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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토학살, 재일동포들이 자기 목소리 내야”

기사승인 2018.10.12  13: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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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5주기 간토학살 일본 추도식 다녀온 김종수 목사

   
▲ 지난 8월 31일부터 9월 11일까지 열이틀에 걸쳐 일본 곳곳에서 열린 제95주기 간토학살 희생자 추모행사에 참석하고 돌아온 김종수 목사를 지난달 14일 서울역 인근 한 식당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이제 2023년 100년이 되기까지 한국, 조선(북한), 중국, 일본시민들과 재일코리안들이 이제부터라도 힘을 모아 국가의 책임을 묻는 구체적인 실천을 위한 공동행동의 목표를 만들어 나갈 수 있기를 제안드립니다.”

일본 가나가와현 구보산묘지 앞에서 열린 ‘간토(關東)학살 희생자 제95주기 추도행사’에 참석한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김종수 목사는 간토대지진과 조선인 학살 100주기가 되는 2023년까지 일본 정부의 책임을 묻는 공동행동을 펴자고 제안했다.

지난 8월 31일부터 9월 11일까지 열이틀에 걸쳐 일본 곳곳에서 열린 제95주기 간토학살 희생자 추모행사에 참석하고 돌아온 김종수 목사를 지난달 14일 서울역 인근 한 식당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간토학살은 1923년 9월 1일 일본 도쿄 등 간토 지역에 대지진이 발생해 막대한 인명피해가 나자 일본 정부가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해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타고 약탈을 한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계엄령을 선포, 조선인 6천여 명 이상을 집단 학살한 사건이다.

‘간토(関東)학살 희생자 제95주기 추도식 공동준비위원회’ 주최로 8월 30일 서울시민청에서 추도식을 가진 김 목사 일행은 9월 1일부터 일본 각지에서 열린 추도식에 참석하고 100주기가 되는 2023년 전까지 일본의 국가 책임을 묻고 진상규명과 유해 봉환 등을 이루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이 문제를 제기해온 1세대 재일동포와 일본인들이 고령으로 하나둘 세상을 뜨고 더 이상 추모행사에도 나다닐 수 없게 된데다 일본 단체들은 각 지역별 추모행사 외에는 연대활동이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는 현실을 목도해야 했다.

김종수 목사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면 추도비를 세운 주체가 그 지역에서 중심이 되어서 추도식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라며 “90주기 때도 연대해서 행사를 치러냈는데, 올해 95주기에는 각각 흩어져서 진행이 됐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연대하는데 점점 어려움이 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는 것.

그는 “먼저 재일동포가 중심이 돼서 조선 정부하고 같이 협력을 해서 움직이면 좋겠다”면서 “재일동포들이 중심이 돼서 요구를 하게 되면, 그래서 남북, 일본이 함께 이 기구를 만들자고 하면 통일된 구조가 하나 만들어질 수 있다”고 남북관계가 개선되는데 발맞춰 재일동포들의 주도적 역할을 주문했다.

아울러 북측에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일 과거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구를 만나서 한국의 시민단체와 같이 연결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북측과의 만남을 제안했다.

우리 정부의 무관심도 큰 문제거리다. 김 목사는 “올해 추도행사 때 국무총리실에 추도사를 요청했는데 들어주지 않았다”며 “도쿄 도지사인 고이케도 추도사를 거부하고 아베 총리도 근거가 없다고 유감표명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데 대한민국 총리도 추도사를 내지 않으면 어떡하느냐”고 허탈해 했다. “이게 촛불정부에 대한 기대와 맞는 건가. 정말 비판할 수밖에 없다”는 것.

문재인 대통령은 2015년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며 간토 조선인학살사건의 진상규명을 일본정부에 촉구했고, 박근혜 정부의 대일과거사문제 해결에 대한 미온적 태도를 질타한 바 있다.

그는 “청소년들의 교육을 위해서, 100년이 되기 전까지 한국에서 각 지역의 학살사례와 또 각 지역에서 해 온 조사와 추모활동에 대한 역사까지 알 수 있는 역사관을 개관하고 싶다”며 “역사관은 독립기념관과 10㎞ 떨어진 곳, 유관순 생가와 5㎞ 떨어진 데에 우리가 땅을 확보했다. 아우내재단 땅이다. 땅은 충분히 있기 때문에 그곳에 역사 벨트를 만드는 것이 제 구상”이라고 밝혔다.

