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민족자주문제와 통일문제에 천착해 온 노중선 <통일뉴스> 상임고문의 ‘역대 국회와 통일문제 논의’를 연재한다. 필자는 제헌국회에서부터 20대 국회에 이르는 역대 국회에서 통일문제와 관련한 논의들을 ‘민족화해와 자주통일’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다. 아울러 필자는 향후 국회가 평화통일과 민족자주 문제에 대한 진지한 토의를 거쳐 민족화해시대에서 분단 극복을 위해 자기 역할에 적극 나설 것을 기대하고 있다. 이 연재는 매주 금요일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3. 국회 통일논의와 분단 구조

지금까지 제헌국회에서부터 현 20대국회에 이르는 기간 동안 국회에서 진행된 통일문제 관련 논의들에 관해 실질 내용 위주로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았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역대 국회는 ‘국가 안보’라는 명분으로 분단의 안정적 현상 유지를 전제로 하여 대북 흡수통일문제들을 논의하고 그와 관련된 결의안들을 가결 처리했을 뿐이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동족에 대한 화해를 도모하는 발언이나 남북협상에 의한 남북관계 개선 의지, 그리고 평화적 자주통일 논의들에 대해서는 언제나 방어적 견제를 늦추지 않았다.

역대 국회의 그와 같은 행태는 결과적으로 평화적 통일을 갈망하는 민족구성원 대중들의 염원에 대한 ‘민의 대변기관’으로서의 임무와 역할을 방기해 왔던 것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이 같은 사실들과 관련해서 그동안 역대 국회에서의 통일문제 논의들과 관련해 살펴본 것을 바탕으로 그 특징적 현상들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형태로 구분하여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역대 국회는 통일문제와 관련한 결의들에서 철저하게 대북 적대적 흡수통일 및 분단의 안정적 유지를 위한 정책 논의들로 일관하였다.

그리하여 휴전이 성립되기도 전 양측 간에 휴전을 논의 과정에 있을 때 이미 국회에서는 <한국동란에 대한 휴전협정설 반대 결의안>(1951.6.5), <휴전회담에 관한 긴급결의안>(1953.4.21)을 가결하여 국회가 휴전을 반대하였고 ‘북진통일운동특별위원회 구성’을 결의하여 북진통일 의지를 분명히 했다. 이어서 <휴전회담에 대한 대책수립 특별위원회 구성 결의안>(1953.6.4.), <휴전협정폐기에 관한 결의안>(57.1.11) 등의 가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1950년대 국회는 휴전반대와 휴전협정 폐기를 주장하면서 북진 통일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유엔 결의를 존중하여 유엔 감시 하 남북한 토착인구비례에 의한 자유선거 실시를 통해 통일할 것을 내용으로 한 <국토통일방안에 관한 결의안>(1964.11.23.)을 가결하였고 그 이후 오늘에 이르도록 <주한미군감축 반대에 관한 결의안>(1970.7.16.) <북한의 핵무기 개발에 대한 규탄결의안>(2001.10.30.) 등에서 나타나고 있듯이 남북 간의 교류 접촉을 통한 민족화해나 남북협상에 의해 남북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논의나 결의는 없었다.

둘째, 역대 국회는 통일문제를 분단 상황의 안보에 종속시켜 민족화해나 자주의식이 내포된 안건은 부결 처리하고 그 같은 내용을 발의한 현역 의원은 가차 없이 구속 처형하는 결의안들을 가결 처리하였다.

자주적 통일을 내용으로 한 안건은 모두 제헌국회에서 발의된 되었을 뿐 그 이후 오늘에 이르도록 평화적 자주통일을 내용으로 한 결의안이 상정된 경우는 없다. 제헌국회 때 박종남 외 45명의원이 발의한 <외국군 철퇴 결의안>(1948.10.13), 국회의원 63명의 명의로 제출된 <외국군 철수와 평화통일결의안>(1949.3.19)이 상정되었으나 모두 부결 처리되었다.

그리고 제헌국회 당시 김약수ㆍ노일환ㆍ이문원 등 소장파의원들이 ‘남북평화통일방안 7원칙’ 발표와 관련하여 구속되자 김용현 외 49명 의원이 발의한 <국회의원 석방요구에 관한 결의안>(1949.5.23.)도 부결 처리하였다. 또한 12대 국회 때 유성환 의원이 대정부 질의에서 ‘통일 국시’를 주장하여 입건되자 당시 국회는 국회의원의 국회 발언에 대한 면책 특권조차 저버린 채 <유성환 의원 체포동의안>(1986.10.17)을 가결하여 동료의원을 구속 재판에 회부토록 했었다.

