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미향 /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공동대표


김학순 할머니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는 언론과 방송국 기자들 앞에서 약 반세기 동안의 침묵을 깨고 “나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김학순입니다”라며 본인의 얼굴과 이름을 공개하고 일본군 성노예로써 겪었던 그 끔찍했던 기억을 세상에 공개하였다.

1990년 11월 16일, 한국의 37개 여성단체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를 결성하고, 일본정부에게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활동을 시작하였지만 여전히 일본정부는 역사적 사실조차 부정하고 있던 암담한 시기였다. 더욱이 피해자가 살아있는지, 살아있다 해도 피해를 이야기해 줄 수 있을지의 여부도 알 수 없었고, 일본정부의 부정에 대응할 수 있는 역사적인 문서들도 아직 공개되지 않고 있을 때였다.

한국사회는 또 어떠했는가? 성폭력 피해의 책임을 피해자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고, 성폭력이 범죄라는 사실조차도 제대로 인식되어 있지 않을 시기였다.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된 이후에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에게는 ‘수치스런 여자’와 ‘순결을 잃은 여자’라는 낙인을 씌워 침묵을 강요했고, 그런 사회분위기는 가장 가까운 가족들에게조차도 ‘위안부’였다는 것을 이야기하지 못하게 했다. 

그런 상황에서 김학순 할머니가 <내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였다>는 것을 말한다는 것은 사회적 낙인을 자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큰 용기가 필요한 것이었다. 다행히 이미 정대협이 발족되어 #With_you를 하고 있었기에 김학순 할머니의 #Mee_too는 한국사회 인식변화 요구로 작동할 수 있게 되었고, 한 사람의 김학순이 239명이 되었을 때, 한국사회뿐 아니라 세계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기림일인가?

김학순 할머니는 할머니의 첫 번째 기자회견 후에 그렇게 많은 피해자들이 증언을 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나는 위안소에서 중간에 도망을 쳐서 살아남았어요. 그래서 나는 나만 살아남았다고 생각을 했죠. 그 곳에 남아있던 여자들은 다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김학순 할머니의 뒤를 이어 침묵을 깨트렸던 238명의 피해자들 역시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내가 있던 곳에서 나만 살아나왔어요. 30명 정도의 여자들이 함께 있었는데, 다 뿔뿔이 흩어지고, 죽고, 어떻게 되었는지 몰라요. 그런데 김학순이가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을 보고 나도 신고를 하게 되었어요.”

한 명의 목소리는 그렇게 또 다른 김학순을 일깨워줬다. 뿐만 아니었다. 김학순의 목소리는 분단을 넘어서서 북으로도 확산되어 박영심 할머니를 비롯하여 200명이 넘는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이끌어 냈으며 1992년 12월에는 북에도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가 설립되어 정대협과 함께 연대를 시작할 수 있었다. 남북연대를 통해 남북 피해자들의 상황을 서로 공유하고, 때로는 서울과 평양에서, 그것이 불가능할 때에는 유엔 혹은 다른 지역에서 함께 만나 연대하고, 대응해 왔다. 즉, 남북이 함께 연대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만든 시작이 바로 김학순 할머니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또 다른 담을 넘어섰다. 필리핀에서, 중국에서, 인도네시아에서, 동티모르에서, 유럽의 네덜란드까지, 그리고 호주에 살고 있던 네덜란드 피해자에게까지 김학순 할머니의 목소리는 건너갔다. 호주에 살고 계시던 네덜란드 피해자 얀 오헤른 할머니는 10대의 소녀 시절에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살고 있었다. 수녀원에서 수녀가 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었지만, 일본군이 자바섬을 점령하면서 꿈은 깨어졌다. 전쟁이 끝나고, 한 호주 남성과 결혼하여 과거의 기억을 차단하고 있었던 그녀에게 호주 방송을 통해 들은 김학순 할머니의 목소리는 그녀에게 침묵을 깨는 역할을 하였다. “김학순 씨의 증언을 들으며, 나도 이제 내 가족에게 내가 위안부였다는 것을 이야기할 때가 되었구나 생각했어요. 그리고 저 아시아여성들과 함께 손을 잡고 일본정부에게 사죄를 요구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지요.” 그리고 1992년부터 얀 오헤른 할머니는 호주 언론 방송사와 인터뷰를 하고, 한국의 할머니들과 함께 일본에서, 미국에서 증언을 하며, 일본정부에게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활동을 시작하였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은 침묵을 깬 후, 일본정부를 상대로 하는 소송의 원고가 되기도 하고, 유엔에 직접 참석하여 증언을 하고, 세계 여러 나라 의회 결의가 채택될 때에는 세계를 돌며 일본정부의 범죄를 고발하고, 피해자에게 인권회복을 요구하며, 다시는 그런 전쟁이 없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미래세대들을 향해서는 “우리와 같은 피해를 입어서는 안된다”고 하시며 적극적으로 인권평화운동가로 살았다.

