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 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중고등학생 시절 누구나 한 번쯤 읽어본 이육사의 시 ‘청포도’이다. 시험에 자주 출제된 시라며 밑줄 긋고 청포도가 무슨 의미인지 공부하며, 시인 이육사가 일제에 맞선 저항시인이라 배웠지만, 이육사가 사회주의 혁명가였다는 사실은 잘 알지 못한다. 

혁명이 완수되는 ‘칠월’, 사회주의를 의미하는 ‘먼 데 하늘’이 ‘이 마을 전설’인 전통을 창조적으로 수용하는 세계에서,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은 ‘고달픈 손님’인 혁명동지들과 혁명의 결실인 ‘청포도’를 향유하겠다는 해석. 생소하지만, 이육사의 삶과 사상을 들여다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16일 시인 이육사 서거 75년을 맞아 사회주의 혁명가 이육사의 삶과 사상을 되돌아본다.

▲ 사회주의 혁명가이자 시인 이육사. 1943년 중국 베이징으로 가기 전 가족과 친구들에게 준 사진으로 알려졌다. [사진출처-이육사문학관]

이육사는 1904년 5월 18일 경북 안동 도사면 원촌리에서 아버지 이가호와 어머니 허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원록, 두 번째 이름은 원삼이며 스스로 활(活)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대부분 ‘이활’로 활동했으며, 1927년 장진홍 의거에 연루돼 투옥되면서 수인번호 ‘264’를 따와 ‘이육사’를 필명을 썼다.

이육사는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집안이 모두 독립운동을 했다. 할아버지 이중직은 진보적 관리로 보문의숙을 세워 민족교육에 힘을 썼다. 이육사의 외가는 독립의병 총사령관 허위의 집안이었다.

이에 이육사의 시는 안동이라는 지역과 유학자 집안 태생이라는 점에 주목해 선비정신에 입각하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그가 쓴 시는 대부분 사회주의 혁명운동에 가담했던 때에 쓰인 것으로, 이육사가 독립운동에 뛰어든 시작을 살펴봐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이육사는 1924년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여기서 당시 일본을 풍미한 사회주의 사상의 지류인 아나키즘을 접했다. 이육사가 박열, 이경순, 장상중 등과 함께 아나키스트 모임인 ‘흑우회’ 회원이었던 것.

김경복 경남대 교수는 “이육사가 민족문제에 눈을 뜬 배경에는 그의 주자학적 집안 분위기가 깔려 있지만, 민족문제에 대한 심각한 번뇌를 비로소 경험하기 시작한 계기가 일본 유학 시절 아나키스트들과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1925년 건강상의 이유로 돌아온 이육사는 1926년 이정기와 함께 중국 베이징으로 가 비밀결사에 참여했다. 그는 베이징에서 ‘다물단’ 남형우와 배천택, ‘의열단’ 김창숙 등을 만났는데, ‘다물단’과 ‘의열단’이 모두 아나키즘 사상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단체였다.

그리고 같은 해 김원홍이 이끈 ‘유월한국혁명동지회’에 가입하고 이어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당시 상당수 사회주의 사상가들이 처음에는 아나키스트로 활동하다 사회주의자로 전향했듯, 이육사의 사상도 비슷하게 바뀌어 갔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1927년 4월 중국 장개석의 쿠데타로 한인 청년 다수가 좌익분자로 몰리며 핍박받자, 이육사는 귀국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장진홍 의사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투척사건’에 연루돼 형 원기, 동생 원일과 함께 투옥됐다. 이때부터 수인번호 ‘264’를 따 ‘이육사’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했다.

1929년 장진홍 의사가 체포되면서 풀려난 이육사는 1931년 대구 배일격문사건으로 다시 옥고를 치른다. 그리고 1932년 10월 의열단이 세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입교하면서 사회주의 혁명가로서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일부에서는 이육사가 의열단과 관련이 없다는 평가가 있지만, 의열단이 세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1기생으로 들어간 점, 의열단 간부인 윤세주와 밀접한 관계를 지녔다는 점 등이 이육사와 의열단의 관계를 알게 한다.

