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미경 / 농부

 

살구나무를 찾아서 살구나무 동산을 만들고 있다. 올해는 살구나무 마을을 만들려고 한다. 올해 우리 마을에는 많은 살구나무들이 새로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인데, 나는 그것이 북측 회령 백살구나무이기를 바래서, 그것을 구하려 안타깝게 뛰어다니고 있다.

사라진 살구나무를 찾으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살구나무를 잃어버렸듯이 아주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무엇을 위하여 그 많은 것들을 놓아버린 것일까? 여기 연재할 글들은 살구나무처럼 우리가 잃은 것들, 잊은 것들, 두고 온 것들에 대한 진지한 호명이다. / 필자

 

 

부산, 진해, 제주, 그리고…

일전에 욱일기로 인해 법석 끓었던 일이 있었다. 작년 10월, 제주해군기지에서 열리는 국제관함식에 일본 자위대 군함이 ‘욱일기’를 달고 입항한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일어난 일이다. 전국, 각계각층, 남녀노소, 너나할 것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비분강개로 입을 모았고, 희한한 것은 전에 없이 매스컴들이 일제히 나팔을 불어주었던 것이다. 들끓는 여론에 밀려 정부는 욱일기를 허용할 수 없었고, 일본군함은 결국 불참을 통보하여 제주관함식은 ‘무사히’, ‘탈없이’ 열리게 되었었다.

그 일이 그렇게 되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두 가지를 생각했다. 하나는 사건의 이면에 대한 것이요, 또 하나는 욱일기를 향해 모처럼 표출된 집단적인 반감에 대한 것이다.

사건의 이면이란 이런 것이다. 마치 처음이기라도 한 듯이 모두들 펄쩍 뛰었지만, 일본 자위대군함이 욱일기를 뻐젓이 달고 우리 항구에 들어온 건 이미 20년 전의 일이다. 1998년과 2008년 국제관함식이 열린 부산항에서였고, 2016년 미국, 캐나다 등 미동맹 6개국이 벌인 대잠훈련 때 진해항에서였으며, 그 외 알려지지 않은 것도 10여 차례나 된다고 한다. 물론 그 때에도 눈밝은 사람들은 분노를 표하고 문제를 제기했으나, 어떤 매스컴도 받아 읊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분개해야 할 마춤한 기회를 놓쳐버리고, 이렇게 늦게야 비로소 뒷북을 치게 된 것이다. 그럼 이번엔 왜일까? 사실 방점은 욱일기가 아니라 국제관함식, 그리고 제주에 있다.

국제관함식이란, ‘세계 해군을 초청해 열리는 전 세계 해군의 축제’라고 해군은 주장하지만, 침략의 대명사인 핵항공모함까지 끌어들이는 행사가 무슨 축제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미군 핵항모, 일본 해상자위대 군함을 비롯해 45개국 함정 50여 척에, 항공기 20여 대가 참여하고 외국 장병 1만여 명이 방문하는 역대 최대 규모의 제주 국제관함식은, 사실상 제주해군기지의 출범을 국제적으로 확정하는 대외적 선포식이었을 것이다. 대내적으로는 구럼비를 지키려는 강정주민들을 폭력적으로 제압하며 둘러쓴 ‘민군복합형관광미항’이라는 가면을 공식적으로 벗어 던지는 행사이기도 했을 것이다.

2016년에는 제주의 여론악화를 우려해 제주해군기지로 예정되었던 대잠훈련 폐막식을 진해군항으로 변경했었다. 그 일로 미루어 볼 때 욱일기 소동은, 제주해군기지의 핵항모, 핵잠수함 입항을 확정하는 민감한 행사를 모양 빠지지 않게 거행하기 위한 시선기만용 방패였다고 보여지기도 한다. 당연한 결과로, 관함식과 핵항모의 입항을 반대하고, 제주해군기지를 반대하는 강정사람들의 해상시위와 격렬한 외침을 우리들 대다수는 모르고 말았던 것이다.

관함식 행사가 내걸었던 구호는 ‘제주의 바다, 세계평화를 품다’였다. 그런가? 제주해군기지와 관함식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기 위해 솜씨 있는 카피라이터들의 활약이 필요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기만적인 분장을 벗겨내고 실상을 들여다보면, 제주의 바다가 품은 건 핵오물이요, 전쟁의 씨앗일 것이다.

