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10월 19일, 14연대 지창수 상사가 외쳤다. “지금 여수 경찰이 쳐들어 왔다!”

여수에서 군인의 봉기가 시작됐다. 제주도에서 발발한 ‘4.3사건’. 양민토벌을 반대한 14연대 군인들의 저항 성격이었다. 하지만 국가는 처음으로 대규모 양민을 학살했다. 그리고 이승만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했다. 국가가 70년째 빨갱이를 구분하는 잣대를 들이밀기 시작한 것이다.

여순사건 70년, 여순사건을 군대 내 남로당을 중심으로 한 좌익폭동으로 지금까지 알려져 왔다. 하지만 여러 학자의 분석은 지금까지 정부의 평가와 달랐음을 보여준다.

여순사건, 한반도 분단과 일제 미청산 역사의 축소판

대다수 학자의 분석을 종합하면, 여순사건의 발생 배경은 해방정국의 복잡한 당시 상황과 맞물려 있다.

먼저, 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선거로 대표되는 단선단정을 통한 한반도 분단 고착화가 대표적이다. 해방 이후 분단을 꿈에도 꾸지 못한 국민에게 이승만 정부의 단선단정은 용납되지 않았다. 당시 주둔한 미군이 이승만을 극우 파시즘적인 성향을 지녔다고 할 정도로 남한 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민족대의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이들에게 받아들일 수 없던 것.

김구를 중심으로 정치적으로 반대하는 세력이 있던 한편, 남로당은 행동으로 이승만 세력에 저항하며 단선단정에 반대했다. 이러한 남로당 계열이 군대 내에도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다.

여순지방에서도 5.10선거 반대투쟁이 있었다. 여수 지방 종고산, 구봉산, 미래산, 예암산 등에서 단선 반대 봉화가 올랐고, 전남 13개 학교가 동맹휴학을 했는데, 여기에 여수가 3개 학교로 가장 많았다.

이는 제주토벌을 위해 모인 14연대에도 영향을 미쳤다. ‘제주토벌 출동거부 병사위원회’가 발표한 ‘애국인민에게 호소함’에는 “이승만 괴뢰, 김성수.이범석 도당들은 미 제국주의에 발붙이기 위해 조국을 파는 것과 마찬가지인 분단정권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정치적으로 한반도 분단이 굳어지던 시기, 해방 후 청산되지 않은 친일문제도 여순사건의 한 배경이었다. 동족을 억압하고 수탈하며 일제의 군국주의 협력자였던 당시 경찰이 해방 후 미 군정과 이승만의 묵인 하에 다시 경찰 제복을 입고 등장한 것.

당시 김옥주 국회의원은 “군정 3년 동안 행정 부패와 폭압행위를 저지른 경찰에 대한 원한이 민중의 뇌 속에 침투했던 것이 여순사건의 최대 원인”이라고 주장했을 정도. 미 대사관도 여순사건 당시 공산주의자와 경찰 중 어느 쪽이 더 나쁜지 모르겠다고 보고하기도 했다.

이는 당시 친일파 출신 경찰과 국방경비대 간의 반목에서도 드러난다. 전남지역의 경우, 1947년 4월과 6월 광주에서 경찰과 경비대의 충돌이 있었다. 여순사건이 발생하기 전 9월 구례에서 경찰과 경비대 충돌사건이 벌어졌다.

14연대 지창수 상사의 “지금 여수 경찰이 쳐들어왔다”는 외침이 경비대를 자극했고, 경찰과 충돌해 여순사건으로 확대됐다는 게 중론이다.

여기에 제주도에 대한 당시 지역 민심도 여순사건의 배경이 됐다. 당시 14연대는 여수지역에 창설된 향토경비대였다. 1946년 8월 제주도가 전남에서 분리됐지만, 제주도와 전남은 같은 고향이라는 인식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기에 제주4.3사건이 동족상잔이라는 인식이 퍼졌던 당시 여론에 14연대는 더 자극받을 수밖에 없던 것. 제주도 파병을 반대한다는 명분은 경찰과의 충돌로 표출됐고, 급기야 국가의 학살로 이어지게 됐다.

물론, 14연대 내 좌익의 활동도 무관하지 않다. 1948년 6월 제주도 제9연대장 박진경 대령 암살사건 이후 전국에는 사상검열과 숙군이 진행됐다. 정부 수립 후에는 숙군 바람이 불었고, 14연대 창설 요원이자 본부중대 하사관이 10월 11일 체포되자, 14연대 남로당 조직은 제주도 파병에 앞서 무장 봉기계획을 수립.실행했다.

