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연재를 중단하며

  개띠 해를 넘기고 돼지띠 해를 맞으면서 58년 개띠 노동자 이야기의 연재를 중단하려고 합니다.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의 삶에 좀 더 밀착하고 더욱 희망찬 글을 쓰기 위해 글쓴이 자신이 충전하고 연마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리라는 의미에서 일단 중단이라는 선택을 하게 된 데에 독자 여러분들의 양해를 구합니다.

  ‘중단’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이야기는 아직 진행 중이고 결코 끝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촛불 항쟁을 통해 적폐 정권을 탄핵시켰고, 그 핵심 책임자들을 감옥에 보냈지만, 우리는 아직도 수많은 적폐를 청산하지 못하고 거기에 치여 있는 상태입니다. 특히 노동자들에 대한 적폐는 여전히 온존하고 있고, 오히려 역주행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만들고 있습니다.

  올해는 3.1혁명 100주년이 되고, 우리 민족이 최초로 민주공화국을 선포한 지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결코 멈출 수 없고,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올 한 해도 우리의 주인공 신돌석씨는 자기 삶의 터전에서 열심히 살 것이고, 적폐 청산과 민중생존권 확보, 민족의 화해 · 번영 · 통일을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입니다.

  그 동안 부족한 글을 읽어 주신 독자 여러분과 연재를 허락해 주신 <통일뉴스>에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특히, 매회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놀라운 화폭으로 이 연재를 풍부하고 빛나게 해준 김윤기 화백에게 고마움을 표합니다. 새로운 연재가 시작될 때는 많은 관심과 조언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정해랑

 

▲ [삽화 - 김윤기]

그런 일이 몇 차례 있고 난 뒤 퇴근 무렵에 배부장이 박인환을 불렀다. 그러면서 경고성 발언을 하였다. 자기는 이사장님의 뜻에 따라 이사장님의 대리로 이곳에 온 것이지 선생님들 후배로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해 하고 있으려니까 선생님이 나를 배형, 배형 부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때서야 감이 왔다. 술자리에서 배부장이 자기가 나이가 어리니 말을 놓으라고 하도 그러기에 배형이라고 부른 적이 있었다. 아마 그것이 아니꼬웠던 모양이다. 참으로 웃기는 인간이었다. 자기가 말을 놓으라고 해놓고 이제 와서 그것을 문제 삼다니. 아마 어떻게 나오나 떠보려고 그랬던 모양이었다. 그때는 그냥 수긍했다.

  그리고는 또 며칠이 지났다. 배부장이 출근하자마자 씩씩거리면서 박진환을 불렀다. 박진환더러 자기와 한번 붙어보자는 거냐고 하였다. 박진환은 어리둥절했다. 무엇 때문에 그러냐고 했더니 왜 서무주임과 통화해서 자기에게 압력을 넣으려고 하냐는 것이었다. 자기가 그런 걸 제일 싫어한다는 것을 모르냐고 하면서. 박진환에게 며칠 전에 서무부장이 전화를 했다. 특별히 어려운 일 없냐는 것이었다. 서무부장 소개로 들어오긴 했어도 그것이 별로 떳떳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덤덤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그래서 없다고 했더니 배부장이 괴롭히지 않냐는 것이었다. 뭔가 들은 게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까지 묻는데 말하지 않을 까닭도 없는 것 같아서 있었던 일들을 대략 이야기하였다. 그런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마 서무부장이 그것을 이사장에게 보고하고 이사장이 배부장을 불러서 뭐라고 한 모양이었다. 서무부장은 배부장의 전횡을 견제하려고 배부장에게 타격을 줄 거리들을 수집하였다고 한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진 것인지, 아니면 더러운 놈들 추태에 잘못 끼인 것인지 아무튼 그 일로 박진환은 배부장에게 아침부터 공격을 당했던 것이다.

