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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이야기, 길 따라 흐르지 못하는 물(1)

기사승인 2018.09.08  09:5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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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해랑 연재소설> 노동자 신돌석씨의 하루 (7)

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연재를 시작하며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 온 뒤, 돈도 없고 학벌도 안 되고 빽도 없어서 서울 근교 공단에 있는 중소기업 공장에 취직했던 신돌석씨. 가진 거라곤 의리 있게 산다는 생활 신조 하나였던 그가, 27세 되던 1985년 전국의 공단지역을 휩쓸었던 노동운동의 폭풍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들어가 인생의 변화를 겪고, 의리만으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노동운동가가 되었다가 어느덧 이순의 나이가 되어서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허구입니다. 그러나 있을 수 있었던, 지금도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허구의 이야기는 과거만을 다루는 후일담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이 필요했는지,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었고,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결국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살 만한 세상인지를, 살 만한 세상이 되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물어 보려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 정해랑

 

   
▲ [삽화 - 김윤기]

사상 최고로 더운 날씨 때문에 태풍이라도 불어왔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는데 마침내 6년 만에 태풍이 내륙을 관통하더니 비가 내렸다. 마을버스를 기다리며 서 있는데 발 옆으로 물들이 밀려들어 와서 구두를 적셨다. 바지까지 젖지 않으려면 물이 흘러 들어오는 곳을 이리저리 피해서 발을 옮겨야만 했다. 하수도로 향해 가는 큰물의 흐름을 벗어나서 인도 쪽으로 몰려드는 물들이었다.

이 물들 중 대부분은 다시 큰물 쪽으로 합류해 갈 것이다. 그래서 하수도로 내려가 개천을 지나서 한강으로 가고 끝내는 바다로 가겠지. 하지만 그렇지 못하고 인도의 움푹 팬 곳에서 정지한 뒤 썩어가는 물들도 있을 것이다. 때로는 엉뚱하게 길을 잡아서 주택가나 상점 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가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뒤 여러 길로 가거나 썩어 가는 물도 있으리라. 

신돌석씨는 어머니의 제사를 올리기 위해 형네 집으로 향하면서 이런 생각들을 했다. 형네 집은 가산디지털역에서 내려서 마을버스를 타고 들어가는 곳이었다. 가다 보면 이전에 공단 오거리라고 부르던 곳을 지나야 했다. 공단 오거리는 한때 수도권 노동자들 집회의 상징이었던 곳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집회였다. 주최는 노동자였지만, 집회 참가자는 지금과 달리 다수가 동원된 학생이었다. 

이때 노동자와 학생이 함께 이런 집회를 개최하는 것을 노학연대라고 불렀다. 물론 이때의 집회들은 미리 신고를 한 집회가 아니었다. 겹겹이 둘러싸인 경찰 저지선을 뚫고 몇 명이서 몸부림을 치며 구호를 외치다 잡혀 가고 그러고 나면 여기저기서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것을 반복하면서 시위를 하던 곳이었다. 시위를 잘 조직한 날에는 경찰이 미리 정보를 입수하지 못한 상태에서 시위 주도 세력이 먼저 오거리를 장악했다. 고가도로 위에도 올라갔다. 시위를 주동하는 사람들이 먼저 기선을 제압하면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노동자들이나 학생들이 시위에 가세했다. 그러기를 일, 이십분 정도. 마침내 경찰이 오고 공방전이 계속됐다.

30년도 더 된 오래 전에 이렇게 비가 쏟아지던 날에 시위를 했던 적이 있었다. 이곳은 신돌석씨가 살던 지역이 아니었지만, 신돌석씨는 그 날 시위에 참여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참여라기보다 동원된 것이었다. 당시에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이란 조직을 중심으로 수도권의 주요 공개 노동운동조직들은 ‘삼민헌법쟁취’라는 주장을 내걸면서 노동자가 개헌투쟁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했었다. 그래서 가두투쟁(가투)에도 노동자들이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 서노련의 주장이었다. 신돌석씨의 지역에서는 회의적이었다. 당시에는 가투에 동원할 노동자가 많지 않았다. 해고자 일이십 명 정도였는데, 이들도 대부분 오랜 해고 투쟁으로 지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형식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서노련 측의 요구는 막무가내였다. 

