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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耳順)에 그리는 자화상(1)

기사승인 2018.07.28  09:5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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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해랑 연재소설> 노동자 신돌석씨의 하루 (1)

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연재를 시작하며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 온 뒤, 돈도 없고 학벌도 안 되고 빽도 없어서 서울 근교 공단에 있는 중소기업 공장에 취직했던 신돌석씨. 가진 거라곤 의리 있게 산다는 생활 신조 하나였던 그가, 27세 되던 1985년 전국의 공단지역을 휩쓸었던 노동운동의 폭풍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들어가 인생의 변화를 겪고, 의리만으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노동운동가가 되었다가 어느덧 이순의 나이가 되어서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허구입니다. 그러나 있을 수 있었던, 지금도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허구의 이야기는 과거만을 다루는 후일담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이 필요했는지,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었고,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결국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살 만한 세상인지를, 살 만한 세상이 되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물어 보려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 정해랑

 

오목교역에 도착한 것이 20분 전이었다.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았을 때 오목교역에서 걸어서 12분 걸린다고 하였으니 여유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처음 오는 길이라서 길을 정확히 찾지 않으면 자칫하면 늦을 수도 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12시부터 시작한다고 하였으므로 정확하게 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오히려 피해를 입히는 셈이 된다.

1인 시위를 할 수 없냐고 장선우가 연락한 것이 1주일 전이었다. 칼라텍이라는 회사의 노동자들이 노조탄압과 부당한 폐업에 항의해서 몇 년째 싸우고 있는데 지지하는 1인 시위를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들어는 봤는데 자세한 내용은 모르는 회사였다. 폐업에 항의해서 두 사람의 노동자가 열병합 발전소 굴뚝에 올라가서 겨울을 넘겼다는 소식은 들었었다.

장선우는 신돌석씨가 처음 노동운동을 하던 지역에서 만난 사람이었다. 지금도 사회운동단체에서 일하고 있는데 대학 출신으로 노동현장에 들어갔다가 해고되고 구속되기도 하였다. 지금도 신돌석씨에게 가끔씩 연락해서 만나는 사이이다. 특히 2016년 말과 2017년 초의 촛불 시위 때는 매주 만났다. 그가 1인 시위를 해달라고 부탁한 것이었다. 신돌썩씨는 이제 노동운동의 일선에서 일하지는 않고 지역 단체에서 일하고 있지만, 노동운동에서 중요한 이슈라고 생각되는 문제에 대해서 요청이 오면 함께 투쟁하였다.

전철역에서 나오니 노조 이름이 적힌 승합차가 있었다. 거기일 것 같은데 일단 오라고 한 곳은 방송국 후문 앞이었으므로 더 앞으로 갔다. 방송국 후문 앞은 사람들이 많았다. 점심시간이라서 그런지 부근 사무실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신돌석씨는 굴뚝 밑에 가서 지지하는 1인 시위를 하지 않나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아무튼 장선우가 연락한 대로 방송국 후문에 서 있으려니까 조금 있다가 모자를 쓴 젊은 사람이 왔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사측의 부당한 행위와 이에 대한 요구사항이 적혀 있는 대자보판을 들고 함께 서 있었다. 장선우는 아마 못 오는 모양이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칼라텍 노조의 조합원이라고 하면서 이름이 김윤배라고 하였다. 그에게 왜 굴뚝 밑이 아니라 여기서 1인 시위를 하느냐고 물었다. 신돌석씨가 궁금하게 생각한 점이었다. 그러자 그가 이 회사에 대한 투쟁의 역사를 설명하였다.

김윤배와 그의 동료들은 경상북도에 있는 한길합섬이라는 제법 큰 회사에 다녔었는데, 지금 회장 김아무개가 그 회사를 인수하고는 썬케미컬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단다. 그 뒤 다시 칼라텍으로 바꾸고는 회사를 폐업해 버렸단다. 이에 항의해서 노조가 파업을 하자 공장 가동을 재개한다고 약속했는데 원래 연고지와 상관도 없는 충청도에 회사 부지를 사놓고 거기로 옮겼단다. 회사는 사실상 돌아가지 않고 사람들은 연고지와 너무 떨어져 있어서 하나 둘 그만두었다고 한다. 남아 있는 사람들이 다시 조업 재개를 요구하며 파업투쟁에 들어갔는데 아무런 대응이 없단다.

여기서 1인 시위를 하는 까닭은 회장이란 자가 이 건물에 있단다. 썬플렉스라는 회사를 하고 있는데 간판 등을 만드는 회사로 엄청나게 이윤을 많이 내는 회사란다. 여기에 사람들이 많이 다니므로 회장에게 압박도 하고 사람들에게 알리는 효과도 노리기 위해 여기서 한단다. 굴뚝 밑에서는 따로 집회를 하곤 한다고 한다. 거기에 자기들 근거지가 있고, 점심시간에 사람들이 많은 것에 맞춰서 여기서 1인 시위를 한단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므로 1인 시위에는 효과적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무표정했다. 관심이 없었다. 길 건너편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5층 건물인데 한 층에 십여 개의 점포가 있을 정도로 큰 건물이었다. 눈에 띄는 곳만 해도 1층 휴대폰 대리점들, 프랑스 의류업체, 2층에 코코 이찌방 카레, 3층에 아웃백 등등이 보였다. 단지 일할 권리만이라도 달라고 목숨 걸고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둘 것 같지 않은 소비 분위기였다.

