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일보 다시보기’ 연재를 다시 시작하며

‘민족일보 다시보기’ 연재를 다시 시작한다. ‘민족일보 다시보기’ 연재는 지난 2007년 10월 31일 첫 회를 시작으로 게재돼 부침을 겪다가 2011년 7월 2일 36회를 끝으로 중단된 바 있다.

알다시피 민족일보는 1961년 2월 13일부터 5월 19일까지 지령 92호의 짧은 삶을 살았다. 단명(短命)하긴 했지만 민족일보는 당시 저 유명한 ‘양단된 조국의 통일을 절규하는 신문’ 등 4대 사시(社是)를 내걸고 사월혁명 직후 “한국사회의 새로운 발전과 모색을 대변하는 신문”으로서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다.

통일뉴스가 ‘민족일보 다시보기’를 연재하는 이유는 일찍이 통일뉴스가 민족일보의 얼을 이어받겠다고 국내외에 선언한 바 있으며, 특히 4월혁명 직후 한국사회를 논한 민족일보가 6.15시대를 지나 4.27판문점선언 시대를 맞는 지금 남북관계 발전과 민족통일에 무언가 긍정적 메시지를 줄 것이라는 기대에서이다.

‘민족일보 다시보기’ 란에는 민족일보에 실린 여러 가지 내용이 게재될 것이다. 사설, 논단을 비롯해 인터뷰, 기획연재, 세계의 동향 그리고 생생한 사회면 기사들이 매주 금요일에 한 편씩 실릴 것이다. 게재 방식은 첫째 원본을 싣고, 둘째 그 원본을 현실에 맞게 수정해 싣고, 셋째 가능한 경우 해설을 덧붙일 것이다. 특히 이 작업을 주도하는 이창훈 4.9통일평화재단 사료실장께 감사드린다. / 편집자 주

 

농촌의 인상 5

 

「우릿간」 같은 농가(農家)의 모습

=양식이 모자라 「쌀」을 「고구마」로 바꿔먹고=

가난 속에서 가난만을 되풀이

 

하룻밤 편히 쉴 영일(迎日)도 없는 시골이다. 몰아치는 삼동(三冬)의 매서운 눈보라도 감싸줄 이불 한 채 제대로 마련없이 넘겼다는 농민들의 생활이다.

三천여세대로 구성된 김제군(金堤郡) 금산면(金山面)은 八할에 가까운 二천三백여세대가 납작한 오두막에 살고 있다.

이들의 보금자리는 작대기 같은 기둥에 흙과 돌과 짚을 엮은 초라한 것이었다.

이른바 초가삼간도 못되는 비좁은 집! 여기서 아들 손자 며느리는 불편을 참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바람만 좀 세게 불어도 금시 쓰러질 것 같은 이 가난한 집마저 갖지 못한 채 남의 집 셋방살이로 전전하는 농가도 수없이 많았다.

호남(湖南)하면 김제(金堤)를 말하고 김제하면 봉남면(鳳南面)을 부를 만큼 쌀농사로 이름난 송내리(松內里) 마을의 경우를 보자. 기와집이라고는 그림자도 없는 이 마을은 마흔 두 채의 초갓집에서 예순 두 세대가 살아가고 있었다.

三분의 一에 가까운 스무 세대가 단간 짜리 초가마저 마련 없이 남의 집 문간채의 방을 빌고 있는 실정이다.

어느 외국인의 굴욕적인 표현과 같이 소나 말의 우리로만 보였다는 농가의 모습은 오랜 세월을 두고 휘몰아치는 풍상(風霜)속에서 흙벽에 틈이 나고 기둥에 벌레구멍만이 뚫려 있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농촌문화의 향상이나 농촌경제의 부흥을 기대할 수 있을는지 의심스러웠다.

논 다섯 마지기를 가꾸어 열두 가마의 쌀과 두가마의 콩을 밑천으로 한해 한해를 넘긴다는 어느 농삿집에 들어서 봤다.

쉰둘난 이집의 주인은 그들 내외와 함께 위로 여든셋의 노모(老母)를 모시고 슬하에 스물 두 살의 큰아들을 맏으로 한 여섯 아이들과 다섯 평 정도의 비좁은 방에서 그날 그날을 살아가고 있었다.

부엌에 잇달은 세평정도의 큰 방은 노모(老母)를 비롯한 두 아이와 그들 내외를 합한 다섯 식구의 거처로 쓰고 있었다. 큰 방에 잇달아 있는 두 평 정도의 작은 방은 큰아들을 비롯한 네 아이들의 잠자리로 이용되고 있었다.

큰방에는 웃목으로 궤짝 비슷한 장농이 하나 놓여 있었고 봉창위로 선반이 하나 가로질러 있었다. 선반위에는 「소쿠리」와 반가마 가량의 씻나락(볍씨)이 얹혀 있었다. 네 명의 아이들이 기거하는 작은 방은 창고로도 씌어지고 있었다. 양식이 모자라 쌀과 바꾸었다는 아홉가마의 고구마에 돌돌 만 멍석이 웃목으로 놓여있었다.

이러고 보면 말이 다섯평 남짓한 두간방이지 궤짝이며 고구마 가마에 태반을 빼앗겨 아홉 명이 사용하는 실지면적으로는 겨우 세평정도였다.

아홉 식구의 침구로는 한 채의 이불과 헤진 두장의 담요였다. 이불은 큰 방에서 덮고 담요는 작은 방에서 차지하고 있었다.

까실까실한 방바닥에 요 한 장 펴지 않고 일에 지친 피곤한 몸을 아무렇게나 눕히는 것이었다.

이렇게 그들은 하룻밤 편히 지낼 영일(寧日)도 없었다. 어쩌면 흙벽의 초가는 농촌의 대륙적인 상징인지도 모른다. 거기서 나서 거기서 자라 수십 년을 지내도 새로이 해마다 집을 잇는다는 것 외에 변하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흙에 살며 흙만을 의지하는 그들에게 있어 부락은 사회의 전부였고 초가는 그들의 성(城)이었다. 의식주의 모든 것이 시원치 못한 집을 중심으로 자급자족되고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었다. 가난속이 가난만이 악순환(惡循環)할 뿐 원시(原始)의 껍질을 벗지 못하고 있다.(사진은 초라한 농가의 모습)

▲ 농촌의 인상 5 [민족일보 기사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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