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타자의 부름에 응답하는 이들은 결코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다 (레비나스)

 

 가족  
 - 진은영

 밖에선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
 집에만 가져가면
 꽃들이
 화분이
 다 죽었다


 고대 인도의 서사시 ‘바가바드기타’에는 크샤트리아(무사 계급)의 해탈에 대한 지혜가 나온다. 

 왕위를 찬탈한 삼촌과 그의 친족들을 몰아내고 자신이 왕위를 이어야 하는 왕자 아르주나는 깊은 고뇌에 빠진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한다. ‘차라리 그들의 칼에 맞아 죽고 싶다!’ 

 그때 이 비슈누의 화신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의 마부로 나타나 그에게 가르침을 준다. ‘당신은 수많은 전쟁터를 누벼왔다. 그때는 왜 적을 죽이는 고통을 느끼지 못했는가? 적들이 친족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는가? 그럼 친족은 죽여서는 안 되고 남들은 죽여도 된다는 말인가?’    

 비슈누는 이 세상이 혼란에 빠질 때마다 지상에 나타나 다시 질서를 회복하는 신이다. 그는 아르주나에게 ‘정의의 전쟁’에 참여하고 있음을 일깨워준다. ‘그대는 자신의 욕망을 위하여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불의의 세력을 몰아내는 정의로운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대가 비록 친족일지라도 그들을 죽여야 하는 것이 그대가 해탈을 향해가는 길이다.’ 

 그동안의 크샤트리아의 윤리는 친족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크샤트리아가 친족을 살해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비슈누 신의 화신 크리슈나는 친족을 죽이는 것이 해탈의 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세상은 바뀌었다. 부족 사회에서는 친족이 공동체의 단위였다. 따라서 무사 계급은 부족을 보호하는 게 당연한 의무였다. 하지만 이제 부족사회는 무너지고 부족을 넘어서는 대제국이 형성되는 시기였다. 이럴 때의 무사 계급은 어떤 의무를 다해야 하는가? 

 비슈누 신은 아르주나에게 변화된 세상의 새로운 윤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크샤트리아는 부족을 넘어선 새로운 윤리 의식을 가져야 한다!’

 강남의 모 여고에서 시험을 치른 결과 쌍둥이 학생 둘이 각각 문과 이과에서 전교 일등을 한 것이 부정 의혹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녀들의 아버지가 그 학교의 교무 부장을 맡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 사회의 ‘가족주의’는 블랙홀이다. 모든 걸 삼켜버린다. 가족을 위해서는 법도 정의도 없다. 가족을 위한 모든 범죄행위는 정당화되어 버린다. 

 한 편으로 가족은 ‘나’이기 때문에 서로 함부로 대한다. 최소한의 인간에 대한 예의도 없다.   

 ‘밖에선/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집에만 가져가면/꽃들이/화분이/다 죽었다’

 우리 사회는 아직 ‘부족사회’다. 부족이 아닌 사람은 남이다. 부족은 가족, 친족에 한정되지 않는다. 같은 학교에서 잠시 공부한 동창회가 될 수도 있고 우연히 같은 고향에 태어난 동향인일 수도 있다.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는 ‘부족사회의 문제’일 것이다. 부족을 넘어선 윤리가 형성되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헬조선’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딸들을 위해 부정을 했다고 하더라도 우리 사회의 아버지들은 진심으로 잘못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사랑, 정의가 가족에 한정된 건 결국 믿을 데라곤 가족밖에 없다는 참담한 현실 인식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삶이 위기에 빠졌을 때 누구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노후에 믿을 사람이 누굴까? 국가도 사회도 우리를 보호해주지 않는다. 우리는 안다. 아무리 국가와 사회에 큰 기여를 했다고 하더라도 한 순간에 낭떠러지로 추락할 수 있다. 최후의 보루는 결국 가족일 수밖에 없다. 

 2000여 년 전의 고대 인도의 고뇌를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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