신돌석씨가 처음 노동운동을 알았을 때부터 30여 년이 흘렀다. 많이 변했다. 이러한 1인 시위가 가능하다는 것만 해도 분명히 발전한 것일 테다. 하지만 그 동안 사람들은 냉랭해졌다. 이전에 길에서 유인물을 나눠 주면서 구호를 외치면 사람들은 두려워서 외면을 하지만 적어도 연민의 정만은 갖는 것 같았다. 물론 그것도 긴 시간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하루 종일이라도 하지만 관심을 두는 사람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하긴 이런 번화한 곳에서 시위를 해본 적은 없었다. 아니 그때는 이런 휘황찬란한 소비 지역은 거의 없었던 것도 같다.

아까 전철역 앞에서 본 승합차는 상급 단위 노조의 차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회사가 충청도로 옮겨서 노조도 충남지부에 소속되어 있다고 한다. 충남지부라고 하니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조철구. 대학 시절 반정부시위로 제적당한 뒤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이다. 신돌석씨가 그를 알게 된 것은 벌써 30년이 넘었다. 한때는 그와 하루 중 거의 모든 시간을 함께 지내다시피 했었다. 그리고는 평생 만날 것을 그때 다 만나기라도 한 듯 그 뒤로는 뜸하게 만났다. 그러다가 20년 전쯤 충청도 어디 가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10년 전쯤 암으로 이 세상을 하직한 사람이었다. 그를 생각하기만 하면 극적이란 말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그와의 만남과 인연은 정말 말 그대로 극적이었기 때문이다.

혹시 아냐고 김윤배에게 물었다. 직접 만나 보지는 못했지만 노조 선배들로부터 말은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가 죽고 난 뒤 신돌석씨는 매년 추도식에는 갔었다. 그와 같이 노동운동, 학생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모였었다. 그러다가 몇 년 전부터인지 추도식이 있는지 없는지 연락이 잘 안 오고 신돌석씨도 잊어버리곤 했다.

그가 죽고 세 번째 추도식을 할 때였다. 그의 선배 된다는 사람이 추도식이 끝난 뒤 뒤풀이 자리에서 철구야말로 국회의원감이라고 했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와 같이 일할 때 국회의원감이라는 말을 들어서 그에게 전했더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사람을 그렇게밖에 안 보나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신돌석씨가 한 마디 했다. 훌륭한 사람의 표본이 국회의원이냐고. 그 말을 한 선배라는 사람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만큼 인물이 뛰어났다는 말이라고 얼버무렸다. 학생 출신이라서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학생운동을 하다가 노동운동을 한 많은 사람들을 봐 오면서 국회의원 한 자리 하지 못한 것이 한인 듯 생각하는 사람을 많이 봐 왔다. 그럴 때마다 그들의 젊은 날을 떠올리면 씁쓸해지곤 하였던 기억 있다.

신돌석씨는 조철구를 84년 가을에 한 제조업체에서 만났다. 신돌석씨는 군대를 제대한 뒤 직장을 몇 번 옮기다가 찾아 들어간 곳이 그곳이었고, 나중에 안 일이지만 조철구는 반정부 시위 때문에 징역을 살고 나온 뒤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찾아간 곳이 그곳이었다. 두 사람은 입사 동기가 되었다. 같은 날 입사한 사람이 여럿 있었는데 워낙 이직이 심한 곳이라서 그런지 그 해가 지난 뒤에 남은 사람은 둘뿐이었다. 둘은 같은 프레스반으로 배치되었는데, 10개월이 지난 85년 여름에 조철구가 먼저 해고되었고, 신돌석씨는 이어서 두 달 뒤에 해고되었다.

그런데 그런 인연보다 신돌석씨가 조철구와의 만남을 극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난 해의 이듬해인 1985년 가을밤의 아수라장이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해고된 뒤에도 이런 저런 이유로 자주 보던 두 사람은 그 해 가을이 깊어 가면서 조금씩 만나는 사이가 뜸해졌다. 무슨 일 때문인지 조철구는 매우 바빴으며, 신돌석씨도 그때쯤에는 조철구를 보는 것이 왠지 부담스럽다는 느낌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때 해고되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다른 일자리들을 찾아가면서 신돌석씨도 이제는 돈을 벌어야 할 필요를 절감하게 되었다. 그 동안 노조를 만들고 파괴 공작에 대항해 싸우고 해고되면서, 들었던 계도 깼고 적금도 해약해 버렸다. 이제 이렇게 계속 살아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조철구를 만나면 해고자들이 모여서 계속 투쟁을 벌여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곤 하였다. 물론 조철구는 그런 요구를 막무가내로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결론은 항상 그렇게 나왔는데, 조철구와 함께 있을 때는 정작 그런 주장을 목소리 높여 하는 사람은 조철구가 아니라 신돌석씨 자신이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신돌석씨는 자기가 무엇에 씌웠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신돌석씨는 자연스럽게 조철구를 만나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