어쨌든, 개운치 않은 이면을 들여다보면서도, 모처럼 표출된 욱일기에 대한 집단적 반감은 오랜 가뭄 끝에 쏟아진 소나기처럼 시원스러웠다. 그들이 1876년 강화도에 침략의 첫 발을 들이밀었을 때부터, 아니 저 임진년 부산포에 찍은 침략의 첫 발자국으로부터 오늘날까지, 켜켜이 쌓여 단단한 퇴적물로 굳어진 집단기억의 분출이었을까? 욱일기가 무엇이길래 잠자는 것처럼 보였던 우리의 오래된 기억을 흔들어 깨운 것일까? 이 대목에서 우리는 ‘상징’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상징1 : 욱일기

“욱일기는 메이지 시절 일본군의 군기로 채택돼,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반도 병탄, 만주사변과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지는 군국주의 침략의 역사를 상징해 왔다. 욱일기는 1945년 일본 패전 이후 군대가 해체되며 사용이 금지됐으나, 자위대가 창설된 뒤 되살아났다. 옛 일본 군대의 욱일기는 가운데 태양에서 밖으로 퍼지는 광선이 16개였으나, 육상자위대는 이를 수정해 8개로 줄였다. 그러나 해상자위대는 과거의 16개 광선을 그대로 채택했다. 이런 차이는 육상 자위대의 경우 옛 일본군 출신의 참여를 배제한 반면, 해상 자위대엔 옛 일본 해군 출신 인사들의 참여가 허용된 사정과도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745360.html#csidx1adf92003d4d0ebb61f6e10caebc44b)

2016년, 욱일기를 단 일본자위대군함의 진해항 입항을 다룬 한 신문기사의 일부이다. 욱일기는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이다. 이 간단한 문장 속에 새겨져 있는 수많은 의미를 우리는 안다.

그것은 척양척왜 보국안민의 기치를 들고 봉기했던 동학군의 피로 물든 우금치에서 날리던 깃발이고, 조국을 떠나 맞아 죽고 얼어 죽고 굶어 죽으면서도 독립에의 일념으로 일제와 맞섰던 수많은 선열들이 더운 피를 뿌린 만주땅에서 휘날리던 깃발이며, 우리 형이며 오빠들, 우리 누이며 언니들을 징병으로 징용으로 성노예로 내몰던 총 끝에서 나부끼던 깃발이다.

그것은 땅끝까지 쫓겨간 동학군의 목을 자르던 시퍼런 작두 위에서 펄럭이던 깃발이고, 굶주린 우리농민들이 피땀으로 일군 나락을 빼앗아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군산항을 뒤덮은 깃발이며, 황국의 신민됨에 감사하며 ‘천황을 위해 사꾸라처럼 지라’는 연설과 매문으로 동족을 죽음으로 내몰던 친일문사들의 혀끝에서 나불대던 깃발이다. 그 무수한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는 하나의 도안, 상징이란 그런 거다.

상징2-1 : 국화

하지만 상징을 읽어내는 일이 간단한 건 아니다. 그것이 문학의 영역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욱일기를 보노라면, 단 한 조각의 상상도 허용치 않는 그 단순무지막지한 도안은, 그 너머에 음험하게 도사린 한 송이 국화와 나란히 겹쳐진다. 16개의 광선 너머에 도사린 16개의 꽃잎으로 이루어진 노오란 국화, 그리고 끝끝내 배족의 삶을 살았던 한 시인과 그 시인이 뿌려놓은 씨앗, 그의 시를 떠올리게 된다. 시인은 사라졌어도 씨앗은 시퍼렇게 살아, 책에서, 인터넷 화면에서, 아이들 교과서에서, 오늘도 꾸준히 상징의 전복을 수행 중이다.

김환희 선생, 그의 책을 처음 읽은 것이 2006년이었으니, 그 5년 전 여름, 창비게시판을 후끈하게 단근질한 절호의 현장은 한참 놓친 셈이었다. 하지만 늦게라도 그의 책을 접한 것을 당시는 책귀신의 가호로 여겼거니와, 조악한 제본 탓이겠지만, 책이 낱장으로 떨어져나갈까 노심초사하며 수 회를 거듭 읽어 온 지금에 와서도 그 심정만은 변하지 않는다. 내가 학문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학문하는 사람의 심지가 모름지기 어떠해야 하는가를 일찍이 알려준 이가 임종국 선생이었다고 한다면, 김환희 선생, 그는 그 두번째에 이름을 올렸다. 친미와 반공으로 친일의 원죄를 유폐시킨 이 사회가 이단시하는 묵시록적인 금기에, 드물게도 두 선생이 반박불가한 정교한 논리와 통찰의 칼을 들이댔기 때문이다.