  이때는 정말 박진환으로서도 참을 수 없었다. 자기를 공격하는 것은 그렇다 쳐도 치사한 사람으로 만드는 데는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배부장 앞으로 가서 조목조목 따졌다. 교무실 분위기가 갑자기 싸늘해졌다. 배부장에게 정면으로 대드는 일은 배부장이 온 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배부장은 성질을 내면서도 할 말이 없는지 얼굴만 붉으락푸르락 해지다가 밖으로 나갔다. 옥상으로 올라가는 배부장을 쫓아갔다. 그리고는 계속 따져 물었다. 도대체 나를 괴롭히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지난 번 이야기를 계속 했다. 자기가 없는 데서 왜 자기 욕을 하고 다니고 이사장님 욕을 하냐는 것이었다. 나아가서는 학생들을 선동해서 반이사장님 분위기를 만든다고 하였다. 그런 적 없다고 했다. 들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누구냐고 물으니 아무개 선생이라고 했다. 그럼 그 사람 앞에서 삼자대면하자고 했다. 그러자고 하였다. 하지만 삼자대면은 없었다. 배부장도 성질나니까 말했지만 자기에게 고자질한 사람을 밝힌 것이 찜찜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것 자체가 거짓말인지도 몰랐다.

  문제는 그로부터 얼마 뒤에 엉뚱한 방법으로 나타났다. 그 날은 스승의 날이었다. 아이들한테 꽃다발과 선물을 받고 고맙다는 말과 함께 좋은 말을 해주고 있는데 교장실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급하다고 하기에 하던 말을 중단하고 애들한테 기다리고 있으라고 한 뒤 교무실로 갔는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겼다. 경찰서의 대공과 형사가 와 있는 것이었다. 사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지역에는 대공과라는 것은 없었고 정보과 정보3계였는데, 좀 더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주려고 했는지 정보3계 소속 형사들은 자기들이 대공과라고 하였다. 안형사라고 자기를 소개한 사람이 경찰서로 가자고 하였다. 그 당시는 대공 문제로 가자고 하는데 왜 그러냐는 둥 따진다는 생각은 좀처럼 할 수 없는 때였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박진환은 어린 시절에 경찰에 시달린 일이 많았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젠 그런 시절은 다 갔는지 알았다. 그런데 대공과 형사라는 사람이 경찰서에 가자고 하니 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진환이 경찰서에 가서 자기를 부른 까닭을 알아본즉 다음과 같았다. 며칠 전에 학생들이 아침 일찍 유인물을 몰래 뿌렸다. 이사장을 비난하는 것이었다. 학교 공금을 유용한 것부터 학생들을 강제 동원한 것까지 여러 가지 비난을 쓴 것이었다. 며칠 동안 수사를 했는데 잡히지는 않았다. 그러니 사실 그것이 학생들이 한 것이라고 단정하기도 힘들었다. 그런데 비리 내용이 거의 연구부장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래서 연구부장측은 이 유인물이 서무부장 측에서 만든 것이라고 보고 있었다. 하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또 서무부장 측에서 뿌린다면 이사장을 비난할리는 없었다. 따라서 서무부장 측에서 학생들에게 유인물 내용 중 배부장과 관련된 정보를 제공하고, 학생들이 그 외의 불만을 첨가했을 가능성은 있었다.

  유인물을 뿌릴 가능성이 있는 학생들을 불러서 조사하는 과정에서 박진환의 수업이 문제가 되었다. 박진환은 그 즈음에 최창규가 주도하는 지역 교사협의회 준비 모임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이런 저런 세미나도 하고 책도 읽었다. 박진환은 자기 부모의 내력 때문에 의도적으로 이런 모임을 피해 왔고, 이른바 의식화의 내용이 담겼다고 생각되는 책은 읽지 않았다. 그런 그가 이런 모임에 참여하고 책도 읽다 보니 생각이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신돌석씨가 그와 대화를 나누어 본 경험으로 보면 그는 과거의 피해의식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사회 문제에 대해서 확신하는 발언을 하기를 꺼려하였다. 하지만 이 체제에 대한 거부감은 뿌리 깊이 갖고 있는 것 같았다. 특히 경찰에 대한 그의 적개심은 거의 본능적이라고까지 할 만하였다.