셋째, 역대 국회는 남북공동성명, 선언 등 역사적 문건에 대한 비준 동의를 하지 않았고 남북합의 사항들의 이행 실천 문제들에 대한 의미부여를 외면해 왔다.

분단 70여년에 이르는 동안 남과 북의 고위급 당국자가 합의 서명 발표한 문건은 1972년 7월의 7.4남북공동성명과 1991년 12월의 남북기본합의서다. 그리고 남북정상 회담에서 남북의 정상이 합의하여 직접 서명한 2000년 6월의 6.15남북공동선언, 2007년 10월의 10.4선언, 2018년 4월의 4.27 판문점 선언이다.

이들 문건은 앞으로 우리 민족이 평화적 자주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통일 3대원칙을 비롯한 원칙적인 대강과 기본적인 실천 사항들을 규정한 매우 중요한 역사적 문건인데도 국회는 그 합의 문건들에 대한 비준 동의도 하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만 6.15남북공동선언 발표를 전후하여 당시 국회는 남북정상회담의 한반도 평화정착 노력을 촉구하며, 평화통일의 출발점이 될 것과 당국 간 대화의 정례화 및 이산가족의 재회와 자유왕래 실현, 생산적인 남북정상회담을 기대한다는 내용의 <남북정상회담 개최 지지결의안>과 <대북지원특별법>을 가결한 것이 전부였다.

넷째, 북측의 최고인민회의가 대남 편지, 호소문 등 다양한 형식을 동원하여 남북 국회 단일화, 남북협상을 통한 평화통일방안 등의 내용을 담아 여러 차례 대남 국회 제의 형식으로 남과 북의 국회가 민족통일의 출로를 개척해 갈 것을 제기해 왔으나 역대 국회는 이를 철저하게 거부해 왔다.

북측의 최고인민회의에서는 1950년 6월 19일 남과 북의 국회를 하나의 입법기관으로 연합하자는 <전조선입법기관 구성> 제의를 시작으로 1954년 10월 30일에는 <남과 북 국회합동회의 개최>를 제의하였고, 1956년 11월 7일에는 <외국군대 철수 및 남북군비축소회의개최를 위한 남북국회대표 면담>을 제의하였다. 이어서 1960년 11월 22일 <남북경제‧문화교류 및 남북협상회의 개최>할 것을 제의하였고, 1963년 12월 10일 <남북정치협상회의 소집> 제의, 1964년 3월 27일 <남북합작 교류실현>을 호소하는 등 그 이후에도 기회 있을 때 마다 민족화해와 통일을 전제로 할 때 남과 북의 국회가 공동으로 협의해야할 관건적인 문제들에 대해 남북국회 차원의 논의를 집요하게 제의해 왔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북측 최고인민회의의 대남 국회 제의들에 대해 남측 국회는 이를 일체 접수하지 않은 채 다만 <남북국회 회담을 위한 예비접촉 제의>(1985.4.9)와 <불가침문제 해결을 위한 남북국회연석회의 개최 제의>(1988.7.20)에 대해서만 수용하여 남북국회 회담을 위한 예비 및 준비접촉이 당시 10여 차례 이루어질 수 있었으나 정작 국회본회담은 열어보지도 못한 채 결렬되고 말았다.

다섯째, 역대 국회는 민간 차원의 통일운동 과정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통일논의들을 수렴하지도 않았고 정권 당국의 통일운동에 대한 탄압에 대해서도 국회나 의원들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그냥 바라보기만 했을 뿐 그와 같은 ‘통일 민의’들을 국회에 반영시켜 국론화하는 역할을 하지 않았다.

4.19시기 남북학생회담 제의 등 남북교류 촉구 운동과 민족 자주를 내용으로 하는 남북협상론이 제기되었고 80년대에는 미군철수, 국가보안법 철폐, 정전협정 폐기 등과 같은 통일을 향한 본질문제들이 제기되는 등 통일운동이 활기를 띠는 것과 관련해서도 국회는 그것이 민족화해를 촉발시키는 계기로 될까봐 전전긍긍하면서 ‘안보’논리를 내세워 분단의 현상 유지에 급급하는 것으로 일관해 왔다. 뿐만 아니라 당시 정권 당국자들의 민간 통일운동에 대한 가차 없는 탄압 국면에서도 국회는 오불관언했다.

