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일 / 전 한신대학교 교수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눅 23:34)

슬라보에 지젝의 책『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인간사랑, 2004)는 신약성경 누가복음 23장 34절에 나오는 예수의 십자가 상 7언(架上七言) 가운데 하나이다. 이 말 한 마디가 지젝의 책 한 권이 되었다. 어렵다는 게 정평이다.

그러나 전혀 어렵지 않게 이 말을 이해하는 한 가지 길이 있다. 그것은 지금 한국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각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합동연설회를 보면 이 말을 이해하는 데 하나도 어렵지 않다.

한마디로 말해서 지금 한국당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 태극기 부대 사람들이다. 자기들의 귀에 듣기 좋아 하는 사람들의 말만 듣고, 듣기 싫은 소리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고함을 지르고 행패를 부린다. 심지어는 비상대책위원장의 말마저 ‘빨갱이’ 하면서 가로 막는다. 그러나 당의 지지율은 날개 없이 추락하고 있다. 자기들이 하는 짓을 자기들이 모르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하는 짓 자체를 모르는 집단을 그리는 대표적인 영화가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도그빌’이다. 천진무구한 무균질의 청교도들만 모여 사는 미국의 한 마을 도그빌에서 얼마나 끔직한 범죄가 저질러지는가를 막상 그 공동체 안에서는 모른다는 것이 이 영화의 주제이다. 갱단 두목의 딸 그레이스가 이 마을에 숨어 들어오자 밤마다 이 마을 사람들이 돌아가며 성폭행을 자행한다. 그러나 일요일만 되면 멀쩡하게 교회에서 찬송 부르고 기도하는 이 마을 사람들은 자기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는, 그래서 이 마을 자체를 폭파시키는 방법 밖에 없다는 것이 그레이스의 결론. 혁명가 아버지는 바로 이런 공동체 폭파범이다. 딸 역시 아버지의 길을 따른다.

청교도 정신이란 약자에게는 한없는 자비를 베풀지만 신 자체는 고난의 종이라는 기독교 정신을 따르고 실천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레이스는 이 틀마저 죄악이라고 규정, 기독교적 가치관 자체를 폭파해 버린다. 신은 고난의 종이라는 이것마저 신의 교만이라는 것이고, 기독교가 이런 죄악 자체를 아직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에 이런 그레이스의 기준이라면 한국당은 백번 만번 폭파의 대상이고도 남음이 있다. 해체 수준이 아니고 폭파의 대상이란 말이다. 이들이 지금 광주를 향해 쏟아 내고 있는 말과 행동은 폭파 아니고는 답이 없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지젝은 ‘알지 못하는 것’과 ‘알려고 하지 않는 것’ 사이를 구별하고 있는데, 지금 한국당은 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이에서 오락가락하고 있다.

지금 한국당이 광주에 대해 자행하고 있는 죄악은 광주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자 하지 않는 죄악’이다.

지젝은 ‘알지 못하는 것’과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의 경계는 모호하기 때문에 그것을 도착시켜버려 자기들의 죄악을 감추려 한다고 지적한다. 바로 한국당 안의 사람들이 이런 도착증에 걸려 있다.

우리 사회의 이런 도착증을 적나라하게 그린 영화가 ‘올드 보이’이다.

두 종류의 근친상간의 범죄형이 어떻게 이런 도착증에 빠져들고 있는 가를 영화에서 보자. 한 명은 자기 누이와의 근친상간 행위를, 다른 한 인간은 자기 딸을 근친상간하고도 잘못을 모르는, 두 종류의 도착증을 영화는 그려내고 있다.

자기 누이를 근친상간한 자는 자기가 잘못이라는 것을 아는 것에서 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려고 자기는 범상한 존재라는, 그래서 다른 인간들이 같은 행동을 하면 잘못이지만 자기는 신격화된 존재이기 때문에 죄가 아니라고 즉, 자기가 아는 것을 자기 속임을 통해 극복하려고 한다. 제왕들이 제왕무치(帝王無恥)라고 하여 어떤 잘못도 허용되는 것으로 면피하려는 태도이다.