그는 “한국, 조선, 일본의 관련단체들이 공동행동조직을 만들고 이를 전체적으로 아우르는 조직으로서 ‘대일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한 한·조·일 공동행동’으로 연대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본다”며 “20대 국회에서 식민지 시기에 일어났던 일본제국의 범죄에 대한 포괄적 문제해결을 위한 특별법제정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아울러 “문재인 정부에서 각 현장에서 10여년 넘도록 힘써 온 시민단체들과 함께 조속한 시일 내로 진상규명을 하고, 일본 정부에 그 책임을 물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김종수 목사와 9월 14일 오후 3시 서울역 인근 한 식당에서 가진 인터뷰 내용을 가급적 그대로 옮긴다.

“추도비를 세운 주체가 추도모임 주관”

   
▲ 9월 1일 요코하마의 ‘간토대지진시 조선인학살의 진상을 알리고 추모하는 가나가와 실행위원회’가 주최한 추모행사에서 발언하고 있는 김종수 목사. [사진제공 - 김종수]
   
▲ 일본 각지에서 열린 95주기 간토학살 희생자 추도행사는 추모비를 세운 단체들이 주관했다. [사진제공 - 김종수]

□ 통일뉴스 : 간토 추모제 참가를 위해 일본에 다녀오신 것으로 안다. 누구랑 언제 다녀왔나?

■ 김종수 목사 : ‘간토학살 희생자 제95주기 추도행사 참가단’이라는 다소 긴 명칭을 사용했다. 총 15명이 다녀왔다. 1진은 서울 행사를 마치고 8월 31일 출발해서 9월 1일부터 진행되는 추도행사에 참여했고, 2진은 9월 6일부터 11일까지 참여했다. 열이틀의 여정이었다.

□ 일정을 어떻게 나눌 수 있나?

■ 추모행사가 대부분이었다. 9월 1일 요코하마의 ‘간토대지진시 조선인학살의 진상을 알리고 추모하는 가나가와 실행위원회’에서 주최하는 행사부터 시작됐다.

9월 2일은 치바 후나바시, 9월 4일은 사이타마, 9월 6일은 본진이 와서 재일한국YMCA에서 재일한국기독교단(KCCJ)과 같이 연합예배를 드리고, 9월 8일 도쿄의 아라가와와 요코아미초 공원에서 추도행사를 우리가 준비하고 참가했다. 9월 9일에는 또 치바의 관음사에서 추도행사를 드렸다.

주로 토요일하고 일요일에 집중되는 추도행사에 참여하고, 그 사이사이에는 현재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장, 조선학교와 조선대학을 탐방하는 프로그램을 잡았다.

□ 조선학교와 조선대학은 총련 측과 협의가 돼야 방문할 수 있는 것으로 아는데.

■ 그렇다. 절차가 까다롭기는 하지만 협력을 받았다. 그간 쭉 관련해왔기 때문에 큰 어려움 없이 참여할 수 있었다.

□ 이번 인터뷰에서 주로 다루고 싶은 내용은?

■ 다녀보니까 10년 전과 추모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던 것이 하나 있고, 그 다음에 각 지역의 추도식이 조금씩 차이가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니면서 100년을 앞두고 우리가 뭔가 함께 해나가야 할 과제를 새롭게 발견했다는 것, 연대의 과제를 어떻게 추진해나갈 건가하는 방향에 대해 생각을 다듬은 것이 있다.

□ 10일 이상의 해외 일정을 수행했는데 건강은 괜찮나?

■ 그동안은 현지인들이 학살 현장을 안내해주는 ‘스터디 투어’ 성격으로 많이 다녔다. 조사활동도 많이 했고. 그런데 이번에는 각 현장에서 추도행사를 준비했기 때문에 학살현장을 찾아다녀야 했다.

사실 도쿄의 전철이 굉장히 복잡한데 이것 때문에 많이 걸었다. 무거운 짐들을 가지고 나르는 과정도 많이들 힘들어 했고. 저도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가 있었고 갑자기 허리에 통증이 와서 8일부터는 고생을 좀 많이 했다.

□ 선택의 여지가 없이 강행군으로 다녀야 했으니 무리가 됐겠다. 다른 분들도 비슷했나?