그리고 6.15남북공동선언 이후 구체적으로 남북관계 발전을 향한 논의들의 활성화 시기에도 국회에서는 대북봉쇄 정책에 관한 질문을 통해 줄기차게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을 비판하면서 한미동맹 강화를 역설하였다.

이처럼 국회에서의 통일논의는 냉전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채 4.27판문점 선언, 6.12 싱가포르 북미정상선언이 발표된 오늘의 상황에서도 통일 환경의 변화에 부합하는 그 어떤 초보적인 결의안도 의결해내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국회와 의원들의 통일문제와 관련한 이와 같은 현상은 이른바 진보를 표방하는 재야민주화운동 경력이 있는 국회의원들도 남북화해와 관계 발전 그리고 민족자주 문제에 관한 결의안 제출이나 평화적 자주통일 문제와 관련한 공식적인 자기 소신을 피력한 경우는 찾기 힘들었다.

다만 제13대 국회 문동환 의원(1988.7.5.), 제14대 국회 신기하 의원(1993.2.11.), 제15대 국회 이수인 의원(1996.7.16.), 제16대 국회 장영달 의원(2000.11.14.), 이창복 의원(2001.2.12.), 김원웅 의원(2003.6.9.), 제17대 국회 이영순 의원(2005.2.14.), 임종인 의원(2006.10.12.), 제19대 국회 이석기 의원(2013.4.25.) 등의 의원들이 평화적 자주통일 문제와 관련한 본질적인 명제들에 근접해 가는 발언들을 했을 뿐이다.

이들 의원들은 통일문제와 관련한 대정부 질의 형식의 발언들에서 평화적 자주통일의 관점에서 자주외교 문제, 한미관계 문제, 군사작전지휘권 문제, 휴전협정의 평화평정으로의 대체 문제, 국가보안법 개폐 문제, 주적개념 문제, 북핵 문제, 통일교육의 필요성 등에 관한 문제 제기를 했던 것이다.

4. 맺음말 - 민족화해와 남북관계 발전을 위한 통일논의

지금 70여년 지속되고 있는 우리 민족의 남북분단 상황이 더는 지속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러 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이 같은 현실을 어느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격동적 시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외세에 의해 비롯된 우리 민족의 분단이 그동안 철옹성과도 같이 70여년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4.27 판문점 남북정상선언, 6.12 싱가포르 북미정상 회담의 성사가 그 같은 계기를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평화적 자주통일을 갈망하는 민족구성원 대중들의 기대는 다른 어느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하늘에 닿아 있다.

따라서 우리 사회는 그 같은 통일 환경의 변화에 따른 여러 형태의 계급 계층적 이해관계를 반영하여 매우 복잡한 문제들이 제기될 수 있고 앞으로 백가쟁명식의 통일문제와 관련한 논의들이 제기될 것으로 예견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예사롭게 넘겨서는 안 될 원칙으로 과거 남북공동성명이나 선언들에서 남북의 최고책임자들이 이미 합의했던 것처럼 통일은 그 실현 과정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과 또한 그 내용에 있어서 반드시 민족자주권이 담보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의 국회는 평화적 자주통일 문제와 관련하여 역대 국회의 부끄러운 발자취와 참담한 자화상 앞에 통렬한 자기 성찰이 요구된다.

다시 말하면 국회는 명실 공히 민의의 대변기관으로서 다수 민족구성원들의 통일 염원에 대한 불타는 의지와 절절한 요구를 충실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평화적으로 민족자주권이 보장되는 통일논의가 활기를 띨 수 있도록 국회 스스로 자기 위치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남북 정당 간 또는 국회 간 직접적인 교류와 접촉을 활성화하여 궁극적으로는 ‘남북의회 기구의 단일화’를 이루어낼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그렇게 되어야만 내부적으로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수구세력의 반통일적 행태를 극복할 수 있으며, 최첨단무기를 동원한 전쟁연습 등 위협적으로 도발해 오는 외세들의 온갖 우리의 국권 침탈 행위들을 막아낼 수 있는 토대 구축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문제 논의와 관련해서 국회와 의원은 그동안 분단 구조하의 반통일적 관성에서 벗어나 새롭게 민족구성원으로서의 통일 지향적 관점을 가지고 자기 사명을 다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같은 자기 역할을 해야 할 역사적 시점에 이르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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