▲ 진압작전 당시의 모습. 미 임시군사고문단 소속 장교는 현지에서 작전을 지휘했다. [칼 마이던스(1948. 11. 1.)/<LIFE>(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

여순사건, 8일간의 전쟁

이러한 배경 속에서 10월 19일 지창수의 외침이 있자, 14연대 2천여 명의 병사들이 미제 M-1소총과 칼빈 소총 등을 들고 여수 시내로 향했다. 20일 이들 중 주력 부대는 오전 순천으로 향했고, 순천역에서 홍순석 중위가 지휘하던 14연대 2개 중대가 여기에 가담했다. 같은 날 오전 광주에서 파견된 제4연대 1개 중대도 합류했다.

여순사건이 발생하자, 20일 정부와 주한미군은 비상회의를 열고 송호성을 사령관으로 한 토벌사령부를 설치했다. 그리고 이범석 국무총리는 22일 ‘반란군에 고한다’라는 포고문을 발표, “14연대의 봉기가 반란이니 국법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으면 총살당하지 않으려면 즉시 투항하라”고 요구했다.

21일 로버츠 임시군사고문단 단장은 송호성에게 명령을 보내, “정치적, 전략적으로 여수와 순천이 중요하기 때문에 가능한 빠른 시일 안에 탈환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이에 전주 3연대 2개 대대, 광주 4연대 3개 대대, 대구 6연대 1개 대대, 군산 12연대 3개 대대, 마산 15연대 1개 대대 등 육군 5개 연대와 비행대, 수색대대로 진압부대가 편성됐다. 그러다 반군의 대응이 거세자 22일 제5연대가 추가 배치됐고, 해군 함정이 여수 해안가로 접근하고 육군 항공대 비행대가 전남지역으로 출동했다.

당시 38선을 경계하던 부대와 제주도 주둔 부대와 제14연대를 제외하고 총 10개 연대 중 7개 연대가 진압부대로 편성된 것.

초기 진압에 실패한 진압부대는 22일 순천을 시작으로 24일 보성, 벌교에 진입하고 동시에 하동과 순천으로부터 광양을 향해 진격했다. 여수를 중심으로 육지와 바다에서 포위망을 구축한 것이다. 그러다 26일 진압군은 여수에 들어갔고 27일 여수를 완전히 점거하면서 여순사건을 일단락 짓는 듯했다.

진압군의 면면은 일제 당시 독립군을 토벌하던 만주군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김백일, 송석하, 최남근, 백선엽, 정일권 등은 모두 조선인 항일빨치산을 토벌하던 간도특설대 출신. 이들이 많은 토벌작전을 경험했다는 점에서 여순사건 진압작전에 투입됐다.

21일 이후 정부의 진압작전이 거세지자, 반군은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이른바 ‘구빨치산’ 활동이 시작된 것. 일부는 여순사건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백운산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국가, 양민 학살의 역사를 열다

▲ 여순사건에서 진압군에게 체포된 반란군 모습 [출처: 나무위키]

27일 일단락지을 줄 알았던 여순사건은 다른 양상으로 번졌다. 간도특설대 출신 진압군들이 양민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부역자를 대상으로 한 즉결심판이 자행된 것이다.

일제 당시 항일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만든 ‘잠정징치도비법(暫定懲治盜匪法)’ 중 군대 사령관이나 고급 경찰관이 토벌 시 사태가 급박할 때는 자신들의 재량에 의해 ‘임진격살(臨陣格殺)’할 수 있도록 한 법이 여순사건에서 재현된 것.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일이 양민에게 적용됐다는 점이다.

진압군이 순천에 들어온 23일 순천 읍민들은 순천북국민학교에 집합했다. 26일 이미 빠진 14연대 대신 여수에는 소수 반군과 남녀 중학생이 저항했는데, 주민들은 공설운동장, 종신국민학교 등 다섯 군데로 끌려갔다.

심사요원들이 ‘저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받은 이를 교사 뒤에 파놓은 구덩이 앞으로 끌고 가 즉결처분했다. 김종원은 일본도를 휘두르며 양민들을 살해했다. 종신국민학교에서 처형된 시신은 만성리 굴 너머에서 불태워졌다. 이는 여수와 순천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보성, 구례 등지에서도 양민학살이 자행됐다.