서노련이 다른 수도권 지역 조직들의 상부는 아니었지만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무조건 반대하기도 어려웠다. 특히 지금은 극히 보수적인 야당의 중심인물이 된 사람이 당시 서노련의 지도급 인물이었는데, 신돌석씨 지역에서는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다. 당시로서는 매우 어려웠던 노조 결성 작업에서 그의 지원 역할이 매우 컸고, 활동가들 상당수가 그의 명쾌한 논리와 일관된 실천력 때문에 그를 따르고 있었다. 그가 직접 지역에 와서 설득 작업을 벌였다. 

   
▲ [삽화 - 김윤기]

그의 주장은 노동자들이 앞에서 깃발을 들고 싸우면 대다수가 학생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의미가 다르다는 것이었다. 즉 노동자가 선도하는 정치투쟁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소수라도 아니 깃발을 들 서너 명이라도 참가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신돌석씨는 그 주장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지만 반박할 말을 제대로 찾지 못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지역에서 해고되고 활동을 하던 학생 출신 노동자들도 그의 주장에 선뜻 동의하는 것이 아니면서도 반박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결국 신돌석씨가 총대를 메게 되었다. 그리고 스물을 막 넘긴 해고자 둘이 더 참가하기로 했었다. 정말 무리한 일이었다. 

이 날도 경찰이 미리 정보를 입수하지 못했는지 고가도로 위에서 동이 뜨고 플래카드가 내려지고 노동자와 학생들이 가세하면서 한 십 분여 정도 시위를 한 뒤에나 경찰이 도착했다. 경찰은 도착하자마자 사과탄을 던지면서 해산 작전에 돌입했다. 하지만 경찰의 최루탄은 이날만큼은 무력하였다. 빗물에 녹아서 별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측의 화염병도 역시 무력했다. 그러다 보니 접전이 벌어졌고, 난투극이 벌어졌다. 그때 부상당한 사람들이 엄청났던 것으로 신돌석씨는 기억했다. 

신돌석씨도 시위를 하다가 경찰에 쫓겨서 재빨리 골목으로 들어갔다. 전경들이 쫓아왔다. 커다란 쓰레기통이 있는 곳에서 전경 세 명과 격투를 벌였다. 들고 있던 깃발로 전경들을 막았다. 그러다가 힘이 달리자 깃발을 버리고 쓰레기통을 집어서 던졌다. 전경들이 뒤로 물러섰고, 그 틈을 타서 뒤로 돌아 뛰어가려고 하는데 몇 걸음 못 가서 멈춰야 했다. 반대편에서 전경들이 몰려 왔던 것이다. 끝내 전경들한테 포위되어 집단 구타를 당했다. 

그리고는 비가 쏟아 붓는 진창에서 그야말로 개처럼 질질 끌려가는 중이었는데 지휘관인 듯한 자가 ‘됐다, 그냥 놔 줘라.’하는 말이 들렸다. 그 상황에서도 고마운 마음이 들어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 헬멧 아래 무뚝뚝한 표정의 사나이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중학교 동창이었다. 김무원. 중학교 때 함께 놀았다면 놀았다고도 할 수 있는 친구였다. 경찰이 되었구나. 그때 신돌석씨가 군대를 제대한 지 3년쯤 되었을 때였다. 김무원이는 전경에 갔다가 그대로 말뚝을 박은 것일까? 아니면 제대를 한 뒤 다시 순경 시험을 봐서 경찰에 들어간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김무원이가 경찰 간부로 들어갔을 것 같지는 않았다. 신돌석씨는 두들겨 맞아서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빗속을 걸어가면서도 그런 생각들을 했었다. 

