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해방된 성 에너지는 억압된 자본주의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다 (마르쿠제)

 

수라(修羅)
- 백석 

거미새끼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모 생각 없이 문 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어니젠가 새끼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 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 거미를 쓸어 문 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적은 새끼거미가 이번엔 큰 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한 이 작은 것은 무서우이 달어나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히 보드라운 종이에 받어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강의 시간에 한 주부가 질문을 했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 왜 고전이죠?’ 중학생인 아들이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읽기에 자신도 읽어보았는데 그 소설이 왜 고전인지 도무지 모르겠단다.

나는 오래 전에 영국의 소설가 D.H 로렌스가 쓴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원작으로 한 영화 ‘레이디 채털리’를 본 기억을 떠올렸다.

우리는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노골적인 성애(性愛)의 소설로 기억하고 있다. 숨죽이며 성애 장면만 골라 읽었다는 사람들이 많다. 나이 들어 영화 ‘레이디 채털리’를 보면서 성애 장면이 눈물겹도록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외설스럽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건 원작을 살린 감독의 뛰어난 능력 때문일 것이다.

로렌스는 ‘자기 연민’이라는 짧은 시를 썼다.

‘나는 들짐승이 자기 연민에 빠진 것을 본 적이 없다/얼어 죽은 작은 새가 나뭇가지에서 떨어질 때/그 새는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슬퍼해본 적도 없었으리라’

로렌스는 ‘채털리 부인의 사랑’에서 ‘자기 연민’을 느끼지 않는 당당한 인간상을 그리려 했다.

레이디 채털리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하반신 불구로 돌아온 남편을 보살피며 무기력한 나날을 보낸다. 자기연민에 빠진 레이디 채털리는 결국엔 앓아눕고 만다.

그녀는 남편의 부탁으로 사냥터지기 파킨을 만나게 된다. 채털리는 파킨이 돌보는 꿩의 새끼를 손안에 넣고는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주체하지 못한다. 생명의 힘, 자신 안에서 꿈틀대는 생명의 힘을 느꼈던 것이다.

성이라는 글자를 한자로 써보면 그 뜻이 명확해진다. 성(性)은 생(生)의 마음(心)이다. 그녀가 느낀 생명의 힘은 근원적 성충동이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리비도다.

근원적 성충동 리비도는 에로스(생명본능)와 타나토스(죽음본능)로 나눠진다. 성 본능이 에로스로 가지 못하면 타나토스로 간다. 타나토스에 시달리던 채털리는 작은 생명을 손에 쥐고서 자신의 깊은 속에서 불꽃처럼 타오르는 생명력, 나아가 모성(母性)까지도 느꼈던 것이다.

파킨도 아내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자신을 떠나버린 깊은 상처가 있는 남자였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등지고 숲 속에서 홀로 살아갔던 것이다. 하지만 그도 이미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했던 불꽃이 몸속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음을 느꼈다.

생명으로 충만한 자연 속에서 나누는 그들의 사랑은 또 하나의 자연이다. 성충동은 사랑으로 피어나 꽃으로 만발하고 모든 생명을 살리는 모성(母性)의 손길로 숲을 일렁이게 한다.

채털리의 남편이 불구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은유일 것이다. 귀족 남자들은 권력욕과 명예욕 즉 타나토스에 침윤돼 이미 죽은 인간들이라는 것.

백석 시인은 불멸의 연인 자야를 찾아 만주 벌판을 헤맨다. 그러다 ‘수라(修羅)’의 세계를 만난다.

‘거미새끼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모 생각 없이 문 밖으로 쓸어버린다./차디찬 밤이다’

‘어니젠가 새끼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 거미가 왔다/나는 가슴이 짜릿한다/나는 또 큰 거미를 쓸어 문 밖으로 버리며/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어데서 좁쌀알만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적은 새끼거미가 이번엔 큰 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히 보드라운 종이에 받어 문밖으로 버리며/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수라(修羅)는 싸우기를 좋아하는 귀신이다. 시인은 거미의 자식과 부모가 만나지 못하게 하는 인간 세계에서 수라를 본다.

로렌스는 20세기 영국 자본주의에서 수라의 세계를 본다. 수라가 되어버린 인간이 어떻게 다시 사랑을 회복할 수 있을까?

그는 사랑의 근원인 성애에서 인간의 구원의 힘을 발견한다. 남녀 간의 사랑은 결코 단순한 육욕적인 쾌락이 아님을. 성애는 인간의 근원적인 생명력을 일깨워 물화(物化)하는 자본주의에 맞설 수 있는 근원적인 에너지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지금 우리의 하늘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우리 사회는 타나토스에 맞설 수 있는 에너지를 성과 사랑에서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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