이것은 〈국화〉에 관한 이야기이다. ‘국화’ 하면 자동으로 떠오르는 〈시〉에 관한 이야기이고, 선생의 말을 그대로 옮긴다면, 〈종천순일(從天順日)의 상징, '노오란' 국화〉에 관한 이야기이다.

"국화의 꽃잎이 질서정연한 배열로 퍼져나가는 방식으로 인해 이 꽃은 본질적으로 태양의 상징이 되며, 따라서 장수(長壽)와 불멸(不滅)을 뜻한다. 국화꽃이 일본 황실의 문장(紋章)이 된 이유도 그러한 특성 때문일 것이다. 16개의 꽃잎을 지닌 국화꽃으로 된 일본 문장(紋章)엔 태양의 이미지와 나침반 지침면의 이미지가 겹쳐져 있는데, 그 중심에서 천황이 세상을 통치하고, 우주의 모든 방향을 집약한다."

선생이 인용한 프랑스의 상징사전에 적혀있다는 글이다. 서구에서 발간되는 각종 세계상징사전들도, 국화꽃은 일차적으로 태양을 상징하는 꽃이며 일본왕실과 제국주의를 대표하는 상징물로 소개하고 있다 한다. 일본문화에서 국화는 천조대신 아마테라스의 꽃으로서 만세일계를 내세우는 일본왕실을 상징하는 꽃이다. 14세기 이후 ‘한 송이 황국’은 왕실의 문장으로 신사, 신궁, 학교, 관청들의 건물과 휘장에, 그리고 병사들의 총에까지 새겨졌고, 여권표지를 장식하며 국가를 상징하는 꽃이 되었다.

▲ 일본신사의 황국문양과 소총, 여권의 국화문양.

일본과 서구에서 보는 국화의 상징이 그러하다면, 우리 문화에서 국화가 갖는 상징은 어떤 것인가? 우리의 전통에서 국화는 군자의 꽃이다. 국화를 일컫는 ‘오상고절’이라는 말은 ‘서릿발 속에서도 굴하지 아니하고 외로이 지키는 절개’라는 뜻으로, 선비의 고결한 지조를 상징하며 당당히 사군자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또한 전통 민화에도 모란처럼 흔하게 등장하는 꽃으로, 국화의 무수한 꽃잎은 집안의 기쁨과 즐거움을 상징했으며, 층층이 그린 국화꽃은 장수를 의미했다. 우리 문화에서 국화는 선비의 꽃으로 고상한 품위와 고결한 지조와 장수를 상징하는 꽃인 것이다.

1915년에 태어나, 평생 일본어를 국어로 사용하고, 일장기를 국기로 생각하며, 일왕을 하늘로 모셔온 서정주의 의식을 지배했던 국화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가 「국화 옆에서」를 집필했다고 알려진 1946년은, 그의 친일문학 행각이 절정에 달해있던 때, 일본군복을 입고 종군기자로 전장을 누비며 「마쓰이히데오 송가」와 같은 ‘불멸의 친일시’를 열정적으로 써대던 1944년에서 불과 2년이 지나있던 해이다.

상징2-2 : 서정주의 국화

김환희 선생은, 치밀하게 ‘서정주의 국화’를 해부한다. 그의 국화는, 선생이 제시하는 풍부한 자료와, 역사와 신화를 아우르는 깊은 통찰과, 숨막히게 전개하는 정교한 논리 아래서, 그와 그를 하늘로 모셔온 유력한 학자들이 두껍게 덧칠해온 화려한 치장을 벗고 그 적나라한 실체를 드러낸다.