가산디지털역에서 출발한 마을버스는 어느새 형이 사는 아파트 입구에 도착했다. 형이 여기에 살기 시작한 것도 벌써 20년이 넘었다. 20여 년 전 형으로서는 40이 넘어서야 처음 아파트를 장만한 것이었다. 사실 형처럼 주어진 환경을 넘어서 보려고 처절하게 살아온 사람도 드물었다. 부모가 물려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집에서 동생 둘을 키우다시피 해야 했었다. 형은 그런 생활을 중학교에 들어간 해부터 했었다. 중학교 때부터는 사실상 아버지는 벌이가 없었다. 조그마한 점포에서 구두 수선을 해서 버는 돈을 거의 모두 술로 날려 버렸고, 손님들이 맡긴 구두들을 술에 취해서 일하다가 망쳐 놓는 경우가 생기면서는 그나마 있던 수입마저 거의 사라져 버렸었다. 

   
▲ [삽화 - 김윤기]

신돌석씨와 동생 선옥이가 거리에 나앉지 않고 성장 과정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형의 헌신 덕이었다. 형은 그 어린 나이에도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여름에는 당시 유행하던 아이스케키 장사를 했다. 당시에는 ‘케키나 하드’를 외치면서 통을 메고 다니는 소년들을 거리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또 신문팔이도 했다. 지금은 가판대가 있어서 사라진 풍속이지만 그때는 시내 정류장에서 버스가 멈출 때 달려들어서 신문을 파는 신문팔이 소년들이 꽤 있었다. 그리고 서울역 등에서 짐을 날라 주는 일도 했었다. 

그리고는 공고에 들어갔고, 공고를 중퇴한 뒤에는 공장에 들어가 금형을 배웠다. 그 뒤에는 이역만리인 중동 땅에 가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악착같이 산다고 해서 잘 살게 되는 것은 아닌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었다. 형은 말 그대로 안 해 본 것 없이 다 해 봤고, 남들 다 하는 짓도 이를 악물고 하지 않으면서 살았지만, 스물 세 평짜리 아파트 한 채를 40이 넘어서야 그것도 서울에서 가장 집값이 싸다는 곳 중의 하나인 동네에서 겨우 샀었다. 

“미안하다. 좀더 넓은 집을 사야 너희들 식구들도 와서 자고 그럴 텐데…” 

집을 사서 이사를 하고 집들이를 하던 날 형이 술이 오르면서 신돌석씨와 동생 선옥이에게 한 말이었다. 신돌석씨는 어이가 없었다. 미안하다니, 형이 미안할 까닭이 뭐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형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형은 좀더 잘 살고 싶었으리라. 동생들에게 보란 듯이 사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보는가 보다. 아마도 마음에 차지 않았겠지. 형이 살아온 나날에 비하면 이런 결과는 너무 보잘것없는 것일 수도 있었다. 형보다 훨씬 쉽게 살아온 사람들도 형보다 훨씬 잘 사는데, 형으로서는 허탈한 마음이 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형네 집에 들어서니 형과 먼저 와 있던 선옥이가 맞아 주었다. 안방으로 안내되어 들어서니 선옥이 남편도 와 있었다. 신돌석씨가 제일 늦은 셈이었다. 신돌석씨는 선옥이 남편과 인사를 나눈 뒤 옷을 벗어서 걸어 놓다가 벽에 걸린 아버지와 어머니 사진에 눈이 갔다. 이 집에 이사 오고 한참 동안 형은 아버지 사진을 걸어 놓지 않았었다. 그만큼 형은 아버지를 미워했었다. 그러나 자신도 늙어 가면서 마음이 바뀌어 가는 것일까? 아버지는 사진 속에서도 술에 취한 듯하였다. 술에 취하지 않은 아버지의 모습을 본 기억이 이제는 전혀 나지 않는다. 어머니의 사진은 아마 이십대 때 찍은 것인 모양이다. 활짝 웃고 있었다. 어머니의 웃는 모습에 대한 기억도 누렇게 뜬 흑백 사진이 꽂혀 있는 사진첩처럼 아련하기만 하였다. 

자비하신 예수여어 제에가 사람 가운데에 의지할 이 어없으니이 슬픈 자가 됩니다… 

어머니만 생각하면 떠오르는 찬송가다 어머니는 이 찬송가를 유달리 좋아했다. 유난히 길게 끌면서 부르는 어머니의 찬송가는 분위기가 매우 독특했다. 어머니는 동네에서 가까운 교회에 다니지 않고 한강 쪽으로 한참 가면 있는 작은 교회에 다녔다. 그 교회는 이필수의 아버지가 장로로 있던 교회에서 갈라져 나갔는데 여자 전도사가 신비한 능력을 소유했다면서 특이하게 교회를 이끌어가는 곳이었다. 이필수 아버지가 장로로 있던 교회에서는 그 작은 교회를 이단이라고 불렀다. 