특히, 이육사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졸업식에서 연극 ‘지하실’을 지었다. 조선에 공산제도가 실현되고, 토지는 국유화되고, 노동자와 농민이 지배하는 사회가 실현돼, 마지막으로 ‘조선혁명 성공 만세’를 외치는 내용의 연극은 이육사가 독립운동의 방향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 1934년 6월 20일 서대문형무소 수감 당시 신원카드. [사진출처-이육사문학관]

일제도 그의 독립운동 사상 기저는 사회주의 혁명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1934년 일제가 작성한 ‘이원록 소행조서’는 “배일사상, 민족자결, 항상 조선의 독립을 몽상하고 암암리에 주의의 선전을 할 염려가 있었음. 또 그 무렵은 민족공산주의로 전환하고 있는 것으로 본인의 성질로 보아서 개전의 정을 인정하기 어려움”이라고 적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1934년 발표한 ‘자연과학과 유물변증법’이란 글에서는 레닌이 사회주의 혁명의 원칙으로 제시한 변증법적 유물론의 사적 전개를 주장하고, 활동목표는 사회주의의 대중화라고 제시해, 일제로부터의 독립은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가능하고, 궁극적으로 해방된 조선을 사회주의 국가로 건설해야 한다는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육사가 문학적 스승으로 루쉰을 둔 것도 그의 시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육사는 1936년 루쉰 사망 소식을 듣고 ‘노신추도문’을 발표했다. 루쉰과 만나 대화를 나눈 적이 있던 이육사는 “노신에 있어서는 예술은 정치의 노예가 아닐 뿐만 아니라 적어도 예술이 정치의 선구자인 동시에 혼동도 분립도 아닌, 즉 우수한 작품, 진보적인 작품을 산출하는 데만 문호 노신의 위치는 높아졌고, 아Q도 여기서 비로소 탄생하였으며, 일세의 비평가들도 감히 그에게는 함부로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고 추모했다.

그리고 “푸로 문학가는 반드시 참된 현실과 생명을 같이하고 혹은 보다 깊이 현실의 맥박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된다”며 “옛것을 분명히 알고 새로운 것에 간도하고 과거를 요해하야 장래를 추단하는 데서만 우리들의 문학적 발전은 희망이 있다. 생각건대, 이것만은 현재와 같은 환경에 있는 작가들은 부단히 노력할 것이고, 그래야만 참된 작품이 나오는 것이다”라고 루쉰의 어록을 강조했다.

즉, “참된 작가는 역사의 진상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현실주의적 관점을 지녀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투철한 역사의식을 담아내는 작품을 써야 한다”는 주장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사실주의 문학을 활용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육사의 시 짓기도 다르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이육사 시의 최고로 평가받는 ‘절정’을 다시 읽어야 한다는 학계의 주장이 있다.

지금까지 시 ‘절정’은 “8행 4연의 서정시가 표출해주는 절박한 민족적 현실과 정황은 다른 어떠한 산문기록으로도, 수만 수천 어로도 표현하지 못하는, 오직 시만이 할 수 있는 압축성과 응결성, 그러한 감정적 진실과 표현의 진실을 획득하고 있”으며 “절체절명의 극한경에서 벗어나는 길은 바로 시 자체에 의한 구원, 시가 추구하고 시가 의거할 수 있는 미의 세계가 아니면 안 되었던 것이다”라는 박두진의 해석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이육사의 시에 담긴 사회주의 혁명 완수에 대한 갈구를 단순한 미학적 관념성으로 뭉갠 평가라는 지적이다. 이육사의 삶과 사상을 들여다보지 않은 채, 단순히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가 시인으로 치부했다는 것. 그리고 지금까지 독자들은 이육사를 저항시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처럼 평가하고 있다.

▲ 1932년 3월 29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사진. 뒤가 이육사이다. 사진은 이육사가 '신진작가 장혁주 군의 방문기'를 쓰던 당시에 찍은 것으로 이 글에는 이육사의 아나키즘에 대한 인식이 담겨 있다.[사진출처-이육사문학관]

1930년대 중반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 문단 활동에 주력한 이육사는 국내 무력항쟁을 전개하고, 조선독립동맹과 임시정부의 좌우합작을 위해 1943년 4월 중국 베이징으로 다시 들어갔다. “항일혁명운동의 직접행동을 위한” 그의 중국행은 그해 가을 피검되고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감옥에서 순국하면서 끝났다.

이런 그의 행적을 간과한, 지금까지의 그의 문학에 대한 평가를 두고, 하상일 동의대 교수는 “이육사 연구는 사회주의적 성격에 대해서는 사실상 함구하고 있었다. 반공주의의 감옥에 갇혀버린 우리 현대사의 억압으로 인해 이육사의 민족주의는 보수적 민족주의에 기반한 주자학적 전통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으로 획일화되어 버리고 만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경복 교수는 “민족독립운동의 구체적 활동을 사회주의 시각에서 모색하고, 그것을 문학적으로 실천했던 이육사의 시적 세계는 ‘민족적 사회주의’, 또는 ‘사회주의적 민족주의’의 표출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사회주의 혁명으로 조국의 해방을 위해 투신한 시인 이육사. 서거 75주기를 맞아 시 ‘절정’을 다시 읽어본다.

매운 계절의 채쭉에 갈겨 
마츰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리빨 칼날진 그우에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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