■ 참여자들의 느낌은 대체로 이랬다. 아무리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이라고는 하지만 이 정도 슬프고, 이 정도 몸도 마음도 아플 줄 몰랐다. 그런데 ‘민족’이라고 하는, 조선학교를 중심으로 해서 엮어내는 재일동포들의 어떠한 신앙과도 같은 ‘우리’를 지켜 나가려고 하는, 또 ‘우리’의 아픔을 함께 공감해 나가려고 하는 그 움직임에 대해서 굉장히 많이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 한국 사람들이 재일 조선학교에 가면 감동을 많이 받는 것 같더라.

■ 조선학교를 갔다 오면 자기의 정체성을 스스로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 같다.

□ 여러 지역들을 직접 다니면서 추도식을 참석하고, 같이 주최하기도 했다. 구체적인 지역에서의 추도식이 한국에서 하는 추도식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소개해 달라.

■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면 추도비를 세운 주체가 그 지역에서 중심이 되어서 추도식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게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 주체에 따라서 종교적인 형태도 다르게 나타나고, 문화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그런 것 없이 그냥 일반 시민들로 구성된 모습으로도 나타나기도 했다.

치바의 마고메 위령원 추도비는 우리 재일 동포들이 세운 추도비 중에서 가장 크고, 그 추도비는 정말로 학살한 주체, 학살당한 희생자들의 숫자,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조선인들이 어떻게 다시 힘을 모으고 단결해 갈 건가라고 하는 장문의 추도문을 기록한 곳이다. 그곳에서는 역시 재일동포들이 중심이 됐다.

요코아미초 공원에서는 일조협회가 세웠기 때문에 일조협회를 중심으로 해서 추도식이 열렸다. 그리고 요코하마 구보산에 있는 공원에서는 구체적으로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학살을 목격했던 사람이 세운 추도비 앞에서 시민들, 특히 요코하마 지역의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들이 중심이 됐다. 그들은 그동안 쭉 연구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그 지역 추도활동의 중심이 돼서 운영하는 모습이었다.

그 다음에 군마의 성도사(조도지), 치바의 관음사(칸온지), 사이타마의 상천사, 이런 추도비를 관리하는 절과 연계해서 추도회를 하는 그런 모습이었다. 아무튼 공통점은 추도비를 세운 주체가 추도모임을 주관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됐다.

고이케 효과 “정말 많은 사람들이 긴 줄을 섰다”
일본 연대행사 못해...“재일동포들이 자기 목소리 내야”

   
▲ 관음사 인근 세 명의 조선인 유골이 묻혀 있는 추도비 앞에서. [사진제공 - 김종수]
   
▲ 지바현 후나바시 마고메공원 추도식 모습. [사진제공 - 김종수]

□ 한국에서 간 분들은 한국에서 추도하는 것보다 생생한 느낌이 있었을 것 같다.

■ 아무래도 추도비와 관련된, 추도비를 세우는 과정과 상황들을 이해하면서 일본 시민사회가 이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시대별로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런 것을 깨닫게 됐다.

이를테면 1923년 여기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 이 사건을 왜, 누가 추도하려고 하는지. 그리고 추도비에 어떤 문구를 집어넣느냐에 따른 정치적 선택 과정에서 그 정서랄까, 그 지역에서 얼마만한 고민을 하면서 거기에 이름을 집어넣고, 빼거나 했던, 또는 은유적으로 표현하거나 했던, 어떤 상황들을 볼 수 있는 거다.

특히 가장 최근에 세워진 도쿄 스미다구 아라가와 추도비에는 학살한 주체인 군대, 경찰, 자경단이 조선인들과 중국인들을 어떻게 학살했다라고 하는 것들을 명확하게 썼다.

시민들이 모금해서 세운 추도비에 정말 많은 사람들이 긴 줄을 섰다. 일본의 그 좁은 골목 약 30m 정도에 우리가 머문 30분 동안 그 줄이 유지되면서 계속 이어졌다.

예전에도 이랬는지 물어봤더니, 고이케 유리코 도쿄 도지사가 추도사를 작년부터 보내지 않자 양심적인 일본인들이 오히려 자극을 받아서 굉장히 많아졌다며, ‘고이케 효과’라고 이야기하더라. 그때부터 요코아미초 공원에도 추도하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들었다.

□ 도쿄 도지사가 추도사를 안 보내니까 오히려 시민들이 우리라도 추도하겠다고 나선다니 참 특이하다.

