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영원히 자유롭도록 선고 받은 존재이다 (사르트르)


 학살 2
 - 김남주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
 경찰이 전투경찰로 교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전투경찰이 군인으로 대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미국 민간인들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도시로 들어오는 모든 차량들이 차단되는 것을
 
 아 얼마나 음산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계획적인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낮이었다
 
 낮 12시 나는 보았다
 총검으로 무장한 일단의 군인들을
 낮 12시 나는 보았다
 이민족의 침략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낮 12시 나는 보았다
 민족의 약탈과도 같은 일군의 군인들을
 낮 12시 나는 보았다
 악마의 화신과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아 얼마나 무서운 낮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노골적인 낮 12시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도시는 벌집처럼 쑤셔 놓은 붉은 심장이었다
 밤 12시
 거리는 용암처럼 흐르는 피의 강이었다
 밤 12시
 바람은 살해된 처녀의 피 묻은 머리카락을 날리고
 밤 12시
 밤은 총알처럼 튀어나온 아이의 눈동자를 파먹고
 밤 12시
 학살자들은 끊임없이 어디론가 시체의 산을 옮기고 있었다
 
 아 얼마나 끔찍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조직적인 학살의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낮이었다
 
 낮 12시
 하늘은 핏빛 붉은 천이었다
 낮 12시
 거리는 한 집 건너 울지 않는 집이 없었다
 무등산은 그 옷자락을 말아 올려 얼굴을 가려 버렸다
 낮 12시
 영산강은 그 호흡을 멈추고 숨을 거둬 버렸다
 
 아 게르니카의 학살도 이리 처참하지는 않았으리
 아 악마의 음모도 이리 처참하지는 않았으리


 1980년 5월에 나는 모 여고에 교생 실습을 갔다. 저 멀리 남도에서 온갖 흉흉한 소식이 들려오던 음산한 봄날이었다.

 수업 시간에 무슨 얘기를 하다고 나도 모르게 ‘김재규 장군’이라는 말을 했다.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다. 아차! 나도 모르게 속으로 신음했다. 한 여학생이 의아한 눈빛으로 질문을 했다. ‘왜 김재규를 장군이라고 하세요?’ 순간 나도 모르게 대답했다. ‘그 사람 장군 아냐?’ 학생들의 눈빛이 안정을 되찾는 듯했다. 나는 뭐 그런 걸 질문하느냐는 듯이 수업을 계속했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지금도 그 당시를 회상하면 가슴이 서늘해진다. 그때는 말 한번 잘못했다가 모 기관에 끌려가 잘못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김재규의 ‘박정희 시해’가 어떤 역사적 평가를 받을지 모르나 그 당시 많은 대학생들이 김재규에게 장군이라는 호칭을 붙였다.

 교생 실습이 끝나고 돌아온 교정은 완전히 딴판으로 변해있었다. 함께 어깨 걸고 몰려다니며 구호를 외치던 목소리들은 어디서도 들을 수 없었다. 조용한 분위기가 괴기스러웠다. 그렇게 4학년을 보내고 졸업 후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나는 학창 시절을 박정희와 함께 보냈다. 그가 권력을 쥔 후 국민학교(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죽음으로 권좌에서 물러난 후 나도 학교를 떠났다.

 고등학교 1학년 가을 어느 날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느 날처럼 신문을 사 보았다. 1면에 실린 고딕체의 대문짝만한 제목, ‘국회 해산’ 헉! 이게 무슨 말인가! 국회는 국민의 대표 기구라고 배웠는데, 해산이라니? 그것이 10월 유신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수업 시간에 사회 선생님은 대놓고 공화당(그 당시 박정희의 여당)을 비웃었다. ‘공화당은 밤을 좋아해!’ 대통령의 연임금지 조항을 삭제하고 3선을 허용하는 개헌을 밤에 여당 국회의원만 모여 국회 별관에서 통과시킨 걸 말하는 것이었다. ‘선생님이 저런 말을 해도 되나?’ 하고 속으로 생각했지만 서늘한 기운이 가슴을 가로질러 지나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단히 용기 있는 선생님이셨다. 아마 우리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시고 싶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졸업 후 철도 공무원으로 근무할 때는 꿈에 박정희 대통령이 죽는 꿈을 꾸었다. 막연하지만 내 깊은 무의식에서는 질식할 듯한 사회 분위기를 느꼈던 것 같다.