공장에서 해고되던 해, 즉 1985년 10월 26일이었다. 이 날짜를 신돌석씨가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은, 이 날이 10. 26이라는 날짜에 맞추어서 정해진 것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때는 신돌석씨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 이 날도 함께 해고된 김철배의 자취방에서 김철배와 그의 사촌 동생인 김강배 그리고 신돌석씨가 같이 특별한 일없이 따분한 듯이 뒹굴고 있었다. 김철배의 자취방은 노조를 만들 때와 노조를 만든 뒤 회사와 투쟁을 할 때, 그리고 해고된 뒤에 아지트의 구실을 하던 곳이었다. 해고된 직후에는 많을 때는 열 명도 넘는 사람이 좁은 방에 모여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도 나누곤 하던 곳이었는데 한 사람 두 사람 다른 일자리를 찾아가고, 재취업을 아직 하지 못한 사람도 직장을 구하러 돌아다니는 바람에 신돌석씨를 제외하면 거의 들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모여서 하는 일들도 달라졌다. 한때는 모여서 고스톱도 많이 쳤다. 술판을 벌이는 일이 거의 매일 계속된 것은 물론이었다. 간혹 술에 취해서 주정을 부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뿐이었다. 서로 뒤엉켜서 욕을 하고 치고받고 그러다가 끝내는 울었다. 그러면 끝이었다. 다음에 만났을 때는 대부분 그때 일을 입에 담지도 않았고 기억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시작한 것이 배드민턴이었다. 김철배의 방에서 5분 거리에 빈터가 있었다. 예전에 약수터이었는데 그때는 집들이 하나 둘 지어지면서 사람들이 약수터로 여기지 않는 곳이었다. 빈터에 긴 의자 하나만 낡은 상태로 자리 잡고 있을 뿐이었다. 거기에 금을 긋고 배드민턴 코트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복식을 해서 시합을 하곤 했다. 김철배가 중학교 때 배드민턴 선수를 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그가 제안해서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서로 하겠다고 해서 차례가 돌아오기도 힘들었는데 한 사람 두 사람 일자리를 찾아가면서 이제는 짝을 만들어서 치기도 어렵게 되었다.

   
▲ 24.6×18cm 종이에 수채 2018 [삽화-김윤기]

그 날도 2시쯤 돼서 점심을 라면으로 때운 뒤 배드민턴을 치러 가려고 했는데 셋밖에 없어서 그냥 방구석에서 가요를 들으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는 지금은 흔한 케이블TV조차 없던 때였다. 총각 노동자들의 방에는 텔레비전이 있는 곳도 드물었다. 김철배의 방 역시 그랬다. 단지 카세트가 하나 있어서 가요만 반복해서 듣거나 애꿎은 담배만 빨아대면서 라디오를 듣는 게 고작이었다. 김철배는 단식이라도 치자고 했지만 그렇게 까지 배드민턴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던 김강배는 누가 와서 짝이 차면 가자고 하면서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신돌석씨는 담배도 떨어져서 꽁초를 거듭해서 다시 피워야 하는데다 하루 종일 듣는 노래도 이젠 지겨워서 나가고 싶었지만, 어쨌든 둘 사이에 결론이 나야 하기 때문에 방구석에 비스듬히 누워서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만 따라서 흥얼거리고 있었다.

신형, 조형은 요즘 뭐해요…

김강배가 신돌석씨에게 갑자기 묻는 말이었다. 조철구는 신돌석씨보다 한 살이 위였고, 김철배는 신돌석씨와 동갑이었다. 그리고 김강배는 김철배나 신돌석씨보다 두 살 아래였다. 그런데 그 당시 공장 노동자들은 대충 다섯 살 정도의 터울이면 서로 성에다 형이라는 말을 붙여서 조형, 신형, 김형이라고 부르는 게 일상적이었다.

내가 어떻게 알아? 그 양반, 워낙 바쁜 분이라 요즘은 얼굴 보기도 힘들지…

사실이 그랬다. 김철배, 김강배보다 신돌석씨가 조철구와 더 가깝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요즈음에는 그가 어떻게 지내는지를 통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한때는 그렇게 죽자 사자 어울려 지냈는데 요즘 들어 잘 나타나지 않다니 좀 섭섭하기도 하구만…

김철배의 말이었다.

큰 일 하는 양반이니 어디 우리처럼 방구석에서 담배나 빨고 있겠어…

신돌석씨는 말을 하고도 흠칫 놀랐다. 왠지 말이 곱게 나가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정말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조철구에게 서운하게 생각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건 그렇지만 혹시 조형 그 사람 고첩(고정간첩)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김강배가 불쑥 내뱉은 말이었다.