지난 30여년의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의 역사에 있어서 김학순의 목소리, 그 이후 생존자들의 연대로 진행된 가해자의 책임 이행 활동, 국제사회에 대한 호소 등의 활동은 수많은 변화를 이루어냈다. 유엔의 결의와 권고, 아시아연대회의와 2000년 일본군성노예전범여성국제법정, 세계 각국 의회 결의 채택 등 수많은 성과를 남기며, 유엔에는 심각한 인권침해 피해자에 대한 해결기준이 채택되고, 마찬가지로 전시 성폭력 피해자들의 인권회복을 위한 원칙들이 세워졌다.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담은 박물관이 세워지고, 평화비가 세워졌다. 1992년 1월 8일부터 시작한 수요시위가 26년이 되도록 1340회가 넘도록 함께 해 온 피해자들의 노력은 세계 각지에서 계속되고 있는 무력분쟁지역의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확산되어 한국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로부터 용기와 희망을 갖게 되었다는 응답이 오고 있다. 

그렇게 피해자들의 주체적인 운동은 피해자들과 함께 활동해 온 아시아 여성들을 감동시켰고, 세계 여성인권운동가들을 감동시켰다. 그래서 지난 2012년 12월 10일, 대만에서 열렸던 <제11차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에서 참가자들은 김학순 할머니의 기자회견이 있던 8월 14일을 세계 일본군'위안부'기림일로 지정하였다. 그리고 지난 해 대한민국 국회에서도 8월 14일을 일본군‘위안부’ 기림일로 결의하며 피해자들의 삶에 한국사회가 동행하는 길을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2018년 8월 14일, 제6회 세계일본군‘위안부’ 기림일은 한국정부의 공식적인 기림일로 지키게 되었다.

기림일로 선정했다는 보도가 처음으로 나갔던 2012년 말, “왜 ‘기림’인가, 기림은 훌륭한 업적을 남긴 사람에 대해 쓰는 표현이다. 위안부 피해를 기린다는 것은 맞지 않다”라는 문제제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왜 우리가 ‘기림일’로 선정했는지 그 이유와 배경,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 있는 목소리 이후, 수많은 피해자들이 스스로 주체가 되어 자신들의 인권회복을 위해, 그리고 가해자의 반성과 책임이행을 통해 정의를 실현하고 미래세대들에게 다시는 이와 같은 피해가 재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피해자들이 이루어온 업적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수많은 전시(戰時) 성폭력 피해자들의 해방을 위해 연대하고 지원해온 그 수많은 노력들을 아직 인식하지 못하고, 단지 ‘불쌍하고 가련한 피해자’, ‘역사의 희생자’라는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기림일은 피해를 넘어서서 주체적으로 인권운동가로, 평화운동가로, 수많은 여성들에게 희망이 되고, 용기가 된 피해자들의 그 숭고한 삶을 기리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바로 “다시는 이 땅에 이와 같은 피해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피해자들의 메시지를 잊지 않고 기억하여 실천해 나가기 위해서이다.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며

피해자들이 60대의 나이에 시작한 수요시위를 90대의 나이에도 여전히 계속하고 있다. 매주 수요일마다 아무리 더워도, 추워도, 비가 와도, 눈보라가 쳐도 피해자들은 거리에 서있다. 김학순 할머니의 뒤를 이어 “나도 피해자입니다.” 목소리를 냈던 239명의 피해자들이 이제 28명만이 생존해 있는 상황이다. 여전히 피해자들은 일본정부의 범죄부정과 법적 책임 회피 앞에서 인권과 명예를 훼손당하고 있다. 일본 정부와 우익들은 피해자들이 30여 년 동안 이뤄놓은 평화와 인권의 행적들을 지우려 하고 있고, 세계 시민들의 연대로 이루어진 기림비, 평화비 철거를 위해 온갖 힘을 쏟고 있다. 거대한 일본정부의 금권력 앞에 90세 고령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은 여전히 마주하고 있다. 

해방이었지만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에게 해방이 될 수 없었던 1945년 8월 15일, 그 때로부터 반세기가 흐른 뒤 1981년 8월 14일, 그 날의 외침을 기억하고 기리고자 하는 우리의 결의는 바로 그 피해자들의 바라고 외쳐왔던 뜻을 이루어 가는 것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범죄자는 범죄를 인정하고, 사죄와 배상을 하고, 그것을 통해 피해자들의 인권이 회복되는 것이다. 또한 그 일을 지켜보는 세계의 무력분쟁지역 성폭력 피해들은 희망을 갖게 하는 것, 그것을 통해 전시 성폭력 피해의 재발을 방지하고 평화를 이루는 것, 그것이 지난 세월, 피해자들의 그 부단한 노력에 대한 우리의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73년 동안 지연되어 온 정의실현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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