그러다 보니 그 작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다. 상식적인 기준으로 볼 때 그 교회에서는 이해가 안 되는 행위들을 많이 했기 때문이었다. 물에다가 여자 전도사가 기운을 불어 넣으면 그것을 생수라고 부르면서 만병통치약처럼 생각했다. 그가 머리를 때리는 안수와 온몸을 때리고 주무르는 안찰이라는 것을 신도들은 매우 신성한 의식으로 여겼다. 그것으로 병이 다 낫는다고 생각하고, 죄도 다 사해진다는 것이었다. 

그 교회에는 의자가 없었다. 예배를 드리는데 어째서 편안하게 앉아서 드릴 수 있느냐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는데, 아마도 의자 설치비용을 줄이기 위한 그의 계산에서 나온 것이리라고 그 교회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말하곤 했었다. 신돌석씨는 다른 교회에 가본 적이 없었으므로 예배당은 으레 그 교회가 그렇듯이 의자가 없는 줄 알았다. 그러다가 친구들을 좇아 다른 교회에 갔다가 의자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고 놀랐던 적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 교회 사람들을 이상하게 보도록 만드는 것은 박수를 치면서 광적으로 찬송가를 부르는 일 때문이었다. 의자도 없는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박수를 쳐대면서 찬송가를 부르는 장면은 정말 기이한 것이었다. 신돌석씨가 기억하기로 그 여자 전도사는 설교를 잘 하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설교를 하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를 몰고 가는 데에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신도들은 그의 지휘에 따라 몸부림을 치면서 박수를 치고 눈물을 흘리고 하면서 찬송가를 불렀다. 

   
▲ [삽화 - 김윤기]

신돌석씨는 어린 시절에 어머니를 좇아서 그 교회에 갔다. 그 교회에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인지 망태산 동네에서 그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그 교회에서는 찬송가를 변형해서 부르는 경우도 많았다. 천당이나 천국이라고 하기보다는 천년왕국이 이 땅에 이루어진다고 주장했고, 그에 맞추어서 찬송가를 개사하기도 하였다. 신돌석씨는 가끔씩 옛날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개사된 찬송가를 흥얼거릴 때가 있었다. 완전히는 기억하지 못해도 대부분 아직도 생생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벌써 30년이 지난 일인데 가사가 생생하게 기억난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무서운 일이었다. 어릴 적 기억이라는 것이 그렇게 사람의 평생을 사로잡는 모양이다. 

신돌석씨가 처음 구류를 살았을 때 유치장 같은 방에서 만난 아저씨가 있었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사람이었다. 원래 구류를 사는 경범과 국가보안법 같은 형사범은 유치장에서 다른 방을 쓰는데 이때 신돌석씨는 경찰서 내에서도 함께 들어온 사람들이 구호를 외치면서 항의를 해대니까 각 방으로 분리하기 위해서 형사범 방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 사람이 범한 죄라는 것은 반국가단체 고무찬양죄인데 죄명은 무시무시하지만 사실은 어렸을 때 배웠던 북한 노래를 부른 것이 죄라면 죄였다. 이 아저씨의 고향은 전라남도 어디였는데 10살쯤 됐을 때 6.25가 나고 인민군이 그 지역을 점령한 상태에서 한 달 너머를 보낸 모양이었다. 그러다 보니 인민군들이 가르쳐 주는 노래를 자연히 배우게 되었다. ‘장백산 줄기줄기…’로 시작되는 노래였는데 술 한 잔 마시고 옛날 생각이 나면 이 노래가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60년대에 한번 반공법으로 징역을 살았는데, 그 뒤 세 차례나 더 구속되었다고 하였다. 