잘못을 안다, 그러나 나는 다른 존재이다, 라고 하는. 자 박정희, 박근혜, 그리고 이명박, 전두환, 그 무리들 태극기 부대들이 지금도 거리에서 “박근혜는 죄가 없다” 심지어는 “최순실에게 무슨 죄가 있나”고 외치는 무리들. 모두 손석희의 거짓 보도 때문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다른 한 명은 자기 딸과 근친상간을 한 후 그 향락을 결코 포기할 수 없어서 자기 딸이라는 사실 자체를 지우려 최면술사의 도움을 받아 자기가 한 짓을 자기도 알지 못하고 한 짓이라고 자기 최면을 건다.

이 자는 근친상간이 잘못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향락 자체를 포기할 수 없어서 최면술로 성적 대상이 자기 딸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최면을 통해 믿으려고 한다. 이들은 법정에서 ‘나는 내가 하는 일 자체를 알지 못했다’고 강변할 것이다. ‘모르쇠’라는 인간들. 마치 부시 정부의 럼스펠드가 전쟁 범죄 청문회에서 “나는 아는 것을 알지 못했다”고 하듯이.

과연 한국당은 지금 이 두 부류의 인간이 쓰는 수법을 다 쓰면서 광주를 향해 말의 향연을 벌리고 있다.

‘광주 학살’이라는 자기들이 저지른 죄악에 대해서 근친상간을 한 인간들 같이 자기 최면술에 걸려 그런 죄악을 저지른 것 자체를 알지 못한다고 하거나, 잘못을 알고는 있었지만 스스로 무슨 잘못을 저질러도 감히 누가 나에게라고 하듯이 자신을 제왕적 자리(혹은 신격 위치)로 매김하려 한다.

한국당의 행태를 지금 보고 있노라면 ‘올드 보이’를 다시 보는 듯하다. 이런 신판 올드 보이는 전두환으로부터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내가 잘못한 것 다 알아, 그러나 나는 그런 인간들 위에 있는 준(準) 신적 존재야 하는 착각을 지금 전두환과 박근혜는 똑같이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논리는 그들 공동체 안의 논리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스스로 아주 잘 하고 있다고 하는 데도 지지율은 계속 하락하고 있다.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괴델의 불완전성 증명이란 예수의 마지막 말을, 십자가 상의 말을 수학적 언어로 설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체계든지 그 체계 안에서는 잘잘못을 판가름할 수 없다.

소크라테스는 마지막 독배를 마시면서도 “악법도 법이다”라고 했다. 유신시대에 이 말이 많이 응용되었다. 소크라테스의 말을 한 번 예수의 말과 대비해 생각해 보자.

저 악법도 그 자체 안에서는 악법인 줄 모른다. 그래서 그런 악법이 있는 사회든 국가든 그 악법 때문에 망할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말이나 예수의 말이나 자기를 죽이던 자들이 결국 자기들이 하는 일 자체를 모르기 때문에 망할 것을 예시한 저주의 말이다.

그래서 악법도 법이니 지키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법 그 자체 안에서는 악법인 줄 모르기 때문에 그 악법을 지키는 자들은 망할 것이라는 직격탄이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로 소크라테스의 말을 읽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태극기 부대여, 부디 태극기 높이 들고 전진 또 전진해 주기를 바란다. 총선에서 대선까지 전진해 주기 바란다. 그대들 말 듣기 좋아 하는 당대표를 부디 뽑아 올드 보이들이 되어주기 바란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때에 한 개인이나 당이 아니고 나라 전체의 구성원들이 자기들이 하는 일을 자기들이 모를 때에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런 적이 있었다. 바로 구한말 때에. 그래서 나라가 망했다. 벌레는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른다. 그래서 새가 벌레를 잡을 수 있다. 새는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른다. 그래서 포수가 새를 잡는다.

교만해져서 자기 이익과 향락에 빠질 때에 자기가 하는 일을 스스로 모른다. 마치 자기 누이를 근친상간한 자와 같이, 다른 한 편 자기의식을 마비시킴으로 자기가 아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한 자기 딸을 근친상간한 자와 같이.

저 한국당만 ‘올드 보이’라면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본질은 나라 전체가 그럴까봐 걱정이다.

지금 미국을 보라, 올드 보이의 도를 넘은 도그빌 사회가 되었다. 저 청교도들의 집단을 지젝을 통해 다시 보라. 그리고 우리 현실을 진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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