순천에서 당시 상황을 목격한 유건호 <조선일보> 기자는 이렇게 적었다.

“주로 청년들만 모아놓은 곳이 있는 하면, 남녀 학생들만 모인 곳, 또 팬츠만 입고 벌벌 떨고 있는 벌거숭이 집단도 있다. 경찰대가 구분해놓은 것이다. 심사 중인 그룹 앞에는 경찰관에게 끌려 나온 사람이 충혈된 눈으로 이 얼굴 저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누군가를 찾고 있고, 웅크리고 앉아서 떨고 있는 사람들은 고개를 숙인 채 그 시선을 피하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다. 얼굴을 들었다가 그와 시선이 마주쳐서 ‘저놈이다’ 손가락이 가리키기만 하면 끝장이 나는 것이다. 이것이 정확한 정황파악도 제대로 못 한 채 천신만고 사건 현장에 도착한 기자의 눈앞에 전개된 첫 광경이었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여수 5천 명, 순천 2천2백 명, 보성 4백 명, 고흥 2백 명, 광양 1천3백 명, 구례 8백 명, 곡성 1백 명 등 총 1만 명이 학살됐는데, 이 중 95%가 진압군에 의해 자행됐다. 지방 좌익과 빨치산 등에 의해 학살된 이는 5백여 명으로 추산된다.

▲ 여순사건에서 희생된 이를 보여 오열하는 가족. [칼 마이던스(1948. 11. 1.)/<LIFE>(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

진압군의 양민학살은 과연 국가와 무관한 일이었을까. 22일 현지 사령관에 의한 계엄령이 내려졌다. ‘본관에게 부여된 권한’이라는 표현이 있지만, 계엄사령관이 누구인지도 명시되지 않고, 누가 권한을 부여했는지 명확하지 않다. 근거도 없이 사형을 처할 수 있도록 한 자의적 조치였던 것.

배후에는 이승만 정부가 있었다. 당시에는 계엄법이 제정도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국무회의가 계엄법을 제정하고 의결했는데, 당시 법상 국무위원회는 법률안을 국회에 제출할 수만 있을 뿐, 제정 권한은 없었기 때문에, 여순사건 당시 내려진 계엄령은 위헌이었다.

이승만도 22일 “계엄령을 내렸다고 외국에서 전보가 들어오고 있는데, 사령관이 내린 것은 해당 지구에만 내린 것”이라고 말해 사실상 계엄령 선포를 정부는 묵인한 것이다.

여순사건, 국가보안법을 만들다

현재 집계 결과 1만 명의 양민이 학살된 여순사건은 학살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는 여순사건 배후로 단선단정을 반대하던 김구 세력을 지목했다. 김구를 좌익으로 몰아 정치적으로 거세하려고 했던 것.

그러나 김구가 자신의 배후설에 반발하자, 이승만 정부는 남로당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빨갱이 색출을 위한 법안 마련에 주력했다.

여순사건이 마무리되던 27일 한민당을 중심으로 국회 법사위원회에서 진전이 없던 ‘내란행위특별조치법’ 동의안이 통과됐다. 그리고 11월 9일 본회의에 법안이 제출됐다. 기존 내란죄와 명칭이 중복된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여순사건을 계기로 밀어 붙여진 ‘국가보안법’의 위력을 이승만을 알고 있었다. 군에 의한 양민학살이 진행 중이던 11월 5일 이승만은 담화를 통해, “남녀 아동까지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라”며 “앞으로 어떠한 법령이 혹 발포되더라도 민중이 절대복종하라”고 밝혔다. ‘어떠한 법령’은 ‘국가보안법’을 의미했다.

70년 전 일어난 여순사건은 국가에 의한 빨갱이 색출의 시작이었다. 여순사건으로 시작된 양민학살은 ‘빨갱이’ 처단이라는 명분으로 자행됐고, 제주 4.3사건 양민학살로 이어져 한국전쟁 당시 양민학살로 확대됐다.

그리고 여순사건으로 만들어진 ‘국가보안법’은 법의 이름으로 국가가 국민을 ‘빨갱이’와 ‘빨갱이’가 아닌 자로 구분하는 잣대가 됐다. 그리고 ‘국가보안법’으로 형장의 이슬로 수많은 이들이 사라졌다.

‘빨갱이’ 처단 역사의 시작이었다는 점에서 아직도 여순사건은 금기어이기도 하다. 70년 전 벌어진 여순사건은 아직 살아있는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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