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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호랑이 그림

기사승인 2018.12.06  22: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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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 심규섭의 아름다운 우리그림 (189)

조선 전기 200년 동안은 호랑이 세상이었다.
조선 정부에서는 매년 각 군현에게 호피 3장씩 진상하도록 했다. 그 당시 군현의 수가 대략 330여개 정도였으니 매년 1,000여 마리의 호랑이를 잡은 것이다.
이를 토대로 호랑이의 생태를 감안하면 약 5,000~6,000마리의 호랑이가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호랑이를 포획하는 전문 군사인 착호갑사(捉虎甲士)가 성종 대에 400여명이었는데, 숙종 대에 1만 1천여명으로 늘어났다.
이러한 호피 진상제도는 급격한 개체 수 감소로 영조 대에 폐지된다.

아무튼 한반도에 수많은 호랑이가 서식했던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드넓은 산악 지역과 깊은 골짜기, 엄청난 수의 초식 동물, 상대적으로 적은 인구 분포 따위는 호랑이가 서식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었다.

또한 전문 군대를 만들어 공식적으로 호랑이를 사냥하고 포획한 것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을 개간하기 위함이었다.
조선 초기 80만 결이었던 농지가 조선 말에는 480만 결로 늘려 호랑이를 깊은 산으로 몰아넣었다. 평지가 대부분 농지로 개간되자 산에 불을 질러 개간하는 화전(火田)이 성행하면서 호랑이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여전히 깊은 산골짜기에는 수많은 호랑이가 서식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해수구제사업(害獸驅除事業)’의 일환으로 1915~1924년 간 포획한 호랑이가 89마리, 표범 521마리였다. 비공식적으로는 호랑이 500마리 이상, 표범은 2,000마리 이상일 것으로 추정한다.
1924년 이후 호랑이는 더 이상 발견되지 않았다. 마지막 표범의 경우는 1963년 경남 합천에서 한 마리가 포획되어 창경궁 동물원에서 살다가 1974년 죽었다.

   
▲ 1917년 호랑이 원정대에 소속된 조선 포수 최순원과 백운학이 각각 잡은 호랑이. 이 호랑이는 경성 조선호텔과 도쿄 제국호텔에서 열린 호랑이 시식회에 쓰이기도 했다. [자료사진 - 심규섭]

우리나라에 서식한 호랑이는 줄무늬 호랑이, 점박이 호랑이가 있다. 요즘 말로 호랑이와 표범이다. 줄무늬 호랑이는 참호랑이, 표범은 개호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표범의 개체 수가 호랑이보다 월등이 많았는데 포획한 기록으로 보면 대략 4.5배 정도이다.

호랑이가 그토록 많았음에도 호랑이 그림은 좀처럼 그려지지 않았다. 정부에서 호피 진상이 폐지되기 직전인 숙종 대에 와서야 호랑이가 그려지기 시작하고 정조 대 단원 김홍도가 그린 [송하맹호도]를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호랑이 그림이 창작된다.
이후 호랑이 그림은 [까치호랑이그림]으로 대중화되기에 이른다.

조선 후기부터 호랑이 그림이 그려진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엄청난 포획을 통해 더 이상 호랑이가 사회와 사람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전통 미술작품은 대부분 긍정적인 상징이 붙어있다. 그런데 사람을 공격하고 농사에 방해가 되었던 호랑이를 긍정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었다.

둘째, 사나운 호랑이를 사냥하고 포획하는 행위를 통해 무사의 용맹함과 능력을 과시하는 문화가 없었다. 문치를 존중했던 조선 사회에서 탁월한 능력을 가진 영웅 무사의 출현은 견제 당했다. 실제 호랑이를 잡는 일은 정부 소속의 군인들이 조직적으로 수행했을 뿐이다.

셋째, 조선 후기 조선성리학이 완성되고 유학의 중심국이라는 자부심은 이 땅이 곧 이상세계라는 생각을 낳았고 진경산수화가 탄생한다.
이런 흐름에 따라 매난국죽(梅蘭菊竹)에 머물러있던 선비의 상징을 보다 강력하고 역동적으로 만들고자 했다.
다시 말하면, 당시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호랑이의 존재성과 용맹성을 선비의 신념체계와 결합시키려고 한 것이다.