  박진환은 법대를 나왔지만, 이 학교에서는 사회 과목은 대충 다 가르치는 셈이었다. 지리 시간에 그가 베트남은 망한 것이 아니라 통일이 되었다고 가르쳤다는 학생들의 진술이 있었다. 그것도 문제였겠지만 그보다 그가 학생들에게 ‘오월의 노래’를 불러 주면서 따라하라고 가르쳤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노래는 신돌석씨가 박진환에게 가르쳐 준 것이었다. 그래서 박진환의 해직에 신돌석씨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신돌석씨가 그에게 ‘오월의 노래’를 가르쳐 준 것은 아마 그해 4월쯤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이미 지역교사협의회에 속해서 활동하고 있던 최창규를 통해 박진환을 알게 되었고, 이따금씩 만나서 술 한 잔 하곤 하였다. 하지만 여러 교사들과 함께 만나는 것이었고, 그것도 주로 ‘함께 하는 집’이라고 하는,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모임 집에서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날은 박진환이 최창규를 통해 한 잔 하자고 연락을 해왔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그 날이 바로 박진환이 배부장에게 모욕적인 경고성 발언을 듣던 날이었다.

  박진환은 아무 말 없이 술만 들이켰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왠지 화가 난 사람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하고 아무 생각 없는 것 같기도 했다. 그냥 술잔만 건네고 마실 뿐 왜 술을 마시자고 했는지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소주를 한 세 병 정도 마신 다음이었을 것이다. 갑자기 그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그러나 그 이상은 몰랐다. 그래서 이어지는 게 바로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이었다. 그리고는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를 반복했다. 몇 번을 부르고 나서 ‘좋다’라는 소리를 하고는 소주 한 잔을 들이켰다. 그 노래를 부를 때 그의 모습은 평소와는 아주 달라 보였다. 마치 뭔가에 도취된 듯한 그런 모습이었다.

  노래를 부르다가 이런 소리도 했다.

  “내 어릴 적에 엄마가 막걸리 한 잔 마시면 부르던 노래가 있었지. 엄마는 그 노래를 굉장히 슬프게 불렀는데 그러면서도 사람을 흥분시키는 힘이 있었어. 안타깝게도 그 노래를 나는 의식적으로 잊어버리려고 했기 때문에 지금 기억이 안 나. 다만 장백산 줄기줄기 어쩌구만 생각나지. 그리고는 엄마의 그 표정, 그 음색, 그 분위기 그것만 기억에 남는 거야.”

  그 정도 이야기가 나가면 이제 가야할 때가 되었다고 신돌석씨는 생각했다. 함께 만나서 술을 마시던 집은 소래기집이라고 해서 공단 입구 주택가에 가건물로 지은 집이었다. 신돌석씨가 공장에 있을 때부터 잘 알던 집이라서 어느 정도는 이런 노래를 불러도 별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그 정도가 심하면 아무래도 시절이 그래서 부담이 되었다.

▲ [삽화 - 김윤기]

  더 마시자고 하는 그를 끌고 그의 집으로 갔다. 술을 사들고 가서 더 마시다 보니 어느덧 4시가 다 되었다. 그런데도 그는 자려고 하지 않았다. 자기는 차라리 그냥 밤을 새울 테니 신돌석씨더러 자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갑자기 옆방으로 가서 녹음기를 들고 왔다. ‘오월의 노래’를 부르라고 하는 것이었다. 얼떨결에 신돌석씨가 노래를 불렀고 그리고 박진환은 그것을 녹음하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렇게 녹음한 노래를 학생들한테 틀어 주면서 가르쳐 주었다고 하였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형 잘리게 한 건 정말 황당하더라구.”

  시간이 별로 지나지 않았는데도 술병은 벌써 세 병째가 되었다. 한 사람에 한 병 꼴로 돌아간 셈이었다.

  “뭘, 그때 잘리지 않았어도 언젠간 잘렸을 거야. 전교조 만들 때 잘리지 않았겠어.”

  술을 빨리 먹는 편인 최창규는 벌써 취기가 오른 것 같았다. 박진환은 그런 최창규를 한번 쳐다보고 난 뒤 한마디 했다.