이런 사람들을 ‘막걸리 반공법’이라고 했는데, 이 교회에서 개사한 찬송가를 생각하면 신돌석씨 자신도 같은 경우를 당했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저씨가 그 옛날 장백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면서 그 노래를 부르듯이, 신돌석씨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이 땅에 세워진다는 천년왕국을 믿은 적이 없으면서도 그 노래를 불렀다. 그저 다함께 신나게 부를 수 있는 노래니까 불렀고 지금도 그 가사들이 뚜렷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교회에 대한 기억이 좋은 추억으로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신돌석씨는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만 그 교회를 다니고 그 뒤로는 근처에 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 교회가 어머니에게는 한편으로는 위안처가 되기도 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억압하는 곳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런 생각은 뒤에 정리해 본 생각이었다. 그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대체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그런지 살아가는 것이 드센 편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한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신돌석씨 어머니도 가슴에 한이 많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신돌석씨 어머니는 그 교회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다. 어머니가 유일하게 친하게 지냈던 사람은 교회 한 옆에 창고로 쓰이던 가건물에 방을 들여서 살던 사람이었다. 정확한 이름은 모르는데 사람들이 정갱이이라고 불렀다. 이름이 정경희인데 그렇게 부르는 것인지 아니면 별명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젊은 시절에 술집에 다니던 여자라고 하는데 이때는 이미 늙고 병들어서 혼자서 그렇게 죽을 날만 기다리던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새벽 기도를 갔다가 꼭 그 사람한테 들렀다가 오곤 하였다. 그 사람과 둘이서 찬송가를 부르고 나면 가슴에 얹혀 있는 것이 시원하게 내려가는 것 같다고 어머니가 했던 말이 신돌석씨는 기억이 났다. 그 사람이 교회 층계에서 새벽에 굴러서 신음을 하다가 결국 죽었는데 임종을 지킨 사람은 어머니였다. 말하자면 어머니는 소외된 사람들 속에서도 소외된 사람이었다. 

“삼촌 오셨어요.” 

부엌에서 선옥이와 일을 하고 있던 지수와 지훈이가 들어와서 인사를 했다. 지수는 형의 딸이고, 지훈이는 아들이다. 지수는 아들과 딸을 둔 엄마이고, 지훈이는 30대 후반이 되었는데 아직 혼자 산다. 지수는 딸이지만 자기 아빠를 닮았고, 지훈이는 아들인데 엄마를 닮았다. 어쩌면 그렇게 빼닮았는지 역시 씨도둑은 못한다는 말이 생각났다. 

지수와 지훈이를 보자, 신돌석씨는 이 애들의 엄마, 즉 형수였던 사람을 생각했다. 지금은 천안 어디에선가 미장원을 한다는 소리만 들었다. 그것도 좀 된 이야기이다. 다른 곳으로 이사했을지도 모른다. 형은 방위를 마치고 금형을 배우던 중에 미장원에서 일하는 아가씨와 결혼했다. 형은 손가락이 잘려 나가는 고통 속에서도 금형을 성공적으로 배웠고 공장에서 그런대로 대접을 받았다. 형이 버는 수입과 미장원에서 형수가 버는 돈을 합하면 잘 살아갈 수 있었다. 형은 다른 무엇보다도 강한 성격의 여자를 원했다. 이를 악물고 잘 살아보겠다고 다짐했던 형이기에 어머니처럼 약한 성격이 싫었을 것이다. 하지만 강하고 약하고는 겉으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었던가 보다. 

신돌석씨의 형수는 강한 사람이었다. 혼자서도 능히 이 세상을 헤쳐 나갈 듯하였다. 신돌석씨에게는 정말 좋은 형수였다. 형이 결혼한 것은 신돌석씨가 군대를 막 제대한 뒤였는데 그 뒤 한동안 빌빌대며 노는 시동생을 감싸 주던 사람이었다. 85년에 해고될 때 신돌석씨는 주민등록을 서울에 있는 형네 집에 두고 있었다. 해고되고 구류를 사는 일이 생기자 신돌석씨가 있던 지역의 경찰서에서 주민등록지인 서울에 있는 형네 집 관할 경찰서로 연락한 모양이었다. 반장이 오고, 통장이 오고, 동사무소 직원이 오면서 말소할 테니 빨리 주민등록을 옮기라고 하였는데 형수는 끝까지 버티면서 신돌석씨 주민등록을 지켜 주었다. 그런 사람들이 와서 신돌석씨가 여기 살지 않는 것 아니냐, 그러니 주민등록을 옮기라고 하면, 형수는 여기 산다는데 왜 그러냐고 대거리를 하면서 버텼다고 한다. 

