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신체적 노화현상으로 인해, 즉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보다 지혜로워진다는 확실한 보장은 없다. 오히려 가면 갈수록 도대체 나이는 어디로 드셨을까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 같다. 나 역시 그런 면에서 늘 긴장하지만, 사실 그 때뿐 이른 바 나잇값을 못하기는 매한가지다.

2014년에 읽은 책을 별안간 다시 집어 들었다. 개인적으로 아는 인물도 아니다. 다만 그나마 현재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중 양심이라는 것이 있는 의원이 아닐까 평가하는 정도다. 그리고 범죄소설, 추리소설을 매우 좋아하는 입장에서, 그가 연쇄살인범에 대해 분석한 글과 직접 집필한 추리소설 등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 그 정도다.

▲ 표창원·구영식, 『표창원, 보수의 품격』, 비아북, 2013. 2. [자료사진 - 통일뉴스]

‘보수’와 ‘품격’이라는 단어는 언뜻 어울려 보일 수도 있겠다. 물론 한국을 제외하고서. 노블리스 오블리제 운운하며 서구 귀족 엘리트들을 찬양(!)할 때 흔히들 사용하는 단어이고, 우리나라에서도 심심하면 인용되거나 강조되는 말이기도 하다. 벼슬을 자랑하지 말고 알이나 부지런히 낳으라는, 벼슬이 좀 멋있는 닭들이 들으면 상당히 불쾌할 말이긴 하다.

왜 이 단어가 나에겐 불편할까. 표창원 의원 역시 이 책에서(책이 나왔을 때는 국회의원이 아니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강조했다. 진정한 보수는 자신의 명예(여기에서 우리나라는 자동 열외다.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자칭 보수는 국내에 없기 때문이다. 명예란 것을 소중히 여겼다면, 이미 자유한국당이나 바른미래당 의원 중 스스로 할복하거나, 최소한 정계를 떠나는 이들이 적지 않게 나왔어야 한다.)에 걸맞은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결국 국내 보수 진영에서도 품격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인물이 나와야 한다는 지적이었다. 좀 과한 희망이자 욕심이었다.

하지만 내가 정작 이 단어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솔선수범 차원에서 느껴지는 건방짐이 아니라, 이 단어를 사용하는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일종의 선민의식 때문이다. 무지몽매한 이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그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위대한 자신들이 모범을 먼저 보여줘야 한다는, 짜증나는 오만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건 단순한 건방짐과는 차원이 다르다. 더 모욕적이고, 더 기분 나쁘다. 애초부터 그딴 말을 떠들기 전에 조용히 알아서 잘 하면 된다. 굳이 이따위 말을 떠들며, 정확히 누구에게 인지도 모르는 채, 주절주절 거리는 이들을 보면 당연히 짜증이 나지 않겠나.

이런 선민의식이 소위 우리 사회 기득권들에게서 보인 것이 어디 하루 이틀 이겠냐만, 내가 느끼는 문제는 이것이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마구 표출된다는 점이다. 표 의원도 책의 곳곳에서 국민을 마치 조선시대 백성처럼 인식하고, 대통령이라는 직책을 임금처럼 묘사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인사정책을 비판하고 조언하면서, 간신이 아닌 충신을 중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이야기하려는 핵심은 이게 아니겠지만, 간혹 눈에 걸리는 표현들이 있었음은 사실이다.

다소 서글펐다. 표 의원은 정의감으로 똘똘 뭉쳐 경찰대학을 스스로 박차고 나와 제대로 된 보수주의자의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나선 인물이었다. 그리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바른 말은 하고야 만다는 인상을 깊이 심어주어 결국 현재는 국회의원이 된 사람이다. 이렇게 국내 정치인 중 몇 안 되는 괜찮은 인물임에도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책이 나온 것이 벌써 5년 전이고, 지금은 많이 달라지지 않았겠냐고 말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겠지만, 최근 대한문 앞에서 봉변을 당한 후 그가 한 말에서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표 의원은 그야말로 현 정치인들의 수준에 비하면 극히 훌륭한 사람이다. 예를 들어보자. 대표적인 무양심 정치인이라 할 수 있는 이완구 전 국무총리가 6월 25일 라디오 인터뷰에 나와 내뱉은 말이다.