■ 도이케 도지사가 추도사를 보내지 않겠다고 한다면, 우리 시민들이 보내겠다고 해서 추도사를 계속 단체들한테 보내고 그것을 모으고 그런 운동이 한참 일어났다더라.

□ 그런 운동을 이끈 주체는 누구인가?

■ 각 지역단체이기도 하고, 물론 ‘국가책임을 묻는 모임’에서도 주최했지만 시민들이 더 자발적으로 붐이 되어 일어났던 모습이기도 했다.

□ 현장 여러 곳에서 추도식도 참가했고 다양한 주체들도 만나봤는데, 한국과 일본의 연대, 일본 안에서의 연대, 한국 안에서의 연대, 이런 과제를 진전시켰다고 했는데, 무슨 내용인가?

■ 우선, 10년전에 제가 심우성 선생과 한신대 서굉일 교수를 모시고 일본에 갔었을 때 재일한국YMCA 강연장에서 350여명 정도가 오전, 오후 내내 심포지엄과 추도행사를 했다. 아주 성황리에 전체가 연대해서 참여했다.

그리고 90주기 때도 연대해서 행사를 치러냈는데, 올해 95주기에는 각각 흩어져서 진행이 됐다. 나는 그것이 각 단체의 컨셉이었나 싶었는데, 그것은 아니었던 것 같고 연대하는데 점점 어려움이 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한국에서는 제 시민단체들이 연대해서 95주기를 맞아 서울시민청에서 추도행사를 했는데 일본에서는 그렇게 연대해서 행사를 하지 못한 것이 상당히 아쉽다는 자기반성을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 일본내 단체들 간의 연대가 어려운 이유가 뭐라고 하나?

■ 그냥 하나 되기가 점점 어렵다라는 그런 이유였던 것 같다. 그걸 제가 임의적으로 해석해서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래서 100년을 맞이하는 그때에도 약간 우려하는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물론 한국에도 간토 관련 시민단체들이 많고 활동이 활발해서 연대하는 차원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지 유족들과 함께 학자들, 시민단체들, 종교단체들 이렇게 엮어갈려고, 또 그것을 100년을 앞두고 연대체를 구상하면서 올해 연합행사를 진행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앞을 내다보면서 움직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랄까, 그렇지만 그것에 대한 필요성은 어느 때보다 더 큰 것 같다. 우려와 과제랄까, 이것이 동시에 있는 모습이었다.

□ 거꾸로 한국에서 연대의 틀을 세우고 일본에 제안해서 100주기 때는 같이 모일 수 있는 방안도 모색해볼 수 있지 않나?

■ 그렇다. 오늘 이야기 하려고 하는,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재일동포들의 아픈 역사, 죽은 자의 권리, 살아있는 자들이 당하고 있는 배제와 차별, 이 부분을 재일동포들이 각 지역에서 중심이 돼서 거기에 일본인들과 함께 연대해서 부각시켰어야 하는데, 제가 그동안 쭉 일본을 다니면서 재일동포들이 주가 되지는 못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지금 100년을 앞두고 남북이 분위기가 좋아지는 속에서 이제는 재일동포들이 뭔가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재일동포들이 중심이 돼서 일본단체와 한국 정부, 또는 한국의 시민단체들을 끌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이야기했고, 재일동포들도 그런 필요성을 느낀다고 했다.

그래서 그전까지는 올해 돌아가신 이일만 선생께서 강제연행진상조사단의 여러 사업 중에 간토학살 문제를 다루고 있었는데, 제가 요청을 했다. “이게 그렇게 돼서는 안 될 것 같다. 간토문제 해결을 위한 독립적인 기구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한국에도 본부를 두고 북(조선)에서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조직이 있어서 남북과 재일동포가 하나로 이 문제를 풀어갈 수 있도록 힘을 모으는 과정이 필요하겠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이 역사를 어떻게 풀어갈 것이다’라고 하는 명확한 방향과 구체적인 방안을 가지고 일본사회에 함께 협력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바람직스럽다. 그것을 재일동포들이 먼저 중심이 되어서 풀어나가고, 남과 북도 함께 협력해야 한다.

남쪽이 고향인 사람이 대부분이고 이들이 희생됐는데, 남쪽이 그동안 한일문제에서 이 부분을 소홀히 해왔다. 한국 정부가 그렇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한국 시민단체가 한국정부한테 요구하는 것과 재일동포들이 한국정부에 요구하는 것이 다르지 않겠나.

