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송도 전경.
아래)영통동구(靈通洞口)/송도기행첩/32.8㎝×54㎝/종이에 담채/18세기/국립중앙박물관. [자료사진 - 심규섭]

단원 김홍도의 스승으로 알려진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은 선비 출신의 화가이자 미술평론가, 감식가였다.
그의 호(號)는 표암(豹菴)인데, 몸에 무늬와 같은 점이 있어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몸에 난 점을 무늬로 본 것은 일종의 해학이다.

[송도기행첩]은 개성 일대의 고적을 여행 답사한 후 그림과 글을 모은 화첩이다.
이 중 개성 전경을 그린 작품과 영통동구(靈通洞口)를 그린 작품이 조금 특별하다.

이 그림에 제발문(題跋文)을 보면 거대한 암석이 있는 영통동구의 느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영통동(靈通洞) 입구에 난립한 암석들은 크기가 집채만 하며, 푸른 이끼들이 뒤덮고 있어 잠시 보기만 해도 어질어질하다. 세속에 전하기를 못 밑바닥에서 용(龍)이 나왔다고 하는데 믿을 만한 것은 못된다. 이렇듯 둘러싼 멋진 장관은 역시 보기 드믄 것이다.(靈通洞口亂石, 壯偉大如屋子, 蒼蘇覆之, 乍見駭眼. 俗傳龍起於湫底, 未必信. 然然環偉之觀, 亦所稀有).”

아무튼 강세황이 그린 개성 전경은 서양화법인 원근법이 적용되어 있고, 영통동구 그림에는 명암법을 사용했다.
강세황이 서양의 원근법과 명암법을 사용한 것은 청나라에 들어와 있었던 서양미술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제 강세황은 1784~85년 청나라 연행(燕行)에 다녀왔다.

강세황은 중국 연행을 통해 서양화를 접하면서 여러 질문을 하고 꼼꼼하게 기록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짧은 시간 안에 서양화법을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실 원근투시법은 사람 눈높이 정도의 낮은 시점에서 긴 복도가 있는 건물이나 풍경을 표현할 때 적합하다. 또한 명암법은 조명을 받는 인물이나 사물에 잘 맞는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높고 긴 복도를 가진 건물은 거의 없었고 조명을 이용한 인물 표현법은 가능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서양화법을 적용할 수 있는 마땅히 환경이 없었다.
그럼에도 조금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서양화법을 적용한 이유는 뭘까?

[송도 전경]이란 그림은 원근법을 적용한 그림이다. 하지만 사람의 눈높이에서 그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높은 산에서 내려다본 것은 아니다.
앞쪽의 성은 정면에서 본 시점이다. 그렇다면 큰 길을 중심으로 양 옆으로 집들이 있는 모습은 성루 위에 올라가서 본 것이다. 길 앞쪽에서 뒤로 가면서 좁아지는 것은 원근법을 적용했다. 하지만 소실점이 명쾌하지 않다.
원근투시법은 한 사람이 본 단일 시점인데, 이 그림은 여러 사람의 시점이 교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영통동구]라는 작품에는 명암법을 사용했다.
위는 밝게 아래는 어둡게 표현해 바위의 무게감과 입체감을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명암법의 핵심이 빠져있다. 그것은 바로 그림자이다. 그림자가 없다보니 커다란 바위가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바위에 명암과 그림자를 함께 넣었다면 입체감은 더욱 잘 표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위에 그림자뿐만 아니라 산과 사람도 모두 평면으로 처리했다.

서양화법의 입장에서 보면 위의 그림은 모두 엉터리이다.
원근법과 명암법은 3차원의 공간을 창조하는 핵심 조형원리이다. 하지만 강세황의 공간은 3차원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특정할 수 없는 4차원이다.

과연 강세황은 서양화법을 잘못 이해해서 엉터리 그림을 그린 것일까?
미술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 작품은 일종의 조형적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강세황은 남종산수화를 그렸던 화가이다. 남종화는 평면적인 선묘, 발묵, 즉흥성 따위가 강조되는 지극히 관념적인 그림이다.
남종화는 실제와 똑같이 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능력을 천기(賤技)라고 경멸했다.
이런 남종화에 전문 화원들의 조형적 요소인 원근법과 명암법을 적용시키는 것은 애당초 무리가 있었다.

그럼에도 강세황은 이질적인 두 요소를 작품 속에 결합시킨다.
이 작품을 감상한 선비들은 시각적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또한 이 둘의 통합을 통해 새로운 미감을 발견했을 것이다.

강세황이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사회적 배경이 있었다.
강세황이 살았던 18세기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성리학의 변화가 있었다. 호락논쟁을 통해 인간의 올바른 본성(인의예지)을 바탕으로 인간의 현실적 욕망(칠정)의 추구할 수 있는 이론이 만들어졌다.
이는 금난전권 폐지, 노비추쇄법 폐지, 관노비 해방 따위를 통해 백성들의 권위를 높이는 제도개선과 새로운 문물의 수용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조선시대 미술작품은 그 자체가 철학이자 정치적 행위의 산물이었다.
미술작품에 변화가 있다는 것은 곧 사회가 변화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강세황의 그림은 이러한 시대를 반영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상당히 정치적이다.

평소 강세황과 가깝게 지냈던 김홍도나 강희언 같은 중인 화원들이 서양화법을 실험하고 구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선비였던 강세황의 영향이 있었다.
정치적 입장을 가지지 않았던 중인 화원이 서양화법을 직접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어려웠다.
그래서 강세황 같은 선비의 정치적 영향력과 보증은 반드시 필요했다.

선비화가의 그림이 관념적이고 정치적이라면, 김홍도와 같은 전문화원의 그림은 현실적이다. 다시 말해, 김홍도가 서양화법을 적용한 작품을 창작하고 있다면 양반사회는 물론 일반 백성들의 생활까지 영향을 주고 있었다는 말이다.

조선 후기 선비들은 새로운 문화를 수용하는데 있어 주저하지 않았다. 다만 그 주체는 조선의 문화였다. 전통을 바탕으로 외부 문화를 수용하고 새로이 창조하고자 했다.

지금도 미술을 비롯한 모든 예술은 정치적이다.
아름다운 꽃을 그리고 무서운 괴물을 그려도 그 안에는 철학과 정치가 오롯이 녹아있다.
미술작품의 진정한 감동은 그림 속에 내재된 철학과 정치에 공감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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