뭐가 어째…

신돌석씨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너 왜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냐…

김철배가 김강배를 나무랐다. 그러면서 신돌석씨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조철구가 대학 출신의 이른바 위장취업자라는 게 알려졌을 때 조철구에 대한 비난을 강력하게 막아 나선 것은 신돌석씨였다. 한참 신문과 방송에 위장취업자에 대한 기사가 오르내리면서 공장 내에서도 쑤군대는 분위기가 생겼다. 그때는 이미 노조준비위가 회사 몰래 노동자들 사이에서 만들어져 있던 때였다. 노조준비위를 주도적으로 이끄는 사람은 물론 조철구였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조철구와 신돌석씨가 함께 만든 ‘횃불’이라고 하는 프레스반 친목회가 노조준비위로 확대되어 갈 수 있었다. 그런데 노조준비위 내에서도 위장취업자가 있다면 노조 만드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주장을 강하게 막아선 것이 신돌석씨였다.

그 해 봄에 구로공단에서 한국전쟁 이후 처음이라고 하는 동맹파업이 일어났다. 그러자 언론은 연일 위장취업자가 사주한 것이라고 보도하였다. 위장취업자 문제는 텔레비전과 신문을 통해서 계속 보도가 되었고, 그 뒤에는 반드시 공안 당국의 설명이 덧붙여졌다. 위장취업자는 대학 출신이라는 것을 위장하고 공장에 들어와 노동 현장을 혁명기지로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어쩌면 그들의 뒤에는 고정 간첩이 있을지도 몰라서 조사를 진행 중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위장취업자들은 어떤 특징이 있는지를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이런 저런 특집을 통해 보도하였다. 그 중 신돌석씨에게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위장취업자는 성실하고 주변 동료들에게 인기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고정 간첩과 연계됐을지도 모르는 무시무시한 사람이라고 해놓고 성실하고 인기가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웃기는 일이었다. 그리고 자취하면서 동아일보를 보는 사람이었고, 여자는 청바지를 잘 입고 화장을 잘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동아일보를 보는 사람이 의심을 받았던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면서 신돌석씨는 이른바 조중동이라고 일컬어지는 언론들의 문제를 생각하며 쓴 웃음을 지었다.

위장취업자 문제가 계속해서 보도되자 자연스럽게 현장에서도 이 문제가 화제에 올랐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우리 공장에는 그런 사람이 없을까 하는 문제로 이어졌다. 노조준비위에서 일부가 조철구를 의심하는 말을 조심스럽게 한 두 사람에게 꺼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프레스반에서는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만큼 조철구는 프레스반 사람들과 아주 자연스럽게 잘 어울리고 있었다. 신돌석씨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신돌석씨는 이런 문제가 보도되기 직전에 조철구로부터 자신이 위장취업자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위장취업에 대한 이야기가 방송에서 본격적으로 나오기 얼마 전에 조철구가 새벽에 신돌석씨를 찾아온 일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대학 출신임을 고백했다. 이 말을 하면서 조철구는 어설프게 웃었었다. 신돌석씨는 좀더 일찍 자기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못내 서운했다. 하지만 그러려니 했다.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1년 가까이 함께 지내면서 아무리 보아도 조철구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보아도 사장을 비롯한 회사 경영진과 관리자들은 문제가 많았다. 자신이 누구 편을 들어야 하는지는 너무나 명확했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하려면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닌가? 자기에게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를 지지하지 않는다면 그게 어디 사나이가 할 짓이냐? 이런 생각으로 신돌석씨는 서운한 마음을 접어 두기로 했다.

그 뒤 얼마 후에 열린 노조준비위 모임에서 조철구가 자기 신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신돌석씨가 노조를 못 만드는 한이 있더라도 조철구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라고 하면서 다소 흥분한 말투로 말을 하였다. 신돌석씨의 성질이 고집스럽고 얼마간 거칠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몇 마디 말을 하기는 했으나 대놓고 반론을 펴는 사람은 없었다. 김철배와 김강배는 그때 거의 신돌석씨 편을 드는 사람이었다. 그들도 신돌석씨, 조철구와 함께 친목회를 하던 사람들이었고, 노조준비위를 만드는 데 자취방을 아지트로 내 줄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그러던 그들 중 한 사람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올 줄은 정말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신돌석씨가 신경질적으로 반응을 하는 것은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요즈음 들어서 웬일인지 신돌석씨 자신도 이따금씩 조철구에 대해서 의심이 생기는 것이었다. 고첩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좀 심한 이야기이지만 자신이 모르는 어딘가에서 지령을 받거나 아니면 논의를 하고 다시 와서 일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뭐가 문제란 말이냐 라고 생각을 하다가도 그런 생각을 하면 온몸에서 힘이 빠져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화만 낼게 아니여. 조형이 고첩이란 것이 아니라, 고첩에게 자기도 모르게 이용당할 수도 있지 않으냐, 혹시라도 모르니 한번 생각해 볼 필요도 있지 않느냐, 아니면 그만인 거고…

김강배가 평소대로 느릿한 충청도 사투리로 말했지만, 그 말에는 잔뜩 불만이 섞인 듯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게 그거지 임마, 고첩이나 고첩에게 이용당하는 거나 뭐가 달라? 우리가 지금까지 봐왔지만 그건 회사가 우리를 분열시키려고 하는 말이잖아. 잘 알면서 그따위 소리를 해…

신돌석씨는 그렇게 화를 내면서 대꾸했지만, 사실 신돌석씨가 화를 내는 것은 김강배를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흔들리고 있는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아 글씨 아니면 그만이고, 뭐 그렇게 성질 낼 것도 없잖여. 한 번 생각해 보자고 한 것을…

야, 그만두지 못해. 왜 자꾸 쓸데없는 소리를 계속하냐…

이번에는 김철배가 막아 나섰다.