“일본은 나카소네 전 수상 아들과 손자가 국회의원이다. 정치를 장인화·전문화하고 있다.”

무엇을 느끼는가? 일단 이완구라는 인물이 가지고 있는 온갖 부정적 요소를 제외하고서라도, 매우 싸가지 없게 들리는 말이다. 그것도 자한당 내에서 지선 대패 이후 중진들의 책임을 묻는 데 반발해 던진 말이란다. 결국 저 살겠다고 되도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은 셈인데, 그 예도 참 천박할뿐더러, 우리들을 자신과 같이 매우 무지한 족속으로 매도해 버린 망발이다. 뭐, 솔직히 뭐라 떠들든 이젠 별 존재감도 없는 인물이지만.

그럼에도 이른 바 기득권층이 가지고 있는 무지막지하게 천박하고 이기적인 마인드를 새삼 확인할 수 있는 발언이었다. 정치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고, 지들 같이 특히 특권 좋아하고 뇌물 좋아하고 세습 좋아하는 이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훈계 아닌가. 그러면 이완구라는 정치인은 진즉 북한으로 넘어갔어야 했다. 3대 세습을 아주 아주 훌륭하게 완수한 나라에 가서 정치하시는 게 낫지 않겠는가. 워낙 개소리라 나도 개소리로 답해보았다.

참고로 나카소네 아들, 손자건, 고이즈미의 아들이건 변변한 실력이나 경력도 없이 부친 빽으로 정치계에 입문한 인간들이다. 같은 재단 학교 출신자에게 특혜를 주는 내부 진학을 통해 대학에 들어갔고, 부친의 후광으로 취직하고 결국 부친의 개인비서로 정치에 뛰어들어 의원이 된 인물들이다. 얼어 죽을 장인화, 전문화는.

글의 앞에 나잇값을 언급한 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경험이 쌓임에 따라 인간은 더욱 성숙해질 것이라는 믿음이 최근 매우 급격히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자한당이나 뭐 그 나머지들보다 민주당에 대한 반감, 실망감이 더 큰 편이다. 아울러 현 정부의 관료, 부처의 보신주의, 눈치 보기 등이 지난 MB, 박근혜 정부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에 신물이 나오는 상황이다. 역겹고, 매우 매우 꼴 보기 싫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대로 가면 2020년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오만함이 흘러넘치고 있기 때문이다. 지들 예뻐서 국민들이 표를 준 줄 안다. 지난 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9년간 보수 정부, 보수 진영의 패착을 고스란히 따라가고 있다. 건방지고 불통이고 국민 알기를 우습게 안다. 그리고 선민의식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국민들은 경제가 무너져 내린다고 아우성인데, 뭐 하나 시원하게 해나가는 모습이 없다. 그저 다만 야당 탓, 지난 정부 탓만 죽어라 한다. 장난하시나?

그나마 남북관계가 획기적으로 변화해 다행이지만, 그것도 큰 틀에서 남북 정상, 북미 정상의 결단이 작용한 측면이 크다. 그 아래 실무를 진행해야 하는 이들의 능력은 여전히 미달이다. 게다가 전문가들이란 집단의 수준도 크게 나아지지 못했다. 그저 빤한 이야기를 떠들고, 엘리트 의식에 충만해 누구든 가르치려 든다. 역시나 꼴 보기 싫다. 이들은 국제제재 탓, 미국 탓, 북한 탓을 하는 데 이골이 난 이들이다. 최근에 그나마 우리 정부는 빠졌을 뿐이다. ‘정부 탓’도 언제 다시 시작될지 모른다.

난 이 모든 것의 근원에 이른 바 시건방진, 게다가 매우 염치없는 선민의식이 작용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권력 앞에서는 한없이 비굴해지는 것들이 감히 국민들을 향해서는 일장훈계를 주절거린다. 보수와 진보 크게 다르지 않다. 다들 싸가지가 없다. 경제가 안 좋다고, 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인데, 국회는 여전히 싸가지 없이 돌아가고, 여야 할 것 없이 제 살길만 궁리한다. 정부 관료나 각 부처는 대통령 눈치 보기 바쁘고, 국민들을 위한 봉사는 살짝 제쳐 둔다. 사법부는 말하기도 싫다. 그냥 쓰레기들이다. 군은? 겁나게 지겨울 따름이다.