총련쪽 재일동포들이 어쨌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하는 조국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남한 정부에 구체적으로 무엇을 요구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에 명확하게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게 정치적인 문제로 좀 어렵다고 한다면, 한국, 조선, 일본에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역본부들을 만들어서 서로 간에 연대하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목소리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그래서 일본의 국가책임을 묻고 남북 정부에서도 그들이 해야 할 국가로서의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래야 재일동포들이 일본 정부에도 강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많이 공감들을 했다.

□ 재일동포들이 일본 사회에서 목소리가 너무 작다. 일본 정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안다.

■ 작다. 지금까지 경계인이라는 위치에 서 있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이제 남북화해 분위기 속에서 그 흐름을 타고서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해서 강하게 양쪽 정부에 요청할 수 있어야 된다. 과거사 문제 중에서 상당한 부분이 재일동포에 관련된 문제니까 그런 목소리를 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일본 정부한테 국가책임을 물어주길”

   
▲ ‘1923한일재일시민연대’가 2013년 6월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교육원에서 주최한 간토학습회 모습. 강덕상 선생이 발표자로 참석했지만 지금은 연로해 추도행사에서 만날 수 없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추도행사에 빠질 수 없는 헌무. [사진제공 - 김종수]

□ 간토 문제에 관한 북측의 입장이나 현황을 소개해 달라.

■ 북쪽은 해마다 아주 강한 성명을 일본 정부를 향해 내고 있다. 그런데 이 문제를 풀어가는 지속적인 조사단이라든지 기구랄까 이것은 제가 잘 모르겠다.

좀 만났으면 좋겠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일 과거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구를 만나서 한국의 시민단체와 같이 연결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

□ 이번 인터뷰를 통해서 간토 문제 해결을 위해서 북측에 만나자는 메시지를 발신하는 것인가?

■ 그렇다. 메시지에 그 부분이 있다.

□ 입장은 분명한데, 실제로 움직임은 미약한 것 같다.

■ 그 역할도 재일동포들이 해줬으면 좋겠다는 거다. 먼저 재일동포가 중심이 돼서 조선 정부하고 같이 협력을 해서 움직이면 좋겠다. 사실 북에서 조사를 한다고 하더라도 대부분 조선대학교나 총련을 통해서 하게 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재일동포들이 중심이 돼서 요구를 하게 되면, 그래서 남북, 일본이 함께 이 기구를 만들자고 하면 통일된 구조가 하나 만들어질 수 있다. 물론, 총련만 이 부분에 관여할 건 아니고, 실제로 이 사건 1세대 연구자는 민단쪽 강덕상 교수다.

□ 한국에서 강덕상 교수 발표할 때 취재한 적이 있다.

■ 그분도 지금 많이 연로하셔서 지금 86세쯤 되신 것 같다. 10년 전에 뵀던 분 중에 상당수 떠나가신 분들이 있다.

이번에 좀 안타까웠던 게 10년 전에 모셔갔던 심우성 선생이 올해 초에 돌아가셨다. 공주박물관 관장이셨고 민속학을 하신 분인데, 그분이 치바 관음사에 보화종루를 세운 분이다. 조선에서 흙도 가져가고, 나무도 가져가고 한국의 건축가들과 함께 가서 보신각종 모양의 종루를 만들었다.

또 10년 전에 뵀던 금병동 조선대 교수도 2010년에 타계했고, 치바에서 일어난 조선인 학살사건의 마지막 목격자이자 증언자인 야끼가야 타에코 할머니도 돌아가셨다. 그리고 지금 굉장히 연로하셔서 추도행사에 한 번도 뵙지 못한 분들이 강덕상 교수, 야마도 쇼지 선생이다. 노구를 이끌고 어디를 돌아다니실 상황이 안 된 거다.

100년이 되기까지 5년 남았는데 5년동안 어떤 일이 있을지 몰라서 사실 우리들로서는 참 안타깝다. 5년이 되기 전 뭔가 빨리 우리의 과제를 성취해야 되는 그런 안타까움이 있는 거다.

□ 결론은 재일동포들이 중심이 돼서, 남북 정부와 일본 정부, 또 시민단체들에도 제안해서 큰틀을 짜야 된다는 것 같다. 그러나 아무래도 남쪽 정부와 친연성이 없고, 연로하신 분들이 자연사하고 있다는 문제도 놓여있는 것 같다.