세 사람은 한 동안 침묵을 지켰다. 라디오에서는 ‘바람 바람 바람’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즈음 술을 마시고 자주 부르던 노래였다.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왔다가 사라지는 바람,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날 울려 놓고 가는 바람… 조형은 우리에게 바람인 것일까? 신돌석씨는 부질없는 생각까지 하며 재떨이에서 피울 만한 장초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때 별안간 문이 열리면서 조철구가 들어섰다. 세 사람은 놀라는 낌새를 감추기 어려웠고, 자연히 분위기는 어색해졌다.

왜들 그렇게 씹주그레하게 있어?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야…

조철구가 뭔가 이상한 낌새라도 챈 듯 말을 꺼냈다.

아, 조형도 양반되긴 글른 거여. 우리가 조형 얘기를 했잖여…

김철배가 이렇게 나오자 신돌석씨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친구가 조금 전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인가?

우리가 지금 배드민턴 짝이 모자라거든. 그런데 이럴 때 조형이 오면 을매나 좋을까 혔지. 허지만 누가 조형처럼 시로도와 짝이 되려고 하겠어. 그게 고민이라서 신형과 강배가 서로 짝을 안 하겄다고 티격태격 하고 있었걸랑…

김철배는 역시 능청맞은 사람이었다. 신돌석씨는 괜한 걱정을 했다고 생각하며 들릴락 말락 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해서 넷이서 배드민턴을 치게 되었는데, 배드민턴이 끝나자 조철구가 그 날 저녁 5시에 만나자는 것이었다. 웬일인가 싶어서 물었더니 오랜만에 술 한 잔 하자고 했다. 그러면서 프레스반이나 노조준비위에서 자주 가던 소래기집이라고 하는 대포집에서 만나자고 하였다. 꼭 나오라는 당부를 몇 번이나 하면서 조철구는 또 약속이 있어서 가봐야겠다고 하면서 먼저 자리를 떠났다. 떠나기 전에 조철구는 신돌석씨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면서 잠깐 보자고 눈짓을 했다. 그래서 김철배, 김강배가 눈치 채지 않게 조금 떨어져서 걸어갔는데, 그때 조철구는 오늘 여러 공장의 해고자들이 연대해서 가두시위를 벌이기로 했다고 하였다. 공단 입구 사거리의 버스 정류장 앞에 모여서 시작할 것이니 그리 알라는 것이었다. 신돌석씨는 아무 반응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조철구는 신돌석씨의 손을 한번 힘있게 잡은 뒤 빠른 걸음으로 사라져갔다.

이 말을 들은 뒤 신돌석씨는 두 시간 정도를 고민에 빠졌다. 나가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나가지 않을 핑계거리는 없을까. 김철배, 김강배에게는 말해야 하는가, 말하지 말아야 하는가. 조철구는 말하라고도 하지 말라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경우 말하지 않는 것이 조철구와 그 동안 지켜 온 묵계 같은 것이었다. 고민은 결국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 신돌석씨는 그것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가게 되었다. 소래기집에서 조철구와 함께 만나 이야기를 들은 뒤 공단 입구 사거리의 정류장에 간 것이 6시 5분 전이었다. 이렇게 되니 막걸리는 갔다 와서 먹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연기되었다. 김철배와 김강배는 조철구의 말을 듣고는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어찌나 태연하게 듣던지 신돌석씨는 조철구가 이들에게도 미리 이야기한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기도 하였다. 어쩌면 신돌석씨보다 먼저 이들에게 말한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도 언뜻 스쳐갔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너무 한심한 생각인 것 같아서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이런 말을 들었을 때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치사한 것이라고 계속 주입되었기 때문에 이들이 태연한 것이리라.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공단 입구 사거리의 버스 정류장은 이맘때쯤이면 언제나 그랬듯이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공단에서는 계속해서 노동자들이 밀려 나왔다. 신돌석씨는 이 시간에 여기에 서 있는 것이 까마득한 옛날 일이나 된 듯 어색하게 느껴졌다. 신돌석씨는 굳은 표정으로 김철배, 김강배와 함께 주위를 둘러보았다. 낯익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눈에 띄었다. 그러나 그들도 가두시위가 있는 것을 알고 모인 것인지 신돌석씨를 보고 아는 체를 하지 않고 외면을 했다.

정각 6시가 되자 사이렌 소리가 났다. 메가폰으로 사이렌 소리를 낸 것이었다. 이윽고 누군가 공중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노동운동 탄압하는 군부독재 타도하자!

