의 책, 57〜72쪽 참조.

14) 이현주, 앞의 글, 121쪽

15) 이현주, 앞의 글, 122쪽

16)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6』, 196쪽

17) 김희곤, 앞의 책, 96쪽

18) 김희곤, 앞의 책, 97쪽

 

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출판기획자, 저술가. 청년시절 민주화․사회운동에 관계했으며, 지금은 한국 근현대사와 세계사, 인문․사회 관련 대중서의 기획․집필에 주력하고 있다. (사)현대사연구소 연구위원으로 활동했으며,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공식 보고서 발간을 총괄했다.

저서로는 『스토리 세계사 1~10』, 『두 개의 한국 현대사』, 『산골대통령, 한국을 지배하다』, 『국민을 위한 권력은 없다』,『대한민국사 1945~2008』, 『대한민국50년사』, 『북한50년사』, 『거꾸로 읽는 한국사』(공저), 『거꾸로 읽는 통일이야기』 등이 있다.

 

 

임영태 ytlim2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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