■ 그렇다. 그분들이 모아놓은 성과가 있는데, 자료다. 사실 금병동 선생이 재일 조선대학교의 교수지 않나. 그런데 그 자료를 대한민국 국가기록원에 맡겼다. 굉장히 특이하다. 그러면 그분이 돌아가시면서 대한민국 정부에 기대하는 게 있을 거다.

아마 금병동 선생은 대한민국 정부가 일본 정부한테 국가책임을 물어주기를 바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한다. 2010년에 돌아가셨는데 사실은 조선대 쪽에서도 잘 모른다. 깜짝 놀라더라.

강덕상 교수나 야마도 쇼지 박사께서 이루어 놓으신 연구업적도 대단하다. 그동안 이루었던 연구의 성과를 보면 일본 정부가 조선인 학살에 대한 증거가 없다고 말을 못한다.

한국 정부가 책임지고 이 자료들을 빨리 정리해서 책임을 물어야하는 과제가 있는데 이 작업을 안 하는 거다. 연구자들의 연구가 한국정부의 진상규명을 위한 구체적인 증거자료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안타깝다.

□ 100주년이 다가오고 있다. 준비를 어떤 방향에서 어떤 방식으로 하려고 하나?

■ 가장 큰 과제는, 대한민국 정부가 해야 할, 국가의 책임을 꾸준히 물어가는 것이 우리 시민단체가 하는 큰 일 중의 하나일 듯싶다.

대한민국 정부가 지금까지 연구자들과 활동가들이 모아왔던 그 자료들을 빨리 정리를 해서 외교부를 통해서 아베 총리에게 국가책임을 묻고 정부가 공식적으로 국가 주도의 추도회를 여는 것이 100년 이전까지 국가가 해야 할 일이라고 본다.

이미 2003년에 일본변호사연합회가 조사활동을 통해서 일본 정부가 책임이 있다고 선언한 적이 있다. 고이즈미 총리한테 권고서를 내면서 책임있다고 인정해라. 사과해라. 유족들한테도 배보상해라. 그리고 다시는 재발하지 않도록 해라라는 권고문을 냈다. 일본의 법조인들이 아무 근거 없이 할 수 없는 일이다.

두 번째는 국가가 나서서 유골들을 모셔오는 작업을 해야 한다. 이미 묘지에 있는 유골, 또 묘비에 이름도 있는 유골 등 확보된 유골이 있다. 그 다음에 이름이 없지만 학살된 조선인의 유골이라고 보관돼 있는 유골도 있다.

정말로 이것은 안타까운 경우인데 요코아미초 공원 위령당에는 지진으로 인해서 죽은 일본인들의 유골과 학살된 유골을 그냥 한데 뒤섞어버린 게 있다. 증거를 없애기 위해서 학살된 조선인을 다 모아서, 살아있는 조선인 노동자들을 불러서 기름을 붓고 태워서 일본인 유골과 합사해서 증거를 인멸해버린, 그 유골들의 문제는 어떻게 할 건가.

국가가 일본 정부와 어떤 형태로든 협상을 통해서 정말로 가져올 수 있는 유골들은 조속히 가져오고 어려운 부분들은 추후의 문제로 놓더라도 유골봉환은 100년이 되기 이전에 돼야 한다.

그리고 지난번에 우리가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위를 통해 외교부에 계속 질의를 하게 했고, 결국 외교부가 명부를 내놨다. 그때 실질적으로 명부만 내놨지 이걸 가지고서 국가가 조사작업을 안하고 유족찾기도 안하고 있다. 그것을 행안부가 시민단체들과 함께 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 지방자치단체와 협력해서 유족을 찾는 작업을 조속히 실시해야 한다.

□ 가족찾기는 DNA 검사를 해야 하나?

■ 그렇다. 그런 여러 가지 작업들은 민간에서 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기 때문에 정부가 100년이 되기 전까지 꼭 추진해 나가야 한다.

아우내재단 땅에 2023년까지 역사관 건립 추진
일제 식민시기 범죄 포괄적 해결 위한 특별법제정 필요

   
▲ 김종수 목사는 2023년 100주기를 앞두고  ‘대일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한 한·조·일 공동행동’으로 연대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제안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현재 확인되거나 추산되는 유골 숫자가 있나?