구호는 연거푸 계속 되었다. 소리가 나는 곳을 보니 한 사람이 전봇대에 올라가서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그가 전봇대에 걸어 놓은 플래카드가 바람에 펄럭이면서 꼬인 채 흔들리고 있었다. 신돌석씨는 그 플래카드가 몸을 비비틀면서 짜내는 목소리로 구호를 외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장선우였다. 한성화학 해고자였다. 조철구의 대학 후배라고 하였다. 신돌석씨는 그를 해고자들 모임에서 몇 차례 만났고, 술도 같이 마신 적이 있었다. 그가 구호를 외치자 여기 저기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모여 들면서 함께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장선우는 구호를 외치는 사이사이로 짤막한 연설도 하였다. 공단에서 밀려 나오던 노동자들이 몰려서서 구경하기 시작하였다. 그때는 구경이었다. 그들이 동조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도 선뜻 참여하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호기심 때문에 방관하고 있는 것인지, 둘 다 인지, 아니면 둘 다 아닌 다른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그런 문제는 보는 사람의 관점에 달린 문제였을 것이다.

그렇게 한 10분쯤 했을까? 경찰이 오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신돌석씨가 있던 공단이 있는 경찰서에는 기동경찰대가 따로 없었다. 기동경찰대가 출동하려면 서울에서 와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좀 걸렸다. 그때까지는 가두시위가 매우 드물었고, 아직 학생들과 연대해서 가두시위를 하는 일이 없었다. 학생들이 가세하지 않은 시위는 경찰들에게는 별로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래서 교통정리나 방범 활동을 하던 전경들을 시위 진압에 동원하곤 하였다.

경찰 트럭이 한 대 도착하더니 전경들이 차에서 내렸다. 열 명 가량 되었다. 그리고는 전경들이 시위하는 사람들을 강제 해산하기 시작하면서 끝까지 저항하는 사람들을 하나 둘씩 트럭에 싣기 시작했다. 모여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흩어졌다가 저쪽 건너편으로 가서 몰려 구경했다. 해고자들이 아닌 사람들 중에서도 시위 대열에 합류한 사람들이 꽤 있었는데 그들도 구경하던 사람들과 함께 대열에서 멀어져 갔다. 경찰과 몸싸움을 하는 사람은 이제 열 명 안팎인 것 같았다. 신돌석씨는 이제는 자신도 대열 속으로 사라져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김철배, 김강배가 계속 서 있었다. 그들도 구호를 외쳤지만, 그렇게 열렬하게 외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어쩐지 그들은 도와주러 온 낯선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 외에는 신돌석씨를 비롯한 학생출신 해고자 서너 명이 있었고, 여성 해고자들이 또 서너 명 있었다. 이들은 한 봉제공장 해고자였는데 해고 싸움을 할 때마다 굉장히 전투적이었다. 남성 해고자들은 그들을 볼 때마다 악바리라고 생각했다. 신돌석씨도 그들을 보면 어떻게 저렇게 싸울 수가 있을까 생각했다. 그들은 물론 학생출신도 아니었고, 대부분 스무 살을 갓 넘긴 아가씨들이었다. 세상 물정을 몰라서 저러는 것일까, 아니면 그 동안 너무나 억눌려 와서 저렇게 싸울 수 있는 것일까? 신돌석씨는 그들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는데, 오늘도 역시 그들은 목이 터져라 외치며 싸우고 있었다.

그러고 있는 사이에 경찰들이 김철배와 김강배를 잡아서 트럭에 실어 버렸다. 이윽고 신돌석씨도 경찰관 두 명에게 양 팔이 붙잡혔다. 몸을 흔들어서 뿌리쳤다. 그러자 두 명의 경찰이 더 달려들었다. 더 몸부림 칠 수도 있었지만 신돌석씨는 그냥 순순히 그들에게 잡혀 준 뒤 트럭으로 올라갔다. 트럭에는 이미 잡혀 들어온 김철배, 김강배가 있었고, 낯은 익었지만 잘 알지는 못하는 해고자들이 세 명 있었다. 밖에서는 아직도 몸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여자 해고자들 세 명에게 한 명 당 두 명씩의 경찰관이 달라붙었다. 그렇지만 여자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하였다.

놔라 이 새끼들아, 죽여 죽여, 어 이 새끼들이 사람 치네…

이 씨팔년 정말 독종이네, 너희 같은 년들 누가 데려갈지 걱정된다…

이런 고함 소리와 비아냥 소리, 욕지거리들이 마구 섞여서 들려 왔다. 한 여자 해고자가 머리채가 잡힌 채 땅바닥에 질질 끌려서 트럭 쪽으로 오고 있었다. 윗도리의 겨드랑이 부분이 찢어진 채 속살이 드러나 보였다. 끌려오면서도 그는 계속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신돌석씨는 고개를 돌렸다. 계속 그 장면을 보고 있는다는 것은 너무 괴로운 일이었다. 그러다가 신돌석씨는 자기 눈을 비볐다. 이상한 일이었다. 끌려오고 있는 여자가 순덕이가 아닌가. 그러나 다시 보니 아니었다. 저쪽에서 구경하는 사람들 속에 안타까워하며 발을 동동 구르는 여자가 있었다. 순덕이었다. 그러나 다시 보니 아니었다.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딱하다는 듯이 보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순덕이었다. 그 여자는 신돌석씨를 보고 싸늘한 눈초리로 무언가 말을 할 듯 말 듯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러나 다시 보니 아니었다.