선생은 서정주의 국화가 일본의 천조대신 〈아마테라스〉이자, 당대의 〈일왕〉임을 밝혀낸다. 그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선생이 보여주는 수많은 것들 중 핵심은, 단연 일본제국주의의 상징인 태양신 아마테라스와 그 어머니 이자나미에 관한 창세신화이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곡진하게 전개하는 이야기를 숨죽여 따라가다 보면, 문리가 환히 트이는 듯한 개안의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 거울 앞에서 기도하고 있는 일본 신도 (출처: 도서 국화꽃의 비밀)

서정주의 국화는 하필이면 왜 한 송이 황국인 것인지, 소쩍새, 울음, 천둥, 먹구름, 거울, 무서리와 같은 시상과 시어는 어디에서 온 것이며,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무엇을 닮은 것인지, 국화꽃은 왜 누님이며, 작자가 동생을 자처하는 연유는 무엇인지, 뒤안길에서 돌아온 누님이 선 곳이 왜 하필이면 거울 앞이고, 그 누님이 왜 하필이면 40대인 것인지, 그리고 국화를 밝히기 위해 거론한 국화가 아닌 시들, 「일본 산들의 의미」, 「목화」, 「누님의 집」, 「견우의 노래」와 같이 난해한 그의 시들이, 모두 동일한 맥락 하에서라면 아주 쉬운 시가 된다는 사실까지를. 그것은 실로 모골이 송연해지는 경험이다. ‘서정주의 국화’는 바로 ‘욱일기’였던 것이다.

이 모든 내용들을 다 이야기한다는 것은 주제넘은 일이 될 것이다. 내 능력으론 요약전달할 수도 없거니와, 요약으로는 결코 알아질 수 없을 테니까. 읽을 수 밖에.

선생에 의하면, 서정주가 강조하는 시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소량으로 정선해 가지는 언어의 그늘에 함축해 지니는 바의 무진한 암시력”이라 한다. 뭔 소린가? 마치 일어문장을 직역해놓은 듯한 어려운 문장이다. 풀어 말하면 자신의 시에는 ‘암시’와 ‘복선’이 많다는 말이고, 표현한 글자대로만 알아들어서는 안된다는 고백이다. 그는 상징을 비틀고, 은폐하고, 조작하여 마침내 전복된 상징을 만들어내는데 평생을 바쳤다.

당자가 언급한 ‘암시력의 힘’에 대해서라면 다른 누구에게 물을 필요도 없다. 스스로 체험한 것이거니와, 청소년기에 한 편의 시가 일으킨 상징의 전복은 때때로 혼돈을 불러왔다. 굳건하게 자리잡은 ‘국화=누님’이란 등식은 사군자를 배우게 되었을 때부터 혼란을 일으켰으니, ‘매’와 ‘난’과 ‘죽’은 이해가 되는데 국화는 낯설었다. 국화가 왜 거기 들어가는 거지? 국화는 누님 아냐? 국화에 관한 한 나의 의식은 일본인의 그것이었던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알아버린 지금에 와서도, ‘국화’하면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놀랍게도 누님이요, 서정주란 이름이다. 의식을 지배하는 상징의 힘이란 그런 거다.

상징3-1 : 사꾸라

일본문화에서 국화가 왕실의 상징인 귀족들의 꽃이라면, 일반대중들의 꽃은 사꾸라다. 국화가 14세기부터 국가를 대표하는 꽃으로 출현했다면, 사꾸라는 1천 년을 두고 일본인들의 삶에 자리잡은 꽃이다. 9세기부터 일본 고유의 것을 찾기 시작한 추세를 타고 선택되어, 에도시대에 와서는 많은 쇼군들의 독려에 의해 온 나라로 번져갔으니, 결국 자타가 공인하는 일본의 나라꽃이 되었다.

사꾸라는 오랜 세월 일본 대중의 삶에 깊이 침투하여 다양한 이미지로 축적되면서 일본 특유의 정체성을 형성해왔다. 전쟁 전, 초등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의 첫 문장은 ‘피었다 피었다 사꾸라가 피었다’였고, 수많은 노래와 문학의 소재로 일본인들의 희로애락을 함께 하며 그들 삶의 지울 수 없는 배경이 되었다. 이런 연유로 일본뿐 아니라 세계각국에서도 사꾸라=일본이라는 등식이 각인되었으며, 일본을 사랑하고 동경했던 반 고흐도 사꾸라와 후지산으로 일본을 그려냈다.