■ 정확한 숫자는 우리가 알 수 없다. 우선, 제가 알고 있는 것만 하더라도 구체적으로 무덤 위에 세워진 이름이 있는 두 개의 추도비가 있다. 사이타마 강대흥 추도비와 군마의 구학영 추도비다.

특히 강대흥은 그 명부를 통해 유족도 찾았는데, 후손이 헛묘를 만들어서 해마다 추도를 해왔다. 한 사람의 유골이라도, 진토가 되었겠지만 고향으로 잘 모셔와서 고향땅에 묻히도록 만드는 것이 정부가 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지역에서 추도비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고 하지만 어디에 묻혀 있는지 그 지역 사람들은 안다.

국회에 원하는 부분이 또 있다. 19대 국회 때 특별법을 발의 했는데, 유기홍 의원이 대표발의해서 여야 의원 104명이 발의했는데 결국 폐안이 되고 말았다.

이번에 왜 특별법을 서두르지 않았냐면, 당시에 특별법이 통과되지 않은 이유는 새누리당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던 사람이 도종환 의원이고, 박근혜 정부가 과거사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한다고 미온적 행태를 질타했던 게 문재인 야당 대표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실질적으로 행정부를 맡고 있어서 기다리고 요청하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되지 않았다. 특히 올해 추도행사 때 국무총리실에 추도사를 요청했는데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제가 “아니, 도쿄 도지사인 고이케도 추도사를 거부하고 아베 총리도 근거가 없다고 유감표명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데 대한민국 총리도 추도사를 내지 않으면 어떡하느냐” 그렇게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추도사를 내지 않은 거다.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이게 촛불정부에 대한 기대와 맞는 건가. 정말 비판할 수밖에 없다.

□ 담당자는 그 사유를 뭐라고 했나?

■ 특별한 사유가 없다. 여러 가지 일정상 뭐라뭐라 하지만, 관련 자료까지 다 보내줬다. 문재인 대통령 야당대표 시절 했던 자료와 다른 데서 했던 추도사 다 모아서 보내줬는데도 불구하고 추도사 하나 보내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납득이 안 간다.

행정부가 이렇게 자기 역할을 못한다면 특별법을 다시 만들 수밖에 없는 거다. 특별법 만드는 것도 동시에 추동하려는 생각은 가지고 있다.

그 다음에 민간단체가 할 역할인데, 우리가 일본에서 역사관, 자료관을 만든다는 게 일본의 정치상황으로 볼 때 실질적으로 굉장히 어렵다. 물론 아라가와 강가에 있는 조그만 사무실겸 자료관은 있지만 이것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청소년들의 교육을 위해서, 100년이 되기 전까지 한국에서 각 지역의 학살사례와 또 각 지역에서 해 온 조사와 추모활동에 대한 역사까지 알 수 있는 역사관을 개관하고 싶다.

2023년에 개관을 할 수 있도록 하는 5개년 프로젝트를 세우고 ‘기억과 평화’라는 사회적협동조합을 지금 신청했고, 추도시설과 역사관을 만들고 다양한 역사교육을 하는 협동조합을 지금 추진해 나가고 있다.

역사관은 독립기념관과 10㎞ 떨어진 곳, 유관순 생가와 5㎞ 떨어진 데에 우리가 땅을 확보했다. 아우내재단 땅이다. 땅은 충분히 있기 때문에 그곳에 역사 벨트를 만드는 것이 제 구상이다.

독립기념관,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반이었던 이동녕의 생가도 거기에 있고, 아우내 장터, 아우내의 민중들이 만세를 불렀던 독립만세거리도 있고, 아우내독립운동의 숨은 지도자였던 김구응, 최정철 애국지사의 묘소도 있고, 유관순 생가도 있다. 곳곳이 다 역사의 유적이다.

거기에 3.1운동과 아주 직접적인, 그래서 그렇게 강하게 피해를 받았던 간토의 역사관까지 세우고, 또 동학의 장수들이 학살당하고 마을 전체가 전소된 세성산 전투지와 개목마을 전소지 그런 지역까지 쭉 아우르고 있기 때문에 청소년들의 역사교육 벨트가 될 수 있다.

천안시 병천면 개목마을 동학에서부터 3.1운동, 임시정부 수립, 간토역사관, 독립기념관, 대일항쟁기의 역사를 쭉 볼 수 있는 교육 벨트가 될 수 있다. 병천, 목천 일대가 아주 역사교육의 중요한 곳이기 때문에 그곳에 역사관을 만들려고 한다.