문제는 형이 중동에 가면서 생기기 시작했다. 85년 말에 형은 2년만 갔다가 오겠다면서 중동으로 떠났다. 금형 기사로 버는 돈으로는 형의 꿈을 이룰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2년 만에 오겠다던 사람이 또 2년을 연장하고, 그 뒤 다시 2년을 연장했다. 지훈이가 갓난 애기 때 떠난 형이었다. 지훈이는 아빠의 얼굴도 못 본 채 유치원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다. 

선옥이의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달려갔었다. 90년 봄에 있었던 일이었다. 형수는 동네에 있는 작은 병원에 있다가 신촌 세브란스로 옮겨야 했다. 수면제 과다 복용이었다. 처음에는 형수가 왜 수면제를 과다 복용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의사 말로는 처음 있는 일이 아닌 것 같다고 하였다. 상습적으로 그랬을 것이라고 하였다. 다만 이번에는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양을 먹어서 이렇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때 막 초등학교에 들어갔던 지수가 재빨리 자기 고모인 선옥이에게 연락하지 않았으면 형수는 아마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형수의 목숨에 문제가 없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의사가 한 말은 신돌석씨와 선옥이를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다. 형수의 뱃속에 애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 애를 떼야만 산모의 건강이 회복될 수 있다고 하였다. 형은 지난 5년여 동안 한국에 온 적이 없었다. 물론 형수가 형이 있는 나라로 간 일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돌석씨와 선옥이는 어쩔 줄을 몰랐다. 결국 고모와 작은아버지에게 연락을 하였다. 그리고 형에게도 연락이 갔다. 형은 계약 기간 중도에 계약을 포기하고 국내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아주 신속하게 이혼 수속을 밟았다. 형수도 아무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떠났다. 작은아버지와 작은어머니 그리고 고모는 다시 살라고 하였다. 신돌석씨와 선옥이도 그런 의견을 말하였다. 하지만 형은 완강했다. 

“어렸을 때부터 유달리 자존심이 센 녀석이었지. 용서하기 힘들 거다.” 

고모의 말이었다. 하지만 신돌석씨는 그것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수면제 복용이 형을 괴롭게 했을 것이다. 정신적으로 강하지 못한 사람 밑에서 자란 어린 시절이 악몽처럼 떠올랐으리라. 강한 여자를 원했는데 끝내 그렇지 못한 것을 확인한 순간 형의 결심은 더욱 굳어졌을 것이라고 신돌석씨는 나름대로 짐작했다. 

정갱이가 죽은 뒤 어머니는 더욱 외로움을 탔다. 그래도 어머니는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집을 나섰다. 일요일이나 수요일 예배도 거르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무하고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구석에서 눈물을 흘리며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어머니는 그 교회에 가지 못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예배 도중 방언이라는 것을 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 교회에서 기성 교회라고 부르는 곳, 다시 말해서 일반 교회들에서는 방언은 성령을 받았다는 징표 따위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신돌석씨는 그 뒤 여러 사람들에게 들어서 알았다. 하지만 그때 그 교회에서는 방언은 마귀가 마음속에 침투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해석되었다. 마귀에게 영혼을 사로잡혔다는 것이었다. 

   
▲ [삽화 - 김윤기]

신돌석씨는 어머니가 왜 방언을 하게 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떤 교회에서 말하듯이 성령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그 교회에서 말하듯이 마귀에게 사로잡힌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일종의 정신 착란 현상이 시작된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세월이 많이 흐른 현재 이 순간에도 신돌석씨는 그 점은 해석이 되지 않았다. 신돌석씨 주변에서는 일상생활에서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사적 유물론에 입각해서 견해를 말하던 사람들이 최근 몇 년 사이에 초월적인 세계의 존재를 확신하는 사람으로 변한 경우를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여전히 그런 이야기만 나오면 냉소부터 흘리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신돌석씨는 아직도 그 영역은 알 수 없는 반신반의의 세계일뿐이다. 다만 초월적인 현상을 굳게 믿는 사람을 신돌석씨는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러한 어린 시절의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었다. 