일본문화에서 사꾸라는 기본적으로 쌀과 여성을 상징하고, 사랑과 젊음과 생명을 의미하지만, 역설적으로 무상과 죽음과 환생을 상징하는 것도 사꾸라다. 바로 이 ‘죽음’을 전면에 내세워 정치적 상징으로 조작하고 이용한 것이, 메이지유신으로 그 진군을 시작한 일본군국주의다. 일본군국주의는 침략전쟁에 사꾸라를 끌어들여 영토 확장의 상징으로,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사꾸라는 식민지에 이식되어 일본제국령을 알렸고, “천황을 위해 사꾸라 꽃잎처럼 지라”는 구호는 젊은 생명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가미카제 특공대원들은 가슴에 사꾸라 가지를 꽂고, 사꾸라 꽃을 흔드는 여학생들의 전송을 받으며 죽음을 향해 돌진했다. 화려한 사꾸라 축제는 군국주의 군대와 함께 행진하였고, 정치군사적으로 변질된 이데올로기로, 국군주의의 상징으로, 일본의 정신으로 각인되었다. 일본의 사꾸라는 자연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속죄하지 않는 일본군국주의의 사꾸라는 결코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상징3-2 : 사꾸라 축제

바로 그 사꾸라가 오늘날 우리 강산을 뒤덮은 사꾸라다. 우리나라 3대 사꾸라 축제를 꼽으라면 주저할 것도 없이 대뜸 집어낼 수 있으니, 진해군항제요, 전군가도 백리길이요, 여의도 윤중제다. 이것은 ‘그’ 사꾸라가 ‘이’ 사꾸라일 수밖에 없는 사실에 대한 움직일 수 없는 증거로 된다. 바로 그 세 장소에서 하나같이 어른거리는 것이 일본군국주의의 망령이다. 「벚꽃의 비밀」의 저자 류순열은 “사꾸라엔 역사의 악연이 숨어있다. 사꾸라는 한국과 일본의 악연을 잇는 역사의 외나무다리와 같다” 고 서술한다.

진해는 우리에겐 이순신 장군의 전승지이지만, 일본에겐 러일전쟁의 전승지이다. 일본은 러일전쟁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산꼭대기에는 ‘일본해 해전기념탑’을 세우고, 항구는 군항으로 만들었으며, 도로는 욱일기 문양으로 건설하고, 10만주의 사꾸라를 심었다. 이것이 ‘진해군항’과 ‘사꾸라 축제’의 탄생이다. 해마다 떠들썩하게 열리는 진해군항제는 무엇을 기념하는가? 이순신 장군의 동상은 욱일기의 한 복판에 처연히 서있지만, 장군을 기린다는 진해군항제의 주인공은 러일전쟁의 승전을 기념하는 사꾸라일 뿐이다.

전군가도는 1908년에 완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2차선 포장도로다. ‘신작로’라는 말이 여기서 생겨났다. ‘징게망게’라고 부르는 김제만경평야 너른 들 복판을 일직선으로 관통하는 그 길은, 일제의 조선 수탈을 위한 제1호 인프라였다. 군산은 농민들의 피땀으로 생산된 쌀을 일본으로 실어내기 위해 이 때 만들어진 항구도시, 조선쌀 수탈의 전초기지였다. 최대 곡창 호남평야의 쌀이 전군가도를 통해 군산항에 쌓이고 일본으로 실어내졌다. ‘가마니’는 이 때 쌀을 안전하게 실어내기 위해 학교아이들까지 동원하여 만들어낸 튼튼한 주머니였고, 도로완공 이듬해인 1909년에 벌써 조선쌀의 30% 이상이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빠져나갔다.

추수철, 쌀을 가득 실은 우마차 행렬이 장사진을 이루어 흘러가고, 굶주린 조선사람들의 눈에 비친 건 백리 길따라 늘어선 사꾸라나무였다. 해방되고 죄 뽑아 던졌던 원한의 사꾸라는 그 자리에서 다시 살아나 활개를 뻗고, 지금은 손꼽는 드라이브 축제의 현장이 되었다. 사꾸라 만발한 백리길 끝에서는 캘리포니아 땅으로 낙인된 미군기지를 만나게 되지만, 화려한 사꾸라 꽃너울 아래서는, 그 길에 서리 맺힌 처참한 기억도, 접근금지 둘러친 싸늘한 철조망도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 것인가.

여의도 윤중로 사꾸라 길은 미국 워싱턴 포토맥 강변의 사꾸라 길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포토맥 강변의 사꾸라는 저 악명높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산물로서, 미국이 조선을 일본에 넘긴 기념으로, 일본과 미국의 우정을 확인하는 징표로 일본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다. 이 기이한 삼각관계를 보여주는 현장의 중심에 어처구니없이 국회가 들어서 있다. 1백년 전 한일관계의 현대판인 한미일 삼각동맹의 본질을 함축하는 상징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사꾸라 축제에 취하면 자존심도 내다버리고 굴욕도 견딜만하게 되는 것인가.