□ 그곳에 목회하는 담당교회가 따로 있나?

■ 아힘나학교의 교목이고 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함께 예배드리는 느티나무교회이다. 아이들하고 성경학습하고 지금은 아우내재단 이사로 있다. 아우내재단은 안병무 박사가 한국신학연구소를 만들면서 했던 것이고, 우리 스승이기도 한 김성재 김대중도서관 관장이 실질적인 이사장 역할을 했다.

최근 재단이 아무 역할을 못하니까 우리가 전세로 들어가서 집도 고치고 길도 고치고 그런 상황이다. 거기를 쓸모있는 땅으로 바꾸어 나가는 작업을 하면서 그 속에서 마을을 가꿔 나가는 그런 작업을 하고 있다. 이번에 농림부의 마을 활성화 사업이 선정되어 역사를 컨텐츠로 한 마을사업도 하고 있다.

□ 중국 쪽 움직임은 어떤가?

최근에 중국에 간토학살 희생자 유족도 유족회를 조직해서 한국의 유족회하고 같이 연대를 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한국과 조선, 중국, 일본이 함께 모여서 공동 역사교과서, 역사교재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것들을 함께 아울러서 100년을 우리가 어떻게 맞을 것인가 하는 남.북.중.일 포럼을 내년 초반 정도에 하려고 한다. 우리로서는 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내년에 각국을 초청해서 포럼을 하면서 향후 간토 100년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공동행동 로드맵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 중국에서의 유족 모임에 대해 더 자세히 소개해달라.

■ 아마 작년부터 유가족 모임이 좀더 활발히 움직여 일본쪽 하고의 교류가 시작된 것 같다. 1923년 당시 조선은 식민지 상태였기 때문에 진상조사, 유골 본국환수가 전혀 안됐지만 중국에서는 당시 사건과 관련된 기록과 유골들을 전부 중국으로 가져갔다. 그 이후에 일본과 보상문제를 협상하는 과정에 중국 정부가 변해서 유야무야된 것 같다. 최근 들어서 유족들을 중심으로 해서 배보상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 있다.

□ 우리는 희생자 수를 6천명 내지는 몇 만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중국은 어떤가?

■ 500명 정도인 것으로 안다.

□ 중국은 더 큰 난징대학살이 있었지 않나. 최근 시진핑 주석인 난징대학살 추모 행사에도 참석한 것으로 아는데, 그런 데와 연대해 일본 정부를 상대하는 것은 어떤가?

■ 난징은 간토와 같이 안 하려 할 거다. 난징 자체가 워낙 크다 보니까.

□ 간토 문제 만을 다루는 별도의 특별법과 별도의 기구를 바라지만, 강제징용과 ‘위안부’ 배보상 문제 등 여러 문제가 있다. 일제식민시기 여러 문제를 다루는 것 중의 하나일 텐데, 별도의 기구, 별도의 법으로 가려고할 경우 북이든 우리 정부든 쉽지 않아 보인다.

■ 바라기는 식민지 시기에 일본제국이 자행한 학살, 강제연행, 성노예, 이주동포문제 등에 대한 포괄적 조사기구가 만들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러나 정부는 그동안 위안부 문제에만 집중해 왔다. 최근 역사시민단체와 대중운동단체가 연대하여 ‘강제연행 문제 해결과 대일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행동’을 만들었다.

안타까운 것은 조직 명칭이 ‘강제연행문제’가 전면에 부각되어 있다. 대일과거사 문제는 무엇의 비중이 높거나 낮을 수 없다. 현실적인 이유로 조직명칭을 그대로 고수하였기에 간토조선인학살문제에 대한 별도의 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각 과제에 대한 한국, 조선, 일본의 관련단체들이 공동행동조직을 만들고 이를 전체적으로 아우르는 조직으로서 ‘대일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한 한·조·일 공동행동’으로 연대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본다.

20대 국회에서 식민지 시기에 일어났던 일본제국의 범죄에 대한 포괄적 문제해결을 위한 특별법제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에서 각 현장에서 10여년 넘도록 힘써 온 시민단체들과 함께 조속한 시일 내로 진상규명을 하고, 일본 정부에 그 책임을 물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수정, 18:25)

김치관 기자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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