  “그런데 형 소개했다는 서무부장인가 하는 사람은 형 잘리는데도 힘을 못 쓴 모양이지?”

  “그렇기도 하겠지. 그 당시야 배부장이란 놈의 위세가 워낙 대단했으니까. 하지만 일부러 막지 않은 점도 있을 거야. 그 친구 우리 고향에 가서 삼촌한테 진환이가 빨갱이들하고 어울린다고 큰일 났다고 하면서 전교조 하기 전에 잘린 게 다행이라구 뭐 그랬다잖아.”

  결국 자기들끼리 싸우면서 박진환을 이용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었다.

  “근데 잘 잘린 거지. 그 덕분에 공립학교 다니게 됐잖아. 허허허.”

  사실이 그랬다. 그는 해직교사가 되었고, 87년 이후 5공 때 해직된 교사들을 복직시켜 줄 때 공립중학교로 발령되었다. 그러다가 그때는 공립고등학교를 다닌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서 웃는 그의 웃음이 왠지 공허하게 느껴졌다.

  “사실 내가 창규나 신형을 만나지 않았으면 아직도 울분만 가득 안고 살았을 거야. 누가 누구인지 분간도 못하면서. 왜 실미도에 나오는 주인공 있잖아. 설경구가 하던 역처럼. 아버지가 월북했다고 아버지만 원망하는. 내가 그랬거든. 뭐하러 나는 싸질러 놓고 도망가느냐. 그런 소리 할 때면 엄마는 울면서 술 한 잔 하고는 아까 말한 노래를 불렀어. 뭐 다 지난 얘기하기도 싫지만…”

  좀처럼 말을 많이 하지 않는 박진환이 슬슬 말을 많이 하기 시작했다. 취해 간다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럼 그 서무부장인가는 지금 뭐해요? 아직 그 학교에 있나요?”

  “있지. 아 그 사람이 교장이 됐어. 얼마 전에 사학법 개정 반대한다고 하면서 기자회견할 때 나오더라구. 많이 출세했지. 정말 아부 밖에는 모르는 인간인데…”

  사학법 개정 이야기가 나오자 술기가 약간 오른 듯한 최창규가 갑자기 소리를 내어 웃었다.

  “아 그 웃기는 인간들이 장외투쟁을 한다잖아. 마치 탄압받는 사람들처럼. 지 가진 것 놓기 싫어서…”

  “하긴 학교운영위에서 추천한 사람이 이사가 된다는 것에 그렇게 난리를 치대요. 전교조가 학교를 장악할 거라고 하면서. 그런데 전교조가 운영위원의 3%밖에 안 된다면서요?”

  신돌석씨가 한마디 거들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할 것만은 아니야. 3% 아니라 단 한 명이라도 이사가 된다는 것은 걔네들한테는 무척 견디기 힘든 일이지. 그만큼 썩었거든. 내가 운영위원이 돼 봤잖아. 갑자기 운영위 분위기가 써늘해지는 거야. 이 사람들 내가 들어가기 전에는 운영위가 회식 자리였어. 그런데 내가 껴서 미주알고주알 따지니까 죽을 맛인가 봐. 얼마나 웃기던지. 그런데 예산을 지네 멋대로 쓰는 거야. 근거도 불확실하게. 그러니 따지지 않을 수 있나. 공립학교가 그러니 사립이야 말해 무엇해. 그런데 운영위원도 아니라 아주 이사가 된다는 거 아냐. 아마 창성고등학교 같은 경우에는 돈 빼돌린 거 도중에서 처먹은 것들 때문에 난리가 나도 한참 날 거야.”

  창성고등학교는 박진환과 최창규가 함께 다니던 학교 이름이었다.

  “그것도 그거지만 사립학교들이 나서서 기를 쓰고 반대하는 데는 아마 친족 이사를 1/3 이하에서 1/4이하로 줄인 것과 이사장이 자기 학교는 물론 다른 학교 교장 겸직을 금한 것, 재단 이사회 회의록을 반드시 작성하기로 한 것 등 때문에 그렇기도 할 거야. 그러다 보면 창성 같은 데서는 정말 학교 빼앗기는 기분이겠지.”

