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지난해 9월 14일 문을 연 뒤 190일 만에 멈춰섰다. 북측은 22일 오전 ‘상부의 지시’에 따라 철수했다. 낌새를 차리지 못한 남측은 당황한 기미가 역력하다. 북미관계 중재자, 촉진자에 머물렀던 문재인 정부가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로 등판할 수 있을지 속내가 복잡한 상황이다.

천해성 통일부 차관은 이날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긴급 브리핑을 열고, 북측의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철수 통보를 밝혔다.

북측은 이날 오전 9시 15분경 남북 연락대표 간 접촉을 통해, ‘상부의 지시에 따라’ 철수한다고 통보하고, 연락사무소 인력을 전원 철수시켰다. 이 과정에서 북측은 구체적인 철수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남북공동연락사무소 남측 소장으로 당시 현장에 있던 천 차관은 북측의 사전 움직임은 없었다고 밝혔다. 출입경 과정에서도 통상적인 절차는 그대로 진행됐고, “오늘뿐만 아니라 이번 주에도 근무하는 중에 어떤 분위기나 징후를 느낄만한 특별한 특이동향은 없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상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 북측의 일방적인 통보에, 남측은 아무런 낌새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구체적 이유도 모른 채 “북측이 조속히 복귀하여 남북 간 합의대로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정상 운영되기를 바란다”는 공허한 유감 표명만 발표했을 뿐이다.

북측은 왜 남북공동연락사무소에서 철수했을까. 북측의 진의를 파악하기 어렵지만, 대북제재에 얽매여 남북 간 합의에 진척을 보지 못하는 문재인 정부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것 아니냐는 해석만 가능하다.

북측 매체들의 보도에서 일단 확인된다. 공식적인 입장은 아니지만, 웹 사이트 <우리민족끼리>는 21일 한미워킹그룹을 거론하며, “남조선 당국이 동족이고 북남선언에 합의한 상대인 우리에 대한 미국의 제재압박책동에 추종하면서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다”고 힐난했다.

이어 22일에는 ‘2019년도 통일부 업무보고’를 두고, “북남선언에 합의한 당사자로서의 지위도 예의도 다 줴버리고 체면유지에만 급급하고 있다”며 “주견과 소신있게 처신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신년사에서 밝힌 조건없는 금강산 관광 재개와 개성공단 재가동에 호응하기는커녕, 자신들이 원하는 철도.도로 현대화 사업은 차치하고 개성공단 기업인의 방북 문제마저도 미국과 협의를 거치는 남측의 태도에 북측은 더는 바랄 게 없다는 판단이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철수를 결정한 이유로 풀이된다.

한 북한 전문가는 “개성공단 기업인이 간다는데, 이번에 무산되는 모습을 보면서 북한이 남한을 두고 아무것도 못 한다고 생각하는 것 아니냐. 그래놓고 이산가족이니 뭐니 셈법이 안 맞는 이야기를 하니 북한으로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는데, 더 있어야 무슨 소용이냐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오히려 북측은 문재인 정부의 당사자 역할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웹 사이트인 <메아리>는 22일 “중재자, 촉진자가 아닌 당사자 역할을 해야한다”며 “미국에 대고 요구할 것은 요구하고 할 말은 하는 당사자 역할을 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북미 간 비핵화 협상에 맞물려 있는 대북제재를 뚫으라는 직접적인 요구이다. 시쳇말로 “내 편이 돼라”는 압박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가 북측이 요구하는 당사자가 아닌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로서 내놓을 카드가 마땅치 않은 것이 현실이다. 베트남 하노이 2차 북미정상회담의 장밋빛 전망만 기대한 문재인 정부가 합의 무산 이후 뚜렷하게 내놓은 방향이 없다. ‘신한반도체제’ 실현은 결국 대북제재와 연계되어 있고, ‘스몰딜’을 ‘굿 이너프 딜’로 만들도록 북미를 설득하겠다는 전략만 있을 뿐이다.

미국 정부는 한미워킹그룹이라는 틀을 쥐고 남북협력사업에 하나하나 간섭하고 있고, 북측으로부터는 최선희 외무성 부상이 지난 15일 평양 주재 외신을 상대로 한 기자회견에서 말했듯이, ‘워싱턴의 동맹’이며 “남조선은 중재자가 아니고 플레이어”라는 힐난만 듣고 있다.

지난해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의 선순환 구조로 운전자론을 내세워 남북관계 개선을 통해 북미를 대화 테이블에 앉히는 데 성공했지만, 이제는 북미대화의 성과만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 한미동맹 속에서 북측 편만 들어줄 수는 없다.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 역할로 내놓을 해법이 만만치 않다.

2차 북미정상회담 합의 무산으로 북미관계가 풀려야 남북관계가 획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현실만 확인한 셈이다. 결국,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재개는 북미협상에 달렸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강 대 강의 말싸움으로 번진 북미관계 현주소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재개를 어둡게 하고 있다.

조성렬 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표면적으로는 남북 간에 제재가 유지되는 상황에서 협의할 일이 별로 없다는 북한의 판단이 작용한 것”이라면서 “북한은 조만간 대미 비핵화 협상 중단을 선언할 것 같다. 그에 대한 예비조치로 연락사무소 철수라는 남북관계에 대한 초보적 조치를 한 것 같다. 상황을 하나하나 끌어올리겠다는 의미”라고 짚었다.

“지금은 공이 북한으로 넘어왔지만, 미국에 다시 공을 던지는 상황을 만드는 것”으로 미측의 ‘장군’에 북측이 ‘멍군’으로 맞서면서 연락사무소 철수라는 카드를 활용했다는 해석이다.

북미 간 협상이 진척이 없으면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재개도 어려울 수 있다는 의미. 재개 시점은 내년 5월 이후라는 관측도 있다.

박창일 평화3000 운영위원장은 “우리가 미국을 설득하고 압박할 길은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미국이 필요하면 나올 것”이라며 “미국 대통령 선거가 내년 12월이다. 트럼프 입장에서 내년 4~5월에 핵 타결을 해야 선거에 유리하다. 내년 5월까지는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북미 간 힘겨루기 속에서 남북관계에 타격을 줄 수 있지만, 그렇다고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철수가 남북관계 악화로 이어지지 않으리라 보인다.

북측이 연락사무소 철수를 통보하면서, “남측 사무소의 잔류는 상관하지 않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정부도 23~24일 주말 동안 남측 연락사무소 인원을 기존보다 늘려 직원 9명과 지원시설 인력 16명 등 25명을 잔류시키기로 했다.

김일성 주석 생일인 4월 15일까지 북측이 남북 간 협력을 중단한다고 밝힌 것으로 일각에서 전해져, 이후 대화에 나올지도 주목된다. 내부 입장이 정리되는 4월 11일 북측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차회의 이후가 북미관계와 남북관계의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문재인 정부도 김연철 통일부 장관 내정자가 국회 청문회를 통과하면, 전열을 가다듬어, ‘창의적인 해법’ 구상을 통한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로 나설 가능성은 열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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