이런 상황이니 감히 품격 운운할 자격이 누구에게 있을까. 표 의원도 책을 펴낼 때, 2018년이 이렇게 되어 있을 것이라곤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다 그랬을 것이다. 무언가 좋은 일이 마구마구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폭풍전야처럼 두려울 따름이다.

보수 진보를 떠나 아직 우리는 품격을 운운할 때가 아니다. 기본부터 다시 돌아봐야 한다. 최근 제주 예멘 난민 사태에서 알 수 있듯, 우리는 세계 시민으로서의 기본적인 자격도 미달이다. 한국전쟁 시 우리를 도와주었던 수많은 국가들의 선의에 적반하장으로 응답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다. 내가 소중하고 내 가족이 소중하듯, 다른 이들도, 설사 국적이, 피부색이, 종교가 다르다 하더라도 그들 역시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외면한다. 결과적으로 스스로를 매우 비인간적인 존재로 만들고 있다.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미국을 선진국으로 생각한 적이 없다. 선진국이라는 단어 자체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는 선진국인가? 전혀 아니다. 자살률과 출산율을 따져보자. 노인 빈곤율을 따져보자. 청년실업률을 따져보자. 아니, 다 때려치우고 국민들의 행복도를 따져보자. 선진국은커녕 이보다 더 후진 나라도 찾기 드물다. 게다가 졸부처럼 오만하기까지 하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운운할 자격이 전혀 없다.

지난 9년 동안 최악으로 후지게 된 나라다. 이제 다시 회복하려니 당연히 더디게 느껴지고 힘도 들 것이다. 그건 물론 이해한다. 충분히 이해하고, 나름 이 사회의 일원으로 그 과정에 힘을 보태려 한다. 할 줄 아는 건 다만 통일운동 분야이기에 끝이 어떻게 되던 세계 평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려 한다. 미스 코리아 나셨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묻지마 박수를 칠 수는 없다. 더 이상 지난 9년 핑계만 댈 수도 없는 상황이다. 지난 9년이 절대악이라 할 수 없듯, 지금이 절대선 일리도 없다. 때문에 우리가 진정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제대로 된 품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대통령을 포함해, 정부, 관료, 재벌, 정치인 등 이 사회의 기득권층에 대한 차가운 감시와 비판을 이어가야 한다. 계속 지켜봐야 한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품격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사회에서도 품격 있는 보수, 싸가지 있는 진보, 우리 삶을 위해 땀 흘리는 이들이 존재함을 우리 스스로 증명해 내야 한다. 그게 정답이 아닐까.

책은 정치인 표창원의 출사표와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우리 사회에서 보수와 진보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중간지대의 역할은 또 무엇인지 나름대로 고민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일견 타당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동시에 존재하지만, 생각해 볼 것들은 분명 있다.

왜 지금 이 책을 들여다보게 되었는지 여전히 알 수 없다. 『민주당의 착각와 오만』이란 책을 이제 읽어볼까 한다. 여기에서 민주당은 한국이 아닌 미국의 정당이다. 하지만 더불어민주당도 한 번쯤 읽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만큼 위태로워 보이기 때문이다.

책에서 제일 아쉬웠던 부분은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두 저자의 선민의식과 함께, 지나친 단정이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보수와 진보의 소통을 줄기차게 강조하면서도 정작 본인들은 조금은 쉽게 무언가 쉽게 단정 짓는 모습이 보인다. 내 부족한 독해 탓일 수도 있겠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느꼈을지 궁금하다.

스스로 너무나 부족하고 못났음을 절감하고 있기 때문인지, 특히 요즘은 잘난 척 떠드는 이들, 국민 탓, 지난 정부 탓, 미국 탓 등등, 오로지 남 탓만 하는 이들이 정말 보기 싫다. 동시에 많이 알수록 겸손해지고, 많이 가질수록 현명해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느낀다. 갈 길은 멀고, 정상은 언제나 높은 법이다.

표창원 의원의 건투를 새삼 빈다. 디스 아닙니다. 이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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