우리 전통문화에서 사꾸라는 아무런 상징을 갖고 있지 않다. 사꾸라를 노래한 어떤 문헌도 찾아볼 수 없고, 옛사람들의 어떤 삶에도 당최 등장하지 않는다. 일본농부들은 사꾸라 꽃이 피면 모내기를 준비하고 쌀의 수확을 점쳤지만, 우리농부들은 진달래꽃이 피면 볍씨를 담그고, 살구꽃이 피면 모내기를 준비했다. 일본인들의 봄이 사꾸라 축제로 장식되었다면, 우리들의 봄은 진달래꽃 화전놀이로 물들었다. 해방 70여년이라는 이 땅에선, 1백 년도 무색하게 여전히 사꾸라축제가 점입가경인데, 진달래꽃 화전놀이는 문자로 된 화석만을 남기고 아스라히 사라져갔다. 1930년대 유행한 ‘앵화폭풍’이 바야흐로 앵화태풍으로 일취월장 행군하는 중이다.

그리고 상징의 힘

〈욱일기〉와 〈국화〉와 〈사꾸라〉는 각각 하나의 상징이다. 상징이란 ‘일반적으로 말과 글이 아닌 모양이나 모습으로 의미나 뜻을 전달하는 의사소통 수단’이다. 이렇게 ‘특정 의미와 내용을 함축적으로 포함하는 특정한 표현을 우리는 보통 상징’이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상징은 내적 경험이나 정서, 사상과 같은 정신의 세계를 감각이나 물질의 세계로 바꾸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활동에서 상징의 기능을 연구한 ‘에른스트 카시러’는 인간을 ‘상징의 동물’로 정의한다. 그는 “인간은 상징의 세계에 산다. 상징의 세계는 의미의 세계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와 세계의 의미를 찾는 동물이다. 의미있는 것을 찾고 이상을 바라보며 가능한 것을 추구하는 인간은 문화를 창조하였다. 문화의 세계야말로 인간에게 고유한 상징들의 세계이다. 문화를 떠나서 인간은 살 수 없고 또 인간의 본성을 이해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인간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인간이 만들어낸 여러가지 형태의 문화를 이해해야만 한다. 인간이 인간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문화로 보아야 한다. 한 인격이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가는 것 역시 문화를 통해서이며, 인간은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상징적 표현을 통해 세계와 자아를 구성한다”고 설명한다.

상징은 자기정체성을 드러내는 표지이다. 어떤 상징을 안다는 것은 그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인데, 한 사회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상징을 통해 자기정체성을 확인하고, 하나의 공동체문화를 누리고 또 이어나가는 의미있는 존재가 된다.

상징은 하나의 역사적 장소를 살아가는 사람과 자연, 사람과 사물, 사람과 사람의 관계속에서 형성되고 자라난다. 상징의 형성은 한 사회가 존재하면서 누적되어온 오랜 시간과 공감대, 그리고 전승을 필요로 한다. 상징은 함께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 거듭해 쌓이는 경험과 기억을 통해 그 힘을 축적한다. 그것은 어느 날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며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상징이 갖는 에너지는 무엇보다도 사람의 정신에서 큰 힘을 발휘한다. 상징은 사람의 의식을 지배하기도 하고 말살하기도 하며, 반면에 더없이 벅차게 고양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김환희 선생은 서정주가 스스로를 규정한 ‘종천순일’의 정신을 〈주인을 섬기는 종의 멘탈리티〉라고 지적한다. 서정주의 국화를 찬미하고, 사꾸라 축제를 찬양하는 사회가 퍼뜨리는 정신은 〈주인을 섬기는 종의 멘탈리티〉, 그것일 수밖에 없다.

정으로 쪼아 바위에 글자를 새기는 듯 절실한 땀과 집요한 노고가 배어 나오는 선생의 글은, 여러 문필가들이 반세기를 풍미한 서정주 분석의 정점이다. 인정하건 말건, 그의 서정주 분석을 설득력 있게 논리적으로 반박한 글을 나는 단 한 편도 발견하지 못했다. 상징의 전복을 방관하는 사회가 가는 길은 해체로의 길이다. 상징을 잃어가는 사회가 가는 길은 소멸로의 길이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