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운동 열심히 하시오.”
“평생 바른 말만 하고 살았는데, 이제 후배하고 기자 양반 왔으니 한 말씀 하세요” 하고 부인 이영자 여사가 보채자, 입을 우물쭈물하다가 나지막이 내뱉은 말이다.
김규철 선생. 얼마 전까지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서울본부 상임공동대표를 역임했으며 지금은 범민련 남측본부 서울연합 명예의장이다.
병상에 누운 지 15개월째. 2016년 11월 갑자기 각혈을 하며 쓰러졌다. 처음엔 담낭에 이상이 있다고 했는데 지금은 위암 말기 판정이 났다. 수차례 입원과 퇴원을 번갈아 했다. 2개월 시한부란다.
2년 전만 해도 그는 각종 집회에 빠짐없이 참석했으며, 마이크를 잡으면 특유의 경상도 목소리에 원칙적인 논리로 연설을 하곤 했다.
지난 6일 권낙기 통일광장 대표와 서울 중랑구 망우동에 위치한 서울시 북부병원을 찾았다. 그는 다소 못 알아볼 정도로 하얗게 세어진 머리카락에 살이 빠져 말라 있었다.
권 대표와 기자가 누워있는 그에게 다가가자 알고 있다는 듯 만면에 미소를 띠며 손을 펼쳐 악수 겸 잡으려 한다.
“병상에서도 뉴스만 봐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을 꼭 챙겼어요.” 사모님의 말이다. 하긴 그는 건강할 때 늘 자료를 보며 정세를 살폈다.
하노이 회담 합의 불발로 그가 안타까워 할까봐 권낙기 대표가 “이번에 합의 안됐지만 앞으론 잘될 거예요. 통일도 가까워졌어요”하고 미리 안심시키자, 그의 입에 미소가 깃든다.
김 선생이 말은 알아듣지만 말을 하긴 힘들단다. 그래서 사모님한테 몇 가지를 물었다.
사모님은 “평생 외길로 살아오다가 지난해 4.27 판문점회담 때 통일이 된다고 기뻐했는데 병상에 누워계셔 안타깝다”며 슬픈 표정을 짓는다.
그러더니 “결혼해서 단돈 10원 안 갖다 줬다. 다섯 번이나 감옥에 갔다. 내가 교편 잡았는데 저 양반 때문에 7년간이나 실직해 있었다. 7년간 과일장사 떡볶이장사 안 해본 게 없다”고 푸념조다. 사모님은 부산사범대를 나와 교편을 잡았다.
“결혼한 건 후회 안 되세요” 하고 기자가 묻자, 사모님이 “후회할 겨를이 어디 있었나요. 후회나마나 저이가 제 뜻대로 살아 영광이지요”하며 즉각 두둔한다.
그리고는 “친정 오빠가 저이를 소개해줬어요. ‘대한민국에서 제일 멋있는 내 친구를 동생한테 넘긴다’ 하면서. 평생 함께 사는 걸로 알았지” 한다.
사모님의 오빠는 이상배. 김규철과 요샛말로 절친이었다. 이상배는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다.
김규철과 이상배를 잘 아는 1934년생 동갑이 박중기 추모연대 명예의장을 다음날인 7일 만났다.
박 명예의장에 따르면, 이상배는 경남고와 서울법대를 나왔는데, 집이 가난해 고등학교 때부터 가정교사로 입주를 하며 독학하며 학교를 다녔다. 대학생 때는 태권도 사범을 할 정도로 스포츠맨이었다.
박 명예의장은 ‘김규철-이영자’ 결혼과 관련 오빠 이상배가 소개시켜줘 결혼한 건 맞지만 그 뒤엔 당시 인혁당 사건으로 수배돼 피신 중인 도예종 선생이 도와줬다고 귀띔했다.
김규철은 4남매 중 맏이로 부친과 삼촌이 모두 좌익운동을 했으며, 모친도 삐라 살포 등을 했다. 부산대를 나와 교사하며 교원노조 활동을 했는데, 5.16쿠데타 후 해고됐다.
김규철도 인혁당 사건 관련자인데, 6.3사태 때 안 잡히고 피신했다. 이후 단독범으로 구속됐다.
이때를 회상하며 박 명예의장은 “김규철이가 인혁당 사건 때 피신했다가 나중에 단독범으로 잡혀 (인혁당 사건) 피해를 줄였다”고 안도했다.
박 명예의장은 김규철에 대해 “이론공부를 많이 했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 교조적이라 하는데 본인은 원칙주의라 한다”면서 후자에 방점을 찍었다.
그는 “김규철은 사람이 좋아 친구가 폭넓었다. 결코 쉬는 사람이 아니다. 옳은 걸 남기려 노력했다”며 평했다.
사모님과 이런저런 얘기가 길어지자 김규철 선생이 끼어들려고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입을 움찔움찔 한다. 그러나 소리가 여의치 않다.
이때 김을수 선생 등 민자통 회원들이 병문안을 왔다. 좁은 병실 안이 부산해졌다. 으레 병문안이라는 게 새 문병인이 오면 자리를 비켜줘야 하는 법.
기자는 병실을 나서면서 권낙기 대표에게 김규철 선생은 어떤 분이냐고 물었다.
권 대표는 “6.15남측위 서울본부 상임공동대표를 함께할 때 이제 후배들을 위해 함께 빠지자고 했을 때 두말 않고, 묻지도 않고 ‘그럽시다’ 하고 함께 사임했다”며 후배사랑이 남달랐다고 기억했다. 그러면서 두 가지를 배웠다고 덧붙였다.
“김 선생은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항상 바른말을 하셨다. 또한 항상 독서하고 늦은 나이에도 컴퓨터를 배워 자료를 찾으며 늘 공부했다.”
그러면서 권 대표는 “좋은 시대가 올 텐데, 더 오래 사셔야 하는데...” 하며 말을 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