어제 순덕이가 찾아 와서 모레, 그러니까 이제는 내일이 된 날에 장인 될 분을 함께 만나기로 약속을 잡아 놨다고 했다. 순덕이는 그 동안의 마음고생이 말해 주듯 무척 수척한 얼굴이었다. 정말 순덕이에게는 할 말이 없었다. 순덕이도 저 해고자들과 마찬가지로 중학교 나온 뒤 계속 봉제공장만 다녔다. 신돌석씨와 그가 만난 것은 벌써 3년이 넘었다. 군대 시절 휴가 나왔다가 친구들과 공원 놀이터에 갔다가 역시 친구들과 함께 놀러 온 순덕이를 만나서 오늘에 이르렀다. 신돌석씨가 노조준비위를 하기 전까지 둘 사이는 별 문제가 없었다. 둘은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동거할 것도 여러 번 고려했었다. 하지만 서로 직장이 있는 지역이 달랐고, 신돌석씨의 알량한 자존심이 제동을 걸어서 그만두었었다. 순덕이는 중학교만 나온 뒤 봉제공장만 죽 다녔기 때문에 이미 오야미싱사가 되어 있었고 적금을 들어서 모아 둔 것도 이제 제법 많은 액수가 되었다. 하지만 신돌석씨는 특별한 기술 없이 직장을 여러 군데 옮겨 다녔기 때문에 모아 놓은 돈이 없었다. 순덕이는 전세방은 자기가 마련할 수 있으니 자기 있는 지역으로 오라고 했다. 신돌석씨는 그런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 직장에 들어간 뒤에는 무리해서 적금도 들고 계도 들어서 돈을 모으고 있었다. 그러나 노조준비위를 하면서 모두 깨버렸다.

처음 친목회를 할 때, 그리고 노조준비위를 만들기 전 노동법 공부를 할 때, 그 뒤 노조준비위를 만들 때까지 순덕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아니 드러나지 않게 신돌석씨를 도와 주었다. 지지한다는 표시였다. 10년 가까운 세월을 봉제공장에서 고생한 순덕이니 이런 문제에 우호적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점점 활동의 정도가 심해지고, 마침내 적금도 해약하고 계까지 깨니 순덕이의 태도가 달라졌다. 그 뒤로 순덕이와 여러 번 싸웠다. 그 전에는 주로 신돌석씨가 순덕이가 있는 곳으로 찾아 갔으나 노조 준비위를 한 뒤에는 가지 않고, 주로 순덕이가 신돌석씨를 찾아왔다. 순덕이는 변해 가는 신돌석씨를 처음에는 묵묵히 바라보다가 울며불며 소리치는 일도 있었다.

돌석씨는 결국 위장취업자들에게 이용만 당하고 말 거예요…

순덕이는 자기네 현장에도 위장취업자가 있었는데 짤렸다고 했다. 진짜 배고픈 게 뭔지 모르고 노동자들을 선동하기만 했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 집에 가 보면 비싼 비누만 쓰더라는 것이다. 네가 가봤냐고 하면 들은 이야기라고 했다. 이런 이야기가 시작되면 신돌석씨도 마구 헝클어졌다.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옳고 그름 이전에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더욱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순덕이에게는 이런 말이 잘 통하지 않았다. 끝내는 순덕의 뺨을 때리고 주먹을 휘두르곤 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팔을 붙잡고, 다리를 붙들고 울며 매달렸다. 잘못했다고 했다. 다시 안 그러겠다고 했다. 그런 날 순덕이는 자고 갔다. 둘은 언제 싸웠냐는 듯 서로를 불태웠다. 순덕이는 다음날 새벽이면 어김없이 돌아갔는데 한번도 신돌석씨의 아침밥을 만들어 놓고 가는 것을 거른 적이 없었다. 그뿐인가. 때로는 처박아둔 빨래까지 깨끗하게 빨아놓고 가곤 했었다. 이번에 장인 될 분을 만나자고 한 것은 일종의 최후통첩인 셈이었다.

이 좆 겉은 년아, 이제 좀 그만 떠들어, 너 겉은 년한테 장가드는 놈, 좆 짤릴까 봐 걱정되겠다…

끌려오던 여자 해고자가 트럭에 실린 뒤에도 계속 구호를 외치자 트럭 안에 있던 경찰이 한 말이었다. 그러자 문 앞을 가로막고 있던 전경들이 떠들며 웃어댔다. 그래도 그가 계속 구호를 외치자 전경 하나가 군홧발로 그를 짓밟았다. 얼굴이 짓밟히자 코피가 터졌다. 그의 카키색 점퍼와 새파란 스웨터에 새빨간 피가 얼룩을 만들며 번져 나갔다. 그의 구호 소리가 신음 소리와 함께 잦아들었다. 순간 트럭 안의 해고자 한 사람이 일어났다.