 대학에 들어간 후 교양 체육 시간에 교수님이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을 소개해 주었다. 에리히 프롬의 저서 ‘건전한 사회’ ‘자유로부터의 도피’ 등을 읽다가 그가 인용한 마르크스 글들이 내 가슴에 쿵! 와 닿았다. 충격이었다. 마르크스가 이런 사람이었던가! 너무나 뜨거운 인간!

 하지만 마르크스 저서는 읽지 못했다. 지도 교수님이 마르크스를 공부해보고 싶다는 나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 지도 교수님은 ‘그건 너무나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나도 막연한 어떤 공포 속에 마르크스를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았다.

 만일 그때 마르크스 글들을 읽었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분명히 나는 그때와는 전혀 다른 삶을 꿈꾸었을 것이다. 단지 ‘안락한 직업’을 택해 국립 사대를 간 내 생각이 송두리째 바뀌었을 것이다.  

 우연히 ‘독서 모임’에 들어가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고 새로운 생각을 했지만 내 삶을 새롭게 구성하지는 못했다.   

 자유를 모르는 삶. 그렇게 30대 중반이 되었다. 세상에 맞춰 사는 삶, 그건 꼭두각시의 삶이다. 노예의 삶이다.  

 자유가 없는 삶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무작정 그만 둔 직장. ‘자유인’이 되어 만난 마르크스, 그는 ‘자유로운 개인의 공동체’를 꿈꾸었다. 나는 그런 세상이 언젠가는 꼭 오리라는 것을 믿는다. 인류사 전체로 보면 그런 사회를 이뤘던 원시공동체 사회가 개인이 자유를 잃은 계급사회보다 훨씬 더 길다. 인간이 좀비가 되어가는 지금의 사회는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자유니까(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시를 공부하러 갔다가 김남주 시인을 만났다. 수강생들과 함께 김남주 선생님의 ‘학살 2’를 낭송했다.   

 선생님이 감옥에 계실 때 5.18 소식을 들으셨다고 한다. 즉석에서 쓰신 시라고 한다. 현장에 계셨던 것처럼 그 당시 상황이 생생하다.

 ‘5월 어느 날이었다/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밤 12시 나는 보았다/경찰이 전투경찰로 교체되는 것을/밤 12시 나는 보았다/ 전투경찰이 군인으로 대체되는 것을/밤 12시 나는 보았다/미국 민간인들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밤 12시 나는 보았다/도시로 들어오는 모든 차량들이 차단되는 것을’
 
 ‘아 얼마나 음산한 밤 12시였던가/아 얼마나 계획적인 밤 12시였던가’
 
 ‘낮 12시 나는 보았다/총검으로 무장한 일단의 군인들을/낮 12시 나는 보았다/이민족의 침략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낮 12시 나는 보았다/민족의 약탈과도 같은 일군의 군인들을/낮 12시 나는 보았다/악마의 화신과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아 얼마나 무서운 낮 12시였던가/아 얼마나 노골적인 낮 12시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아 게르니카의 학살도 이리 처참하지는 않았으리/아 악마의 음모도 이리 처참하지는 않았으리’

 최근 몇몇 국회의원이 ‘5.18’을 모독했다고 한다. 그래서 ‘역사는 끊임없는 현재와 과거의 만남(카)’이다. 그들은 어쩌다 ‘자유’를 잃어버렸을까. 그들은 인간에게 자유는 숙명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그들이 뜨거운 자유를 단 한번이라도 느껴보았다면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저렇게 모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김남주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소는 좁은 방에 10년을 가둬놓으면 죽는데 사람은 산다.’ 인간은 자유를 향한 뜨거운 꿈으로 그런 지옥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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