▲ [삽화 - 김윤기]

  “이번 주말에는 사립학교법 개정 반대하는 집회에나 가서 깽판이나 놀까. 근혜야 그네나 타라 하구 말야.”

  최창규가 목청을 높여서 말을 했다.

  신돌석씨는 이런 이야기들을 주고받을 때면 마음이 답답하고 우울해졌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이야기들이 계속되어야 하는 것일까?

  회 안주가 거의 끝나갈 때쯤 되자 최창규가 나가서 맥주로 입가심을 하자고 했다. 박진환이 먼저 달려 나가서 계산을 하려고 했는데 이미 최창규가 화장실 갈 때 계산을 해버린 모양이었다.

  “아니 이 동네 어떻게 소리 소문도 없이 술값을 내고 지랄이야. 그런 거 받아 줘도 되는 건가.”

  박진환이 대단히 불만 있다는 투로 인상을 쓰면서 큰소리로 말하였다. 물론 농담이었지만 농담을 해도 좀 걸쭉하게 하는 게 박진환의 스타일이었다.

  “우린 최선생님 말씀만 들어요. 안 그러면 단골인데 혼나죠. 호호호.”

  사장인 듯한 다소 살은 붙었지만 곱게 늙은 50대쯤의 아주머니가 말했다. 그들이 대하는 태도로 보아서 최창규는 이곳에 매우 자주 오는 모양이었다.

  노량진 수산시장을 나서서 육교를 건너가 골목길을 걸어가는데 최창규에게 아는 체를 하며 인사하는 젊은 애들이 여럿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오는 길에도 여러 명이 인사를 했었다.

  “대한학원에 다니는 애들인 모양이지?”

  “그렇지. 학원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간 애들도 꽤 있지. 벌써 대학까지 졸업하고 임용고시나 공무원 시험 공부하러 온 애들도 있어.”

  “그런 애들이 왜 이곳에 있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신돌석씨는 오는 도중에 공인중개사 시험 대비 홍보지를 나누어 주던 아줌마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대학 들어간 애들도 이곳에 와서 노는 애들이 많아. 왜냐하면 이곳이 무척 물가가 싸거든. 그리고 요즘은 일부 전문직을 배출하는 학과를 제외하면 대학 들어가도 별 볼일 없어. 또 시험공부를 해야지. 그런 점에서 애들이 불쌍해 보이기도 해.”

  “그럼 우리 때가 오히려 행복했다는 말이야?”

  박진환이 불만스럽게 따지고 들었다.

  “아니 그런 뜻은 아니고. 민주화라는 것이 그대로 삶의 질과 연결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어떻게 보면 오히려 있는 놈들을 위한 민주화가 아닌지 생각이 들 때도 있어.”

  최창규가 술기운이 오른다는 듯 머리를 흔들며 변명하듯 대답하였다.

  사실 그런 점은 신돌석씨에게도 상당히 헷갈리는 문제이기도 하였다.

  한 5분쯤 걸어서 대로변으로 나간 뒤 다시 5-6분 정도 걸어가자 최창규가 가자고 했던 맥줏집에 이르렀다. 지하에 있는 맥줏집은 젊은 애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르바이트하는 듯하는 젊은 남자한테 안내되어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대학에 들어간 우리 제자들 거의 대부분이 이런 곳에서 아르바이트들을 하지. 신문에서는 애들이 힘든 일을 싫어하느니 어쩌니 하면서 문제라고 말해. 뭐 그런 점도 있을 거야. 하지만 그건 걔네들 책임만은 아니야. 애들을 대학생으로 만들어 놓고 취업문은 좁혀 놓은 기성세대가 웃기는 것 아니야? 그러다 보니 남는 건 이런 식으로 불안정한 임시직뿐이지. 그러다가 기껏 취직이 돼도 비정규직이지. 그리고는 금세 밀려나는 거야.”

  최창규가 이제 술이 깼는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을 했다.