어머니는 교회에 나가지 못하자 방구석에서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했다. 처음에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면서 그러다가 가끔씩 방언을 하고 까무러치기도 했다. 아버지는 아침에 나가서 밤늦게 돌아왔는데 어머니의 그런 모습을 못 본 척 했다. 형이 있을 때는 어머니는 혼자서 기도만 할 뿐 소리를 내서 찬송가를 부르거나 방언을 하는 일이 없었다. 그만큼 어머니는 형을 무서워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아버지도 나가고, 형도 나가고, 신돌석씨와 선옥이만 있을 때는 어머니는 또 방언을 시작했다. 찬송가도 조금씩 크게 부르기 시작했다. 기도도 소리 내서 하곤 하였다. 가끔씩 망태산 동네에 살면서 함께 그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이 다녀가곤 했는데 그들은 어머니의 편이 되어 주려는 것인지 감시하려는 것인지를 분간하기 힘들었다. 따라서 어머니는 그들이 왔다 가고 나면 더욱 힘주어 그런 의식들을 치렀다. 

거기까지였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날 리가 없었다. 그때는 신돌석씨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배정을 받은 뒤 입학을 기다리던 때였다. 그러니까 2월 하순쯤 되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일 나가고, 형은 학교에 가고, 선옥이도 학교에 갔었다. 오전 10시쯤 되어서 신돌석씨도 나가서 친구들이나 불러서 만화방에나 나갈까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대여섯 명의 여자들이 한명의 중년 남자와 함께 들이닥쳤다. 그 교회 사람들이었다. 

중년 남자는 그 교회 전도사였다. 그 교회에는 목사가 없었다. 원래 교회에서 갈라져 나갈 때 이끌고 나간 여자 전도사가 최고위직이고, 그 밑에 전도사만 몇 명 더 있었다. 일요일 낮 예배는 여자 전도사가 인도하였고, 수요일이나 금요일 혹은 신자들을 방문하는 심방은 다른 전도사들이 인도하였다. 신돌석씨도 그 교회에 나갔었기 때문에 그가 전도사인지 알았다. 여자들 중 두 명은 동네 사람이었는데, 나머지 중에서 한 사람은 유권사라는 사람이었다. 검은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는 이 여자를 보면 신돌석씨는 괜히 무섭기만 하였다. 목소리도 걸걸한 이 여자는 전도사는 아니고 권사이지만 영적인 문제에서 신도들에게 인정을 받는 사람이었다. 

이들이 들이닥치자 조용히 앉아서 찬송을 부르던 어머니의 얼굴에 긴장이 감돌았다. 그리고는 겁먹은 얼굴이었다가 성난 얼굴로 변하더니 다시 처참한 표정을 하였다. 신돌석씨네 집은 조그마한 방 두 개가 장지문을 사이에 두고 붙어 있는 구조였는데 아랫방에 어머니를 둘러싸고 세 명이 들어서자 방안이 꽉 차버렸고, 나머지들은 윗방으로 들어가 앉았다. 신돌석씨는 그저 윗방 한 구석에서 덜덜 떨고만 있었다.(계속)

 

필자 정해랑(鄭海郞)

서울에서 태어나 여의도 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노동정책연구소 정책실장, 경희총민주동문회 회장,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재생의 담론 21세기 민족주의>(2010년, 공저), <공주와 도둑들>(2017) 등이 있다

 

삽화가 김윤기(金允起)

<전시> 1993 개인전(그림마당 민) 외 단체전 다수
         2013 ‘내 앞에 서다’전(세종문화회관)
< 기획> 2006 조국의 산하전 ‘평택-평화의 씨를 뿌리고’(대추리)
        2009 평화미술제 ‘대지의 꽃을 바다가’(제주현대미술관)
        2012 통일미술전 ‘하나는 다른 많은 것을 이룬다’(국회의원회관)

 

글 정해랑/삽화 김윤기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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