   
▲ 단원 김홍도/송하맹호도/비단에 담채/18세기/리움박물관. [자료사진 - 심규섭]

하지만 사람과 가축을 공격하는 포악한 호랑이의 형상은 좀처럼 없어지지 않았다. 또한 이렇게 포악한 호랑이를 곧바로 선비의 상징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단원 김홍도는 호랑이의 포악성을 제거하고자 다양한 조형적 방법을 동원한다.
일단 포효하며 공격적인 모습이 아닌 그냥 서있는 자세를 만들었다. 고개를 살짝 숙여 이빨을 보이지 않도록 하면서 눈을 실제보다 크게 그렸다. 그 결과 호랑이의 공격성은 배제되고 총명한 느낌을 만들어냈다.
또한 발톱을 감추고 두발을 공손히 모아 예의바른 호랑이처럼 보이도록 했다.
하지만 정적인 호랑이는 자칫 역동성이 떨어질 수 있다. 이런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측면의 몸과 정면 얼굴을 결합하고, 여기에 등과 허리를 길게 늘여 운동성을 표현했다.
무엇보다 실제보다 꼬리를 길게 그리고 말아 올려 약간의 해학과 경쾌한 느낌을 만들어냈다.

김홍도가 그린 호랑이는 줄무늬 호랑이이다.
그렇다면 김홍도는 왜 개체 수가 훨씬 많았던 표범을 그리지 않고 호랑이를 그렸을까?
실제 호랑이 가죽보다 표범 가죽이 일상생활에서 쓰임새가 많았다. 호랑이 가죽이 뻣뻣한데 반해 표점 가죽은 부드럽고 무늬가 아름다우며 가공하기가 편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랑이는 표범보다 덩치가 크고 위협적이며 잡기가 어려웠다. 이런 특성은 호랑이의 용맹성과 가치를 높이는 역할을 했고 최종적으로 그림의 주인공으로 발탁되었다.
이후 대부분의 호랑이 그림의 주인공은 줄무늬 호랑이로 굳어진다.

조선 후기 중국에서 [표작도 彪雀圖]가 수용된다.
‘까치호랑이’ 그림의 뿌리는 중국에 있다고 알려져 있다. 표범과 까치를 함께 그리는 ‘표작도(豹鵲圖)’는 ‘기쁨으로 보답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까치는 ‘기쁨’을 뜻하고 표범의 ‘표(豹)’가 보답할 ‘보(報)’와 발음이 같아 이런 그림이 나온 것이다.
중국의 ‘표작도’는 표범, 까치의 형상을 문자와 발음의 장난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실 본래의 뜻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어쨌든 중국의 표범이 우리나라에 와서 호랑이로 바뀌어 ‘호작도(虎鵲圖)’ 즉 ‘까치호랑이 그림’으로 바뀐다.

   
▲ 다양한 까치 호랑이 그림이 세화로 창작되고 소비되었다. 줄무늬와 점박이 무늬가 결합되어 있는 모습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하지만 처음부터 줄무늬 호랑이를 그린 것은 아니다. 초기 그림은 대부분 점박이 무늬 즉 표범을 그렸다. 그러다가 점차 줄무늬와 점박이 무늬가 공존하는 형태를 보이다가 최종적으로 줄무늬 호랑이로 정착된다.
속화(俗畫), 혹은 민화의 특성상 이러한 흐름은 뚜렷하지는 않다. 대략적인 흐름이 그렇다는 말이다.

사실 단원 김홍도의 호랑이 그림은 대중화에 실패한다.
그 이유는 선비라는 구체적이고 특정한 존재에게 상징을 투영했기 때문이다. 선비의 용맹한 지조와 절개는 백성들의 일상적인 생활과 결합하기는 어려웠다. 무엇보다 너무 잘 그려서 따라 그리기가 어려웠고 변주 자체가 쉽지 않았다.

이에 반해, [호작도]는 세화였다. 세화는 일종의 연하장 같은 그림으로 그 수명이 1년 정도였다. 빠르게 소비되는 그림이다보니 정교하게 그릴 필요가 없었다.

백성들은 거의 멸종한 호랑이를 산군(山君)이라고 불렀지만 선비는 인격적 완성체의 개념으로 수용했고, 백성들은 산을 지키며 액을 막아주는 수호신, 산신령으로 생각했다.

우리나라에는 더 이상 호랑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동시에 호랑이 그림도 그리지 않는다.
다만 이북에 호랑이가 서식한다는 소문이 있다. 또한 이북에서는 단원 김홍도의 호랑이 그림을 전통으로 삼아 정갈한 호랑이가 그려지고 있다고 하니 이것으로 위안을 삼을 뿐이다.

심규섭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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