  “하지만 애들은 그것을 깨기 위한 수단이 거의 없어. 뿔뿔이 흩어져 있고, 순간의 쾌락에 노출되어 있지. 그런데 가진 놈들은 자기 것을 수호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최대한 이용하잖아. 사학법 개정 반대에 목매고 모이는 놈들 봐. 벌써 작년, 재작년부터 반북집회가 열리면 모여서 사학법 개정 반대를 이슈로 제기했잖아. 대부분 사람들이 관심도 없을 때…”

  “그러니까 6월 항쟁 때 전두환이가 쿠데타를 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해서 피를 좀 봤어야 하는데…”

  박진환이다운 과격한 발언이었다. 신돌석씨는 이런 생각도 가능은 하지만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우여곡절을 거치면서도 역사는 진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삽화 - 김윤기]

  “그런데 요즘 애들은 사학법은 어떻게 생각하지?”

  신돌석씨가 최창규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그가 가장 젊은 애들을 잘 알 것 같아서였다.

  “얼마 전에 교대에 가겠다는 애들이 면접 준비를 할 때 도와 준 적이 있어. 그때 그런 이야기를 했지. 사학법 개정이 질문으로 나오면 어떻게 말하겠냐구. 그런데 애들이 그러더구만. 그 문제가 나오면 정말 쉽고 좋지 않냐구. 너무나 답이 간단하지 않냐는 거지. 처음에는 무슨 생각에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어.”

  신돌석씨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신돌석씨한테야 분명하지만 애들한테 그것이 분명하다는 게 뭘 말하는 걸까?

  “애들은 너무나 잘 알더라구. 사학법 개정 반대는 소수 기득권 세력이 자기 이익을 놓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라는 걸. 거기서 또 한 번 깨달았지. 애들만이 희망이야. 우리 미래는 결코 어둡지 않아.”

  최창규의 말투가 밝아졌다. 박진환도 고개를 끄덕끄덕하였다.

  “맞아, 괜히 자라 보고 놀란 놈들이 솥뚜껑만 보고도 지랄들 떠는 거지.”

  그날 대화는 그렇게 매듭지어졌던 것 같다. 자라 보고 놀란 놈들이 솥뚜껑 보고도 지랄들 떠는 것이다. 그리고 애들만이 희망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사학법반대투쟁을 주도했던 박근혜가 그 뒤 정권을 차지했다. 그리고는 탄핵 당했다. 그 과정이 무려 10여 년이 된다. 지금은 유치원3법 제정 저지를 위해 집회도 하고, 1인 시위도 한다. 그리고 자한당이나 이른바 성조기 집회세력은 공공연히 한유총을 지지하고 나선다. 이전에 비하면 훨씬 더 기득권 수호를 위한 싸움에 치열하다.

  이러한 싸움이 반복되는 것일까? 무엇이 나아졌고,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 수구기득권세력은 권력을 잃으면 그 전보다 10배나 되는 힘으로 저항을 한다는 말이 생각났다. 지금의 모습이 그러한 것 같았다. 그러다가 문득  얼마 전 어느 글에서 본 내용도 떠올랐다. 박근혜 탄핵에서 승리한 세대는 그 승리감이 문신처럼 새겨졌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거치면서도 새로운 세대가 새롭게 길을 개척해 나갈 것이다. 어둠침침하게 느껴졌던 실내조명이 밝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신돌석씨는 다시 한 번 역사는 진보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렇다면 새로운 세대를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지금 돌파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소주잔을 기울이며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정해랑(鄭海郞)

서울에서 태어나 여의도 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노동정책연구소 정책실장, 경희총민주동문회 회장,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재생의 담론 21세기 민족주의>(2010년, 공저), <공주와 도둑들>(2017) 등이 있다.

 

김윤기(金允起)

<전시> 1993 개인전(그림마당 민) 외 단체전 다수
         2013 ‘내 앞에 서다’전(세종문화회관)
< 기획> 2006 조국의 산하전 ‘평택-평화의 씨를 뿌리고’(대추리)
        2009 평화미술제 ‘대지의 꽃을 바다가’(제주현대미술관)
        2012 통일미술전 ‘하나는 다른 많은 것을 이룬다’(국회의원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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