이 인간백정 같은 새끼들아…

그 소리와 함께 다른 해고자들도 일어났고 트럭 안에서 전경들과 해고자들의 난투극이 벌어졌다. 문 앞을 가로막고 있던 전경 하나도 안으로 달려 와서 가세했다. 이제 문 앞에는 한 명의 전경만이 있었다. 신돌석씨는 순간적으로 갈등을 했다. 덤벼들어서 전경들을 패 주어야 하나, 아니면, 아니면… 신돌석씨는 결심했다. 잽싸게 문을 가로막고 있던 전경의 배에 일격을 가한 뒤 밑으로 뛰어 내렸다. 너무나 순간적인 일이라서 전경들도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이 난투극이 벌어진 상황이니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신돌석씨는 그들이 쫓아가면서까지 꼭 잡아야 할 인물도 아니었다.

신돌석씨는 앞만 보고 달렸다. 누가 잡으려고 쫓아오지도 않았다. 곧 이어 전경 버스가 도착했다. 그리고 전경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서울에 있는 기동대에서 증파된 모양이었다. 이어서 사다리차가 도착하고 전경들이 그 위에 올라서 전봇대에 올라간 장선우를 끌어내리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버티면서 메가폰으로 계속 소리를 질러댔다. 이제 밑에서 구호를 외치거나 전경과 몸싸움을 벌이는 사람은 몇 명 없었고, 조금 떨어져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몰려 있을 뿐이었다.

신돌석씨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전봇대 위를 바라보았다. 장선우가 발을 뻗어서 사다리차를 타고 다가오는 전경을 차고 있었다. 그러면서 확성기에 대고 계속 소리쳤다.

노동운동 탄압하는 군부독재 타도하자! 여러분, 전두환 군사독재는 우리의 기본 생존권마저 압살하고 있습니다. 광주학살로 손에 묻은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저들은 그 잔인한 손으로 우리의 생존권을 압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장선우의 말이 갑자기 끊겼다. 드디어 사다리차로 다가가던 전경이 장선우의 목덜미를 움켜 쥔 것이었다. 장선우는 계속 소리를 쳐댔지만 밑에서 들리지는 않았다. 신돌석씨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순덕의 얼굴이 계속 앞을 가렸다. 몰려 있는 군중 속 여기저기에 순덕이가 있었다.

어서 와, 빨리 와. 계속 거기 있으면 이제 정말 끝이야…

그때였다. 뒤에서 ‘죽여’ ‘이 새끼가 진짜 악질이야’ 이런 외침들이 들려 왔다. 그리고는 외마디 비명소리. 다시 잦아드는 목소리로 ‘파쇼 타도’를 외치는 소리가 있었다. 조철구였다. 그는 군부독재나 군사독재라는 말보다 '파쇼'라는 말을 쓰곤 했다. 평소에 쉬운 말을 골라서 쓰기 때문에 학생출신이면서도 노동자들과 거리감이 없는 그였다. 그가 노조준비위에서 노동법을 설명할 때면 국민학교만 나온 어린 여성노동자들도 쉽게 이해하곤 하였다. 그런데 그는 유독 ‘파쇼’라는 말을 고집하였다. 그의 말로는 그래야만 현재의 독재를 구조적으로,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다. 지금은 노동자들이 모른다고 해도 자꾸 그런 말을 써서 그렇게 인식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신돌석씨도 그 말이 무엇인지 잘 와 닿지 않았고, 꼭 그래야 하는지도 의문이었다. 조철구가 외치는 ‘파쇼 타도’라는 소리는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전경들이 그를 둘러싼 가운데 어느새 대열 속에서 튀어나온 사복형사 둘이 그의 멱살을 잡고 끌고 가고 있었다. 아마도 급소 부분을 가격당한 것 같았다. 뭐라고 외치기는 하는데 그것이 소리가 되어 들려오지는 않았다. 신돌석씨는 뒤에서 무언가가 잡아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는 그만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다보고 말았다. 군중 속에서 순덕이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안 돼. 가지 마…

그러나 이미 그 소리는 허공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신돌석씨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야 이 새끼들아, 그것 놓지 못해…

그것이 신돌석씨의 인생을 뒤바꾸어 놓게 될 줄 그때는 정말 몰랐었다. (계속)

 

필자 정해랑(鄭海郞)

서울에서 태어나 여의도 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노동정책연구소 정책실장, 경희총민주동문회 회장,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재생의 담론 21세기 민족주의>(2010년, 공저), <공주와 도둑들>(2017) 등이 있다

 

삽화가 김윤기(金允起)

<전시> 1993 개인전(그림마당 민) 외 단체전 다수
         2013 ‘내 앞에 서다’전(세종문화회관)
<기획> 2006 조국의 산하전 ‘평택-평화의 씨를 뿌리고’(대추리)
        2009 평화미술제 ‘대지의 꽃을 바다가’(제주현대미술관)
        2012 통일미술전 ‘하나는 다른 많은 것을 이룬다’(국회의원회관)
<경력> 2004~08 한양여자대학 조형일러스트레이션과 겸임교수
        2014   (사)민족미술인협회 서울지회장

 

 

글 정해랑/삽화 김윤기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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